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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잠언 29:18 2018.12.02 主日禮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29:18)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
 
20세기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문호文豪 솔제니친Aleksandr I. Solzhenitsyn,1918-2008을 한번쯤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련군에 자원 입대하여, 포병 장교로 참전하였습니다. 복무 중 친구에게 보낸 국가 최고지도자인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1879-1953을 비난하는 편지가 발각, 1945년부터 10년 동안 투옥되었습니다. 1962년 자신이 경험한, 제 노동 수용소의 비참한 현실을 다룬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One Day in the Life of Iban Denisobich를 연재하여, 작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됨과 동시에 소련정부로부터 큰 미움을 사기 시작하였습니다. 1968년 소설 암병동Rakovyi korpus연옥 1번지In the First Circle는 문학적으로는 물론 윤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소련의 잔학상을 폭로한 <수용소 군도>, 1973년 해외에서 발표되면서, 국외로 추방당했고, 소련이 붕괴한 뒤인, 1994년에 돌아오기까지, 21년간 이국에서 반체제 인사로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러시아의 양심으로 불렀습니다.
 
1918년 생인 솔제니친은 1917년 볼세비키 혁명Bolshevik Revolution으로 시작된 러시아 공산주의를 어려서부터 경험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러시아 공산 혁명사를 전공하고, 그 분야에 관한 저서를 8권이나 남겼습니다. 러시아 혁명에 관해 그는 최고의 권위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랬던 그가 공산주의를 비판하여, 조국에서 추방된 뒤, 망명생활 중이던 1983, 미국의 권위 있는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The Templeton Prize 수상 연설에서, 충격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20세기에 들어 와서, 5, 60년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6천만 명이 넘는 무고한 생명을 혁명이라는 구실아래 잔인하게 학살했는데, 솔제니친은 이런 가공할 만한 공산혁명이 왜 하필이면 러시아에서 일어났는가를 오랫동안 연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얻은 결론은 놀랍게도, 자기가 어릴 적에 어른들에게서, 엿들은 이야기와 꼭 일치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어른들은 어두운 방에 숨어서, 깊은 한숨을 지으며,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왜 러시아에서 피로 물든 이런 끔찍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일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야
 
지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1991년 해체되기 까지, 오 육십년 동안 육천 만 명이 넘는 안타까운 인명이 희생당한 원인을 솔제니친은 어린 시절, 러시아공산혁명이 시작 될 때, 들었던 어른들의 말에서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야”.
 
이것은 솔제니친의 체험만이 아니죠. 1945815 광복과 함께 삼팔선 북쪽을 통치한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1948년 조선인민민주의공화국을 수립한 후, 1950625일 감행한 북침은, 5,218,48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단군 이래 가장 크고 참혹한 비극을 낳았습니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공산주의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산주의가 한반도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193899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평양에 있는 서문밖교회에서, 27회 장로교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신사참배는 일왕에 대한 예지 우상숭배가 아니다며 가결하였습니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목회자와 장로 등 교회지도자 중 96페센트가 일왕 앞에 절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청년들을 일본군대로 어린 소녀들을 근로정신대로 보내는데, 일부 목사들이 앞장을 섰습니다.
 
신사참배를 주도했던 평양노회는 자 노회 지역인 평양이,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10년이 지난, 194899일 김일성 북한공산정권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10년이 지난 195899일엔 주민색출을 통해, 기독교도들을 조사하고 모든 교회를 폐쇄시켜 버렸습니다.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평양을 밝혔던, 600여개의 십자가는 내려졌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에 공산주의가 창궐하게 된 원인도, 동족상잔의 비극 625,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이와 같은 비극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민족의 역사로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지옥이 된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체험했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묵시‘Vision’으로 해석하여, 큰 꿈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경우도 있는데요. 묵시는 ‘Vision’보다 ‘Revelation’, ‘계시가 성경적인 뜻입니다. 계시는 비밀에 감추어졌던 것을 알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볼 수 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계시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것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망할 짓을 골라서 한다는 말입니다. 앞서 공산주의를 예로 들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성경이 없는 세상은 방자히 행함으로 지옥과 같은 망함이 있을 뿐입니다.
 
