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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2019년 3월 24일 주일예배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2019년 3월 24일 주일예배
                               요한복음 13 : 31 - 38  ;  잠언 15 : 17


국수와 참기름이 싸우다 국수가 경찰서에 잡혀갔습니다. 왜? '참기름이 고소해서'. 이어서 참기름도 끌려갔습니다. 왜 끌려갔을까요? '국수가 다 불어서' 구경하던 김밥도 잡혀갔습니다. 왜? '말려들어서'. 덩달아 달걀도 잡혀갔습니다. 왜? '후라이쳐서'. 재수 없게 꽈배기도 걸려들었습니다. 어떻게? '일이 꼬여서'. 아이스크림이 경찰서로 면회 가다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왜? '차가 와서'. 이 소식을 듣고 수프가 졸도했습니다. 왜? '국물이 쫄아서'.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간장과 소금 때문이랍니다. 왜? '간장과 소금이 짜서'. 그런데 고구마가 해결했습니다. 어떻게? '구워삶아서'. 이렇게 풀린 일을 식초가 망쳤습니다. 왜? '초 쳐서'. 처음 국수와 참기름이 잘 어울렸더라면 모두가 잘 섞여 맛있는 비빔국수가 됐을 것을 싸우다가 모두 망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함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이 말씀에 따라 세워진 처음교회는 그 사랑으로 인해 유무 상통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에서부터 좋은 소문이 퍼져 나날이 교회가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사랑을 경험고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까지 증언합니다. 오늘 교회와 사회의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란 책의 저자인 방송작가 미치 앨봄은 하루 수백 통의 전화와, 비행기 타기 위해 백 미터 달리기하는 생활의 연속, 5초 전에 방송원고 종결하는 생활이 연속되면서 일 중독에 빠져 비인간화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교 은사인 모리 교수가 몸이 서서히 힘을 잃어 가는 루게릭에 걸린 사실을 알고, 매주 화요일마다 모리 교수를 찾아갑니다. 모리 교수는 자기가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을 수용하며, 제자 미치에게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이야기합니다. 모리는 근육에 힘이 빠지면서 이제 목욕이나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없어 모든 문제를 주위에서 해결해줘야 합니다. 그때 모리 교수는 제자에게 자기 몸을 맡기고,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면서 자유를 누립니다. 어느 날 휠체어에 앉아 발의 고통 때문에 제자에게 그 발을 마사지해달라고 하여, 미치는 그의 발을 주무릅니다. 그때 모리 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갓난아기로 태어났을 때,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지. 그리고 우리가 죽어갈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중간기간, 갓난아기와 죽어 가는 중간에 우리는 사실 서로를 더 필요로 해.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돼. 그렇지 않으면 죽게돼." 이 말이 죽어 가는 사람이 마지막 깨달음을 전하는 유언으로 새겨집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땅에서 살아가며 서로 돌보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 밤,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세족식을 하고 나서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13:21절)고 하시자 가룟 유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갑니다. 방안은 잠시 활기를 띄었지만 이어 주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에(33절) 다시 어두워집니다.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려는 시기심으로 보이지 않는 치열한 대립과 갈등이 있었고,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으로 서로 의심하며, 주님이 떠난다고 하시자 외로움과 불안에 떱니다. 이런 제자들을 아시고 주님은 저들을 위로하시며,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저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려고 일치와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여기서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는 계명도 있는데, 어떻게 이런 형제 사랑이 새 계명이 될까요? 그 이유는 옛 계명의 '이웃 사랑'은 인간적인 범주 내에서의 사랑인데 비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예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 것'에 기초한 신적인 기원에서 비롯된 사랑이기에 이것이 새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마지막 유언처럼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간곡히 말씀하실까요? 첫째, 제자들의 일치와 결속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앞에 있는 3절입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요13:3). 주님은 곧 십자가에서 죽어 하늘나라로 가시면 제자들만 남게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두고 가실 제자들을 생각하니 무엇보다 저희끼리 다투고 분열할까 염려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7)라고 말씀드리자,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막10:41)라고 했던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성도들 간에 다투게 하여 서로 싸우다가 모두 흩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분열로 몸살을 앓던 당시 영국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상하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 할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니...."어느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의 분쟁이 대법원까지 올라왔는데 그 판결을 맡은 사람이 불교 신자였는데, 그가 볼 때 서로 화해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는데 대법원까지 올라온 것을 보고 놀랐답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듣기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끼리는 절대로 화해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어디 한번 끝까지 열심히 싸워봅시다." 불교신자인 대법관의 그 말에 두 사람은 큰 충격을 받고 그 즉시 화해했다고 합니다. 외부의 박해는 차라리 견디기 쉽지만,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은 성도들 간에 서로 미워하고 다툴 때, 서로 상처를 입고 흩어져버리기에, 마귀는 이것을 노려서 성도들 간에 어떻게든 사랑하지 못하도록 이간질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갈등하게 합니다.


