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9. 29.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랴 요나 4:5-11
I. 아버지 마음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잘 살펴보면 그 인물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숨은 주인공이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펼치면 창세기 1장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안에 ‘하나님’이란 단어가 30번 정도 등장하는데요. 목적격으로 하나님은 한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격 아니면 소유격입니다.
앞으로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이 주인공, 하나님이 주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그 유명한 탕자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탕자 비유라 합니다만 집 나간 탕자, 둘째 아들이 주인공이 아니란 사실을 금방 우리가 알 수 있지요.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되는데 누가복음 15장 보면 이 탕자는 중간에 사라집니다. 맏아들이 나오긴 합니다만 맏아들은 전반부에는 전혀 등장하지 아니하고 후반부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집을 떠난 자들을 향한 아버지 마음,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나서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사흘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게 아닙니다. 불순종하여 혼쭐난 선지자 얘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죄로 망해가는 도시, 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가? compassion = com이란 것은 함께, passion = 고통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고통을 가슴에 품고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요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요나서가 펼쳐지면 1장 1절 “여화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요나의 아버지가 ‘아밋대’라고 했는데 “아멘”이란 뜻입니다. 우리말로 구태여 번역하면 “진실”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은 ‘요나’입니다.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기쁜소식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진실이란 한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그 이름을 “요나”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짓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꿈대로 1:2절에서 요나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3가지 동사로 임하게 됩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일어나라 - 아마 그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절망에 낙심에 주저 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 만은 일어나라고 얘기합니다.
가라 - 아무도 순종하지 않은 그림을 전제로 하고 너는 가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외치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면 산다. 하나님께만 구원의 희망이 있다. 이것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앓이에서 터져 나온 거친 숨소리가 외치라. 울어라. 부르짖으라는 말로 명령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요나의 반응이 1장 3절에 나옵니다.
‘그러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저희들 학교 다닐 때에 ‘그러나’ 라는 접속사는 역접입니다. 앞에 나오는 단어를 내용을 뒤집는 것입니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고 ‘그러나’ 라고 기록 되어졌다면 불순종의 단어입니다.
니느웨로 올라가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요나는 욥바로 내려갑니다. 그 이유를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다시스”가 어딘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다만 이스라엘과 멀리 떨어진 도시라고 나옵니다. 현실, 이 사회에서 멀리 떠나 살고 싶으신 분 계십니까? 교회를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으신 분 계시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멀리 달아나고 싶으신 분 계십니까? 가정을 떠나 살고 싶으신 분 계십니까? 바로 당신이 오늘 아침 요나의 위기에 부딪혀 있는 것입니다.
욥바로 내려갔다. 단순히 지리적인 위치로 내려갔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내려간 상태, 영적 위기의 상태를 말합니다.
한번 내리막길에 들어서면 미끄러지는 것은 당연한 순리입니다.
3절 요나는 욥바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배로 내려갑니다.
5절 배 밑층으로 내려갑니다. 마침내 바다로 던져져서 바다 가운데로 내려갑니다.
2장에 가서 죽음의 장소 스올로 내려갑니다.
사흘동안 선지자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죽을 고생을 합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면 어디에 들어갔을까요? 허파 속에 들어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위장 속에 들어갔는데 위장속에 아마 모르긴 하지만 큰 물고기였으니 거기 똥 들었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똥통에 빠진 것입니다. 선교사 전도자로 부름받은 요나가 구경꾼, 관광객이 되어버렸습니다. 역사의 도피자가 되어버린 사명자의 모습을 만나보게 됩니다.
도망간 바로 이 자리에서 요나의 인생이 끝장이 나도 요나는 할 말 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요나서가 1장 1절에서 3절까지 기록되고 불순종한 요나를 하나님께서는 버리시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여 이 놀라운 선교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더라.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요나를 폐기처분하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을 선택해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했더라고 성경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요나는 하나님 앞에 할 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2장 지나고 3장에서 보면 “여호아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한번 선택하면 끝까지 구원하시고 한번 사명을 주시면 우리의 손을 꺾어서라도 발을 붙들어서라도 당신의 사명을 이루어내고야 마는 분이십니다. 다시 기회를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3장 2절에도 역시 1장2절의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3개의 동사입니다. 일어나라. 가라. 선포하라.
외치라는 말이 선포하라는 말로 바뀝니다. 외쳐야 할 내용이 구체적으로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곧 니느웨성이 망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II. 내가 아낀다
다시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요나가 일어나 순종하는 장면을 3:3-4절은 참 재미있게 묘사합니다.
“니느웨는 지름길로 걸어서 가더라도 사흘길이라.”
