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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마태복음(송수천)

(제6강) 하늘이 열리고! (마 3:13-17)

(제6강)          하늘이 열리고! (마 3:13-17)

 

 

  선원생활을 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리면서 깡패 짓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 날도 그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배에 올라와 온 천지가 자신의 세상인양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장판을 쳤습니다.
  그런데 배가 바다 한 가운데로 나오자 무시무시한 풍랑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거세 지자 배는 요동하기 시작했고, 갑판 위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선원들은 모두들 나와 우왕좌왕하였습니다.
  이때 아직도 술이 덜 깬 그 청년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펌프로 물을 퍼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파도로 말미암아 배는 점점 기울어져 물에 잠기게 되었고, 많은 선원들이 물 속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제 배 안에는 대여섯 명의 선원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깡패였고 놀기 좋아하던 그 청년도 그 죽음 앞에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추위에 떨며 정신 없이 물을 퍼 내다보니 어느새 동이 터 오고 파도가 점점 잠잠해졌습니다.
  '아 이제 살았구나! 육지에 가면 술이나 한잔 마시면서 이 끔직한 이야기를 나누세!'하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다른 선원들은 아무 대꾸가 없습니다. 이윽고 옆에 섰던 선원하나가 소리를 칩니다. '이젠 우리도 끝장이야! 저걸 보게!'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 깡패 청년이 무릎을 바짝 꿇더니 '주여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외마디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 죄악된 모든 것을 회개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기도가 끝나자 그 파도는 점점 약해지더니 잔잔한 물결로 바꾸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청년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405장을 작사한 영국의 목사 '존 뉴톤'이랍니다. ◀재목 소개!▶

 

  오늘 성경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랜 침묵을 깨시고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는 첫 번째 행적입니다. 그런데 그 행적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대를 뒤엎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예수님의 겸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3절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본문은 '이때에'로 시작합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예수께서 자신이 자랐던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오신 그때를 말합니다.
  눅3:21-23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그러니까 바로 이때가 예수님이 30년 준비를 마치는 때가 되어 요단강에서 그의 첫 공적인 행사를 시작한 때입니다.
  또 이때는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면서 주의 길을 예비하던 때요, 세례요한의 설교를 듣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단강 사방에서 나온 자들이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던 때입니다.
  신앙 인들은 '이 때'에 대해서 잘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도 이 때에 대해서 민감하셨습니다. 요2장을 보면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면서 기적 베푸시기를 거부하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때가 오면 인류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때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생활이란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크게는 주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요, 적게는 이 땅에서 주님의 축복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
  여러분! 분명히 신앙생활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훈련시키는데 특별히 시간의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40년 간 광야에서 철저하게 훈련시켰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약속을 하신 후 25년의 세월동안 약속을 이루어 주시지 않고 훈련을 하였습니다. 야곱도, 요셉도 하나님은 훈련을 철저히 시켰습니다. 여러분 축복의 때가 있습니다. 응답의 때도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참 행복한 교회의 성장의 때가 있음을 믿습니다. /아멘!/ 지금 손에 안 잡히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철저하게 신앙의 훈련은 시키시고 때에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도 30년을 준비하셨습니다.
  요1: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은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대속을 위해 드려질 제물로 보았습니다.
  구약의 렘11:19절에서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다'고 예레미아 선지자도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예언했습니다.
  사53:7절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이사야 선지자도 어린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어린양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⑴유월절 양을 의미합니다. 출12장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이 장자를 멸하는 재앙으로 모든 애굽 사람들의 장자와 모든 짐승들의 첫 새끼까지 다 죽게 한 무서운 재앙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화를 면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에는 장자를 멸하는 천사가 그냥 넘어감으로 화를 면하게 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애굽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어린양을 잡아 가지고 집 문설주에 피를 바름으로 화를 면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 중에서도 하나님을 못 믿고 의심하던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고 있다가 장자의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멸망당한 장자를 위해 대신 죽음으로서 그 피로 구원한 어린양과 같은 분입니다.
  ⑵희생제물을 의미합니다. 출29:38절 '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구약시대에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희생 제물로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모든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양을 잡아 그 피를 드렸는데 그 희생의 제물이 바로 우리 주님이라고 요한이 말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이 요단강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40년 세월이 끝난 후에 여호수아 장군의 명령에 의해 제사장들이 법궤를 매고 물이 어깨까지 출렁이며 넘치는 요단강 물을 밟고 건너간 곳입니다.
  제사장들이 그 출렁이고 넘치는 요단 강물을 하나님의 법궤를 매고 저벅저벅 밟고 들어가 발이 잠기고, 무릎이 잠기는 순간! 굽이쳐 내려오던 요단 강물이 멈춰버리고 그 물이 갈라져 큰 길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지처럼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신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 요단강은 하나님의 기적의 강입니다. 바로 이 기적의 강 요단강에서 우리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세례란 원문의 뜻은 세 가지입니다. '밥티조'라는 말로 '잠그다. 적시다, 씻는다'는 뜻입니다. 세례란 죄인이 회개하고 죄 씻음을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상징이요 표징입니다.
  세례란 교회가 집행하는 성례전의 하나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표징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란 죄를 씻는 행위를 말합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회개의 표로써 죄를 씻어 정결케 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았는가? 침례를 받았는가?' 가끔 장로교와 침례교가 이 문제로 어느 교단이 성경 적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일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세례요한이라고 분명히 했는데 침례교단은 이 부분은 침례 요한으로 다 바꾸어 놓았습니다. 침례교의 침례의 근거는 오늘 본문 16절을 근거합니다.
  16절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이 말은 예수께서 물(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물 없는 육지로 올라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물 위로 올라오는 것처럼 해석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세례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을 집어넣고 꺼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요한의 고백을 잘 압니다.
  본문 11절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요1:27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런 고백 속에서 우리가 본문을 해석해 보면 쉽게 풀릴 것입니다. 물을 떠서 끼얹는 것이 신사적이요, 또 구약에서 내려오는 세례의 원 뜻이기도 합니다.