둘째, 저들이 장차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역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됨은 '서로 사랑함'을 통해서 입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도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기 위한 화목제물이 되기 위함인데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할 제자들이 서로 싸우고 다툰다면,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신뢰와 감동을 줄 수 있겠습니까?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말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된 유일한 표지이다." 주님은 "너희가 성경을 갖고 다니거나 찬송가를 잘 부르면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지 않고 '서로 사랑해야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서만 참된 그리스도인임이 증거됩니다.


리빙스턴의 전기 작가가 리빙스턴의 일생을 취재하려고 아프리카에 가서 리빙스턴을 접촉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리빙스턴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설교를 했습니까? 리빙스턴이 어떤 일을 한 것이 제일 감동적이었습니까?" 그 중에 한 사람의 이런 대답이 작가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리빙스턴이 무슨 설교를 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를 기억합니다. 리빙스턴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진정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입니다.


셋째,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13:36). 제자들은 지금 서로 사랑하고 있지 못했기에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예수님도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예수님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 안에 있고,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거룩한 사랑을 계시하면서, 그 사랑의 증인으로 우리를 불러 우리를 통해서 이 사랑이 증거되기를 원하십니다.


'인디언의 사도'인 영국인 존 엘리엇(1604-90)은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인물로, 인디언 말에 능통했고, 인디언어로 성경을 완역한 인물입니다. 그가 노후에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이제 나는 노쇠하여 기억력도 상실하고 판단력도 약해지고 건강도 잃고 가족도 잃고 듣는 힘도 보는 힘도 말하는 능력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 마음에 사랑만은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마지막 보화입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듯,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을 약속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겸허하게 비우고 사랑의 영으로 가득히 채워야 합니다.


주님은 말세의 징조는 무엇보다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0-12). 이 시대 위기는 경제나 자원의 고갈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고갈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세상이 업신여기고 함부로 짓밟는 것도 사실은 우리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전도가 어려운 것도 사실은 우리 안에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쇠약해진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길도 사랑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그러면 주님은 저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그 사랑의 대상과 조건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거의가 조건이 있습니다. '네가 예쁘게 생겼으니까, 네가 돈이 많으니까, 네가 똑똑하고 좋은 학벌을 가지고 있으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니까', 등등...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성숙의 구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치할 때는 내가 사랑 받으니까 남을 사랑한다. 그러나 성숙하게 되면 내가 사랑하여 비로소 사랑을 받는다." 성숙한 사랑은 사랑하는 것이 먼저이고, 사랑 받는 것이 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치한 사람은 그 사랑하는 동기가 "I love you, because I need you." "내가 너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며, 필요가 사랑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성숙한 사람은 "I need you, because I love you."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내게 필요하다" 입니다. 내가 필요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현재 조건은 좋지 않지만, 미래에 네가 공부 잘해서 성공할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 갑부가 될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 권력을 잡을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입학을 앞둔 자식을 사랑할 때, 자기도 모르게 이런 사랑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의 어떤 높은 지위에 있는 분이 자식에게 동경대학에 입학하라는 압력을 주었는데, 그 아들이 그만 동경대 입학시험에서 낙방했습니다. 그러자 너무 실망해서 사창가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동경대에 떨어진 것도 가문의 수치인데 창녀에게까지 갔느냐고 두들겨 팼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가출했고, 부모는 얼마 후 경찰서에서 "당신 아들이 자살했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미래 조건의 사랑이 사랑하는 자식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선택하셨고, 그토록 문제가 많았지만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명의 제자들의 신분과 성격들을 보면, 본래부터 똑똑하고 훌륭한 제자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비난하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욕을 했습니다. 주님은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11:19)라고 말씀했습니다. 실제로 주님은 세리의 집에서 함께 식사도 하셨고(마9:9-13), 수가성에선 남편이 다섯이었던 여자와 긴 시간 대화도 하셨습니다(요4:). 주님은 베드로가 얼마 후에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할 것을 아시면서도 이런 한심한 제자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저들을 사랑하시는데 아무런 조건과 자격을 따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사람들은 상대방이 내 맘에 들 땐 사랑하고, 내 맘에 들지 않으면 미워합니다. 누가 그를 칭찬하면 함께 칭찬하다가, 누가 그를 비난하면 같이 비난합니다. 그러나 참된 친구는 누가 그를 비난해도 끝까지 그의 편이 됩니다. 함석헌 선생의 시 [그런 사람 가졌는가?]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욕해도,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하며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이 참된 친구인데, 이런 신의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걸어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다고 밀 이삭을 잘라먹자 바리새인들로부터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마12:2)며 비난합니다. 이런 경우 보통 사람은 "미안합니다. 내가 제자들을 잘 못 가르쳐서 그랬나본데, 앞으로는 주의시키겠습니다"라고 말할텐데, 주님은 제자들 편을 드십니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12:3-5). 제자들에게도 문제가 없지 않은데, 주님은 제자들을 감싸주십니다. 실수와 문제 많았던 제자들의 부족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저들을 사랑하시고 끝까지 믿어주셨더니, 후에 저들은 모두 순교하기까지 주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셋째, 주님은 추상적이고 감상적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라고 말했지만, 그 밤에 주님이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까지 아무 일도 안 했습니다. 주님이 수건을 두르고 자기 앞에 오시니까 그때에야 미안한 듯,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요13:6, 8)라고 거절했을 뿐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 해 놓고는, 실제로 예수님이 그를 필요로 하실 때는 아무 일도 안 했고, 십자가를 지실 때도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막에서 명상하는 수도승에게 거지가 말합니다. "배고픈데 먹을 것 좀 주시오." 수도승은 대답지 않았습니다. "배고파 쓰러질 것 같습니다." "귀찮게 하지말고 저 도시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해요. 지금 깊이 명상하는 게 안 보입니까? 천사와 막 대화가 될 것 같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 앞에 자신을 낮추시고 발까지 씻어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돌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거지는 갑자기 천사로 변해 그곳을 떠났습니다.


