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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박종순목사

[스크랩] 박종순목사 설교모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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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순 목사설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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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돌아온 사람들

4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5 자아관리에 최선을

6 은혜로 사는 사람들

7 한인교회협 정기총회

8 은혜와 삶

9 우울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

10 향과 기도

11 기도에 최선을

12 주 밖에 없나이다

13 경배하는 사람들

14 깨어 있으라

15 지키시는 하나님

16 < 예화 > 독소와 해독

17 생명의 면류관

18 최선을 다하는 교회 II

19 최선을 다하는 교회(1)

20 새해를 맞는 마음

21 구원의 우물에서

22 하나님은 나의 구원

23 엎드리는 사람들

24 승리하는 교회

25 던지고 다시 찾는 법

26 물동이를 버린 여인

27 졸지 맙시다

28 제자가 됩시다

29 열납되도록 드립시다

30 마음을 정한 사람들

31 바로 드리는 사람들

32 수년안에

33 나의 삶 속에 평화를

34 원망하는 사람들

35 하나님이 주신 양식

36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37 풍요로우신 하나님

38 예정에서 영화까지

39 이 성에 유하라

40 그를 힘입어

41 해방된 사람들

42 선택받은 사람들

43 피조물의 탄식소리

44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45 내 생각을 너희 생각과 다르며

46 건강한 사람들

47 단비를 주소서

48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49 나와 내 집이 사는 길

50 가면서 전파하라

51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

52 저주받은 도시들

53 한나의 성공비결

54 어떤 부자의 일생

55 하나님이 주신 기업

56 실패에서 성공으로

57 배가 되기 위하여

58 사는 길로 인도 합시다

59 확실한 증거들

60 나의 객실이 있느냐

61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

62 차고 넘치는 교회

63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들

64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65 전진합시다

66 빛이 있으라

67 실패한 관리자들

68 하나님의 대사들

69 칭송하며 선포하며

70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

 

 

1

 

3

제목 : 돌아온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누가복음 24장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

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3-35절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

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신앙을 회복한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두 제자의 행보 속에서 몇가지 산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두제자의 잘못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제자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열두사도 중의

두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고 모셨던 사람들

이었음에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 두 사람의 행보는 다음과 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오늘 나의 잘못인 것입니다.

 

(1) 삶의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일하던 곳,다른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

. 13절을 보면 "그날에"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부활하신 그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조급하게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세가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방관주의, 회피주의, 도피주의

입니다. 방관은 무관심이고, 회피는 편의주의이며, 도피는 적극적 외면이며

부인입니다. 세가지 다 나쁜 것입니다. 가령 두 제자가 한달 정도 예룻라렘

에서 고통받아가 떠났다면 이해가 가능합니다만 그러나 그날 더우기 부활의

소식이 퍼져나가고 있는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제아무리 미화하고 호평을

한다해도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습니다. 현대 크리스챤의 특징은 방관자,

피자, 도피자라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내밀고, 불리하면 움츠리는데 익숙합

니다.

떠나면 안됩니다. 부활의 현장인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떠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떠나면 안됩니다.

 

(2)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

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저희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

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뇌에 충격을 받거나 손상을 입으면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는 사흘 전까지 곁에 있었던 예수를 알아 보지 못했

습니다. 한마디로 비극입니다. '눈이 가리워졌다'는 것은 신령한 것과 신령

한 세계를 보는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안과의사들은 사람 눈에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 수십가지라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질환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질환 가운데 가장 큰 질환은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겐 네 개의 눈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사물을 보는 눈입니다.

산을 보고, 사람을 보고, 하늘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눈이

대기오염과 텔레비젼 시청 등 물리적인 원인에 의해 점점 어두워지고 있스

빈다.

둘은 이웃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정신의 눈이며, 연민의 눈이며, 사랑의 눈입니다. 그런데 이 눈도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웃은 보이지 않고 나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가고 있

습니다. 이웃은 보이지 않고 나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 가고 있고, 좋은 점

은 보이지 않고 허물만 약점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셋은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인간의 눈 자체의 가시거리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천리안이라는 말이 있

긴 합니다만 천리를 보는 눈은 없습니다. 그러나 보조장치를 이용하면 아

메바도 볼 수 있고 월세계도 볼 수 있고, 사람의 위장도 들여다 볼 수 있습

니다.

사람에겐 세계를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세계란 넓고, 크고, 깁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통합하고, 이해하는 것이 세게를 보는 눈입니다. 그런데 우

리네 눈은 좁고 침침합니다. 나 밖에 모르고 우리 밖에 모릅니다.

TV 토크쇼를 진행하는 사회자이 말이 생각납니다.

"요즘 세계화가 한창 강조되고 있습니다만 한국사람에 세계화 되는 것이

빠를런지, 세계를 한국화 하는 것이 빠를지 얘기해 봐야 될 것같습니다."

고 했습니다.

세계화 수용 태세가 덜 됐다는 뜻일 것입니다. 세계를 보고 역사를 보고

미래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넷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믿음이라는 보조 수단이 없는한 보이지 않는 눈입니다. 그리고 성

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하소서 성령이여"아멘

그런데 현대인은 그 눈이 점점 어두워가고 있습니다.

