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 15. 영역 4/토라
증거궤가 전하는 메시지
출 25:10-22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궤를 만들라고 명하신 말씀입니다. 마치 설계도를 보는 것처럼 자세하게 증거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증거궤의 겉모양을 살펴보겠습니다. 증거궤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상자인 궤 부분, 궤 덮개인 속죄소 부분, 그리고 속죄소 위에 장식되어있는 그룹 부분입니다.
궤는 아카시아 나무의 일종인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겉에 순금을 입혔습니다. 크기가 가로가 약 125센티, 세로가 약 75센티 그리고 높이가 약 75센티 정도입니다. 그리고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도록 양쪽 옆면에 금으로 싼 조각목으로 만든 채 두 개가 달려있습니다.
속죄소는 궤를 덮는 덮개입니다. 크기는 가로 세로가 궤와 같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덮개는 전체를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룹 둘은 덮개 위에 장식해 두었습니다. 그룹이란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수호천사를 말합니다. 그룹 둘이 속죄소 양쪽 끝에서 양 날개로 속죄소를 감싸고 했습니다. 역시 이 그룹 둘도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음으로 이 증거궤 안에 담아 보관한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증거궤 안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 두 돌판을 넣어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를 보면 여기에 증거판 외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았던 금항아리도 넣어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 증거판을 넣었고, 후에 하나님께서 명하셔서 나마지 두 개도 넣어 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이 증거궤를 보관한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증거궤를 성막 안의 가장 성스러운 곳인 지성소에 보관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지성소에는 오직 이 증거궤만을 보관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증거궤를 만들게 하셨을까요? 도대체 이 증거궤가 무엇이기에 이것을 만들어 지성소에 보관하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 증거궤의 행방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꾸로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증거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현재는 증거궤는 사라져버렸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찾으려고 오랜 세월 안간힘을 썼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증거궤는 언제 사라진 것일까요? 성경에 증거궤를 솔로몬 성전에 안치한 뒤부터 언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시대에 없어졌는지, 바벨론 포로 직전에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증거궤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뒤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와 성전을 지을 때까지만 그 존재 의미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당시 상황과 그들의 영적 수준을 고려하셔서 증거궤를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저들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시는 임재의 상징물로 증거궤를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특히 광야생활 중에 이동하며 하나님을 섬겨야 할 저들에게 이 증거궤는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저들은 증거궤가 안치된 성막에 나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광야를 행군할 때 앞장 선 증거궤를 따랐습니다. 그러니까 증거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증거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세워졌고 증거궤는 그 성전 안 지성소에 안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그 증거궤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신 후에 이 성전조차도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영으로 진리로 예배하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으로 하나님의 임재는 모든 성도들 심령 속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증거궤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말씀 드린 대로 우리에게 증거궤는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접적인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증거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해 역사하신 일들은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님의 임재
증거궤를 자세히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덮개 부분입니다. 이것을 순금으로 만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속죄소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해주신다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이곳을 ‘시은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증거궤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자리로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이 증거궤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는 뜻에서 ‘하나님의 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성막에서 제사드리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궤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놀라운 능력을 덧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지난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백성입니다. 뼛속 깊은 곳까지 노예근성이 자리 잡고 있던 백성입니다. 자기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백성입니다. 저들이 광야에서 40년을 견뎌냈습니다. 여러 민족들과의 전쟁을 승리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일은 우리를 새롭게 만듭니다. 우리를 능력 있게 만듭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을 잘 견디고 헤쳐 나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그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 어떤 적들도 싸워 이길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로 ‘무소부재(無所不在)’라는 말을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시지 않는 곳이 아무 곳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디나 계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은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디나 그리고 언제나 그곳에 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시면서도 특별한 시간, 특별한 장소, 그리고 특별한 사람에게 ‘임재’하십니다. 그 사람을 만나주시고 그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모태신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태신앙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하는 모태신앙과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신앙생활하는 모태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하는 모태신앙은 나름대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 와서 교회생활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만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잘 못합니다. 깊은 기도도 잘 못합니다. 헌신도 잘 못합니다. 인생의 위기로 제대로 헤쳐나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입으로 “못해!”, “못해!”를 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한 모태신앙은 ‘못해 신앙’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 예배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도드릴 때 기도의 골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 묵상할 때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인식
오늘 본문을 보면 1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 지며” 증거궤 안에 증거판을 넣어 보관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증거판이란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을 말합니다. 이 두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이 하나님의 뜻을 증거한다 하여 증거판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궤는 증거판을 담아두었다고 하여 증거궤라 불렀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 증거궤를 다른 말로 ‘언약궤’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두 돌판을 다른 말로 언약의 돌판이라고 불렀고, 이 언약의 돌판을 담아두었다고 언약궤라고도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보면 이 증거궤를 다른 말로 ‘법궤’라고도 불렀습니다. 십계명의 법이 들어있는 궤라는 뜻에서 법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궤를 만들게 하시고 그 궤 안에 바로 말씀을 담아두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백성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가 다 이 십계명의 말씀을 외웠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전체가 이 십계명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의 말씀을 돌판에 기록하여 증거궤 안에 담아둠과 동시에 저들의 마음의 궤에 십계명의 말씀을 담아두었던 것입니다.