넷째, 주님은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주님은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해야할 줄 알면서도 여기에 실패하는 것은 희생 없이 사랑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손해보지 않고, 어려움 안 당하고 사랑하려하니 어떤 사랑이 이뤄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세상이 악하다'는 비난의 목청만 높이지 않으시고, 친히 세상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랑의 척도는 그에 대한 희생에 비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고, 또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5세기에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은 로마남부의 도시 '놀라'를 공격하여 마을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습니다. 그러자 이 지역의 주교 파울리누스는 전 재산을 털어 값을 치르고 주민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가 주교를 찾아와 노예로 잡혀간 자신의 외아들을 구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주교는 자신을 과부의 외아들과 맞바꾸기 위해 반달족을 찾아가 대신 노예가 되었습니다. 파울리누스의 성실함에 호감을 느낀 반달족의 왕이 알아보니 그가 명망 높은 주교임을 알고 감동하여 그와 함께 노예로 삼은 마을 주민을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주민을 지키려고 파울리누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미국의 '세븐일레븐' 체인스토어에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우 추운 어느 겨울 날, 세븐일레븐 본사에서 파견된 서비스 감독관이 가게를 돌아보며 '오늘 같은 날은 손님이 별로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상대로 손님은 많지 않았는데 산마루에 있는 세븐일레븐 가게에는 의외로 손님이 많았습니다. 그 가게를 관찰하던 감독관은 계산대의 여직원이 친절하고 상냥하게 손님을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지, 서비스가 중요하지'라고 생각하는데, 한 노인이 가게에 들어왔습니다. 초라해 보이는 노인은 가게 안을 돌더니 바나나 한 개를 집었습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이 다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계산대에 바나나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직원은 노인의 이름을 부르며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을 물은 뒤, 바나나 한 개를 정성껏 포장해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밖에까지 나와 노인을 끌어안으며 힘내라고 말한 뒤 "내일 또 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지켜보던 서비스 감독관은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말했습니다. "맞아, 저 노인은 바나나를 사러 온 것이 아니야. 저 노인은 사랑을 사러왔어." 그 후 세븐일레븐의 매니저 교육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아주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물건만 팔아서는 안 됩니다. 물건을 파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도가 중요하지만, 단순히 복음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도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에 목말라 있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함으로써 우리는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얻기 위해 우리를 만나고 싶어합니다.


"세상에는 그 누구도 다른 이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부유한 자도 없고, 다른 이에게 사랑을 나눠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자도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웃고 떠들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엔 모두 아픔이 있고 상처와 고독이 있습니다. 이 슬픔 많은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경제나 교육이나 기술이나 오락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톨스토이의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속에 머무를 것이다." 하나님은 가슴으로 임하십니다. 편견과 이기심으로 탐욕과 육욕으로 우리의 마음을 닫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 때에 누구나 거룩한 사랑으로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는 말씀처럼 우리가 천국에 가기까진 '많은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환난과, 슬픔이 많은 세상이기에, 우리는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위로와 격려를 나눠야합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7).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