중세기는 천주교의 교리와 성물숭배가 믿음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때를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21세기는 인간의 지식과 과학문명이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영적 암흑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두 제자의

경우 신령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곁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

니다.

 

(3)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길 가면서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풀

어주는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네 가지

단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듣는 것이고, 둘째는 느끼는 것이고, 셋째는 깨닫는 것이고, 넷째

는 실천하는 것입니다. 듣긴 듣는데 느낌이 없다든지 느끼긴 하지만 깨달음

이 없다든지 깨닫긴 했는데 실천이 없다면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제자가 말씀을 깨닫지 못한 원인을 25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미련하

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선지

자들의 예언을 의미합니다. 그 예언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

님의 말씀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구약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신약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

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무엇이나 잘 믿습니다. 그러나 안 믿고 의심하는데

길들여진 사람은 무엇이나 안믿고 믿지 못하빈다.

안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셔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

.

 

(4)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남의 이야기처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 자신의 부활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마치남의 이

야기처럼 했습니다.

어떤 주간지를 보니까 요즈음 대구에는 "카더라"통신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유언비어를 말하는데, "..했다 카더라.. 아니라 카더라...

한다 카더라"식의 유행어가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유행어여도 안되고 유언비어여도 안됩니다.

만일 두 제자가 부활신앙이 확실했더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다시 사신 예수를 만나진 못했지만 그 분은 반드시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우리나라 속담에 "남의

얘기하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나 처자를 그리고 남편을 남처럼 여기거나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

.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남처럼 여기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내가 다니

고 은혜받는 내 교회를 남의 교회처럼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2. 두 제자의 변화를 살펴봅시다.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 놀랍고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크게 세가지로 요약됩니다.

 

(1) 시각이 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밝아진 눈으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눈이 밝아지면 예수가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영원한 세계가

보입니다. 반대로 죄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 것들이 보입니다. 쾌락이 보이

, 죄짓는 법이 보이고, 불의한 길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제자의 눈

이 언제 어떻게 밝아졌느냐하는 것입니다.

30절을 보면 "저희와 함께 음식잡수실 때에"라고 했고, 31절을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도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에수님과의 격의없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예수

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은 신령한 눈이 밝아지고 신령한 마음이 열리는

법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과 교제하고 먹고 마시면 금방 악을 본뜨게 됩

니다.

내가 신령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려면 그 분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심령이 변했습니다.

 

32절을 보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

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성령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날 거기서 성

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난후 그들의 모든 것은 변했습니다. 냉소

적인 신앙이 불처럼 뜨거운 신앙으로, 침체되었던 신앙이 되살아나는 신앙

으로 탈진했던 신앙이 활기찬 신앙으로, 의심하던 신앙이 확신하는 신앙으

로 회복되었습니다.

언제 뜨거워졌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 라고 32절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길에서 말씀듣고 성경말씀 듣다고 성

령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말씀들은 이

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 요지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

활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듣는 도중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고넬료를

비롯하여 가족들이 방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말씀과 성령의 깊은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

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와 운동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도 발견되게 됩

니다. 말씀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취급하는 성령운동은 잘못 탈선할 위험이

많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가 그날 들었던 그 말씀은 바로 성경이었다는 사

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날 두 제자는 예수님 말씀듣고 성령받았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변했습니

.

 

(3) 행동이 변했습니다.

 

33절을 보면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동없는 변화는 참 변화가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신줄 알고 그리고 마

음이 뜨거워진 뒤에도 그냥 엠마오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이야말로 부활신

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곧 그 시""바로 그 때"라는 뜻입니다. 29절을 보면 그때는 이미 저물

었을 때입니다.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려면 12km나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이나 아니면 2-3일 흐른 뒤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들은 바로 그 때 되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결단입니다. 믿음이 떨

어지면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회복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참 회개는 즉시

해야 합니다. 미룰 필요도 없고 늦출 필요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던

그들이 곧 그 시로 돌아온 것은 회개의 신속성을 의미합니다.

떠났던 예루살렘으로!

떠났던 하나님께로!

떠났던 믿음에로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가수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을 불러 한국과 일본에서 수십만장의 디

스크 판매고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와야 할 곳은 부산항이

아닙니다.

 

부활의 신앙의 현장, 선교현장, 사명의 현장입니다.

그들은 돌아와 길에서 만난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그 일 때문에 돌아왔습

니다. 36절 이하를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

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멘.

 

 

4

제목 :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의 유명한 부활신앙의 고백이며 증언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1-34절은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35-49절은 부활한 몸의 성격에 대하여

50-58절은 부활과 승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증거합니다.

1:3절을 보면 "성경대로 죽으시고" 1:4절을 보면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아이사

53장과 다니엘서 9:26과 시편 22편과 스가랴 12:10등에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 역시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

라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셋째,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24:33-39).

넷째,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습니다.

다섯째,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여섯째,모든사람에게 보이셨습니다.

