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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마태복음(송수천)

(제4강) 예언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 (마 2:13-23)

(제4강)   예언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 (마 2:13-23)

 

  어떤 부부가 싸움을 잘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얼마나 사나운지 싸울 때마다 이깁니다. 한번은 싸우다가 부인이 남편의 머리 한 줌을 뽑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머리 한쪽이 훤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날 일이고 엄청난 일입니까?
  그런데도 이 남편이 꾹 참고 인내를 합니다. 굉장한 인내입니다. 그러다가 슬며시 나가더니 머리를 모두 깎아 삭발을 하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무사하게 후유증 없이 넘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둘 중에 한 사람이 그렇게 노력을 하면 화목해지는 것입니다. /할/
  또 어떤 가난한 부부가 사는데 이웃집에서 매일 같이 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하루는 견디다 못한 이 가난한 집 부인이 남편을 향해서 '나는 저 갈비 냄새 때문에 미치겠다'고 화를 냈습니다. 이 말은 '돈을 못 벌어 온다.'는 넋두리입니다.
  세상의 남자들은 이런 말에 매우 약합니다. 그래서 부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그런 말을 삼가야 합니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에 남편들의 마음이 상하게 하고 자존심을 망가뜨리고 맙니다.
  그 말을 들은 이 가난한 집 남편이 슬그머니 나가더니 마스크를 하나 사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아내가 생각하니 어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쓰면 냄새가 안 들어오느냐?'고 소리를 칩니다. 그랬더니 이 남편이 또 나가더니 이번에는 방독면을 사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둘이 웃음으로써 위기를 넘겼다고 합니다. 마음이 엄청 넓은 남편입니다.
  여러분, 둘이 서로 맞붙어 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감정의 골만 깊어갑니다. 그러므로 둘 중에 한 사람이 십자가를 져야 화목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있는 곳에 화평이 있고 구원이 있고 화해가 있는 것입니다. /믿/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인데도 사람과 화목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있는 곳에 화평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주위에 왜 화평이 없습니까? 모두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려고만 하지 서로 지려 고는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축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십자가를 지는 성도들이 됩시다! 억울함이 있을 때 누군가가 참고 인내하고 십자가를 지면 화목은 분명히 찾아옵니다. '가화만사성'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믿/할/ ◀제목 소개!▶

 