복 있는 사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방자히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는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본문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묵시가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하고, 그들이 있는 곳이 지옥이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고, 복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의 복에 대해서, 가장 잘 말씀하고 있는 성경 중 하나가, 시편 1편입니다. 다같이 시편 11-3절을 읽겠습니다.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1:1-3)
 
시편은 총 150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시와 노래를 담고 있습니다. 시편 150수 중, 73수를 다윗 왕이 썼는데요. 시편의 일편이자, 다윗의 첫 번째 시가 시편 1편입니다. 이 시편 1편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까?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십니다. 이 본문에서, 두 번 반복되고 있는, ‘율법은 하나님 말씀을 일컫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을 것이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십니다. 어디 이것이 전부입니까? 시편 16절에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에게, 왜 이런 은혜를 주십니까? 하나님 말씀이 곧 하나님이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시를 몰라 방자한 자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복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즐거워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있는 사람이 되려거든 첫 번째로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그냥 받는 것과,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는 고백으로 말씀을 받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119:103).
 
한 장로님의 고백입니다. 참 신실하신 분이신데요. 어느 정도 믿음이 좋으신지, 1970년대 경북 봉화 시골에 교회가 없는 동네에, 교회를 설립하신 분입니다. 처음에는 예배당이 없어, 시냇가 자갈 위에 앉아서, 또는 들 풀밭 위에 학생들을 앉혀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전도를 시작해서, 성도들이 모이자, 흙벽돌로 만든 자신의 초가 집, 방 하나를 예배당으로 사용했습니다. 조금씩 부흥을 하면서, 집 전체를 예배당으로 드렸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중에도, 자신은 주중에 직장을 다니는 평신도이기에 사역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교단에 목회자 파송을 요청했습니다. 그렇지만 버스도 하루에 한 두 번 밖에 다니지 않는 두메산골에, 오시려고 하는 목사님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가까스로 한 분이 섭외되었는데,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전도사님이었습니다. 아직 결혼도 안하신 미혼이셨고요. 삼십도 안 되신 젊으신 분이니, 늦게 자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보니 새벽기도회에 맞추어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스마트 폰이 있기에, 시간을 맞추어 놓고 자면 되지만, 당시에는 알람시계조차 귀할 때였습니다. 그래도 교역자이니 새벽기도를 인도하지 못하면, 연약한 성도들은 시험에 들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교회를 설립한 장로님은, 새벽기도회 시간보다, 한 참 이른 시간에 가서, 예배 10분전까지 전도사님 기척이 없으면, 깨워서 모시고 와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깨우는 장로님도 힘들도, 억지로 일어나야 하는 전도사님도 고달픈 것입니다. 한 날도 그렇게 해서 전도사님 일어 나셨는데요. 그 날은 전도사님이 여느 때보다, 더 힘들었는지, 의복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세면도 못하고, 눈곱도 못 띠고, 예배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님들도 그렇겠지만, 장로님 같은 경우, 그런 몰골로 선, 전도사님 설교에 은혜가 되겠어요. 인내하다 못해 화가 솟구쳐 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장로님 마음 가운데 저 전도사님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 말씀이지 아멘!”하는 순간 눈곱도 못 띤, 전도사님의 부스스한 얼굴과 대충 입은 옷매무시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 한 절 한 절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고 달더라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그냥 받는 것과, ‘꿀보다 더 다니이다는 심령으로 듣는 것은 신앙의 클래스Classs가 다르고, 퀄리티 Quality 가 다르고, 그레이드 Grade 가 다릅니다. “삼성이 만들면 다릅니다.” 명품을 만들자나요. 신앙의 명품은 말씀을 꿀보다 더 달다는 고백을 한 말씀을 즐거워하는데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열매가 다른 것입니다.
 