  세례는 구약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출29:16절 "너는 그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단 위의 주위에 뿌리고" 또 겔36:25절에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레14:5-6절을 보면 문둥병을 걸렸다가 정결케 된 자는 살아있는 새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져가면 한 마리를 죽여서 피를 내어 그 피를 제사장이 적셔서 문둥병 걸려서 나은 사람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고 했습니다.
  침례교에서는 왕하5:14절에서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잠근 일을 주장합니다. 쉽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하루에 삼천 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삼천 명 모두 물에 잠갔다가 꺼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물에 잠갔다가 꺼냈다면 하루종일해도 모자랐을 것입니다.
  유대는 물이 적은 사막지대입니다. 또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갇혔을 때, 한밤중쯤 되어 기도하고 찬송할 때 옥문이 열렸습니다. 옥사장이 그것을 인하여 자살하려고 할 때, '그러지 말라! 우리가 여기 다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간수장과 그 온 식구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행16:3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때도 강가에 가서 세례를 준 것이 아니고 또 목욕탕을 만들어서 준 것도 아닙니다. 즉시 머리에 물을 끼얹고 세례를 주었다고 보아야 합니다(이병규목사). 분명한 것은 세례는 반드시 죄인이 받아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독생자로 죄가 털끝만큼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다는 사실에 세례요한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14절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한마디로 '제가 감히 선생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까?' 이런 말씀입니다. 왜 세례요한이 세례를 사양했습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⑴요1:33-34절에 보면 요한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즉시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⑵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할 자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⑶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⑷예수님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세 하사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분임을 알았습니다.
  ⑸자기는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할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⑹무엇보다도 예수님은 흠과 티가 없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써 세례를 받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분 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세례 받으실 것을 극구 사양하면서 내가 예수님께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예수님이 내게 세례를 받으신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극구 사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요한의 겸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조용히 세례요한을 설득합니다. 15절입니다.