마음속에 담겨있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때론 채찍 역할을 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고,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인데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해 낼 수 있었습니다.
때론 브레이크 역할을 했습니다. 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일이고, 유혹에 흔들려 어쩔 수 없이 하려고 할 때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지 않고 버틸 수가 있었습니다.
때론 준엄한 고발장 역할을 했습니다. 육신이 연약해서 죄를 범했을 때 그리고 자기도 모른 채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말씀이 생각이 나서 회개하게 됩니다.
마 26장과 27장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실패한 두 제자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한 사람은 베드로고, 다른 한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비겁하게 자기가 위기에 몰리게 되자 자기 주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26:75에 이렇게 그 이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한 마디로 말씀이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다. 닭이 울 때 그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씀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통곡하고 회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달랐습니다. 저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사건이 진행되는 것을 보니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갑니다. 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후회하게 됩니다.
27: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리고 27:5을 보면 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는 스스로 후회했고, 스스로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 생각을 따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마음속에 말씀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 말씀이 생각나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따름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빼내지 말지며” 증거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도록 양쪽에 채를 고리에 꿰어 두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행군할 때 증거궤가 앞 장을 섰습니다. 민 10:35-3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 이스라엘 백성이 행군할 때 이 증거궤가 일어나 앞으로 나갈 때 따라갔고, 이 증거궤가 멈추어 쉴 때 멈추어 야영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가 앞장을 섰습니다. 수 3: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며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가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진군해 들어갈 때 요단강을 건너야 했는데 이 때도 언약궤가 앞장을 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증거궤가 인도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앞으로 나가면 따라 나가고, 멈춰서면 따라 섰습니다. 그리고 강을 건너면 따라 건넜고, 들판을 지나면 따라 지났습니다. 동으로 가면 따라 동으로 갔고, 서로 가면 따라 서로 갔습니다. 그 결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며 동역하는 장로님 한 분이 계십니다. 전희인 한국교세라 대표시고 충신교회 장로님이십니다. 이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한 번은 이분이 회사가 너무 어려워 작정하고 기도에 몰두했답니다. “하나님 지금 회사가 위기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뜻밖의 말씀이 떠오르면서 마음속에 강한 성령의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내가 보내준 사원들을 몇 명이나 구원했느냐?” “네? 저는 선교사가 아닌데요? 작은 회사 사장일 뿐입니다.” “”제자 삼아라. 영혼을 구원해라“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순종하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회사 임원들부터 불러서 설득을 했답니다. 그리고 사원들을 사랑의 공동체란 소그룹으로 나눠 제자훈련을 시키고 일주일에 한 번 모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이 하나 둘씩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90%의 직원이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믿는 직원이 늘어나면서 회사 매출도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0년째 매출과 이익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의 간증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자기는 주님의 인도를 따랐을 뿐인데 믿는 신자도 많이 얻었고, 회사도 크게 발전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증거궤를 앞세우시며 우리에게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하며 따르면 결국은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증거궤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에게 증거궤는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증거궤는 오늘도 우리에게 소중한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우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복된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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