일곱째,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14-15을 보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믿음은 헛것이며 훗날 거짓증인으로 발견될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 또 확신

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종교이며 나도 다시 산다는 개인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이 바로 '부활신앙'인 것

입니다. 불교,유교, 도교,회교, 힌두교 등 그 어느 종교도 교주가 다시 살

아났다는 교리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기독교가 죽은 종교가 아니라 산 종교라

는 뜻입니다.

본문은 세가지를 교훈합니다.

 

1.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51절을 보면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더니"라고 했고, 52절을 보면

"우리도 변화하니라"고 했습니다. 부활체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의 육체는 변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힘도

쇠하고 허리도 굽어지고 눈도 침침해지고 얼굴도 주름투성이로 변합니다.

곱고 깨끗하던 피부도 거칠어지고 주근깨며 검버섯이 피어납니다. 꾀꼬리

소리나 은방울 굴리던 소리같던 목소리도 쉬고 굵은 소리로 변합니다.

그러나 부활하니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인간이 상

상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일본 나고야 대학의 연구팀이 사람과 같은 혈액형을 가진 돼지를 사육하는

데 성공했다고 412일 교도통신이 보도했스니다.

나고야 대학연구팀은 사람의 피를 생성하는 효소 유전자를 수정된 돼지의

난소에 주입시킨 뒤 수정란을 19마리의 암돼지 자궁에 이식했는데 그 중 3

마리가 낳은 27마리의 돼지 새끼가운데 1마리가 사람과 동일한 특성을 지닌

피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와 같은 특성을 지닌 돼

지를 사육하려면 앞으로 10년이 더 걸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피와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돼지는

돼지 일뿐 그것이 사람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해

서 사람 몸에 수혈이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저로서는 제 몸속에 돼지피를

넣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피는 생명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사람 생명 속에 돼지 생명을 혼합시킬 수

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의 피가 정맥과 동맥을 순환하고 있는데도 돼지만아

도 못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물며 돼지피가 사람의 혈관을 흐른

다면 돼지처럼 꽥꽥거리고 낄낄거리고 온통 세상이 돼지 우리가 될까봐 겁

이 납니다.

사람 몸속에 사람의 피를 수혈하면 생명을 구하거나 연장하는데 도움이 됩

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피로 씻음을 받은 사람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51절과 52절은 변화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식간에 홀연

히 변한다"는 것이고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순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신령한 몸이

란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는 몸을 의미합

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서서히 몇 십년 걸려 진화하는 것이 아

닙니다.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합니다.

상처 후 재혼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에게 요청한 상담의 내용은

훗날 천당가면 부인이 둘이 될텐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

. 저는 그 사람에게 마태복음 22:30말씀을 소개했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했습

니다. 우리는 모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축복된 것입니다.

 

2.이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55절을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

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고 57절을 보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게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김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했

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40일동안 금식하신 후 마귀시험을 이기셨습니

. 유대 교권자들과 지도자들의 도전을 이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영적싸움에 이기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죄와 유혹을 이기셨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이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승리의 축복을 주십니다.

사람의 몸에는 지구상에 사는 사람 수만큼의 온갖 세균이 기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안 거실에는 60만개의 곰팡이가 기생하고 있다

고 합니다. 무심코 피우는 담배한대 속에서 4천여 가지의 화학성분이 발생

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온갖 질병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만 그때 그때 생성되는 강한

저항력 때문에 그것들을 막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항력이란

한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능력)

주십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받아야 죄도 이기고 시험도 이기고 유혹도 이

기고 마귀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죄를 이기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세상법의 경

우에서도 드러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든

지 죄가 없다고 강변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죄인된 사람은 스스로 자기 의를 자랑할 수가 없

는것입니다.

구약의 경우를 보면 짐승을 죽여 그대로 그 피를 제물로 드림으로 죄사함

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림

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공로를 믿는 사람은 죄

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죽음을 이기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을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

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

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시 말하면 죽음을 이기게 해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예수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

아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이며 핵심진리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신앙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삽니다.

 

3.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58절은 고린도전서 15장의 결론이며 부활장의 마무리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

 

나이가 들면 손박이나 몸이 떨립니다. 그것은 몸의 기능이나 힘이 떨어졌

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부활신앙이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을까봐 떨고 망할까봐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만 확실하

면 떨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35을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했고, 8:38-39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

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그 어떤 내적 갈등이나 외적 억압이나 영향에도 자기 믿

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고백이 가

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시 사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데 죽음이 겁날리 없고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

님이 계시는데 걱정될 리 없고, 우겨사임을 받고 핍박을 받아도 힘주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

.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도 그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집이 흔들리면 무너집니다. 나무가 흔들리면 뿌리가

뽑힙니다. 신앙이 흔들리면 그 영혼이 침몰합니다.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맙

시다.

