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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부르고 계십니다. 삼상3:1~10

하나님이 부르고 계십니다.

삼상3:1~10

2008년 9월 21일 장안중앙교회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설교: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있을때 가장 위험한 일은 계기판에 고장이 나는 경우랍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위험한 일은 지상 관제탑과 교신이 끊기는 것이랍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항공기 사고의 상당 부분이 교신이 잘못된 경우입니다. 계기판에 이상이 있더라도 관제탑으로부터 정확한 정보와 지시를 받을 수만 있다면 항로와 위치에 대해 정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안전 운항과 착륙이 가능하답니다. 그러나 교신이 끊어지면 정말 치명적입니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망망한 하늘에서 얼마나 당황스럽고, 난감하겠습니까? 그래서 교신이 끊기지 않던지, 아니면 계기판이 정상이면 항공기는 운항이 가능하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살이도 이와 똑같다고 생각됩니다.

인생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불확실성’ 혹은 ‘불예측성’ 아닙니까?

내 인생이 내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할 때가 허다합니다.

중요한 순간일수록 그렇습니다. 어떻게 결정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과 해야 되나?, 아니면 저 사람과 해야 하나?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 해야 되나? 나중에 해야 되나?, 어떤 업종을 택해야 되나?, 누구하고 손잡고 하나?, 그렇지요?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또 대학에 진학을 해야 되는데 어느 대학에 가야 되나?, 전공은 뭐로 해야 되나?,  정말 고민이 됩니다.

그렇다고 침을 튀겨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가자니 그렇고... 그러니 사람들이 너무 너무 답답하여 점쟁이한테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 믿는 성도들도 찾아간답니다. 정말 정신 나간 신자들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막막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라기는 하나님의 음성에 들을 수 있는 영적 교신이 끊기지 않고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절대로 여러분의 감을 믿지 마시고 영적계기판인 성경을 보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어린 시절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면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거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무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존경받고 살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제사장 “엘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웠습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없는 그런 나이였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아들들이 제사장이 되었는데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느라 성전을 지키지도 않습니다. 결국 친아들이 아닌 어린 사무엘이 마치 친 손자처럼 정성을 다해서 성전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금쪽같은 내 새끼라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면 그 자녀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식이 육신의 자식만이 아닌 영적 계승이 이루어지는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가 육신의 자녀만 되고 영적인 자녀가 되지 못한다면 엘리의 자식들처럼 불행하게 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식들 때문에 아버지에게도 화가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 제사장을 보세요. 신앙적으로 문제를 갖고 있는 두 아들 때문에 자신도 목이 부러져 죽고 자식들도 전쟁터에서 하루 한 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물론 자식들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 책임이 더 큰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과는 핏줄로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지만, 마치 엘리의 자식처럼 자라면서 정성을 다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사무엘처럼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고 여러분의 자녀들도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어 쓰임 받는 영적 자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뭐가 있어야 할까요?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실까요?

1. 성전에서 하나님을 즐겁게 섬겨야 합니다.

1~3절을 보세요.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사무엘의 성공 비법은 어린 나이 때부터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의 모친 한나가 하나님과 약속한대로 젖을 뗀 나이의 사무엘을 성전에서 수종들며 살도록 바쳤습니다. 그러기에 사무엘은 우리 나이로 3~4세 유아 때부터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종을 섬기며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기대한 것도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도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매일 청소하고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그는 심령이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보아도 봉사하는 사람의 마음은 정결합니다.

그 심령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봉사를 하려기보다는 봉사를 받으려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은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이 엘리나 그 아들들에게 말씀하지 않고 그 어린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일까요? 오늘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우리가 추축해 볼 수 있는 것은 사무엘은 성전을 수종드는 것이 재미있고 행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즐겨하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무엘은 어린 나이에 성전일이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 일이 즐겁지 않았다면 그는 엄마 보고 싶다고 벌써 도망쳤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즐겁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또 성전에서 잠자는 것도 재미있었던 것입니다. 재미가 있으면 야곱처럼 칠년이 수일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전에서 살다보니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특별히 자기 처소에 누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사장이 거하는 숙소가 따로 있습니다. 엘리는 제사장인 고로 마땅히 이 성전 안에 가장 중요한 성막 가까운 곳에 처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은 성전을 지켜야 할 후계자들입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러기에 늙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마땅히 성전에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 성전에 있지 않았습니다.

왜요? 재미가 없었습니다. 따분하고 지겨웠던 것입니다. 그러니 도망친 것입니다. 

그 자리를 어린 사무엘이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드리는 것이 재미있습니까? 설교를 듣는 것이 재미있습니까? 봉사하는 것이 즐겁습니까? 그렇게 되길 축원합니다. 혹시 지겹고 따분하고 합니까?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은 성전에 사는 것이 너무 좋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자녀들도 이렇게 되길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어딜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이들 마음의 중심에 뭐가 있습니까? 바라기는 학교가 중심이고 가정이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이 삶의 중심이 되길 축원합니다. 


시편 1편의 말씀처럼 복이 있는 사람“악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고 불의한 자와 함께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에 사무엘이 엘리의 아들들과 어울렸다면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그 마음과 행동을 바르게 보시고 그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하기 위해 나타나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마음에 끌리는 구절이 있습니다.

3절입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기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당시 제사장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엘리 아들들은 방탕해서 제사 드리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성전의 등불은 저녁에 켜서 아침까지 두었습니다. 이는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뜻했습니다.

그 일은 엘리의 아들들이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사무엘이 그 등불을 관리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만나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전을 존중히 여기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가 바로 사무엘이고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성전에 등불은 기도의 불이라 생각합니다. 성전에서 기도의 등불을 끄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도,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도 성전에서 등불을 끄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게 됩니다.


