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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2. 12. 영역 4/바울서신자족의 은혜빌 4:10-13

17. 2. 12.                                         영역 4/바울서신

 

자족의 은혜

 

빌 4:10-13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다른 편지들과는 달리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선 빌립보 교회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믿음을 잘 지킬 뿐 아니라 복음사역을 위해 귀한 역할을 해 온 것에 대해 감사하고 또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선물과 헌금에 대해 감사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바울의 선교사역을 돕기 위해 헌금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바울이 황제 재판을 청하면서 로마로 호송되는 길고도 힘겨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 때 빌립보 교회가 헌금을 전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면서 다시 헌금을 전달할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 편에 헌금과 선물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뜻밖의 사랑을 받게 되어 너무도 기뻤고, 그리고 마음을 다해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감사의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보통 선물과 헌금을 전달 받았을 때 감사는 어떻게 할까요? 우선 선물을 열거하겠죠. 무엇 무엇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할 것입니다. 정말 그것들이 필요했는데 보내주셔서 잘 쓰고 있고, 또 그것이 선교 사역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내주신 헌금은 어디어디에 어떻게 썼고, 그것이 선교활동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이런 식의 표현이 전혀 없습니다. 선물과 헌금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은 없고,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에게 보여준 관심에 대해 감사하고, 이렇게 까지 헌금을 보내준 그 사랑의 태도에 대해 감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헌금과 선물이 자기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헌금과 선물이 자기 선교사역에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식의 인사는 상대방에 대한 결례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기껏 헌금과 선물을 보냈더니 한다는 소리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에게 사실이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은 고맙고 기쁘지만 그들이 보내준 것은 그렇게 크게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한 마디로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도 부족하지만 부족한 대로 자족하며 선교사역을 해 왔기 때문에 헌금이나 선물 때문에 특별히 기뻐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보통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자족을 배웠습니다. 이 자족 때문에 남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자족 때문에 남다른 사역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족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자족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이 “자족(autarkes)”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오직 오늘 본문에만 나옵니다. 비슷한 뜻의 말은 성경 여러 곳에 나오지만 바로 이 자족이라는 이 말은 이곳에만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이 연구해 보니 이 말은 당시 헬라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용어라는 것입니다. 특히 당시 주류 철학이었던 스토아학파가 최고의 덕목으로 손꼽던 용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당시 지성인들 사이에 최고의 덕목으로 사랑받던 이 자족이라는 용어를 빌려서 자기의 상황을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 스토아학파가 주장하던 자족이란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해서 독립성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의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환경에서도 그 누구와 더불어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것에 만족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운을 따르며, 자기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당시를 대표하는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세네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그의 현재의 운에 만족하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의 환경과 조화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결국 당시 스토아학파가 추구하던 자족은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주어진 것으로 순응하며, 자기의 능력으로 주어진 것에 대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칫 저들이 말하는 자족은 체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자족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우선 바울은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과 환경 속에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스토아학파가 운명론적으로 어떻게 하다 보니 이런 상황과 환경을 맞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지금 처한 상황과 환경은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주어진 것일 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뜻이 이루어지는 날을 소망 가운데 기대합니다. 비록 오늘 힘들고 고달프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복된 날을 기대하며 오늘을 받아들이고 견딥니다. 그러나 스토아학파는 그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저 체념하며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딜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은 그래서 자족하지만 그 안에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상황과 환경을 잘 견뎌내면 장차 그 날에 하나님의 칭찬이 있고 상이 있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자족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힘을 다해 순응하고 상황과 환경을 어쩔 수 없이 만족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자족은 무표정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자족은 바울이 당시 지성인들이 흠모하는 덕목을 빌려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자족을 재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상황과 환경을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만족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만족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족하고 계십니까? 우선 우리는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과 환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심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소중히 받아야 합니다.

왜 자족을 배워야 하는가?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그리고 12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한 마디로 자족을 배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자족을 배웠을까요? 우리는 왜 자족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요?

   우선 인생에는 다양한 상황과 환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늘 같지가 않고 비천할 때도 있고 풍부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늘 자족하려면 배워야 합니다.

