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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필곤목사

[스크랩] 앞으로 나아가야 삽니다./출애굽기 14:10-20/

앞으로 나아가야 삽니다.

 

출애굽기 14:10-20.

10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18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19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들어가며

오늘은 "앞으로 나아가야 산다"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저 합니다.

구호:주여!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믿음의 전진

이곳에 가르쳐진 큰 교훈은 모든 시대를 위해서이다.

흔히 그리스도인 생애는 위험에 둘러 싸이고, 의무는 이행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앞에는 절박한 파멸이 있고 뒤에는 속박이나 죽음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밝히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나가라” 하신다.

우리는 비록 우리의 눈으로 어두움을 꿰뚫을 수 없고, 우리의 발 근처에 찬 물결을 감지할지라도,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의 전진을 막는 장애물은 주저하고 의심하는 정신 앞에서는 결단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불확실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지고, 실패나 패배의 위험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순종을 연기하는 자들은 결코 순종하지 못할 것이다.

불신은, “장애물들이 제거되고 우리의 길을 똑똑히 볼 때까지 기다리자” 고 속삭이나

신앙은 용기있게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믿고, 전진하도록 재촉한다.
애굽 사람들에게 흑암의 장벽이었던 구름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큰 빛의 홍수가 되어, 온 진영을 비추고,

저들에게 앞 길을 밝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는 불신자에게는 암흑과 절망을 가져오는 반면에

신뢰하는 영혼에게는 충만한 광명과 평화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혹 사막이나 바다 가운데일지라도 그 길은 안전한 길이다

(부조 290).

 

 

제가 꿈을 잘 꾸는 편은 아닌데 금요일 새벽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시골에 사시는 오촌 종숙께서 나타나셔서 "아들이 되어 어머니 한 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뭐하고 있느냐"는 꿈이었습니다.

3시 50분에 깨었는데 아주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노모님이 시골에서 홀로 살고 계시기 때문에 어머님을 생각할 때마다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데

그런 꿈을 꾸고나니 참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았습니다.

매일 한 장 씩 묵상하는데 그날 묵상하는 말씀은 창세기 23장이었습니다.

창세기 23장 1절 말씀이 무엇인줄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라는 말씀입니다.

사라의 죽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보니 제 마음이 불안해 집니다.

왜냐하면 목요일날 새벽부터 전화를 하였는데 어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아 걱정하고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걱정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홀로 계시다가 자식들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루 종일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새벽에 말씀을 보고 위로를 받기 보다는 오히려 더 불안이 가중되었습니다.

사실 그 말씀이 그렇게 불안한 말씀이 아닌데 제 눈에는 죽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까?

몸이 아프면 의사가 "잘 먹고 잘 잡수십시오"라고 만 말해도 아 고칠 수 없으니까 잘 먹다 죽으라는 가보다라고 생각하며

누가 뭐라 해도 다른 말이 들어오지 않는 것 아닙니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상황 속에서 저는 자꾸 나쁜 쪽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우스운 말이 있지 안습니까?

한 청년이 체계적으로 성경 공부를 하지 못해 매일 아침에 성경 책을 펴고

맨 처음에 눈에 들어오는 말씀으로 한 날의 교훈을 삼기로 했답니다.

어느날 기도하고 조심스럽게 성경을 폈습니다.

성경을 펴자 마자 그의 시야에 들어온 첫 번째 구절은

"유다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였습니다.

영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이 그날 그를 위해 주시는 말씀으로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폈답니다.

이번에 그의 눈에 마주친 말씀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였답니다.

그는 불안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성경을 펴기로 했답니다.

성경을 폈을 때 처음 들어온 말씀은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13:27)"라는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나 그날 새벽 저에게는 조금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꿈도 꾸고 그전날 전화를 계속하였는데 받지 않고 그리고 말씀도 그런 말씀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사실 그 말씀이 제가 불안해야 할 말씀일까요?

거기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거기서 강조하는 것은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 아직 80되 되지 않았습니다.

