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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필곤목사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세계를 품고 섬깁니다./마가복음10:35-45/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세계를 품고 섬깁니다./마가복음10:35-45/

 

모처럼 인터넷 신문에서 [68세 장애 딸 50년 돌본 '101살 엄마']라는 감동적인 기사를 읽어보았습니다. 전에 중학교 교사였던 박옥랑 할머니 이야기였습니다. 딸이 68살인데 전신마비로 누워 있답니다. 1939년 중학교 교사를 하기 때문에 가정부에게 네 살배기 딸을 맡기고 갔는데 그만 딸을 바닥에 떨어뜨려 머리와 목을 심하게 다치고 그 후 불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 딸은 방에 누워 천정만 바라보고 살았답니다. 남편은 집을 나가 버렸고 홀로 그 딸을 키우기 위해 교사직을 사직하고 무려 50년이나 돌보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13평 영구 임대 주택에서 살면서 국민 기초 생활 비로 나오는 52만으로 생활을 하든데 그 중에서도 일부를 자신이 죽은 후 딸이 살 수 있도록 저축을 한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딸에게 글을 가르치며 장애인 딸 돌보는데 인생을 바쳤답니다. 딸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은 나의 어머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딸은 나한테 몸을 기대고, 나는 점차 흩어지고 있는 정신을 딸에게 맡기고 사는 셈이죠"라고 기자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참 감동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섬기며 사는 것이 본질입니다. 아이가 홀로 이 땅에 태어 날 수 없고 섬김받음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집에 있는 가구를 보십시오. 의자가 의자 스스로를 위해 있습니까? 텔레비전, 식탁, 쇼파 등 다 목적이 있는데, 주인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체도 보십시오. 눈이 눈만을 위해 있습니까? 심장이 심장만을 위해 있습니까? 발이 발만을 위해 있습니까? 아닙니다. 심장도 몸을 살리기 위해, 눈이나 발이나 모든 기관은 다른 지체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섬김이라는 것은 남은 시간, 여유있는 것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살이의 본질입니다. 창조 질서에 속한 것이고 존재 양식에 속한 것입니다. 세상이 지옥처럼 변하고 불행해 지는 것은 바로 이 섬김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섬기려 하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맛이 없고 멋이 없고 지옥같이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음 받았는데도 자꾸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섬김의 대상이 되려고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열린 교회 설립 6주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계를 품고 섬기는 교회기 되어야 될 줄 압니다. 특히 오늘 예배 후 우리 교회 역사상 첫 번 장로, 집사, 권사를 뽑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계를 품고 섬기는 지도자를 뽑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주님과 같이 세계를 품고 섬김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사회 개혁을 위해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인간이 개조되고 가정이 바꾸어지며 전근대적인 구조가 현대적인 구조로 바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가 들어 올 때 일부 지식층 가운데 이러한 동기로 교회에 다녔습니다.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추구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통한 구원에 동기를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한 천국의 사모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질병에 시달리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질 때는 주로 이 두 동기로 사람들이 교회에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60,70년대 경제 개발과 함께 신앙이 동기도 달라졌습니다. "잘살아 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새마을 운동과 함께 교회에도 새마을 동기가 들어 왔습니다. 잘 살기 위해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물질적 축복이 신앙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야 복받고 예수 믿어야 건강하고 예수 믿어야 출세하고 예수 믿어야 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윤리성을 상관없고 돈만 벌면 된다는 기복신앙, 번영 신앙, 출세주의, 성공주의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부동산 투기를 하든, 사기를 쳐서 돈을 벌든, 분식 회개를 하든 큰 기업이루고 부자가 되어 교회에 헌금 많이 하면 복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직분도 섬김으로 이해하지 않고 권력으로 이해합니다. 유교적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을 위 아래로 나누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섬기려 오신 예수님, 죽기까지 섬기신 예수님의 본을 닮아야 합니다. 큰 교회가 아니라 섬기는 교회가 가장 좋은 교회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2000년 전에 예수님을 따랐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어떤 동기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권력욕에 한 번 노예가 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은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41절 보십시오.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 시기하고 질투하는 지옥처럼 변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3,44절을 읽어 보십시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섬김에 대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아 천국 백성되었고 은혜로 굶주리지 않고 살만한 사람되었습니다. 이제 섬김을 위해 예수님을 따른다는 섬김의 동기가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세계를 품고 섬기는, 섬기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내 것 내 교회 내 가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하나님은 내 교회, 내 가정 내 아들만 관심을 갖으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입니다. 세계 모든 사람입니다.
