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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 1. 영역 2/신년주일 서로 사랑하라

17. 1. 1.                                         영역 2/신년주일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 그분의 하신 행동, 그리고 그분의 존재 자체가 너무도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심각한 도전이요 걸림돌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태도가 자기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볼 때 예수님은 율법을 어길 뿐 아니라 부정하는 것처럼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까지 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율법을 부정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철저하게 존중하셨는데 저들이 오해할 것일까요? 도대체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입장은 무엇이었을까요?

   마 5:17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대해 분명하게 답을 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구약에 기록된 율법을 부정하거나 폐기처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율법을 잘못 해석해서 그 의미를 곡해한 것을 바로 잡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들의 전통에 따라 잘못 실천하고 있는 것을 바로 잡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는 예를 말씀하셨습니다. 마 5:21-22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실제로 죽이지만 않았지 폭행에 인격살인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것을 완전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에게 화를 낸다든지 심지어 형제를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뜻에서 신약성경을 보면 새계명이라는 말씀이 여럿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새계명이라는 말씀을 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구약의 계명을 보다 완전하게 하시려고 옛계명을 새롭게 하셨다는 뜻에서 새계명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새계명

   오늘 본문에 바로 이 새계명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새계명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계명과 동일한 계명이 구약에도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예를 레 19:18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약에 나타난 모든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해 주실 때 둘째 계명으로 이 계명을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 22:39-4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구약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핵심적 계명 가운데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 이미 나와 있는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왜 새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옛계명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이 계명을 새롭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옛계명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 이 계명을 어떻게 새롭게 말씀하셨을까요? 그 답을 본문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그 사랑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주신 것입니다.

   옛계명을 다시 보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되어있습니다. 사랑하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그 사랑의 내용이 설명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내용을 새롭게 하시면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완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 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롤프 메르클레라는 사람이 쓴 [자기사랑의 심리학]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된 자기사랑을 하고 있다고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이기심을 들고 있습니다. 이 이기심은 자기만을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어서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에게 큰 손해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로 면박꾼을 들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기대가 큰데 실상은 그렇지 못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면박을 주고 자책을 하게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자기 안에 면박꾼이 있다는 것이고, 이 면박꾼 때문에 결국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아상에 상처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이렇게 잘못된 자기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 그 사랑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우선 이기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식당에서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치는데 그대로 내버려두는 젊은 엄마들을 본 일이 있습니다. 다른 손님들이 식사하는데 불편을 끼칩니다. 그런데도 내버려둡니다. 이 아이들이 장차 커서 어떻게 될까요? 남들을 배려할 줄 모르게 클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다음으로 면박꾼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잘 되도록 교육시킨다고 끊임없이 아이들을 볶아댑니다. 잔소리를 해 댑니다. 아이들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이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을까요?

   바로 자기 사랑에 기초해서 누군가를 사랑할 경우 이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옛계명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의 문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런데 새계명에서는 사랑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옛계명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본문 앞부분에 나오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행동입니다.

   요 13: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직전 그 경황없는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을 13:4 이하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동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행동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관심

   우리가 이 예수님의 세족사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지침은 관심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큰  일을 앞에 두고 계셨습니다. 죽으러 가셔야 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힘이 드셨겠습니까? 오죽하면 “내가 죽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이 세상에 두고 가는 제자들이 눈에 밟히신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다투고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하며 다투는 그 모습이 애처로우셨습니다. 특히 당신을 은 삼십에 팔아넘길 가룟 유다를 보시니 안타까움을 금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만찬 식사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을 발을 씻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들을 부르셨을 때부터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저들 곁을 떠나실 때까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사랑은 바로 이 관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관심이란 그 대상에게 내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마음을 써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좋은 처지에 있으면 축하해주고 기뻐해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 염려해주고 도와주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마음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에게 마음을 내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눔

   우리가 이 예수님의 세족사랑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번째 지침은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별하실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아셨습니다. 지금이 제자들과 평안한 가운데 함께 할 마지막 시간임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다 마침 유월절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미리 앞당겨서 유월절 만찬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음식만 나누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도 나누셨고, 비전도 나누셨고, 마음도 나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 귀한 것들을 나누셨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말씀을 나누셨고, 용기와 위로를 나누셨고, 그리고 꿈과 비전을 나누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나눔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자다운 제자로 세워져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랑은 이렇게 나눔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입니다.

 

  2009년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토머스 슈타이츠 박사는 수상 비결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조금은 엉뚱한 답을 했습니다. “커피 브레이크 때 동료들과 연구주제에 관해 주고받았던 게 큰 힘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 체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1967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연구원으로 갔던 첫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동료들은 아침에 모여 커피를 마시고, 점심 때 같이 밥 먹고, 저녁엔 차까지 마셔요. 도대체 연구는 언제 하는지, 그러면서 성과를 내는 게 신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답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서로 만나 차를 마시고 음식을 나누면서 비전을 나누고, 서로 격려를 나누고, 그리고 아이디어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나눔이란 서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주저 앉아있는 사람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사람에게 길을 찾게 해 주는 것입니다. 지쳐있는 사람을 격려하고 새 힘과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소중한 것들을 나누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용기 있게 앞을 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소중한 것들을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나누고, 은사를 나누고, 비전을 나누고, 그리고 소유를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김

   우리가 이 예수님의 세족사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 번째 지침은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종들이나 하는 발 씻는 일을 주요 선생으로서 하신 것입니다. 주요 선생이신 주님께서 마치 종처럼 제자들을 섬겨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실 위치에 계셨지만 오히려 섬겨주신 것입니다. 이 섬김이 제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이 섬김이 제자들을 새롭게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되게 했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섬김의 삶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섬김의 삶은 자기의 목적이나 계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섬기고자 하는 대상의 필요와 의도와 지시에 따라서 행동할 때의 의지(Will)와 수고(Working)와 행동(Doing)이다”

 

   섬김이란 우선 자기의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권리, 목적이나 계획, 그리고 바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기고자 하는 대상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 뜻을 따라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을 섬겨주셨습니다. 포기하셨고, 따라주셨고,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를 위해 자기 것을 포기하고, 따라주고, 그리고 수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17년 우리 교회 표어를 “서로 사랑하라”로 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상도중앙교회라는 공동체로 불러주시고 하나 되라고 명하신 우리 서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가슴 뜨겁게 새기고 순종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서로에게 마음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교인의 수가 적지 않기 때문에 모두에게 다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샘 식구들이나 같은 모임에 속해 있는 분들부터 관심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가까이에 있는 분들부터 대상을 넓혀가며 관심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서로에게 자기의 소중한 것들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은사를 나누고, 그리고 가진 소유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서로의 발을 씻는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우리교회는 더욱 교회다운 교회가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