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거지 근성을 버려라
마가복음10:46~52
2008년 9월 28일 장안중앙교회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설교:
북한의 속담 중에 “가난과 거지는 사촌 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가난이 극에 이르면 결국에 가서는 얻어먹으러 나서는 길밖에 없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한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 당한다고 하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 말은 가난 한 사람은 아무리 도와주어도 그 가난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어떤 인류학자가 연구한 논문에 보면 가난도 하나의 문화라고 말했답니다. 아무리 도와주고 가르쳐 주어도 그 가난을 벗어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다 거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지가 되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게을러서 거지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게으른자는 반드시 가난해지고 결국 거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2)거지가 편해서 거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체나 정신이 멀쩡합니다. 그런데도 거지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 IMF 때 노숙자로 살았던 사람들 중에 아직도 노숙자로 사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처음에 노숙자가 될 때는 너무 창피하고 부끄럽고 힘들었는데 그 생활을 몇 달 해보니 그처럼 맘 편한 것도 없답니다. 걱정할 것이 없고 신경 쓸 것도 없고 하다 보니 그 생활이 익숙해 졌을 뿐 아니라 재미가 든 것입니다. 거지의 생활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는 환경적인 요인이 있습니다.
육체적 장애나 연로하거나 근로의 능력이 없어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바디매오처럼 신체적 장애가 대표적입니다. 그밖에도 일을 할 수 없는 요인으로 인해 거지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신앙인들 속에도 영적 거지가 있습니다.
이른바 거지 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1)늘 받기를 좋아하고, 2)늘 달라고 하고, 3)그러면서도 받은 것이나 누리는 것에 대해 감사가 없는 신앙생활이 그것입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거지 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고 있고, 자신의 신앙생활이 거지 신앙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거지의식의 신앙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이른바 영적 거지는 어떤 사람일까요?
1)먼저는 당연히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줄 압니다.
나는 가난하니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려워”, “나는 제일 가난해” 하면서 하나님이 당연히 도와 주셔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믿음이 참 좋은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실상 영적 거지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에도 그것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 문제입니다.
2) 둘째는 받아도, 받아도 늘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춥고 배고프다는 것입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내 것이 작아 보입니다. 그러니 욕심이 가득하고 탐심이 가득합니다.
어쩌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안주시면 “어찌하여 내게~~ 어찌하여~~” 하면서 원망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그러면서 옛날이 좋았다고 합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이런 사람이 영적인 거지입니다.
3) 셋째는 베풀 줄을 모릅니다.
받을 줄은 아는데 그것을 나눌 줄은 모릅니다. 내가 가난하니 나는 도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거지의 특징은 오직 자기만 생각합니다.
남들을 생각지 못하고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생각지 못합니다. 그러니 헌신도 없고 감사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영적 거지가 아닌 영적 부자가 되길 축원합니다.
문제는 이런 거지의식이 겉으로 멀쩡한 성도들 속에도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에 한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이것이 남의 이야기 인가요?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성도는 신분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 머릿속에 자녀가 아닌 거지의식이 들어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정신문제요. 가치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신앙 속에 거지 근성을 버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몇 주 전에도 살펴본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다시금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각으로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잘 알듯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 바디메오는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거지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는 육신으로는 소경이고 거지였으나 오늘 본문의 사건 이후로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각 장애인으로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거지 생활은 어찌 보면 거의 운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이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가 그 거지의 삶을 벗어 버리고 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됩니다.
우리 중에 두 눈을 멀쩡하게 뜨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거지 신앙, 구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면 심령 깊은 곳에 거지의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있다면 이 시간이 문제 해결을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을 누구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디메오가 어릴 때부터 소경이었듯이 세상 모든 사람은 원래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종노릇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육의 눈으로 불수 없는 세계가 어마어마한 영적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상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소경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계는 어떻게 볼 수 있나요?
예수님을 누구로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 우리를 죄에서 해방 시킬 수 있는 유일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움을 물리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밝게 볼 수 있게 하시는 빛, 그분이 주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을 보세요.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렇습니다. 그가 우리의 소경의 눈을 밝히 보게 하시는 참 빛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영접하면 그 빛을 받아드리는 것이고 그 빛을 받아 드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부여한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누군지 올바로 알지 못하면 아직도 소경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소경인줄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육신의 소경이 되었으나 주님이 누군지 알게 됨으로 눈이 떴습니다.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영의 눈이 이미 뜨였습니다. 사람들이 길 지나다니면서 한마디씩 던져준 쪽지 복음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소경을 고쳤데”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레” “나사렛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렸데”
이 모든 소식이 쪽 복음입니다. 그것들이 바디메오의 귀에 간간히 들려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쪽지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그게 복음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눈으로는 못 보나 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눈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들어야 합니다. 들어야만 눈이 열립니다.
바울도 사울로 살 때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잘못 알았을 때는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갈 때 비로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그가 질문합니다. 주여, 뉘십니까?
그때 주님이 말합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때서 그가 자기가 소경이었던 것이 깨달아 졌습니다. 그때서 그가 세상을 바로 봅니다. 그때서야 그가 영적 세계를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눈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셨습니까? 그래야만 영적 소경에서 해방되고 그래야만 거지 의식을 벗어 버리고 살게 됩니다.
요12:44~46도 보세요.
