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결심" 2019년 3월 31일 주일예배
누가복음 9 : 51 - 62 잠언 4 : 25 - 27
동양에선 홀수는 양수(陽數)로, 짝수는 음수(陰數)로 여겨, 술을 마셔도 한잔이나, 세 잔, 다섯 잔 등, 홀수로 마시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술을 꼭 짝수로 마시기에 곁에서 누가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술을 대체로 홀수로 마시는데, 어째서 당신은 꼭 짝수로 마십니까?" 그러자 대답이, 자기 친구가 술을 너무 좋아하여 술을 마시다가 죽으면서 유언하길 "너 술 마실 때마다 꼭 내 술까지 마셔다오"라고 하여, 그 친구 술까지 마시느라 짝수로 술을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 사람이 술을 홀수로 마시기에 이유를 묻자 대답이 "난 술을 끊었다"고 말하더랍니다. 자기는 결심하여 술을 안 마시고 친구 술만 마신다고 합니다.
201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차이나 패션쇼 런웨이에 바지만 입은 남성 모델의 당당한 워킹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운동으로 단련된 대흉근과 단단한 복근, 군살 없는 몸매에 사람들은 감탄했습니다. 그 모델이 흰머리와 흰 수염을 휘날리는 80세 노인이었기에 더욱 감탄했습니다. 이 할아버지 왕 데슌(王德順) 씨는 많은 역경을 겪었습니다. 14살에 돈벌기 위해 전차운전사로 일하다 배우의 꿈을 품고 20대에 연극배우를 시작하고, 40대에 마임극단을 설립하고, 50대에 빈손으로 베이징에 가면서부터 몸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후에 하루도 운동을 중단한 적이 없었습니다. 57세에 세계 유일의 '살아있는 조각 공연'을 창안해 공연하였고, 79세에 드디어 런웨이에 올라 첫 워킹을 선보였습니다. 상의를 벗고 30년 가량 정성을 쏟아 만든 근육질 몸매를 과시한 그의 워킹은 대성공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그는 패션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늙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전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도전할 수 있느냐고 자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날을 위해 60년을 준비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집념, 그것의 인생 드라마입니다. 누구나 뚜렷한 결심과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노력만 있다면 어떤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도 끝내 이뤄내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들에게는 남과 다른 선천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시카고대학의 교육학 교수인 벤저민 블룸이 5년 동안 120명의 최고 예술가, 운동선수, 학자들을 대상으로 성공 DNA를 연구한 결과 그들에게서는 뛰어난 선천적인 재능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과감한 결단성'과 '불굴의 추진력'이라는 공통점이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성공 DNA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추진력, 즉 '실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결심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 51절은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눅9:51)고 했습니다.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온 유월절에는 12세 이상 이스라엘 남자들은 '율법의 아들'로서,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명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어릴 적부터 유월절이나 오순절, 수장절에는 예루살렘에 가서 명절을 지키셨기에, 지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새삼스러울 게 없는데, 성경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 '굳게 결심했다'는 말은 "...으로 얼굴을 향했다"는 셈어(Semitic)의 표현으로 마음을 굳게 정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선 이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습니다(요7:1).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심각한 얼굴을 하시고, 비상한 결심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얼마 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고난과 죽음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신 것은 이곳에서 겪게 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내다보셨기에 결연한 의지로 십자가를 향한 결심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최초로 십자가의 수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라고 말씀하심으로,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신 것은, 곧 죽음을 향해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둘째,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고 성령의 역사가 이뤄지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하시며 이곳에 성령이 임하실 것이고, 그래서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별칭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교회의 세속화를 경계하면서 "예루살렘이 아테네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교회의 순결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셋째, 예루살렘은 고난받는 교회가 승리하게 될 장차 완성될 천국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보면 마지막 때에 이 땅에서 많은 환난과 박해의 시련이 끝난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천국의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2). 여기서 예루살렘은 이 땅에 완성될 천국의 모습으로서, 새로운 천국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천국의 모형이요, 고난과 박해를 통해 끝내 이루어질 승리의 나라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상한 결심을 하신 것은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최초로 십자가의 수난에 대해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고서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16:21). 그런데, 지금 다시 굳게 결심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고난이 얼마나 큰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결심하신 예수님은 생각의 결심으로만 그치지 아니하시고, 발을 옮겨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게 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이 유대 왕이 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줄 알고 그곳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자,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4)라고 하니,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길로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로 한번 결심하신 후엔 다른 사람들이 오해를 하건, 비난을 하건 괘념치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향해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자의 자세에 대해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 의미를 알고 그 대가를 치러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눅9:57)고 아뢰자 예수님은 그를 향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9:58)라고 거절하듯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도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는 예수님의 권능에 매력을 느끼고, 그토록 많은 권능을 행하시는 분을 수행하는 제자들에게 부러움을 느껴,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저 신나고 재미있는 일로만 생각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을 자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이 지원자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시고, 이런 허영심을 가지고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뿐더러, 도리어 여우나 새 같은 짐승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할 수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의 의미와 성격을 알고 행하는 것과 모르고 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7)하고 부탁드리자.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10:38)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영광만 생각하고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을 것을 부탁드렸지만,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치러야 할 고난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1948년에 소명을 받고는 수도사로서의 복장을 벗어버리고 캘커타의 빈민가로 떠나는데, 그는 가면서 이런 확신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오늘밤 저는 어디에서 잠을 자야할지 모르고 떠납니다. 내일 아침 저는 어디에서 먹어야될지 모르고 떠납니다. 저는 이 한 벌 옷이 헤어지면 무슨 옷을 입을지 모르고 떠납니다. 주께서 떠나라하시기에 저는 떠날 뿐이오니, 주님 제 인생 길에 함께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하여 그는 오 척 단신의 연약한 여자 몸으로도 50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믿고 일했더니, 전 세계가 놀랄 만한 거대한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을 결코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비단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때로 거친 가시밭길이요, 메마른 사막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의 길이기에 우리는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저 예루살렘을 향해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들도 어떤 고난을 무릅쓰고 걸어가야만 합니다.