4절 그런데 요나는 단지 하루동안만 “40일이 지나면 니느웨성은 망한다” 선포합니다. 대단히 알량한 순종을 했다는 뜻이겠지요. 형식적인 전도에 그쳤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니느웨 성 동편 언덕에 올라가서 어떻게 니느웨 성이 망하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심지어는 짐승들까지 금식을 시키며 회개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지요. 온 백성에게 놀라운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선지자가 기뻐해야 되는데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 원망합니다. “저런 인간들을 용서하십니까?” 원망합니다. 때마침 하늘에서는 태양이 이글거리고 타오르며 머리에 내려 쬐이고 있었습니다. 금방 머리가 벗겨질 듯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박 넝쿨 하나를 무럭무럭 자라게 하더니 태양을 차단하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그늘 하나 때문에 요나는 몹시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벌레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줄기를 갉아먹고 동풍이 훅~ 불어오더니 그만 먼지처럼 바짝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묻습니다.
“요나야 그 박 넝쿨 네가 심었느냐? 이 박 넝쿨 네가 자라게 했느냐? 그 박 넝쿨 네 것이니? 그런데 네가 아꼈다고 한다면 이 니느웨 도시에 12만명의 생명이 지금 살고 있어. 그 가정들마다 자녀가 몇이겠니? 육축은 얼마나 되겠니? 네가 그까짓 박넝쿨 잎사귀 하나를 아꼈다고 한다면 내가 이 도시에 생명을, 귀한 영혼들을, 그 어린 자녀들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랴?”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랴”입니다.
III. 당신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여기 요나는 오래전 이 땅에 살았던 신앙인의 얼굴이 아닙니다. 「요~나」 「요놈의 나」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모습, 성도상, 교회상을 보여줍니다.
내 곁에 지금 요나가 있었다면 요나 선지자를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여 당신은 무엇을 보고 기뻐하십니까? 당신은 어느때 감격하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언제 행복한 사람입니까?”
요나서를 아무리 읽어봐도 요나가 기뻐했다는 말이 안나옵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요나는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삶의 상황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납니다. 그때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그 자리에서 요나는 다시 선교사로 부름을 받습니다. 선지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이때 감격하고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지막 장에 와서 드디어 기뻐합니다. 꼭 한번. 크게 기뻐했다. 언제? 자신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 박 넝쿨 하나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고 얘기합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지면 너도 나도 우리모두 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영성 신학자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침체에 빠지면 가치관의 혼동을 가져오는데 마치 미치광이가 주인없는 백화점에 들어가 정가표시를 뒤죽박죽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100만원 짜리 양복에 있는 정가 표시를 뚝 떼어다가 1만원짜리 양말에 갖다 붙이고 10만원 짜리 스카프에 있는 정가 표시를 떼어다가 1천만원짜리 보석에 갖다 붙여놓아서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덜 귀한지 모르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이지요.
무엇 때문에 내가 기뻐해야 되는지? 무엇을 그토록 아파해야 되는지?
무엇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되는지? 무엇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살아야 되는지? 가치, 기준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행복하십니까?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성령을 사모하는 열망이 간절하십니까? 심령의 부흥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말씀 듣는게 기쁘십니까? 기도하는 것이 재미있으십니까?
이런 영적인 생활이 맛있는 밥 한그릇 먹는 것 만큼도 내게 감격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건 이미 내가 영적인 침체의 늪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 가치가 하찮게 여겨지십니까?
당신은 지금 요나의 위기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IV. 자존심인가? 신존심인가?
요나 선지자가 옆에 서 있으면 또 물어보고 두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여! 선지자로서의 자존감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렇게도 중요했습니까?”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가 곧 망할 것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에 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가 말했는데 왜 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하나님께 화를 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나의 알량한 선포를 듣고 니느웨 성에 왕과 백성들이 처절하게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합니다. 복을 주십니다. 이게 기쁨이 되어야지 이게 불평거리입니까? 하나님, 하나님 때문에 내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졌어요. 내가 선포한 말들이 모두 다 거짓말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당신의 선지자가 미친소리만 한 겪이예요. 헛소리만하고 다녔어요. 차라리 나를 죽여주세요. 창피해서 못살겠어요. 하나님 앞에 항거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신앙생활하다가 손가락질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그렇게 창피하십니까? 예수님은 나를 위해 온갖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나를 살리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 몸을 입으셨습니다. 적신의 어린아이로 태어납니다.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나이에 육신의 아버지를 잃고 울어야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매달리시는데 발가벗기움을 당하셨습니다. 나그네와 여인들이 조롱하고 침뺏고 수염을 뽑을 때에 그분은 발가벗기움을 당하셨습니다. 채찍 맞아 살은 찢겨졌고 가시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 찔려 물과 피를 쏟아 죽어 주셨습니다. 나를 살리려 아픔과 부끄러움을 모두 다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주님을 전하다 겪는 작은 부끄러움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다구요? 하나님 섬기다 겪는 손해 때문에 억울하다구요?
V. 무엇을 아끼느냐?
요나 선지자에게 또 물어보고 싶은 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여 당신이 가장 아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을 아끼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요나서 마지막장 결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을 아낀다. 나는 영혼을 아낀다. 이 백성들을 하나님 백성 삼는 것 구원하는 것, 이것이 내게는 가장 소중하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여러분은 사랑하며 사십니까?