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주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빛으로 왔고 주님을 믿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만나야 영적 소경도 아니고 영적 거지도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은 누굽니까? 그 예수님을 바르게 보시길 바랍니다.
2.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사는 일생 동안에 수많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회를 어떻게 잡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는 소경입니다. 거지입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길가에서 “한 푼 줍쇼” 구걸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기회로 잡았습니다. 그것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47절~48절을 보세요.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지릅니다. 어디 한번 만 했겠습니까? 두 번 세 번 소리를 지릅니다.
사람들이 제제 합니다. 잠잠하라, 시끄럽다 조용히 하라고 제재합니다. 그런데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어졌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관심을 갖고 그를 불러오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앞에 기회가 찾아 왔다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을 만날 기회, 은혜를 받을 기회, 복을 주실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그 기회를 어떻게 대합니까?
“다음에 하지 뭐”, “내일 하지”,“하나님 뜻이라면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뭐” 하고 흘려버리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직은 때가 안 되었을 거야!”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어!” 하면서 다음으로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일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만이 내시간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기회를 놓치면 내일의 기회도 날라 가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다음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년에 하겠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이 눈앞에 있는데 “기도해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부교역자를 면접할 때 면접에 맘이 들면 그 사람에게 물어 봅니다. “우리 교회에서 쓰신다면 오실 수 있습니까?” 그럴 때 “기도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저는 그 사람을 안 씁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서 면접했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서 일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제서 기도해 보겠다는 말은 계산 좀 해보겠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기회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우리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현재만이 내 시간입니다. 아니 이 현재 시간도 놓치면 내시간이 아닙니다.
기회도 그렇습니다. 기회라는 것은 현재를 잡을 때 미래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형편 핑계, 환경 핑계하지 마세요. 그것 앞세워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핑계하지 말아야 한다.
마귀는 우리에게 과거를 보게 하고 “너는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 행위나 우리의 현재 상태를 보지 않고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기에 내 능력 보지 마시고 내 형편 보지 마시고 주어진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행위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현재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여러분도 주님 만날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제발 은혜 받을 시간과 장소를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맞아 죽을 상황이라도 결단하고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만약 바디매오가 다음 기회를 생각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면 그는 일평생 소경이었을 것입니다. 그 길은 예수님이 여리고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영적 거지에서 벗어나려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거지 신앙을 버리려면 중대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일사각오입니다. 목숨을 걸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기회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는 이미 하나님이 허락하셨던 기회가 수없이 많이 흘러갔을 것입니다. 문제는 기회라는 것을 놓치면 절대로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얼마나 중요한 기회였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 기회가 내게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회사에 신입사원들이 선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사장님이 신입 사원들 중에 자기 측근에 두고 일을 할 사람을 고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력서나 학력이나 그런 것으로 뽑지 않고 신입사원들이 출근할 때의 모습을 cctv로 하나하나 지켜보는 가운데 치뤘습니다.
첫째는 출근 시간을 보는 것이고 둘째는 회사 입구 현관 부근에 구겨진 종이 휴지를 부러 놓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원들이 늦게 출근하고 시간에 매여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그 휴지 조각을 보지 못하고 뛰어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일찍 출근한 한 사원은 즐거운 마음으로 회사에 도착합니다. 그리고는 회사 입구의 수위들과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들어서다가 바닥에 휴지조각을 발견합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주워 휴지통에 넣고 사무실로 들어갑니다. 회사 사장은 그가 누군가를 확인합니다. 그리고는 그를 비서실로 특채하여 썼답니다.
그런데 모든 사원들이 그 사실을 모릅니다. 오직 그 사장과 입구의 수위 한사람만이 그것을 압니다.
그것이 기회인줄 알았다면 늦을 사람 아무도 없고 그것이 시험인줄 알았다면 다 주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회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3.믿음의 신앙고백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가 누린 축복의 비법은 이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보지 않았고 다윗의 자손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은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불러 오라 하시고는 또 하나를 물어 보십니다.
51~52절을 보세요.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하십니다. 바디매오가 뭐라 대답합니까?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간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요구는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믿지 않으면 절대로 고백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주님을 감동시킨 대답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믿음대로 합당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합당한 믿음 고백을 하는 사람을 결코 그냥 두질 않습니다. 보세요.
백부장의 믿음 고백을 기뻐하시고 그 하인을 낫게 하신 주님,
마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듣고 그를 제자로 삼고 위대한 인물로 들어 쓰신 하나님,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다윗이 골리앗과 전쟁할 때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골리앗을 쓸어 뜨려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삼상17:45을 보세요.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나님은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간구하면 응답하시되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왜 바디매오는 어떻게 눈이 떴나요?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그에 합당한 간구를 드렸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은 주님을 절대감동으로 몰라 넣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뭐라 하십니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결국 그는 그 자리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그는 영의 눈이 열린 상태이므로 부르짖었고 결국 육신의 눈도 뜨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이런 사람을 영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하고 믿음으로 구할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보이는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그 고백으로 여러분의 거지 근성이 날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주님도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바로 여러분 눈앞에 계십니다. 그분을 향해 소리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똑바로 보시고 그리고 내게 찾아 온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마시고 믿음의 고백으로 주님을 감동시키는 성도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제는 한푼 줍쇼가 아닙니다. 거지근성은 벗어 버리고 믿음으로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의 거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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