 

  ▶1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이제 허락하라'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겸손과 온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기 전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왔었는데 그들이 오는 장면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며 나오시는 장면을 아주 대조를 이룹니다.
  구경하고 시험하러 왔던 그들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은 정반대입니다. 세례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대해 '독사의 자식들아!' 무서운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께서 오시자 요한은 '두려움과 떨림, 존경과 감격으로 가득해서 그 분을 마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바른 기독교를 이해해야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요한에게 오히려 나아가 '나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시오!'하고 겸손히 부탁을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대접을 받아야 할 제자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람의 몸에서 가장 더러운 발을 몸소 씻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할/
  본문에서 예수님의 겸손하심과 동시에 세례요한의 순종의 믿음을 우리는 여기서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허락하라!' 하시면서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처럼 두려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세례요한이 즉시 허락했습니다.
  주님이 왜 인간에게 세례를 받았는가? 주님은 죄가 없는 독생자 예수입니다. 그런데 어찌 인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가? 여기에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세례를 받음으로서 구약의 피 흘리는 할례를 그치게 했습니다.
  그가 지신 갈보리 십자가는 세례의 결실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할례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 세례는 훗날에 십자가라는 열매를 결실 하게 된 것입니다. /할/
  '이에 요한이 허락한지라!' 참으로 어렵고 송구스러운 허락입니다. 요한은 겸손의 미덕을 가졌지만 주께 복종하는 것도 매우 중요시 여겼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사명의 한계를 알아서 일할 때 열심히 일하고 물러설 때는 조용히 물러섰습니다.
  여러분, 요한은 받은 사명을 열심히 감당했습니다. 주의 백성들은 다 사명 받은 일꾼들입니다. 일꾼들은 열심히 일을 해야 복을 받습니다. 농땡이를 치면 복이 없습니다. /믿/
  ▶한 농부가 암소와 당나귀를 함께 쟁기에 매여 밭을 갈았는데 하루는 암소가 아픈척하고 일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진짜 아픈 줄 알고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주고 돌봐주었습니다. 이것에 맛들인 암소는 계속 아픈척하면서 농땡이를 쳤습니다.
  그 날은 혼자 일을 하고 돌아온 당나귀에게 암소가 물었습니다. '주인이 무슨 말 안 하드냐?'고 묻자 당나귀는 '나에게는 아무 말씀도 안 했지만 푸줏간 아저씨하고 이야기를 했다'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을 했을까요? 결과는 뻔합니다. 일꾼은 일을 해야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육의 일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아멘!/


  ▶예수님이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세례 받으신 이유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⑴예수님은 선생으로 먼저 법을 지키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땅 위에는 안타까운 일이 많습니다. 자기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너는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도둑이 직업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절대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안 된다. 그리고 진실하게 커라'고 가르칩니다. 웃기는 소리입니다.
  나라의 법을 집행하는 나리들이 먼저 그 법을 지켜야 국민이 따릅니다. 법이란 윗사람이 먼저 지키면서 아랫사람에게 지키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바닷게가 자기 자식에게 '반듯이 가라, 앞으로 가라'고 가르치면 아주 웃기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먼저 지키는 자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할/
  ⑵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공생애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33년 간 계셨는데 30년 동안은 사역을 준비하셨고, 마지막 3년은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시는 복음사역'을 하셨습니다.
  이 공생애에 천국 운동을 시작하실 때, 먼저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일을 순서 있게 시작하고 진행하는 하나님의 법도와 교회의 법을 세워주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을 본받아 세례를 받은 후에야 성가대원으로, 주일학교교사로 서리 집사로 임명을 하는 것입니다. 장로교회 교회 법을 보면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 직분을 임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⑶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는 것을 사양할 때, '이제 허락하라! 이와 같이 하여 모는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⑴사탄을 멸한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을 먹고삽니다. 우리에게도 사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삽니다.
  하와를 유혹한 사탄이 무엇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까? 창3:5절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요8: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⑵세상을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⑶최후의 승리를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스포츠의 묘미는 역전에 있습니다. 초반기에 지더라도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할/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은 마귀에게 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망권세 깨뜨리고 제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으로 위대한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실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의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것으로 단수의 의미가 아닌 복수로서의 '모든 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기 위하여 예수께서 자기 백성의 대표자가 되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마28:19절에 보면 '세례를 주고' 여기서 '주라'는 말씀은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베푸는 것도, 세례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의입니다.
  또 예수님의 세례는 세례요한의 사역을 인정해 주슨 일이요, 또 그 사역을 지원하여 주는 일도 됩니다. 또 예수님의 세례는 하나님나라를 죄인들에게 선포하는 그의 공생애의 첫출발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때, 연합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일은 혼자서는 못합니다.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귀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 나아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세례를 받는 그 순간 요단강 변의 세 가지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⑴하늘 문이 열리는 역사요, ⑵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는 역사요, ⑶'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리는 역사였습니다. 16-17절입니다.

