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사도행전1:12-26
사도행전 두 번째 강해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12절부터 26절까지를 본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 단락 15절부터 20절까지는 기도가 끝난 120명의 성도들에게 베드로가 유다에 대하여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인신 매매하고 그 돈으로 밭을 샀는그는 그밭에서 목메달아 죽어 떨어져 피밭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단락은 21절부터 26절까지 유다 대신에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맛디아를 뽑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는 "하나님의 나라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잡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의 모판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모판이 되어 사도행전에 놀라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모를 심는데 씨앗을 논 전체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못자리에 심어 놓았다가 그것이 어느 정도 크면 논에 옮겨 심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심어 놓습니다. 그런데 모판의 모를 보면 어떤 모는 건강하여 논에 심어 놓으면 잘 자라는 것도 있고 어떤 모든 건강하지 못하여 뽑아 버리고 다시 심는 모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관찰해 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로 크게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13,14절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큰 일꾼이 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으나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고 인생의 마지막이 비참하게 끝난 사람입니다.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처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부터 선택받았으나 그후 아무런 기록도 없이 끝난 사람들입니다. 혹은 120명의 성도처럼 이름 자체도 기록되지 않고 익명으로 신앙 생활을 하다가 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교회로 말하면 열린 교회의 모판에 심기운 사람들입니다. 가정으로 말하면 각 개인의 가계의 모판에 심기운 사람들입니다. 기업의 모판, 사회의 모판, 넓게는 하나님 나라의 모판에 심기운 사람들입니다.
1. 우리는 이 세 종류의 사람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베드로같은 사람입니까? 유다 같은 사람입니까? 맛디아 같은 사람입니까? 가룟 유다같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이름도 없이 그저 무명으로 살다가 가는 이름없는 늘꽃같이 사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유다 대신 사도는 되었지만 그 뒤에 아무런 한 일이 기록되지 않는 맛디아처럼 살겠습니까? 베드로처럼 한 번 말씀을 전하면 3000명씩 회개하고 돌아오고 앉은 뱅이를 향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라고 할 정도의 영적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까?
사람들은 인간을 분류하기를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될 사람등"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사람들 중에서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여 13, 14절에 나오는 사람들을 사도행전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 꼭 있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아마 베드로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사실 이 말씀대로 초대 교회를 이루는 기둥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베드로 한 때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여 그를 찾아가 비전을 회복해 주었습니다. 사람낚는 어부로서의 비전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한 번 선택한 사람 버리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쓸모 없으면 버리지만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실패했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지금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이 시간 쓰시길 원합니다.
IBM의 설립자인 톰 왓슨(Tom Watson)의 성공비결 중 하나는 사람을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젊은 부사장이 매우 모험적인 신제품 개발계획을 보고했답니다. 톰 왓슨은 과연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부사장은 위험부담이 큰 사업일수록 큰 수익을 올릴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신제품 개발사업은 회사에 1000만 달러 이상의 손해를 입히고 말았습니다. 톰 왓슨이 부사장을 불렀을 때 그는 사표를 제출하며 말했습니다."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책임을 느껴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그러자 톰 왓슨이 정색을 하며 말했답니다. "무슨 소린가. 나는 자네를 교육하는데 무려 1000만 달러를 들였는데….다시 시작하게" 사장의 격려에 고무된 부사장은 다시 한번 도전해 신제품 개발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이렇게 대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태어나 하나님의 사람 만들었습니다.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값진 존재로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 엄청난 값을 지불하였는데 우리가 유다처럼 살기를 원할까요? 이 땅에 꼭 필요한 사람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일평생 어차피 신앙 생활합니다. 이왕 신앙 생활하는데 좀더 영적 권위를 가지고 능력있는 삶을 사고 싶지 않습니까?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비전을 가지십시오. 가정을 세우는 초석이 되고 교회를 세우는 기둥이 되고 직장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되어야 겠다는 비전을 가지십시오. 나를 기점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내는 도구로 사용되어야겠다는 비전을 가져 보십시오. 성령의 권능을 받아 죽음을 이기고, 질병을 물리치고 죄악을 이기고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구별되게 살겠다는 비전을 가져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를 때 하나님 나라의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에 대한 비전을 줍니다. 하나님은 우상 장사의 아들 아브라함을 불러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살인자 모세를 불러 민족 지도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초라하게 썩을 목동이 아니었습니다. 시골 목동 요셉과 다윗을 불러 국무총리가 되게 하고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그를 부르실 때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너는 이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다 늙어 죽을 어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낚는 어부 하나님의 나라의 어부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5)"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기둥같은 일꾼 모판이 되는 일꾼이 되는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가 하나님에 대한 꿈을 가질까봐 겁먹지 마십시오. 신앙이 성장할 까봐 신앙 교육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베드로와 사도들을 통하여 초대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우리 때문에 탄생될 것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2. 하나님 나라의 꼭 필요한 사람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권능있는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저는 본문에서 세가지 원리를 발견합니다.