문자적으로 생각하면 용기를 받을 수 있는 말씀이고 걱정하지 말아야 할 말씀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지만 조그만한 일을 만나면 신앙의 진보를 가져오는 것보다는 불안해 하며

신앙이 오히려 뒷걸음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집니다. 병이 생깁니다. 실직이 됩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신앙이 진보합니까? 퇴보합니까?

우리는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사면 초가(四面楚歌)의 입장에 서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어려움에 부딪쳤습니다.

홍해가 앞에 있는 것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뒤에는 애굽 의 특수부대가(7) 현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쫓아 옵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그들은 살육을 당하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있습니다.

앞으로도 갈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사는 길이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그들에게 가서 무릎꿇고 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적당히 타협하였다가 기회 있을 때 다시 탈출하라고 합니까?

무장을 하고 그들과 싸우라고 합니까?

무어라고 말씀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1.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15).
우리는 어떤 위기에 처하면 그것으로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이 더 퇴보하고 가정이 저 불행해져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회로 삼아 더 신앙이 진보하고 더 가정이 행복해지고 더 인격이 성숙해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차가 차도에 들어스면 뒤로 가면 사고의 길이고 죽음의 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뒤로가면 죽음의 길입니다.

뒤로 가면 실패의 길입니다.

뒤로 가면 노예살이의 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사는 길이고 자유의 길이고 희망의 길이라고 성공의 길이고 행복의 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이 광야의 대로입니까?

도망가기 좋게 기차가 대기하고 있습니까?

타익타닉호가 대기하고 있습니까?

앞에 있는 것은 바다입니다.

다리도 없고 배도 없는 바다입니다.

들어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바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성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맞지않습니다.

경험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서 그 말씀을 믿고 나아가면 무에서 유가 창조되듯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은
1)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말입니다.

2)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라는 말입니다.
3)앞으로 나아가는 말은 무엇보다 목표를 분명히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세사 바로 그러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말씀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아무리 불가능할 것같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요단 강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장벽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나가지 않고 계산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나가지 않고 뒤만 돌아 보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 나가지 않고 방황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에 갈려면 완전히 우주선에 맡겨버려야 합니다. 장애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장애물을 어떻게 해결해 주실지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앞의 홍해만 보면 안되는 것입니다.

홍해 앞을 더 내다 보면 젓과 꿀이 흐르는 땅 양속의 땅 가나안이 있는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누가복음 9장 6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롯의 처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 오라고 하셨을 때 처음에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잘 갔지만

잠시후 바람과 물결을 보면서 그만 예수님께로 향한 표대를 잃고 물 속으로 빠져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표대를 잃은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신앙도, 경제도, 마음도, 건강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경건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밀리지 마십시오.

가야할 곳이 아무리 험난한 홍해가 있다하여도 가나안 땅입니다.

목요일날 어느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어렵게 개척하시는 목사님이었습니다.

빚을 얻어 전세로 조그마한 공간을 얻었는데 몇 년전 경제 위기를 당하여 이자를 갚을 길이 없어 교회를 줄여서 갔다고 합니다.

당시 장년만 70명이 나왔는데 전세금을 줄여 교회의 빚을 갚으려고 하니까

안수집사님들이 서로 자기 돈을 먼저 갚아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한 안수 집사님은 국영기업체에 다니고 자신의 집이 두체나 있는데 목사님이 1000만원을 신용으로 빌리고

그 안수집사님을 포함하여 3분이 보증을 섰다고 합니다.

은행에 가서 빚을 갚으려고 하는데 은행까지 따라와서 자신이 신용 보증한 것부터 갚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사하는 날 앞에서 일하시던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나버리드라는 것입니다.

공과 사는 분명히 하고 이 때 떠나지 않으면 계속 붙들리니 떠나자고 서로 상의하고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워지니까 신앙 생활 오래했다는 분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조금 여건이 좋은 사람들부터 교회를 떠나고

어린 아이들과 어려운 사람들이 그래도 남아 교회를 섬기드라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예배시간만 되면 큰 소리로 목이 터져라 찬송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찬송을 크게 부르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래야 목사님이 힘이 나지 않아요."하면서 위로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계속 교회가 이사다니는데 왜 떠나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오히려 교회를 소유하여 한 곳에 있으면 그것이 전부인줄 알지만 이렇게 이사하니 모든 것이 우리 것이 아닙니까?"라고

위로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도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한지 5년이 되고 10년이 되면 그만큼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면 갈수록 뒤로 물러가만 안됩니다.