  ▶오늘 본문은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⑴13-15절은 아기 예수님의 애굽으로 피난을 다룬 기사입니다.
  ⑵16-18절은 헤롯의 베들레헴 지방의 갓난아이들을 죽이는 학살사건입니다.
  ⑶19-25절까지는 헤롯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사렛 동네로 돌아오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은 4복음서 중에 유독 마태복음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행9장을 보면 예수님을 심히 핍박했던 사울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홀연히 빛이 나타나서 그를 둘러 비췄습니다. 그 순간 땅에 엎드러진 사울에게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때 충격을 받은 사울이 '주여! 뉘시오니이까?'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십니다. 바로 그 순간이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는 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예수 만나면 핍박자 사울이 바울이 되듯이 변화가 됩니다. /아멘!/
  본문을 기록한 마태도 레위지파에서 태어났으나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 동족들에게 지탄을 받는 매국노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고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야말로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동방박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또 하나의 사실은 예수님이 온 인류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약속의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인류의 참된 왕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고 특별히 레위지파에서 태어난 마태는 구약을 믿고 있는 정통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요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심은 구약예언의 성취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태는 마2장에서 네 번씩이나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사건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미5:2절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구약 미가서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미5: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두 번째는 호11:1절을 인용합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예수님이 어렸을 때에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했고, 거기서 다시 나온 것이 호세아서의 예언의 성취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16-18절의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게 될 것이 라마의 통곡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의 응답이라고 렘31:15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렘31:15절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네 번째는 사11:1절을 들어 애굽에서 다시 나오게 된 예수님이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나사렛으로 가는 것도 구약 예언의 응답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사렛 예수'로 불리게 됩니다.
  사11: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요1:45-51절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이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반응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사렛은 거룩한 예루살렘도 아니요 또한 예수께서 메시야로 탄생하기로 예언되어 있었던 베들레헴도 아니고 그야말로 상업의 도시요 환락의 도시요 죄가 많고 허물 많기로 유명해서 종교적으로 특히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나타낼 만한 자랑할 만한 도시가 아니고 오히려 부끄러운 그런 저질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의 대답이 나사렛 같은 곳에서는 '의로운 자가 나실 수가 없다' 라는 뜻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했던 겁니다.
  구약성경은 어렵습니다. 사11;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가지가 나서 결실할 자'라고 했는데 2절에 '그가 누구인가'를 설명했는데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사11:2절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이 말씀이 바로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마2:23절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 그런데 나사렛이란 지명은 구약에 나오지 않습니다. 후에 생긴 도시인데 나사렛의 뜻이 '줄기에서 난 싹'이 나사렛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나사렛 동네는 사11:1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동네 이름이 되었습니다.
  구약은 수없이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을 보면서 이것을 빨리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관한 예언과 기록은 실체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로 모형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고전13:12절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구약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봐야 합니다. 구약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신약을 통해서 구약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구약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한 역사가 아니고 구약의 역사는 나와 상관이 있고, 나의 구원의 가장 기초가 되는 말씀임을 새삼스럽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예언의 성취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①13-1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신하는 사건입니다. 마태는 이 사건을 호11:1절의 응답으로 이해합니다.
  ▶13-15절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피난을 가셔야만 할 이유는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가도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며, 또 이 일이 있을 것에 대하여 구약성경 호11:1절에서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호11:1에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주전 570년경의 선지자였으므로 그는 약 750년 이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애굽으로 가시게 될 것'을 예언하였고, 그 예언은 예수님이 피난하시는 형편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호11:1절의 뜻은 '하나님이 430년 간 애굽에서 고난과 고통 속에 살던 이스라엘을 광야 40년 세월을 거처 가나안 땅으로 불러낸 사실을 잊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소흘이 하고 있다'고 경고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중에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처럼 하나님이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는 그 '불러내셨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애굽에서 나오실 것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광야 시절 때나 예수님 때나 그 백성들의 어리석은 마찬가지입니다.