 

  ▶16-17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적절한 용어로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왔습니다.
  가끔 우리는 당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인가? 예수님인가?'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이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 곧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 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믿는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 이외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신약성경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어라'는 말이 나옵니다(막11:22/요14:1).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우리가 주일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말도 나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말도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말도 나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입니다.
  이 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도 하나님이시오,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이시오,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 분이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놀라운 것은 이 세 분이 일체가 되어 일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일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세 분이 하나로 있을 수 있는지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신비이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라고 했을 때 그것은 숫자상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정확히 표현했습니다.(요5:44, 17: 3)
  그 유일하신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관계성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제자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22). 예수님은 '그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그 안에 계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습니다(요17:21). 이것이 하나됨의 의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 안에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요14:9절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여러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할/

 

  ▶본문에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보자!
  ①,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과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늘 문을 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주님의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요14: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늘이 열리고' 성경에 보면 하늘이 열리는 역사가 종종 있습니다. 창28:12-15절에 보면 야곱에게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행7:55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에게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또 계1장에서 보면 사도 요한에게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실 때 하늘 문이 열린 것은 ⑴죄로 인하여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담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무너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에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위해 막혔던 담을 허시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닫혔던 하늘의 계시를 우리에게 열어주셨고, 끊어졌던 다리를 놓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그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지는 사건을 들어 알 수 있습니다.
  ⑵예수님만이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10: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할/

 

  ②열려진 하늘 문 가운데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신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모양이 비둘기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은 온 우주에 충만하신 영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다양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는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심을 가르치기 위하여 바람 같은 성령으로 나타납니다(창2:7).    ▶죄를 소멸하는 능력을 가르치기 위하여 불같은 성령으로 나타납니다(히12:29).    ▶죄인의 심령을 소생시킴을 가르치기 위하여 생수 같은 성령으로 나타납니다(요 7:38).
  ▶성도를 보호하고 위로하고 인도해 주시는 성령 님을 가르치기 위하여 보혜사 성령으로 나타납니다(요14:26-27).
  ▶본문에서는 비둘기 같이 임했습니다. ⑴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새입니다. 마음이 평안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은 평화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눅2: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⑵비들기는 순결의 상징입니다. 마10:16절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칠십 인의 전도 단을 파견하시면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고 했습니다. 악한 세상에 복음을 지혜롭게 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성도가 지킬 순결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⑶비둘기는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을 전하는 새입니다. 창8:11절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라고 했습니다. 비둘기는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와서 홍수에 지친 노아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⑷비둘기는 온유와 겸손의 새입니다. 비들기 같은 성령이 임하면 겸손하고 온유해집니다.
  ⑸비둘기는 제물로 드려지는 새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할/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비둘기 같은 성령의 역사를 일으킵시다. 월남전 때 우리나라에서 일차 이차로 맹호부대와 백마부대를 파견하여 호랑이 같이 흰말같이 잘 싸웠으나 많은 용사들이 전사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용맹스럽게 싸우더라도 목숨을 잃지 않고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비둘기 부대를 파견했습니다. 우리도 비둘기 같은 성령의 역사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아멘!/
  행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할/

 

  ③하늘로서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의 확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성령이 임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비로소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마17:5절에서 이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요, 목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