가면 갈수록 기도하는 시간도 길어지고 가면 갈수록 인격도 성숙되고 가면 갈수록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도 풍요로워져야 합니다.
얼마전 어는 성도님이 직장에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성도님과 상담하면서 밀려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밀려가면 끝없이 밀려간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합니다.

더 인격이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 복받는 길로 나아가야합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2. 왜 앞으로 나가기를 싫어합니까? 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까?
1) 두려움 때문입니다(10).
왜 두렵습니까?

뒤를 돌아 보기 때문입다(10).

바로의 군대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환경, 이치에 맞지 않는 환경, 조그만한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는 계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성을 초월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신 하나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환경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생길 수 밖에 없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미래에 대하여 계획도 할 수 없습니다.

진보가 없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두려움엔 무려 75가지나 있는데 에딘버러 대학의 심리학자 칼스테오

두려움이 인간의 올바른 마음을 빼앗고 정신건강에 해를 끼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온 힐 박사는 현대인을 파괴하는 일곱가지 두려움은 가난, 실패, 소외, 질병, 늙음, 죽음, 전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있는 어떤 장애물도 두려워하길 원치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 환경과 조건을 보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41:10에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십시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이끌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내 사업을 이끌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이끌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회를 세워주심을 믿으십시오.

 

미국의 대설교자 Henry Beecher

 "우리는 날마다 두 개의 손잡이를 잡고 하루를 살게 된다.

하나는 두려움의 손잡이요 다른 하나는 믿음의 손잡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눈 앞에 두개의 손잡이가 있습니다.

두려움의 손잡이를 잡고 덜덜 떨며 뒤로 후퇴할 것인가

믿음의 손잡이를 잡고 용기를 가지고 나아갈 것인가를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분은 우리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반대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상황만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월간 목회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경남 어느 중소도시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댁에 강도가 들었답니다.

종일 심방으로 피로에 지쳐 잠든 목사의 옆구리를 발로 특 차는 것이었습니다.

놀라 눈을 뜬 목사는 시퍼런 칼을 코 앞에 들이 댄 복면의 강도를 보고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강도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돈이나 귀중품이 어디 있소?"

"별,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얼마는 있을 것 아니요? 있는 대로 내어 놓으면 살려 주겠소."

목사는 일어나 돈이며 귀중품은 깡그리 내어 주었답니다.

"겨우 이것뿐이요?"

"예. 목사가 무슨 돈이 있고 귀중품이 있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게요. 요사이는 목사들이 더 돈이 많다던데..."

"그렇지 않습니가. 내가 지금 가진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강도가 말했습니다.

"돈 좀 모아 두시오."

"예!"

그 목사님은 이렇게 결론을 썼습니다.

"내 평생에 그렇게 겁나기는 처음입니다. 강도 앞에서 벌벌 떨며 시키는 대로 얼마되지도 않는 것을 몽땅 다 내어 놓았습니다.

한심한 일이지요.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도 그만큼 떨면서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이 전쟁을 누가 싸운다고 하십니까?(14절) 하나님께서 싸우십니다.
이 전쟁의 대열 맨 앞에 누가 계십니까?(19) 하나님의 사자가 있습니다.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떠나는 것이 문제이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어떤 고난의 강이 있다할지라도

우리가 넉넉히 가난안 땅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천군 천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있는 것입니다.