 

(2)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두 가지 사건 때문에 힘을 얻고 주

님과 교회를 위해 힘써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할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

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따르고 좇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

이 났다면 충성을 바쳐 따르고 섬길 대상이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

고 더 이상 예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순간으로 끝났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감격

과 충성의 대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1914년 당시 정동교회는 미화로 200달러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빚은 1893년에 시작한 교회 건축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은 빚을 갚기 위해 헌금을 하자고 했지만 그날 걷힌

헌금은 5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이화학당 학생이 많았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치기로 의논하고 주일저녁

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찬송을 부른 후 한사람 씩 나와 가

진 것을 바쳤습니다. 동전 17달러 정도, 반지 35, 손거울, 자명종 2,

양먈, 내의,구두,혼수감으로 어머니가 주신 붉은 명주도 있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댕기머리를 잘라서 주님께 드린다며 내어 놓았습니다. 그날 그 교

회의 빚은 해결되었습니다.

빚바랜 이화여대 학생들의 요즘 세태에 비기면 고전소설 같은 이야기입니

.

누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쓸 수 있습니까?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가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라서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한평생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교회 섬기고 직분 감당

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

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 주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4

제목 : 자아관리에 최선을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0409

 

미국 [노테데임 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인 톰 모리스(Tom Morris)는 성공에

5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1) 목표를 분명히 하라.

(2) 당신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을 찾아라.

(3) 집요한 끈기로 자신의 포부를 실천에 옮겨라.

(4) 전심전력을 다하라.

(5) 목표를 다시 점검하고 새롭게 하라고 했습니다.

[놀만 빈센 필] 박사는 "실패자처럼 생각하면 실패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성공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인생과 신

앙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톰 모리스 교수나 빈센 필 박사의 얘기들은 결국 자신을 어떻게 다스리느

냐에 따라 성공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잠언 16:32을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

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가장 힘센 자가 누구냐, 자기를 이기는 자다"라고 했습니

.

미국 캔터키감리교회 담임목사였던 데이빗 씨맨즈(David Seamands)박사는

상처받은 자신의 감정을 치료받기 위한 원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1)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라.

(2) 고침받기를 원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3) 어떤 문제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4) 문제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

(5)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6)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 바를 성령

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씨맨즈 박사 역시 문제 해결의 당사자는 자신이며 기도가 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타락사건 이후 인간은 자신이 져야할 책임을 그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버릇에 익숙해졌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떠넘기고, 하와는 뱀에게 떠넘겼던 그 나쁜 습성이 지금

우리들 속에서 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찌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요즈음 사람들은 "주제를 파악하라"고 말합니다만 그러나 그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알고 자아를 통찰하

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교회 목사였던 조웽(Jowett)은 사람은 두

개의 자로 자신을 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자는 자아의 죽음(Life for Christ)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위해 내가 죽는 것,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부정이

며 바른 삶의 등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세 가지 자아관리의 방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1. 감정관리입니다.

 

32절을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라고 했습니다. 바다

에 파도가 있고, 전파에 주파가 있는 것처럼 감정에도 기복이 있습니다.

치 날씨처럼 흐렸다. 갰다를 반복합니다.

클라이드 네레모어(Clyde M Narramore) 박사는 "인간의 신체적조건

(Physical)과 정서적 조건(Emotional),그리고 영적조건(Spiritual) 은 상호

간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했습니다.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고, 기도하기

도 힘들어갑니다. 그 영혼이 탈진상태에 빠지면 정신도, 육체도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신체, 정서, 영혼은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을 내는 것 역시 그 원인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성내기를 잘하는 원인으로서는,

(1) 습관성 원인, (2) 정서불안의 원인, (3) 외적 충동에 의한 원인,

(4) 물리적 자극에 의한 원인 등이 있습니다.

화를 자꾸내는 버릇에 익숙해지면 반복해서 화를 내게 됩니다.

심지어 좋은 일도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투나 행동 표현이

화를 내는 것과 같기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의 화평을 깨뜨리게

됩니다.

성내는 것은 그 원인보다 결과가 더 무섭습니다. 라틴어를 잘 모르는 사람

이 라틴어로 학술토론하는 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친구가 물었습니

. "자네는 라틴어를 알아 들을 수 있는가?" 그러자 그는 "알아듣지 못하

. 그렇지만 누가 토론에서 밀리고 있는가 하는 것은 잘 알고 있네"

"어떻게 그것을 안단 말인가?"라고 묻자 그는 "먼저 화를 내는 사람이 밀

리는 사람 아니겠나"라고 대답했습니다.

강자가 먼저 화를 내는 법은 없습니다. 믿음 좋은사람은 벌컥벌컥 화를 내

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순간 모든 피가 역류합니다. 그래서 혈압이 상승작용을 하게 됩

니다. 화낼 때 얼굴이 뻘겋게 상기되는 것은 혈압의 상승작용 때문입니다.

화를 내면 모든 신경조직에 비상이 걸립니다. 위벽이 긴장을 하고, 위액분

비가 중단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영적 헛점이 생기게 됩니다. 영적 헛점은

마귀에게 공격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해지도록 분을 품

지 말라"고 했습니다.

밀턴은 "자신을 통제하며 자기의 감정과 욕망 그리고 공포를 다스리는 사

람은 한 나라의 왕보다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상담학자인 로렌스 크랩(Lawrence J.Crab)박사는 나쁜 감정을 유발

하는 네 가지 원인을 밝혔습니다.