   

  지난 주간 교역자 세미나 중 한양도성길을 걸었습니다. 매년 겨울 교역자 수련회 때는 극기 훈련과 팀웍 훈련을 위해 산행을 해왔습니다. 금년에는 한양도성길을 걸은 것입니다.

  남대문에서 시작해서 남산을 넘고, 동대문을 지나 낙산을 넘고, 혜화문을 지나 북악산을 넘고, 창의문을 지나 인왕산을 넘고, 돈의문 터를 거쳐서 다시 남대문까지 왔습니다. 전체 길이가 약 19킬로 정도 되는 짧지 않은 거리였습니다.

  저는 이 길을 걸으며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전체 코스 가운데 크고 작은 산이 네 개나 있었습니다. 오르막을 오를 때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특히 혜화문에서 북악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오르막이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숨이 턱밑까지 막히고 온몸에 강렬한 통증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내리막이 더 힘이 들었습니다. 특히 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까지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의 내리막 계단 길이 2킬로 가까지 이어져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무릎 관절에 퇴행성관절염이 진행 중이어서 계속되는 내리막길에는 무릎에 견디기 힘든 통증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곳곳에 평탄한 시내 길들이 이어져있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날아갈 듯 편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달렸습니다. 그리고 평탄한 길에 대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길이 이와 같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습니다. 그리도 평탄한 길도 있습니다. 늘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바울은 자족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비천에도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러니까 바울은 비천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을 뿐 아니라 풍부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비천에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풍부에도 자족할 줄 알기가 어렵습니다. 어렵게 살던 사람이 형편이 나아진 뒤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를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형편이 나아진 뒤에 사람이 교만해진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할 때 열심히 신앙생활하던 사람이 형편이 나아지니까 교회를 멀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풍부에 처할 줄 아는 사람이 비천에도 처할 줄 알기는 더 어렵습니다. 풍족하게 살던 사람이 형편이 어려워진 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낙심하고 사람과의 관계도 끊고 숨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풍족하게 살 때 교회 잘 다니던 사람이 형편이 어려워지니까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풍부할 때 겸손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 사상에 철저했습니다. 그리고 그 풍부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비천할 때 당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사용하신다는 믿음에 철저했습니다. 그리고 비굴해지지 않고 주어진 형편에 감사하며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그가 자족의 비결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자족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풍부할 때 겸손하고 비천할 때 당당하여 늘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족의 은혜

   본문 13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실 이 말씀은 많은 경우 오용되고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이 구절만 떼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해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 안에 있으면 어떤 병도 고칠 수 있고, 어떤 이적도 행할 수 있다고 설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문맥 안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12절과 연결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12절에 나오는 모든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는 비천한 상태에서도 자족할 수 있고, 또한 풍부한 상태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능력 주시면 어떤 상태에서도 늘 자족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바로 자족은 배워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족이라는 것을 배워서 알고 훈련해서 자족을 익힌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배워서 알아야 하고 훈련해서 익혀야 하지만 그 위에 주님께서 자족의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비로소 자족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자족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욕망입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 안에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내적인 힘이 바로 이 욕망입니다. 이 욕망이 우리를 자족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을 참 많이 봅니다. 그만하면 충분히 먹고 살만합니다. 지금 가진 돈만 해도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쓰기 힘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더 가지고 싶어서 혈안이 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욕망 때문입니다. 아니 그 욕망을 제어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자족의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는 염려입니다. 사탄이 우리 속사람 깊은 곳에서 마치 샘물이 솟아나듯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염려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일을 미리 앞당겨서 걱정하는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이 염려가 우리를 자족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이란 책에서 어니 젤린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그리고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96%의 염려는 거의 쓸데없는 염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자족을 막기 위해 우리 마음에 뿌려놓는 잡초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욕망과 염려를 우리 힘으로 뿌리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욕망과 염려 때문에 자족하지 못한다는 것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욕망과 염려를 떨쳐버리려고 처절하게 노력도 해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 욕망과 염려를 우리 스스로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욕망과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주님께로부터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을 때 이 욕망과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고 그 이후에 참된 자족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족은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자족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만 우리는 참된 자족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족은 인생을 살며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은 항상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족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자족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자족의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자족하며 주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