2) 두번째 이유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확실하게 인도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현재에 안주하고 과거를 즐기기를 좋아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지시하는대로 하나님의 사람 민족 지도자 모세가 지시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확신이 없습니다.
모세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신를을 보다 좋은 복지로 이끄시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도자 모세에게 어떻게 대하겠습니까?(11)

모세를 원망합니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진퇴양난의 위기를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교회가 이렇게 되고 당신 때문에 가정이 이렇게 되고 당신 때문에 자녀가 이렇게 되고

당신 때문에 사업이 이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냐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처음부터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처음부터 교회에 다니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등의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하면서도 남편을 믿지 못합니다. 아내를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가정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일을 하면서도 사업을 하면서도 사업이 잘 될 것을 일이 잘 될 것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고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이 인도해 줄 것을 신뢰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끄시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으로부터 해방을 받았을 때 그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

바로 왕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왔습니까?

정치적 교섭이나 활동을 통해 해방되었습니까?

그들은 한 일 별로 없습니다.

한일 한가지는 그저 양을 잡아 문설주에 피 뿌리는 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능력을 보지도 아니하고 상황과 자기들의 힘만 생각하고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미리 초조해 원망하고 불평하며 신앙이 진전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잘 믿습니다.

방송에 나오는 이야기는 잘 믿습니다.

사실 책의 90%는 방송의 90%는 안보고 안읽어도 될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에는 집중하며 그 말을 잘 믿지만 하나님 말씀을 믿지를 않습니다.

이성을 신뢰합니다.

과학을 신뢰합니다.

경험을 신뢰합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이 엄청난 발전을 했는데 뭐 고리탑탑하게 성경 말씀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설교가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은 세상에서 지친 육신을 졸음으로 휴식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전자 공학을 통하여 복제 인간을 만든 과학자가 어느날 하나님께 찾아가서 말했답니다.

"하나님 이제 우린 당신이 필요치 않아요. 우린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기가 막힐 정도로 황당해 과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래? 내가 흙으로 너희를 만든 것처럼 네가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다면 네가 너희를 떠나마."

과학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보고 계시던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야! 그 흙은 내가 만든 거야. 니꺼 써!"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텔레비전을 봅니다.

텔레비전이 어떻게 만들어 졌고 누가 만들었고 기능을 어떠하고 알고 봅니까?

밥을 먹을 때 밥의 성분을 다 압니까?

여기 예배드리는데 우리 주변에 있는 것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사람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엠프, 의자, 건물, 선풍기, 에어컨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오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이성과 경험으로 계산하며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믿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마8:23-27에 예수님께서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무서 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아들아!"라고 하였습니다.

마16:5-12절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을 떡이 없어 걱정하며 의론할 때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의논하느냐 5병2어의 이적을 보고 도 믿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마17:14-20절에 보면, 어떤 사람의 아들이 간질로 고생하며 자주 불에도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데

고쳐 달라고 제자들에게 말했을 때, 제자들이 고치지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너희가 만일 한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옮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3) 세 번째 이유는 과거의 집착 때문입니다(11,12).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면 미래를 향해 활짝 날개를 펼칠 수 없습니다.

좋았던 과거에 집착하면 사람은 교만해지거나 자신감에 사로잡혀 실패하기 쉽습니다.

나쁜 과거에 집착하면 사람은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매사 자신이 없어집니다.

좋았던 과거든 바빳던 과거는 과거는 다 지나간 것입니다.

왕년에 어쨌는데 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미래가 불투명한 사람이거나 현재가 변변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미래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행해 소망을 가지고 힘있게 나아가는 사람은 왕년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원망하고 좌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 땅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것보다 하루를 살도 하나님과 함께 참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거를 그리워한는 것입니다.

 

사실 애굽 생활이 그렇게 좋은 삶입니까?

아들을 다 버려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성을 쌓지 위해 죽을 고생을 하는 삶이었습니다.

죽지 못하여 사는 삶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루도 통곡이 그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장정만 60만인데 매일 매일 아이들이 얼마나 태어났겠습니까?

그 중에 사내 아이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고통스런 생활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습니다.