  요1: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고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기 왕국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빛 되신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인류가 사단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사단이 헤롯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박해한 것입니다.
  13절 "저희가 떠난 후에" 누구를 떠났습니까?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에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꿈을 통해 나타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고 하신 말씀을 의미합니다. 
  베들레헴에서 애굽까지는 약 1500마일이나 됩니다. 갓난아이와 산모를 데리고 수천 마일을 피난 가는 것은 참으로 무리한 일입니다. 첩첩산중, 험악한 광야 길을 걸어서 애굽으로 피난하는 일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주의 사자의 지시를 따라 곧 순종합니다.
  여기서 동방박사의 순종보다 요셉의 순종이 더욱 빛이 납니다. 동방박사의 경우는 단순하게 다른 길을 돌아가 버리면 되는 것이지만 요셉의 경우는 이제 출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와 산모들 데리고 고국 이스라엘을 떠나 외국으로 피난 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나 무슨 일이나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입니다. /믿/
  주의 사자의 지시는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는 내용입니다. 헤롯이 주후 2년에 죽기까지(19절) 약 6년 간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특별섭리를 베푸셔서 예수님을 보호하셨으며 이와 같은 보호와 인도는 모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는 완벽합니다,
  시121:1-8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할/

  ▶요셉의 순종의 모습을 보자(14)!
  ⑴애굽으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정든 고향, 정든 친구들을 떠나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베들레헴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은 큰 결심과 결단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도 마찬가지엿습니다. 창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⑵피하여: 순종에는 즉각적인 행동이 요구되고 순발력이 요구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오늘 해야 할 것은 내일로 미루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믿/
  ⑶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자의 자세는 항상 다음 지시를 기다려야 합니다. /할/
  ⑷거기 있으라: 명령을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참으로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상15:22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을 들어서 쓰시며, 축복하시며 일하십니다. /믿/ 성경은 순종하는 자에게 따르는 축복으로 가득합니다.
  신1:36절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신28:2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렘26:13절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그렇습니다.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난 가실 때 두 번의 위험한 고비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피난 가던 도중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강도가 그들을 죽이고 보따리를 빼앗으려고 하는데 그때 강도의 우두머리 격인 '다스마스'에게 어떤 힘이 나타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과 그의 양친에게 조금도 해를 가하지 못하게 되었고, 아기 예수께 말하기를 '최고의 축복은 받은 자여! 나에게 자비를 베풀 때가 이르면 나를 기억하여 주소서! 그리고 이 시간을 잊지 마옵소서' 간구 했답니다.
  그런데 그 강도두목이 후에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으며 결국 십자가상에서 예수로부터 용서를 구원 받은 우편 강도라는 것입니다. 이 우편 강도가 바로 아기 예수를 구원해준 강도 두목 '다스마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전설은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난 가던 도중 저녁이 되어 몹시 피곤한지라 어디에서 쉬고자 할 때 마침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 쉬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바람이 세차게 불어 동굴 안이 너무 추웠습니다. 이때 동굴 속의 거미 한 마리가 이 모습을 보고 '내가 이 추운 날 아기 예수를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급히 동굴 입구로 나가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아기 예수님이 잡아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헤롯 군대가 이 동굴 앞에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조장 격인 한 군인이 '혹시 여기 숨었는지 모르니 수색하라!'고 하자, 한 병사가 뛰어가 동굴 입구를 보더니 '여기 거미줄 좀 보십시오, 사람이 들어갔다면 이 거미줄은 걷고 들어갔을 텐데 거미줄이 삼 겹이나 쳐 잇는 것을 보니 이 속에는 사람이 없는 게 분명해요!' 그럽니다. 그리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전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성탄절 트리에 금실 은실을 치는 것이 이러한 전설에 기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의 사자는 요셉에게 명령을 할 때에 '네 아들, 네 아내'라 하지 않고 '아기와 그의 모친'이라 함으로 요셉과의 관계를 멀게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또 마리아는 그의 몸을 낳았으므로 '아기와 그 모친'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사람의 예대로(눅3:23) 호적상 분명한 일이기 때문이며, 또 그때까지는 마리아와의 완전한 부부가 되지 않은 상태임을 잘 나타내신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아기 예수가 애굽으로 피난하신 이유는 성령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주께서' 호11: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예정과 섭리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본문 속에서 몇 가지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⑴하나님이 아기 예수를 보호하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위기와 절망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십니다. /할/
  우리에게 작은 위기가 있는 것은 큰 위기를 막기 위해서요, 작은 고통이 있는 것은 큰 고통을 예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섭리입니다.
  ⑵애굽으로 피난 가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교훈은 하나님은 필요하실 때는 꿈으로 역사하시고, 천사를 사용하셔서 급한 위기를 극복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천사는 돕는 이웃을 표현한 말입니다.
  ⑶뭐니뭐니해도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할/