둘째는, 최우선적인 일에 대한 선택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 가시면서 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자, 그 사람이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눅9:59)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9:60)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례 치르는 일은 율법을 공부하는 일이나, 성전예배, 유월절제사, 할례시행보다도 우선권을 가졌는데, 이 말씀의 뜻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는 의미로, 세상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의 일을 최고 우선순위에 두어 세상의 무가치한 일로 하나님의 일을 지연하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마태는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에, '예!'하고 가타부타 군말 없이 선뜻 따랐으나 이 사람은 예수님께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그 소중한 말씀을 듣고도, '그러나…'하며 다음 기회로 미룸으로 주님의 사도가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그 귀한 반열에 참여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때로는 '무엇을 우선시 해야 할 것이냐'하는 문제에 대한 냉철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눅9;60)고 말씀하십니다. 간디는 "유능한 소방수는 끄지 못할 불에 물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링컨은 늘 과격하게 언쟁을 일삼는 한 젊은이에게 이런 충고를 하였습니다. "뜻을 높이 세우고 결심한 사람이라면 사사로운 언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법이네.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성격을 더럽히고 자제력을 잃게 하는 결과를 감수하는 짓은 피하지." 간디나 링컨만큼 극한의 탄압과 위기 속에서 살면서도 주어진 책무를 다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지혜는 불필요한 곳에 값진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열린다 성경]의 저자 류모세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고난을 선택한 모세를 묵상하고 "그래, 나도 모세처럼 살자. 어차피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주님께 내 인생을 온전히 드리자"여, 한의사로서의 삶을 내려놓고 선교 단체에서 사역자로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이 결단을 하자 나를 짓누르던 마음의 번민과 갈등은 사라지고 하늘의 평강과 위로와 확신이 임했다. 그런데 내 앞에는 반드시 건너야 할 홍해와 같은 문제는 이런 나의 결정을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이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아버지에게 졸업을 앞둔 아들이 한의사가 아닌 복음전도자가 되겠다고 말한다면,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충분히 예상되었다. 아버지는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힘없는 목소리로 물으셨다. 그동안 내가 선교단체에 완전히 빠져 산 것을 아시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염려하시는 것 같아 나는 아버지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은근히 돌려서 말했다. "아버지, 아무래도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내 말의 뜻을 정확히 아시고 이튿날 아무 말씀도 없이 집을 나가셨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우리 가족은 실종 신고를 심각하게 고려했는데 아버지가 무척 초췌하고 몇 날 며칠을 못 드시고 못 주무신 모습으로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들 없는 셈치겠다. 네 인생이니 네가 원하는 대로해라." 아버지는 일주일간의 고뇌와 번민 끝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으셨다. 심지어 아버지는 내게 차라리 정식으로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신 아버지는 거의 자포자기하신 듯했다. 아버지는 그동안 나를 집에서 쫓아내기도 하고, 등록금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하기도 하셨고, 선교단체를 직접 찾아가 리더십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하셨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께 붙잡힌 아들을 꺾을 수 없었고, 결국 아버지가 염려했던 최악의 상황인 아들이 한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복음전도자가 되겠다는 폭탄선언에 망연자실해져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 것이었다. 그 날 밤, 나는 밤새 뒤척이며 한없이 흐느꼈다. 자식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아야 하는 아버지의 심적 고통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가기로 확정한 복음전도자의 길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잠 못 이루며 번민의 시간을 보내던 순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나를 찾아오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예수님을 믿어도 누구나 이렇게 살지는 않지만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우리도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내 안에 부르심의 소망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더욱 새롭게 부어주셨다.