그러니 진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을 때는 하늘을 바라보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입벌리면 어느 인간이라도 좋은 소리 나오겠습니까?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죄짖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13)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애굽을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그리워하는 그 애굽 다시는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14절에 여호와께서 싸우시니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불평하며 무엇인가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를 바꾸어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싸인을 받기 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전에 사람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는 사역이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의 결과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3년 사역을 위해 30년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40년 사역을 위해 80년을 준비하며 기다렸습니다.

 


불 신앙은 언제나 환난과 고통, 불행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을 판단하려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자세는 모든 고난과 실패, 역경이 닦쳐오면 진실과 사랑과 능력 있는 하나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짙은 구름이 태양을 덮었다고 태양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아니됩니다.

환난이 클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더욱 풍성하게 베풀어진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못한다고 하나님이 못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가난하다고 하나님이 가난한 것아닙니다.

내가 능력없다고 하나님이 무능력한 것아닙니다.

내가 없다고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별로 좋지도 않는 과거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을 보면 과거교회에 집착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신앙이 전진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혼을 해 놓고 과거 남편, 과거 아내에 집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장담하건대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 초등학교 1학년 때 100 맞은 것만 집착화는 사람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누구나 100점 맞는 것입니다.

1학년에 다니는 저희 막내를 보았더니 받아쓰기 하는데 8개만 맞아도 100점 줍니다.

과거 집착하지 마십시오.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마십시오.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홍해 불가능할 것 같지만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실패의 과거에도 집착하지 마십시오.

모세의 실패를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입니다.

바울의 실패를, 베드로의 실패를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입니다.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가 아니고 영원한 실패가 아닙니다.

성공의 과거에도 집착하지 마십시오.

사울은 초기의 성공에 교만해져 결국 실패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처음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욱 중요합니다.

가나안 땅 바라보고 하나님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홍해바다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뒤로 물러가면 불신앙의 길이요

앞으로 나아가자니 인간의 연약함으로 불안할 때 제 삼의 방법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3.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16).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를 내밀어라고 합니다.

참 이상한 방법입니다.

토목공사를 하던지 배를 동원시켜야 하는데 지팡이를 들고 바라를 가르키라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옆으로 도망할 수 없습니다.

뒤로 가면 애굽 사람들이 죽이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면 다 물 속에 수장됩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가가면 무엇이 일어납니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번도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절만의 끝점은 기적의 시작입니다.

그들에게 기적을 체험시킴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도록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은 일평생 살면서 잘 넘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광야 훈련의 필수 과목입니다.

선택과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훈련시킬 때는 이런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완악하여 모든 것이 순탄하고 모든 것이 잘되고 생각만 하면 이루어 지고

시작만 하면 다 잘되고 개척만 하면 부흥하고 공부만 하면 1등하고

밥만 먹으면 건강하면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기적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순종으로 일어납니다(21).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방법에서 찾지 마십시오.

산에 가서 40일 동안을 기도하는 것보다는 현장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이성과 내 경험으로는 도저히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한 번 순종해 보십시오.

거기에 기적이 있습니다. 사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2)하나님께서 그 기적의 사건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17).
내가 잘나서 내가 힘있어서 내가 머리 좋아서 내가 능력 있어서 모든 것 잘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 주셨다 라고 생각하여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통하여 문제가 해결 될 때 우리도 기뻐하시지만 우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3)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18).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게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 의지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금방 죽이려고 쫓아 오던 사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19-21) 보이지 않게 합니다.

그 두려운 상황이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지시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니까 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신비하게도 그들도 앞으로 나왔지만 그들은 다 수장되고 말았습니다(21-31).
더욱이 교회에 다닌다 하여도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됩니다.

미지근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며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믿게 되었습니다.

 

결론 적용 호소 결심합시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을 만나면 그것을 바라볼 때 두려움과 불평이 나옵니다(10절)

지도자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그 원인을 돌립니다(11절).

자포자기하고 죽고 싶은 생각을 합니다(12).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주시나 기도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시니다.

그 고난의 강을 통하여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구원해 주시고 풍랑 인연하여 더빨리 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쁜 환경을 이용해서 더 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싸워주시고 그 승리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이십니다.

위기는 기적을 이루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삽니다

 

 김필곤목사

 

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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