 

  ②16-18절까지는 렘31:15절의 성취로 베들레헴의 통곡소립니다.
  ▶16-18절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  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헤롯이 하룻밤을 지나도록 기다려 봤으나 동방박사들이 오지 않자 속은 줄을 알고 심히 화가 났습니다. 헤롯이 무엇을 부탁했는가? 7-8절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예수님을 찾는데 있어서 박사들이 제일 열심이고 그 다음에 헤롯왕이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관심이 큰 것입니다. 헤롯이 박사들에게 아기 예수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주면 헤롯 자신도 가서 예수님께 경배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겉으로는 경배하겠다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거짓되고 악랄한 수법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먼저도 말씀드렸지만 헤롯은 성품이 잔악하여 죽이는 일에는 노련한 사람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대인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을 없애기 위해 300만의 위원들을 살해했고, 첫째 부인에게서 낳은 후계자로 주목받던 아들을 살해하였고, 둘째 부인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부인과 두 아들을 살해하였습니다.
  헤롯은 아내와 자식마저도 자신의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되면 가차없이 살해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유대 나라에 2살 이하의 사내아이는 모두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충분히 그렇게 할 잔인한 임금입니다.
  그 당시에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리리 돼지가 낫다' 하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얼마 있지 않아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마을의 유지들을 다 잡아다 감옥에 넣어라! 그리고 내가 죽거든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온 나라에 곡하는 소리가 들리게 하여 온 국민의 '나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하는구나'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헤롯이 죽은 뒤에 이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잔악 무도한 헤롯이기에 어린이들을 학살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는 한 살 아래 아이로서는 만족하지 못하여 두 살까지의 아이에게까지 학살 영을 내렸습니다. 베들레헴만으로도 불안하여 그 근방까지 확대했습니다.
  학자들 간에는 학살당한 어린이들의 숫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이기에 20-30명의 아이가 죽지 않았겠는가 하는 견해가 우세입니다. 사실 베들레헴의 아들들은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위해 순교자들이 된 것입니다.
  18절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 사실은 주전 550년경의 선지자인 예레미야가 미리 예언한 것이 응한 것입니다. 렘31:15에서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레헬이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 하였도다'라고 한 말씀을 응용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은 그때로부터 약1,000년 전에 야곱의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으면서 난산할 때 신고(아픔으로 인한 슬픔)한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예레미야 당시에 국운의 쇠약으로 말미암아 온 민족이 라헬 같은 슬픔을 당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바로 서면 머지않아 하나님이 다시 위로해 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35:16-20, 렘31:15-17).
  이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약1,000년 전의 라헬의 슬픔이 그 민족에게 온 것을 말하면서 위로하였는데, 본문을 기록한 마태 역시 예레미야서에 나타난 말씀 중 라헬의 슬픔이 약800년 만에 어린이를 학살당한 부모들에게 또 임하였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라헬은 야곱의 아내이자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로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어머니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라마는 베냐민지파의 성읍이며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 가까우며 벧엘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 곳입니다. 바로 이 부근에 라헬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라헬이 그 무덤 속에서 죄로 인해 포로로 끌려가는 그 자손들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는 것으로 묘사된 것입니다. 옛날에 조상들이 겪은 슬픈 사건은 미래에 있을 슬픈 사건을 예언한 것이며 또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교훈한 것입니다.
  여기에 초점은 이스라엘의 어미들(라헬)이 흘리는 눈물에 맞춰져 있습니다. 생떼 같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모습을 보면서 울부짖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을 묘사한 것이며, 또 다른 이방인 헤롯(에돔)의 학정으로 살해된 다윗성의 베들레헴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성장하신 후에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하고 우시던 그 통곡과도 이것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③19-23절까지는 사11:1절의 성취로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게 한 것입니다.
  ▶19절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은 그의 통치 38년, B.C4년, 그의 나이 70으로 병들어 죽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의하면 헤롯은 내장이 썩고 벌레가 나며 악취와 경련이 끊이지 않아 백약이 무효했으며 그의 최후의 죽음의 모습은 '한 괴물이 울부짖다 죽는 그런 현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요셉에게 세 번째 하나님의 계시의 꿈입니다.
  첫 번째는 마1:20절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두 번째는 13절입니다.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그리고 세 번째가 본 19절입니다. 세 번째 요셉의 현몽 때에는 애굽에 있을 때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애굽에 몇 년 머물고 있음을 침묵하고 있으나 외경에는 '예수님의 유년기의 복음'에 약 3년 간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20절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요셉에게 복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21-23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리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여기서도 요셉의 절대 순종이 돋보입니다. 떠날 때는 밤에 떠났지만 이제는 낮에 돌아와도 됩니다.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시기 위해 예수님을 빛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헤롯왕이 그 엄청난 세력으로도 미미한 산골 베들레헴 목수의 아들 예수님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사실 헤롯의 왕권으로는 얼마든지 쉬운 일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엄청난 피의 역사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죽어 갔습니까? 우리나라도 대원군의 폭정으로 기독교인의 학살 명령을 내려 동대문에 순교자의 피로 말굽을 적셨고, 한강변 백사장에는 순교자의 붉은 피가 물들어져 백사장이 핏빛으로 물들었을 때 대동강 변에는 순교자들의 목들을 나열시켰다고 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압제할 때, 일본의 천황이 신이라고 해서 신사참배를 거행했으나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로 인해 수없이 많은 순교자가 나온 것입니다.
  헤롯은 반 기독교적인 행위를 나타냈지만 그도 죽고 말았습니다. 22절을 보면 '아켈라오'왕이 등장합니다. 포악한 헤롯왕이 죽자 로마가 유대 땅을 셋으로 나누어 그의 3아들들에게 다스리게 했습니다.
  유대 땅은 '아켈라오'가 통치했고, 갈릴리는 헤롯 안티파스, 동쪽 요단강 건너편지형에는 필립이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유대 왕을 맡은 아켈라오는 포악하기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능가했다고 합니다.
  그는 왕이 되자 백성들을 3,000명이나 학살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요셉과 마리아는 다시 유대 땅으로 예수가 태어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지시해준 곳이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가 된 것입니다.
  앞 부분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만은 사11:1절은 굉장히 난해한 구절입니다. 다시 한번 알아보면 '나사렛'은 '싹, 어린 순'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렛은 구약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이지만 사11:1절에 '싹'이란 말이 바로 나사렛과 같은 뜻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나사렛은 갈릴리 남쪽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언덕에 올라가면 세상의 반이 보인다고 합니다. 서쪽에 눈을 돌리면 지중해가 보이고, 동쪽을 바라보면 평원과 요단강이 보이고, 서산으로서는 다메섹과 아프리카와 다리를 놓은 애굽까지 이르는 넓은 길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사렛은 멸시받던 곳입니다. 빈민굴, 술주정뱅이, 노름꾼 등 요사이말로 표현하면 달동네요 쪽방 촌입니다. 요1:46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나다나엘이 한 말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 말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어찌 그리 쪽방 촌에서 나올 수 있겠느냐는 그 땅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출신지역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잘못된 편견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향이 어디인가로 그 사람을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디서 사느냐? 고향이 어디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권력이나 지위나 명예나 부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신분을 묻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주님은 지금 현재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됨됨이를 보시고 부르십니다. 베드로를 부르신 주님은 그때 그 모습을 보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훗날 십자가를 거꾸러지고 죽도록 충성하는 그 모습을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예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메시아 예수는 꼭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님만이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아멘!/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