첫째, 나쁜 행동이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바르게 행동하라.

둘째, 나쁜 목표가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의 방향을 수정하라.

셋째, 나쁜 생각이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생각하라.

넷째, 나쁜 신앙이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신령한 생활을 힘쓰라고 했습니다.

내가 올바로 나 자신을 관리하려면 나 자신의 감정을 바로 관리해야 합니

. 로렌스 크랩 박사의 말처럼 나쁜 감정을 올바른 행동과 목표와 생각과

신앙을 가질 때 통제되고 조절되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고백입니다만 이유와 원인이 무엇이건 화를 내고 난 다음 시간

이 지나면 저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워 집니다.

일생동안 저 자신이 자신의 감정통제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그 순간을 참고 넘깁니다.

둘째, 감정유발의 책임을 나한테서 찾아냅니다.

셋째, 빨리 그 사건을 잊어버립니다.

넷째, 기도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은 천하를 다스리는 용사보다 위대한 사람입

니다.

 

2. 마음관리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50대 중년 남자가 어느날 갑자기 소화가 안되고 설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검사를 해보자며 위검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위에 암세포가

있는 것 같다면 3일후 종합검사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날 그 시간부터 위가

쓰리고, 열이 오르고, 사지의 힘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죽도 소화가 안됩니

. 몇달 안에 암이 퍼져 죽을 것 같습니다. 지옥같은 3일이 지난 후 초췌

한 모습으로 병원에 찾아가 종합검사를 받았습니다. 일주일 후에 결과가 나

왔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부터 위도 안쑤시고,

도 오르지 않고, 기분이 날아갈 듯 하더랍니다.

그것은 마음 곧 정신작용의 결과였습니다. 마음은 그만큼 그 사람의 정서

와 감정과 행동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규태씨의 한국인의 건강관리이라는 에세이를 보면 옛부터 한국인은 심인

설을 중요시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원인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

.

 

건강을 해치는 다섯가지 요인을 양생오난이라고 하는데

一難은 명성이나 재물을 구하는 마음을 멸할 수 없는 것.

二難은 기쁘고 노여움을 제할 수 없는 것.

三難은 노래와 여색을 거절할 수 없는 것.

四難은 맛있고 살찐 음식을 거절 못하는 것.

五難은 근심걱정을 없앨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인의 양생법(건강법)은 마음을 곱고 편하게 갖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관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3. 신앙관리입니다.

 

33절을 보면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잠언 29:26을 보면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

니다.

시편 127:1을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

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진리를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

앙입니다.

제아무리 높은 빌딩이라도 그리고 제아무리 최고의 실내장식으로 꾸민 건

물이라도 기초가 흔들려 무너지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몸이 건강하고 돈을 많이 벌고 정신적으로 튼튼하다고

해도 영혼이 흔들리면 그 인생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유는

영혼이 인간의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매년 과로사로 생명을 잃는 사람이 3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주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은 고도반응의 사람들 - 민감한 반응의 사람들이며, 고독한 사람들이

, 까다로운 성미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스트레스를 덜 받느냐인데 그것은 느긋한 마음으로 운

동을 즐기고 생활을 즐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느긋한 마음은 신앙으로만 가능합니다.

스탠포드대학의 의과대학 교수인 케네스 펠레티어박사는 크게 성공한 남녀

51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는가를 연구했습니다. 그 가

운데 제일 많은 것이 기도를 한다는 것이었고, 다음이 정신이나 신체활동을

제어하는 생체자기제어(Biofeedback)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형상을 마음

에 떠올리는 심상화(Visualization)등이었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사는 방

법 역시 기도가 제일이라는 과학적 증명은 신앙의 힘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가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명체와 같기 때문에 관리를 잘 하면 살고 활성화되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시들고 죽게 됩니다.

내 신앙이 죽지 않고 산 믿음이 되려면

첫째,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떨어지거나 떠나면 죽

습니다.

둘째, 때를 따라 말씀으로 영양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셋째, 영적 건강 상태를 수시로 점검해야 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만이 건강한 교회와 사회와 국가를 만들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아를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감정과 마음과 신앙을 철저히 관리합시다. 아멘.

 

 

5

제목 : 은혜로 사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하나님의 은혜는 마른 땅을 적시는 여름날의

소낙비와 같다"고 했습니다. 만일 여름철 소낙비가 없다면 대지도, 초목도,

사람도 메말라 시들고 말 것입니다.

어떤 날 페르시아의 고레스(Kyros)황제가 친구 중 한 사람에게는 금메달을

걸어주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그때 금메달을 받은 사

람은 키스를 받은 사가을 몹씨 부러워했습니다. 이유는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에게 키스를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을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명예를 얻는 것도 나쁠 것은

없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총애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총애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 하나만으로도

일평생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4:32-37은 은혜받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소개해 줍니다. 그 모습

은 이상적 교회상이며 이상적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 내용을 구

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1. 한 마음 한 뜻이 됩니다.