1) 나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 때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시의성의 원리입니다. 시기에 맞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웅도 때에 맞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때가 맞아야 출세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필요한 인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때가 맞아야 합니다. 그 때는 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때를 잘 잡아야 합니다. 때를 놓치면 안됩니다. 때를 모르고 서둘러도 안됩니다. 아이를 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으려면 않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이미 4절에서 들었습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 하에 있으니 서둘지 말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기다립니다. 이제 조급하면 서두르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며 도망가지도 회피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무엇하며 기다립니까?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그들은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그렇다고 성령의 권능을 바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2장에 가서야 성령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을 날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아무 증거 안보이고 지금 손에 잡힌 것 아무것도 없어도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에는 인내력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에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나의 때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자꾸 자기의 때에 모든 것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닙니까? 25년 기다려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비전을 성취하려다가 결국 살인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4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후 17여년 동안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바울도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고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다리지 못해서입니다. 요셉의 꿈이 이루어 지기 까지는 20여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총리가 되었다고 바로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7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이나 기다리면 방주을 지었습니다.
요즈음 세상을 4s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스크린, 스포츠, 섹스, 거기에 하나 더 첨부해 스피드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다리지 못합니다. 리모콘 두르면 금방 이동해야 합니다. 인터넷 들어가 화면이 뜨지 않으면 금방 바꾸어 버립니다. 모든 것을 속전 속결로 끝내버려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가장 빈번하게 인용했던 말 중 하나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을 통해서 '오직 기도로만' 가능하다"라는 확신에 찬 표현이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충실하게 그 나라를 위해 준비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집중의 원리입니다. 방향 설정입니다. 스티븐 코비가 제시하는 뉴 밀레니엄 시대 리더의 4가지 역할을 말하면서 첫 번 째 말하는 것이 방향 설정입니다(Pathfinding) 두 번째가 한 방향 정렬(Aligning) 셋째가 임파워해주기(Empowerment)(길을 따라 여행할 수 있도록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창의성, 재능, 가능성을 계발하고, 발휘하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을 말함) 네번 째가 모델 되기(Modeling)입니다.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합니다. 무엇을 하는 지 모릅니다. 공부하는 지 노는지 노래듣는지 이것 공부되겠습니까? 수련회를 갑니다. 수련회 갔는데 놀러갔는지 방향이 없습니다. 교회 집회에 참석합니다. 이부로 노래방갑니다. 노래방 가기 위해 왔는지 예배드리러 왔는지 모릅니다. 옛날 어느 교회에서 보니까 전도회가 모입니다. 이부로 술집에 갑니다. 전도회가 주진 술집이 주지 모릅니다. 방향 설정을 하고 그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기 원하면 그 비전을 가지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온통 시간을 맞추고 관심을 맞추고 생각의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난 후 무엇을 합니까? 유다에 대하여 설교하고 새로운 공동체의 주역일 될 일꾼을 뽑습니다. 구체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맛디아를 뽑습니다. 영적 전투에 참여할 군사를 뽑은 것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회사에서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해 내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집중하는 것입니다.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집단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꾸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갖고 있으면서 다른 것에 마음을 돌리고 다른 것에 시간을 투자하고 다를 것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필요한 인물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 9:6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 지도력을 쓴 샌더슨은 하나님은 ‘사람들’이 아니라 ‘한 사람’을, 집단이 아닌 한 명의 개인을 찾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는 “내게 하나님의 사람을 주소서. 한 사람을. 믿음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람을 주소서. 그러면 나는 모든 오류를 바로잡고, 그리고 인류의 이름을 축복하겠나이다. 내게 하나님의 사람을 주소서. 한 사람을 혀가 하늘의 불에 접촉된 사람을 주소서. 그러면 나는 가장 어둔 맘을 밝혀 높은 결심과 깨끗한 열망을 지닌 마음들이 되게 하겠나이다. 내게 하나님의 사람을 주소서. 한 사람을 주님의 능력 있는 한 선지자를 내게 주소서. 그러면 나는 칼이 아닌 기도로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겠나이다. 내게 하나님의 사람을 주소서. 한 사람을, 그가 보는 환상에 성실한 사람을 내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무너진 당신의 성소를 재건하고 그 앞에 민족들로 무릎꿇게 하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100% 집중하는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21세기에는 비전이 있는 지도자, 정보통신에 밝은 지도자, 창의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을 찾습니다.
3)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똑같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은 30에 인신 매매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밭을 삽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목메달아 죽어 배가 터져 피가 그 땅에 얼룩집니다. 사람들이 아겔다마라, 피밭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입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도덕적 기준이 낮은 것입니다.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영적인 것은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이 땅의 것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높은 도덕적 가치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땅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가룟 유다처럼 사단의 종이(눅 22:3)되어 욕심과 세상 풍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엡2:2-3)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원리, 도덕적 수준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에 한가지 예가 나와 있습니다. 21절 이하를 보십시오. 지금 유다 대신 제자를 뽑습니다. 그 때 선거 운동을 합니까? 뇌물을 씁니까? 기준이 무엇입니까? 지저분합니까? 요즈음 학급 반장만 되려고 해도 로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목사들이 총회장 되려고 몇 억씩 쓴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안수 집사, 장로, 권사 되는데도 로비를 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그렇게 합니까? 자격이 무엇입니까?