내가 충성하는 것 교회를 섬기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사역을 전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위선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초대교회 양무리를 맡기시면서
“네가 얼마만큼 충성할 수 있니?” “네가 얼마만큼 헌신할 수 있니?”
“네 속에 나를 위해 헌신할 열정이 있니?”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면 위선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어떤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원주민 마을에 집을 짓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다 벌거벗고 살더랍니다. 선교사님 가족만 옷을 입고 살아요. 그러니 그들의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더랍니다. 어느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속에 감동을 주시기를 벗어라. 그러십니다. 하나님 부끄러워서 어떻게 벗어요?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저들을 살리기 위해서 왔느냐. 저들을 사랑하느냐. 벗어라. 저녁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가족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모님이 정히 그러셔야 되겠느냐고. 만류를 합니다.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씁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옷가지를 다 챙겨서 마을 가운데로 가서 몽땅 다 불태워버렸습니다. 선교사님도 사모님도 어린아이들도 다 벌거벗고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간증을 합니다.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님이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부끄럽지 않던가요. 괜찮던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회복되니 벌거벗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이 되었습니다. 내 아내도 자랑스럽게 벗었고 우리 아이들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될 저들이 너무나 소중해서 우리가 벗을 수 있었습니다. 간증을 했습니다.
“내가 아끼노라”
“하나님이 아끼는 것 우리도 아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 우리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 나도 소중히 여기며 살겠습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랴!」
요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끼십니다.
끝까지 요나를 버리지 아니하신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끼고 버리지 않았는데 여러분은 왜 여러분의 자신을 버리십니까? 니느웨까지 아끼고 사랑하신 그 하나님 하물며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시겠습니까? 당신을 아끼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찌 너를 아끼지 아니하랴!」
하나님, 우리도 당신이 아끼는 영혼들을 아끼겠습니다. 우리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4장 11절로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 다음에 요나가 어떻게 했는지 결론이 없습니다. 결론은 두 가지가 가능할 것입니다.
요나가 컴패션. 아버지 마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그 영혼들을 사랑하듯이 진정으로 이방인들을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죽었더라. 이런 결론이 가능하지요.
또 다른 결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요나는 원래 싸가지가 없는 인간이라 요나서 5장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충성하면서 살다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갔다.
그러나 요나서 5장이 없습니다. 결론 없는 미완성교향곡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나서 5장은 네가 기록해라.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충성이야기, 선교 이야기, 복음 이야기, 하나님을 사랑한 이야기, 내게 맡겨진 영혼들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 기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너의 요나서 5장을 기록하여 내게 서라. 화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욥바로 내려갔던 요나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교역사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선교역사를 기록하는 사도행전 9장 10장 11장의 욥바 사건으로 그 요나의 이야기는 신약의 욥바로 그 피가 흘러갑니다.
사도행전 9:36-43에 보면 베드로는 이곳 욥바에서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자녀 도르가를 살려내고 여기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방인 고넬료가 욥바에 있던 베드로에게 복을 전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공교롭게도 고넬료의 메신저들이 베드로를 찾아오는 그 시간 베드로는 옥상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 중 요나처럼 이방인 선교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베드로와 하나님 사이에 한판 씨름이 오고 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씨름이 오고 갈 말미에 아버지 마음을 회복합니다. 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방인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이다.
요나가 실패했던 욥바가 신약 베드로에 의해 새로운 이방선교의 장, 선교의 기지로 펼치지게 됩니다. 바로 메타는 하나였습니다. 아버지 마음. compassion이 있을 때 요나서 5장은 성공의 장으로 기록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사랑 compassion이 없을 때에 우리의 복음 이야기는 실패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욥바에 서 있던 요나처럼 베드로처럼 우리 또한 오늘 하나님의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땅이 싫어서, 염증이 나서 차라리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으신 분이 계십니까? 신문을 펼칠 때마다 저녁 9시 뉴스를 들을 때마다 우리의 현실 정치현실이 너무 짜증스러워서 저 깊은 산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분은 아니 계십니까? 직장에 그 인간들과 부딪히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직업전선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오늘 이곳에 오신 분 계십니까?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그곳으로 가라. 너는 직업인이 아니라 선교사이니라.
한국교회의 모습에 너무 크게 실망하고 내 신앙의 최소한의 자존감마저 무너졌습니까? 선교의 열정마저 다 잃어버리신 분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내 남편에게 실망하고 차라리 가정을 버리고 싶으신 분이 계십니까?
아니 그곳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선교사로 들어가라 말씀하십니다.
거기다 불신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니? 하나님 저 혼자 서 있기조차 벅찹니다. 내 믿음, 내가 지키기도 힘들어요. 그런데 이웃을 향하여 손을 내밀고 약한 자를 붙들어 주라고요? 항의하고 싶으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요나로 오늘 서 계십니까? 베드로로 서 계십니까?
요나서 5장은 어떻게 기록되어지고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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