베다니 동네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은총을 듬뿍 받은 남매들입니다. 종종 이들의 집에 들르셨던 예수님은, 한 날도 사랑하는 친구라고 불렸던 나사로의 집을 찾았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할 음식을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 식사는 예수님 한 분만 아니라, 그와 동행한 제자들 것도 준비하여야 했기에 일손이 부족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동생 마리아는 눈치가 있는지 없는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만 집중하였습니다. 식사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는 참지 못하고,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고 간청을 합니다(10:40).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시면서,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10:41-42).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말씀을 듣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그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이지요.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을 드는 것을 즐거워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 까요? 예수님이 잡히시기 엿새 전 날,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들리셨습니다. 이 날도 마르다는 여전히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지극히 비싼 향유를 깨어,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습니다(12:3). 집안은 금새 향유 냄새로 가득찼습니다. 이를 지켜본 제자 가운데는 그 비싼 향유를 허비한다며,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나무라기도 하였습니다(12: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12:7).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엿새 전, 들린 나사로의 집에는 그의 누이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얼마 후면 십자가에 죽으심을 한 사람만 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구에요 맞습니다. 마리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안, 마리아는 비싼 향유 옥합을 깨어, 주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이를 본 예수님은 마리아만이 내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마태복음 261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이러한 은총을 받은 기인基因이 무엇이었습니까?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라고, 누가복음 1039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할 때, 주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에, 그의 행함이 증거되는 놀라운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은 귀하고 귀한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는 곳에,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되는 곳에, 청아비전교회의 거룩한 사역이 알려지는 곳에,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이름이 함께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그 무엇보다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면, 그러한 기회와 역사가 찾아 올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첫 번째로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요, 두 번째는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데 밤낮, ‘주야로 묵상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한다는 것이 하루 종일 성경 구절만 암송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범사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인도함을 기도하며, 성령님께 지금 상황에서,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말씀하여 주옵소서! 하는 겸허한 자세를 의미합니다.
 
다같이 베드로전서 123-25절을 읽습니다. “23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
 
우리가 거듭난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항상을 또 다른 표현으로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것은, 항상 있는 말씀, 세세토록 있는 말씀으로 된 것임으로, 우리는 말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팔구십 육체의 생명이 전부가 아니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받아먹어야 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것도, 예배 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 엄마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우리도 자녀를 키울 때, 모유수유를 했고요. 엄마 가슴에 안겨서, 젖을 빠는 아이의 모습, 그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이가, 엄마 젖을 먹고 먹고, 배가 다 차면, 어떻게 해요. “꺼억소리를 내고 입을 뗍니다. 저는 이와 같이, 엄마 젖을 먹고 먹고, 배가 다 차서, “꺼억소리를 낸 아이들과 같이, 청아비전교회 강단에서 신령한 양식이 성도들에게 공급되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렇게 말씀을 받아야, 평상시 어떤 상황에서, 주일에 주셨던 말씀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승리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영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받는데, 열심을 내라는 의미라고 가르쳐 드렸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을 살릴 수 있는, 영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시간을 내어서, 성경을 읽는 것 필요합니다. 요즘은 스마프 폰 어플을 통해, 성경을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편리함이 있습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보입니다.
 