 

4:32를 보면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라며 살고 있

는 부부도 한 마음 한 뜻이 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년 사이 이혼율이 5배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1970년도

말에 3만쌍이었던 것이 1993년에는 8만쌍으로 증가했습니다. 이혼의 사유는

부정행위, 학대, 직계존배속 학대, 악의에 찬 유기 등이 대부분입니다.

리고 이혼율은 매년 가속되고, 증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도 한 마음,

한 뜻이 되기가 어렵다는 실증인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의 함께 은혜받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감정, 의지, 사상, 생각이 집합된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부부가 하나되고 교회 공동체가 하나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은혜

를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사건 이전의 그들은 저마다 각각 놀던 사람들이었

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난 이후부터 마음과 뜻이 하나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세가지 안목이 열립니다.

 

첫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죄인이었던 나, 허물많은 나, 쓸모없는 나, 연약한 나를 제대로 보게 됩니

. 그리고 주의 은혜로 거듭난 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웃을 보게 됩니다.

이웃을 보면서 사랑을 나누고 통찰력있는 교제를 시작하게 됩니다.

셋째,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은혜를 못받으면 선악

과가 보이고 벌거벗은 수치가 보이게 됩니다.

 

일본인들은 [가다오까(KATAOKA)]를 중의원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네 차례나 일본 중의원 의장을 역임한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불신자였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날 안

개낀 철길을 건너다 기차에 치어 공중으로 튕겨 올랐습니다. 수십미터를 날

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모래밭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누가 나를 모래밭에 떨어져 살게 했을까

를 생각하다가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친데도

없었습니다. 그는 즉시 모래밭에 꿇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발로 교회를 찾아가 예술르 믿기 시작했고, 유학 후 일본으로

돌아와 정치에 투신 중의원 의장을 네번씩 역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고 문간에 서서 들어오는 교

인들의 신발(게다)을 정리하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리고 매 월말이면

자신이 직접 [아오끼] 목사님께 드리는 생활비를 봉투에 담고 리본을 매어

찾아와 무릎꿇고 드렸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은혜받은 산증거인 것입니다.

 

산산조각난 부부가 하나되려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회사가 잘 되려면

사장도, 사원도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교회가 잘 되려면 목사도, 교인도

함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은 은혜받고, 예수의

마음으로 변화될 때 가능해집니다.

 

2.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32절을 보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서로 통용했다는 것과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누는 삶이 가능합니다. 그리

고 헛된 욕심이 사라집니다. 소유는 전투적 과정과 절차를 거쳐서 이루어집

니다. 그러나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했

습니다(1:15).

사람은 나이가 들면 하루에 뇌세포가 10만개씩 소멸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의력도 기억력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월남전 당시 미군 포로들은 지옥같은 수용소에서 별로 할 일이 없었습니

. 그때 그들은 둘러 앉아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담뱃재로 만든 잉크로 성

경을 써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한 포로들은 모두가 기억력과 건

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인 물을 썩는 것처럼, 돈벌어서 나만 쓰고 나만 먹었던 부자는 한결같이

당대로 망했습니다. 그러나 나누며 산 부자들은 대를 이어 나갔습니다.

초대교회의 경우는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저희 교회는 세례문답할 때 십일조 여부를 반드시 묻습니다. 부부가 함께

세례를 받는 경우에도 부부에게 따로 질문을 합니다. "십일조를 하는가,

제부터 할 것인가"라고 십일조의 경우도 부부가 함께 은혜를 받아야 가능하

기 때문입니다.

부인은 하자는데 남편이 반대를 한다든지 부인은 교회가자는데, 남편은 놀

라가자면 신앙생활이 고달퍼집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나누는 삶을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고, 구경꾼도 없었고

빠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9:8을 보면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

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

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의 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넘치도록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받은 만큼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눌 때 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강하게 됩니다.

딤후 2:1을 보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은혜를 받은 사람과 나누는 사람과 은혜안에 사는 사람

은 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강하고,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부

자입니다.

둘째, 성장합니다.

베드로후서 3:18을 보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믿음과

지식이 자라갑니다. 은헤를 받아야 교회도 성장하고 회사도 기업도 직장도

자랍니다.

셋째, 더욱 풍성해 집니다.

나누면 작아지고 줄어든다고 믿는 것은 세상 경제원리입니다.그러나 나눌

수록 커지고 많아진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경제원리입니다.

 

경기침체와 불황으로 전 세계가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미국경제

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를 위해 이유야 어떻든 나누

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바로 그 나누는 정신과 신앙 때문에 미국이 복을 받

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대로인 것

입니다.

 

사도행전 5장으로 건너가면 나누기를 주저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웠던 아나

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적 최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부부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베드로를 속이고 성령을 속여려 하다가 한날 함께 죽었습니

.

칼빈은 아나니아의 죄를 여섯가지로 지적했습니다.

(1)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 (2) 성물을 거짓으로 바친 죄,(3) 허영심으로

바친 죄,(4) 거룩한 교회에 오점을 남긴 죄,(5) 불신앙의 죄,(6)외식의 죄

등입니다.

아무리 내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물질

, 시간도 재능도 함께 드리기로 한 것은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예수를 부활을 증거합니다.