21-22절을 보십시오. 단 한가지입니다. 항상 함께 있던 사람,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 예수님 메시야 되심을 본 사람입니다.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뽑기 위해 어떻게 합니까? 두 사람 천거합니다. 그리고 무엇합니까? 연설합니까? 24절 보십시오.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비뽑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삶의 원리를 살펴보면 세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자신의 편리에 따라 임의로 도덕적 기준을 만드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정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선거해서 원내 구성 단체를 만들만한 숫자가 안되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자민련인지 타민련인지, 한나라당인지 두나라당인지, 새천년인지 헌천년인지 모르겠습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원칙이 없습니다. 정치가와 정치꾼을 구별됩니다. 영어에서 정치가는 '스테이츠먼'이라고 하고 정치꾼은 '폴리티션'이라고 합니다. 스테이츠먼이 당리당략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경세가(經世家)라면 폴리티션은 국가보다 자신과 당파의 이익에 집착하는 정상배(政商輩)라 할 수 있습니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영국 경제학자였던 콜린 클라크의 명쾌하게 정의하였습니다. "정치가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정치인을 말하고 정치꾼은 자신을 위해 나라를 이용하는 정치인을 말한다" 고 전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는 말했습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 전서 2장 16절부터 3장 3절에 보면 신앙인도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신령한 자,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신앙인은 도덕적 수준이 낮습니다.
개인이 그렇게 하면 폭군이 되는 것입니다. 단체가 그렇게 하면 폭력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주먹이 법보다 가까운 것입니다. 의료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법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안 바꾸어 지면 문닫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금요일날 간호사들이 있는 곳에서 설교하면서 그 말을 했더니 얼굴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교인 중에 혹 이해 관계가 얽힌 분있으면 얼굴 붉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단계는 어떤 원칙에 의해 집배받는 것입니다. 서로가 원칙을 세우면 어떤 경우든지 그 원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죽이기 위해 원칙을 바꾸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탁월한 도덕적 수준입니다. 원칙에 의해 사는 것도 사람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사람 보지 않으면 법에 걸리지 않으면 적당히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얼마나 탁월한 도덕적 가치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인이 유혹합니다. 눈짓합니다. 옷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그 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득죄하리요 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놀라운 능력을 나타냅니다. 3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앉은 뱅이가 일어납니다. 그 때 그것으로 베드로 성당을 짖고 전용 기사 두고 전용 낙타 타고 다니면 아들 낳아 유학보내었다 후임자로 베드로 성당 물려 주었나요? 바울은 어떻습니까? 칼빈은 어떻습니까? 과부 결혼 아이 낳자 마자 죽음 20여가지의 병, 고향을 떠남 스위스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말년에 스위스에 가서 목회할 때 사람들이 칼빈이 오는 것을 싫어 하여 개를 풀어 놓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방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선남선녀로 하여금 춤을 추게 했다 해서 추방했고, 세례식에서 웃었다 하여 사흘간 감금했으며, 70세 여인이 25세 청년과 결혼하려 했다 해서 태를 치고 추방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탁월한 도덕적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인이 비신앙인보다 40% 수준 이상되는 도덕적 수준을 가지고 있어야 세상을 변화시키고 영향력을 준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포르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답니다. 믿는 사람들은 30%, 믿지 않는 사람들은 40%가 즐겨 보더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도덕적 수준이 시정 잡배들 수준같으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가면 갈수록 더 빠르고(speedy) 더 감각적이고(sensuous) 본능적인(sexual)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성이 무너지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태조 왕건이 방영되고 있는데 궁예가 비참하게 죽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도덕정입니다. 처음에는 잘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이 신통력있는 미륵불이라고 하고 타락합니다. 부인과 아들마처 칼로 치고 결국 자신의 신복들에게 반역당합니다. 1000년의 신라가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참 잘 나가던 후백제가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선이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가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드워드 기본(E. Gibbon)은 [로마제국의 쇠퇴와 패망의 역사]라는 저서에서 로마의 패망은 야만족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내적 도덕적인 퇴폐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1)이혼율의 급격한 증가 (2)고율의 세금과 투기장과 향연을 위해 낭비한 공금의 유용 (3)쾌락추구의 광적 상태 (4)거대한 군비 확장 (5)종교의 타락 등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서의 초석이 될 비전을 가집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때를 놓치지 말고 그렇다고 하나님의 때를 앞지르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기다리며 기도로 준비하고 기도로 준비하며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충실히 준비합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사도행전1:12-26/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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