2.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4~5절을 보세요.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데도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지를 몰랐습니다.

그 말은 아직 그런 경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성을 듣고는 엘리 선생님에게 달려가서 말합니다. “나를 부르셨습니까? 내가 여기 있습니다.”

“아니,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가서 도로 누워라” 이것이 세 번 반복됩니다.

그제서 엘리가 깨닫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구나!”

엘리도 오랫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기에 감각이 둔한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는 아주 중요한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지 않고 사무엘에게 나타나고 있구나!” 시기 질투를 하거나 사무엘을 야단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가르쳐 줍니다. “다시 부르거든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렇게 말하라”라고 가르쳐 줍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엘리에게 말하지 않고 사무엘에게 말하셨을까요?

여러 가지로 추축해 볼 수 있습니다. 엘리의 영적 감각이 둔했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고 자식의 범죄를 제대로 처리 하지 않은 그에게 실망을 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삼상3장 13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13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엘리의 아들들의 범죄에 대해 이미 말했고 그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아들들에게 아무런 징계도 안하고 그들의 범죄를 막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그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요? 그는 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들을 귀”란 단지 듣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듣고 실천할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들을 귀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소서.” 이 말 뒤에는 “무슨 말씀이든지 듣겠습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시행하겠습니다.” 바로 실천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말씀해 보세요.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곧 시행하겠습니다.” 이러한 결단, 이러한 헌신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사무엘을 보세요.

그는 부르는 음성을 세 번이나 듣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못들은 척 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 그 어린 아이가 얼마나 귀찮겠습니까? 한번, 두 번 갔는데 안 불렀답니다. 그러니 세 번째는 이불 뒤집어쓰고 그냥 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도 동일하게 움직이고 엘리 앞에 대령합니다.

세 번째서야 엘리가 가르쳐 주어 깨닫고 반응을 새롭게 합니다.


저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사무엘의 자세입니다.

그는 자기의 육신의 편함을 추구하지 않는 사무엘입니다. 세 번씩 반복되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부름에 반응합니다. 그게 열정이고 순종이고 겸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고집’이라 표현해서 하나님께 송구하지만 하나님의 고집은 사람이 못 당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못 알아들어도 계속 부르십니다. 결국 네 번째에서 응답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몇 번 부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열 번, 어떤 이는 백번, 어떤 이는 수백 번도 더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3번이 아니라 10번도 100번도 부르십니다. 언제까지요? 알아들을 때까지... 할렐루야!

그러나 중요한 것은 들을 귀가 없으면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 번 만에 사무엘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응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소서.” 그래서 하나님과 일대일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사무엘처럼 들으려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종들을 통해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8절~9절을 보세요.

8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식별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엘리 제사장이 먼저 깨닫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서려면,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들으려면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영적 도우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 여러 곳을 살펴보면 어렵고 힘든 시대일수록 영적 도우미를 세워서 사용하십니다. 선지자, 교사, 사도, 교사, 오늘날의 목사 전도사……. 이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도우미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오려면 혼자는 잘 안됩니다. 영적인 것이기에 누군가가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곳곳에, 그리고 그때그때 세우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말씀 앞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과 만나는 일은 더 더욱이 그렀습니다. 분명히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이게 사람의 소리인지 하나님의 음성인지 그는 그것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아야 했습니다.

신약시대도 그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을 왔다가 돌아가면서 마차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가 성경은 읽고 가지만 깨닫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빌립에게 명령합니다. 광야로 속히 가라는 것입니다. 그가 순종하여 가보니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가까이 가서 읽고 있는 성경의 뜻을 아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가르쳐 주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알겠냐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독학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왜요? 영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훌륭한 대답입니다.


가르쳐 주는 자가 없다면 깨닫기 힘이 듭니다. 기도하면서 읽어도 잘 모르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하고 부지런히 배우라고 합니다.

그래서 빌립이 병거에 올라타고 같이 가면서 성경을 풀어서 해석을 합니다. 해석의 요점은 이사야 성경에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했단 말입니다. 

결과는 그 내시가 깨닫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세례까지 받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가서 교회를 세우고 그 나라가 복음을 받아들여 아프리카 최초의 복음 국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매우 중요합니다. 가르쳐 주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도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수많은 제자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혹시나 나는 누구의 가르침도 필요 없다고 한다거나 나는 성경을 다 알았다거나 하면 그것은 교만이고 착각입니다. 

말씀의 가르침은 죽을 때까지입니다. 세상 학문도 배워야 하지만 영적인 진리는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어느 목사님은 저보다 연세가 많고 목회도 잘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제게 수시로 전화합니다. 그리고 목회에 대해, 성경에 대해 물어봅니다. 그래서 내가 되레 여쭈어 봅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것을 왜 내게 물어봅니까?”

그분 하시는 말씀이 “제가 잘 몰라서요. 한수 배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을 존경합니다.


목사가 남에게 배운다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가르침 받아야 합니다. 목사도 배워야 하고요. 여러분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좋은 스승을 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 충만한 교회, 모두가 방언을 하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감격해 하는 바로 그 초대교회, 바로 그것에도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가르침 받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항상 모였고 항상 떡을 뗐고 그리고 항상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무엘도 비록 눈이 어둡고 시원찮은 늙은 스승이지만, 자식 교육 제대로 못해 비참한 상황을 만든 스승이지만 그 스승의 지도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문제는 내 마음이 성전에 있지 않고 세상에 있거나 들을 귀가 없어서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국입니다. 그리고 배우지 않아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에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따라 합시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 하옵소서”/


기도합시다.  (통성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