 

33절을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여기서 부활을 증거한 사건과 큰 은혜가 동시적이었다는 점을 주목해

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이 증거되는 곳에는 큰 은혜가 넘친다는 뜻도 되고 큰

은혜가 넘치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왜 받아야 합니까?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초대교회 사도들은 큰 은혜를 받고난 후에 큰 소리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성령받고 예수의 부활을 전파했습니다.

음식을 먹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은 식도락입니다. 그러나 힘을 얻기 위해

음식을 먹고 일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음미하기 위해 은혜를 받는 것은 영적 사치입니다.

은헤는 예수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받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연쇄

적으로 일어난 사건들, 지존파 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건, 도시가스 폭발사

, 세금 포탈사건 등은 한강의 기적과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독일의 경우

는 라인강의 기적은 있었지만 우리나라 같은 패륜적이고 반사회적인 사건은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급걱한 사회변동에 대처할 올바

른 가최관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종교분포를 보면 기독교 25%,불교25%(물론 생전절에 한번도 안

가는 사람을 포함해), 유교, 무종교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매년 무당조

합에 연회비를 내는 무당만도 5만여명이 됩니다. 그리고 소위 유형문화재라

고 해서 나라돈으로 관리하고 지원하는 것들 가운데 80%가 불교사찰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방향도 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패륜도, 사치도,무법

, 사고도 세계 제일이라고 합니다.

서울대학의 윤이흠 교수는 절대가치를 이 민족과 사회 앞에 제시할 사회적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정치권도 아니다. 대학도 아니다.무당도 아니

. 종교 아니다. 바로 개신교다"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기독교만 유일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신앙이나 잡신앙

을 가진 종교는 유일한 가치나 진리를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생명을 믿습니다. 부활이 뭡니까?

다시 산다. 죽어도 다시 산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

.

희망의 종교라야 희망을 줄 수 있고 생명의 종교라야 생명을 줄 수 있고,

부활의 종교라야 부활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 길 막고 이 민족이 사는 길은 없습니다.

비내리는 땅은 푸른 초원, 녹음방초로 우거지고 비내리지 않는 땅은 사막

과 황토로 뒤덮여 있는 것처럼 은혜받은 나라, 교회, 가정이라야 푸르르고

기름지고 잘 살게 됩니다. 은혜로 삽시다.

 

 

7

제목 : 한인교회협 정기총회

자료원 : 한국컴퓨터선교회

발행일 : 950629

 

미장로교산하 한인교회협의회는 오는 81-4일까지 소망수양관에서 통

일기원대회 및 정기대회를 개최한다.

 

[자유를 공포하라]라는 주제아래 열릴 이번 대회는 한인교회협의회 소속

목회자 수백명이 참가한다.

 

이 대회에는 곽선희, 박종순목사, 송영대 장로(통일원차관)가 강사로 참

, 교회 및 정부의 관심사에 대해 강연한다.

 

 

8

제목 : 은혜와 삶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0326

 

은혜와 은혜 아닌 것, 은혜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

이도 없다면 구태여 은혤르 논할 필요도 없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 엄청난 차치

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은혜를 강조하고 있으며 은혜를 받으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은혜 베풀 때 너를 도

왔다","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라고 말씀하면서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도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은헤를 강조했습니다만 그 가운데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강조했습니다. 이유는 바울 자신이 풍성한 은혜

의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깨달은 사람과 체험한 사람들이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교훈을 찾겠습니다.

 

1. 은혜는 올바로 받아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

의 은헤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에 대하여 권면

하는 자신의 위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는 것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까 이 권면은 바울의 개인적 충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설교듣는 사람들이 지녀야 될 태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

님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케 합

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고 순종

해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편식방법과 태도로는 은헤받기가 어렵습니다. 본문

1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 뜻은 은헤의 가치를 알고 소중하게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은혜 자체는 금은보석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헤를 잘못 받으면

그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갱신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동안 유교전통과 문화를 지켜 나왔기 때문에 유교적

윤리와 도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유교윤리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삼강오륜]이 그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부모와

자식, 윗사람과 아랫사람, 부부간의 윤리가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높이

고 순종하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고 동양윤리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94년도에는 유학갔던 아들이 돌아와 돈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한 사

건으로 온 세상에 충격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 강단에서 학생

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버지를 살해함으로 더 큰 사회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부 언론은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더 큰 충격

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정말 기독교인이었다면 은혜를 체험

하고 거듭난 신자였다면 그런 일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1,200-1,500만이라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은혜를 모르고

교회만 들락거리는 사람들 속에는 도둑놈, 소매치기, 살인자, 불한당, 이중

생활하는 자, 그리고 어쩌면 살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

. 그러나 그들도 은혜를 제대로 받기만 하면 거듭나고 새사람되고 회개하

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니라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소프라노 성악가 김영미씨의 얘기는 감동적인

것입니다.

 

미국 L.A 에 있는 나성한인교회 김의환 목사님이 김영미씨에게 주일 2

예배에 와서 성가연주회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미국 대부분의 교회

는 저녁예배가 없거나 2시에 드리는 교회가 많습니다.