시편 126절에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요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결함으로, 그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더러운 욕심을 버려 버리고, 순결하게 합니다. 단려한 은 같이 깨끗하게 합니다. 시편 198절에는 여호와의 계명을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여, 말씀을 받아먹는 자를 순결하고, ‘눈을 밝게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게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행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첫 번째로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요, 두 번째는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율법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찾아 본 두 가지,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묵상하는 자는, 말씀을 지키는 자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첫 장인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란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7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고 하셨습니다. 앞에 13절에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는 생략이 되었습니다. ! 227절에는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는 없고, ‘지키는 자의 복에 관해서만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말씀을 읽는 것과, 듣는 것이, 덜 중요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한 것과 같이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말씀을 읽는 것과, 듣는 것,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첫 장과 달리, 마지막 장에 지키는 자의 복만이 기록된 것은,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본을 보이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다같이 마태복음 2651-52절을 읽습니다.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순간, 베드로는 칼을 들어 대제사장 집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습니다. 이를 본 예수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꽅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53-54절입니다.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들을 물리치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시면, 로마 군대로 1개 군단이 6,000명가량입니다. 그러면 열두 군단은 72,000명입니다. 천사 72,000명을 내려오게 하셔서, 무리들을 물리 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시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심이 성경의 예언을, 지키기 위함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19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군병들은 예수님이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미 1천 년 전 성경에 예언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2218절을 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1천 여 년 전, 시편 기자가 예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앞 절을 볼까요? 시편 2214-17절입니다.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까지도 이미 예언되었고, 그대로 예수님이 당하셨습니다. 시편 221절에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226절에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1293절에는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채찍에 예수임의 등이 밭고랑처럼 패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모진 고통이, 그대로 예언되었고, 이 모든 고난을 예수님은 몸소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계셨고, 그 고초가 얼마나 크고, 치욕과 모멸을 당해야 함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모르고 죽을 수는 있지만, 알고는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 아셨음에도 왜 피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이, 예언된 하나님 말씀을 지키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떠한 지경에서도 지켜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Saviour & Role Model, 우리의 구원자이요 모범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성경의 예언을 응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같이 빌립보서 28-11절을 읽겠습니다.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다 행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높이셨습니까?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아멘!
 
시편 30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라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가 끝아 아닙니다. 스올은 죽음과 지옥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움과 지옥에 갇히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나를 살리사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을 예언한 성경 또한 예수님은 모르실 리가 없지요.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죽지 않습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죽음도 막아 설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히브리서 1138절에 말씀합니다.
 
정리
 
러시아의 대 문호 솔제니친의 체험한, 6천 만 명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러시아공산혁명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 발발한 625전쟁의 원인이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우상숭배를 통한, 하나님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배웠습니다. 오늘 분문에 이에 대하여 묵시, Revelation, 계시,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망할 짓을 골라서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인은 물론 이 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1.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첫 번째는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그냥 받는 것과, ‘꿀보다 더 다니이다는 고백으로 말씀을 받는 것은, 신앙의 클래스가 다르고, 퀄리티가 다르며, 그레이드가 다르게 됩니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열매가 다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리아의 예를 말씀 드렸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오시면, 주님의 발 자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가장 좋은 편으로 택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사모한, 마리아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장례를 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에, 마리아가 기억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자, 즐거워하는 자,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의 이름과 함께 기억되는, 위대한 역사에 쓰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첫 번째로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요, 두 번째는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인도함을 기도하며, 성령님께 지금 상황에서,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말씀하여 주옵소서! 하는 겸허한 자세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받아먹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받아야, 평상시 어떤 상황에서, 주일에 주셨던 말씀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승리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시간을 내어서, 성경을 읽는 것 필요합니다. 요즘은 스마프 폰 어플을 통해, 성경을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편리함이 있습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보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첫 번째로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요, 두 번째는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첫 장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는, ‘지키는 자의 복만이 기로된 것은,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 누가 아닌 우리의 구원자시오. 모범자이신 예수님이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분은 죽음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요. 죽음을 아신 분이요. 그 죽음도 평범한 죽음이 아니라, 가장 큰 고통과 모욕을 꺾어야 하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담당하신 것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행한 예수님을 하나님은 가장 높이셨습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존귀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죽음만이 아니라. 삼일 후 부활을 예언한 성경 또한 예수님은 모르실 리가 없지요.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죽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이런 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방자히 행합니다. 우리는 망하는 자가 아니라 복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 자입니다. 2018년 마지막 달인, 12월의 첫째 주 모인 성도 여러분! 12월은 응답의 달입니다.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고, 지키는 자가 되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는 응답으로, 2018년을 결산하시기를, 12월 응답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