셋째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그 목표에만 집중하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 또 다른 사람이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9:61)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9:62)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 시인 헤시오드(Hesiod)의 시에 나오는 격언으로, 쟁기로 밭가는 자의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인데, 다른 데 신경 쓰며 돌아보면, 고랑은 곧게 될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을 좇는 자도 분명한 목적을 망각해선 안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쉽게 나약해지고, 흔들리는 까닭은 무엇보다 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단 없이 쉽게 믿으려 하기에, 작은 어려움에도 흔들리고 낙심합니다. 뜻을 세우는 것이 결심인데, 믿음에도 분명히 뜻을 세워야합니다. 뜻이 없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간 됨은 그가 품은 뜻에 의해 평가됩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뜻을 품은 사람이고, 거룩한 사람은 거룩한 뜻을 지닌 사람입니다. 언제나 먹을 것이나, 성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며 산다면 그는 짐승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결심을 해야합니다.
1776년 7월 4일에 필라델피아에서 채택된 미국독립선언문에 서명한 56명은 그들 자신과 가족들이 많은 고난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이들 중 5명은 영국군에게 잡혀 고문으로 죽었고, 12명은 그들 집이 약탈당하고 불탔습니다. 9명은 전투하다 상처를 입거나 전사했습니다. 버지니아에서 사업과 농장을 경영하던 카터 클랙스톤은 자기 선박들이 모두 영국군에게 격침 당하고, 집을 팔아 빚을 갚은 후에 가난하게 살다 죽었습니다.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의 장군 콘월리스는 독립선언문 서명자인 토마스 넬슨의 집을 영국군 사령부로 사용하자, 넬슨은 워싱턴 장군에게 자기 집을 공격하라고 부탁하여 그의 집은 파괴되고, 그는 파산하여 죽었습니다. 56명의 자녀 중 2명은 독립전쟁에서 전사했고, 2명은 포로 되었습니다.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C.S. 루이스의 [악마의 편지]는 사탄의 전략을 보여주는 얘기입니다. 영국에서 존경받는 한 노신사가 도서실에서 기독교서적을 읽다 감동을 받고 '나도 이젠 제대로 신앙생활 해야해. 내 인생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해야지.' 이런 진지한 생각을 하다 갑자기 '점심시간이 됐는데,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그래서 식당에서 밥을 먹습니다. 식사를 하니 식곤증이 오며 생각이 달라집니다.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이 나이에 내가 뭘 유별나게 인생의 길을 바꾸나?' 이런 생각을 하며 점심 먹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에 오는데, 악마는 이 노신사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짖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감동도 받았는데, 집에 갈 때는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거지...' 합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도적처럼 닥칠 인생의 종말을 어떻게 맞을까요?
한 성공한 기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29세의 나이에 커다란 저택과 250만 평의 토지를 소유하고, 호숫가의 별장과 호화로운 보트, 최고급 승용차를 소유하는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힘든 유년시절을 보낸 그에겐 오로지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는 그 많은 재산에 만족치 않고, 돈 모으는 재미에 빠져 아내와 두 아이의 얼굴을 볼 시간조차 없이 일만하며 지냈습니다. 결국, 그의 아내는 결혼 5년 만에 별거를 요구했습니다. 자신의 욕망만 생각하고 남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난날을 곰곰이 돌아보았습니다. '도대체 무얼 위해 그토록 정신 없이 뛰었던 것일까?' 결국, 돈 때문에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아내에게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인생을 설계하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는 유년시절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한 노부부의 허름한 집을 고쳐주며 뿌듯해하던 아버지와, 너무도 고마워한 노부부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진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여 '국제 해비타트'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백만장자의 삶을 버리고 집이 필요한 이들에게 직접 망치를 들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면서, 세계 100개 지부에서 100만 채 이상의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망치로 사랑의 나비효과를 만들다가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밀러드 풀러입니다. 하루하루 정신 없이 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뛰어가고 있는 것일까?' 진정 어떻게 사는 삶이 후회 없는 삶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육신만을 위해, 자신만을 위해, 그리고 이 세상만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언젠가 영원한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합니다.
저는 세례문답할 때 꼭 이런 당부를 합니다. "오늘 세례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것을 꼭 지키십시오. 첫째, 꼭 주일성수 하십시오. 한 주간 첫날을 예배로 시작해야 생활이 안정되고 질서가 있습니다. 둘째, 꼭 십일조 생활하십시오. 십일조는 열 중에 하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기보다, 열 중에 아홉을 받는 것으로, 성실히 십일조하면 물질로 시험받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매일 성경을 읽으십시오. 날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이 정도 결심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말했습니다. "어제 맨 끈은 오늘 허술해지기 쉽고, 내일은 풀어지기 쉽기 때문에 날마다 다시 끈을 매어야하는 것처럼, 사람도 그 결심한 일을 나날이 거듭 여미어야 변하지 않는 것이다."
잠언서 말씀입니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4:25-27). 저 영원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마음의 결심을 굳게 하고 꾸준히 앞을 향해 전진해나갑시다. 주님이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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