 

김영미씨의 대답은 주일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L.A

있는 제퍼슨 감리교회 성가대원인데 성가대원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빠질 수

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은혜받은 사람만 가능한 감동적 이야기입니다.

김영미씨의 성공은 그녀 자신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입니다만 그러나 주님

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그의 신앙과 책임감 때문이었으며 그것을 보신 하

나님께서 그녀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 저는 이 말 뜻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에게 자주 물었습니

. "엄마 어떻게 엉덩이에 뿔이 나?"라고 그때마다 제 어머님은'크면 알게

된다"라고 하셨고 "까불지 말라는 뜻이란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어머님의 대답은 명답이었습니다. 철들고 세상을 알면

서 그 뜻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뜻이 때론 떠오릅니다. 엉덩이에 뿔

나는 법은 없습니다. 뿔은 이마에 납니다.

만일 엉덩이에 뿔이 난다면 그것은 기형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장애물

이 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거나 잘못 받으면 기형아가 됩니다. 그리고 자

신의 삶을 망가뜨립니다.

 

서울시내 모 큰 교회 정문입구에는 그 교회가 꼭 사서 넣어야 할 건물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회 자체도 땅이 비좁거니와 그 땅을 사서 넣어야 교

회 전경도 드러나고 출입도 자유로워지는 건물입니다. 큰 교회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돈도 있습니다. 문제는 건물임자가 땅을 내놓지 않는 것입니

. 그런데 어느 해 그 건물을 팔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긴급히 당회

를 모였습니다.

 

그런데 당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결사반대를 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 이유

를 들이대면서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그 교

회는 그 건물을 사지 못했습니다. 그후 그 장로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

렸습니다. 들은 바대로는 그 분은 지금 미국에서 "내가 왜 그때 그렇게 반

대했는지 모르겠다"며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고집은 다릅니다. 내 고집을 강조하는 사람은 은혜받은 사람이 아

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주관과 고집과 죄악과 악습을 십자가에

못박고 꺽어 버립니다.

 

다른 얘기 하나를 더 하겠습니다.

서울에 있는 모 큰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교회 바로 뒷편에 붙어 잇는 500평 대지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성장이

나 미래를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매입해야 하는 땅입니다.

15년전 어느 날 평당 100만원에 팔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당회를 모였습

니다. 땅이 너무 비싸다며 한 사람이 한사코 반대를 하는 바람에 포기했습

니다. 7년이 지난후 5억에 팔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다시 모였습니다만

반대하던 그 사람 때문에 부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어느날 50억에 팔겠다는 연락을 받고 14년만에 50억에 샀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고집부렸던 그 사람은 교회에 세 가지 큰 손해를 주었

습니다.

첫째, 495천만원의 손해를 주었습니다. 첫번 기회에 반대를 안했다면 5

천만원에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성장을 14년 정지시켰습니다.

셋째, 긍정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일하려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신앙적 상

처를 주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바로 받으면 태도가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

고 신앙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헛되

이 받으면 다른 삼과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사울왕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

었습니다. 그는 은혜받고 예언을 하는가 하면 나라 정치를 잘했습니다.

러나 그 은혜를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헛되이 여기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외면하고 교만하기 시작하고 세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자 하나

님이 그를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자신도 그의 왕가도

몰락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그리고 바로 받아야 합니다. 부천의 영생교, 일본의

오음진리교, 그들이 표방한 것은 영생이고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

을 주저하지 않는 비영생, 비진리 집단이었습니다.

여러분, 부모도, 자식도,남편도, 아내도,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은혜를 받아 합니다.

 

2. 지금 받아야 합니다.

 

2절 끝을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라고 했습니다.

"보라"는 것은 은혜의 공개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은혜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란 숨쉬는 그 순간, 살아있는 이 찰라를 의미합니다. 이 순간.

찰라, 맥박이 뛰고 심장이 고동치고 손발이 움직이고 두 눈이 껌벅거리고

있는 이 순간이 지금입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

분히 종말적 긴박성이 강조되는 시간인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다음으로 미루면 안됩니다. 은혜를 덱토스라고

합니다. 그 뜻은 "입증된"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입증된 사건입니다. 두 번다시 그 효과를 물

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카이로라고 합니다. 그 뜻은 유쾌하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유쾌하고 행복합니다. 본문은 은혜와

구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결과를 구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은혜받아야 행복하고 유

쾌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은혜를 미루고 소홀히 취급할 생각입니까>

스코틀랜드에서 목회하던 어스킨(Erskine) 목사의 설교를 들은 스칼렛 부

인이 그 날 큰 은혜를 받고 깊은 감동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

일 그녀는 어스킨 목사의 설교를 들엇으나 은혜를 받지 못받았습니다. 스칼

렛은 목사님을 만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스킨의 댈바은 "지난 주에는

당신이 예수를 만나려고 왔기 때문에 신령한 은혜를 받았지만 오늘은 나를

보려고 왔기 때문에 은헤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의 출처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은헤를 주는 것입니

.

지금 은혜받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내일도 내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은혜를 받읍시다.

 


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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