사도 행전에 나오는 바로 이 제자들이 이 본질을 알았기 때문에 당시 세계를 품고 주님처럼 섬기는 비전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직분자를 뽑습니다. 이런 비전을 가진 사람이 뽑혀야 합니다. 키르키스탄, 우간다, 필리핀, 뱅갈로, 말라위, 파라과이, 에르트리아, 네팔, 몽공, 탄자니아, 나이제리아, 방글라데시, 볼리비아. 온두라스, 캐냐, 우이구르, 볼리비아 등 우리는 아이들을 품고 있습니다. 더 많이 품고 섬겨야 합니다.
왜 직분자를 세웁니까? 군림하는 사람 만드는 것입니까?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만드는 것입니까? 엡4:11-12절을 보세요.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2. 우리는 주님과 같이 주어진 것으로 섬김의 비전을 성취해야 합니다.
섬김이란 없는 것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시면 주신 것으로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직분이 주어지면 그 직분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깁니다. 건강이 주어지면 그 건강으로 방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건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물질이 주어지면 그 물질로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로 섬기는 것입니다. 권력이 주어지면 그 권력으로 교만해 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으로 백성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고 주어진 것으로 오용하고 남용하기 때문에 병들고 가정이 파괴되고 대통령 아들들이 구속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한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왜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담대하게 좌편 우편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요? 그 만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세베대였습니다. 어부이긴 했지만 자신의 배가 있고 종을 거느린 부자 선주였습니다. 어머니는 살로메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지간입니다. 그러니 육신의 예수님의 이모가 됩니다.
요 19:25을 보십시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이모가 나옵니다. 이 이모가 누구일까는 다른 복음서와 대조하면 나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막 15:40)" 그러니 야고보의 어머니가 자신의 독특한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께 나와 아들들을 권력의 자리에 올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1)"
있는 지위로 자신의 것을 더 차지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섬김을 위해 주신 선물입니다.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 여러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핵심적인 제자였습니다. 측근 참모였습니다. 주님께서 중요한 자리에 가실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항시 동행하도록 하신 것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 때도 다른 제자들은 산 아래 있었지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과 같이 산에 올라 신비한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이것을 이용하여 특권의식을 가지고 예수님께 권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위치와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그것으로 섬김의 도구로 사용하여 섬김의 비전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이 이 일을 이루지 못하다가 자신도 망하고 가족도 나라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헤롯에게 왕권을 주니까 그것으로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결국 충먹고 죽습니다. 차라리 그것이 주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어짐으로 그것을 통해 더욱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고 자신도 복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같은 칼이라도 의사에게 주어지면 사람을 살리지만 강도에게 주어지면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바울이 당시 세계를 품고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가말리엘 문하생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로 당시 공용어인 헬라어에 능통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신부이면서 교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농민이 루터 같은 이야기를 했다면 아무 영향력도 없고 사람들이 웃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주어지면 그것으로 권력을 부리려다 망하는 사람되지 말고 섬김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 땅에 이루어야 합니다.

3. 우리는 주님과 같이 섬김을 위한 고난을 기쁘게 감당해야 합니다.
섬긴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낭만이 아닙니다. 한적하게 여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시간 여가 선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쓰다 남아 귀찮은 돈으로 자선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은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면 그것으로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그것이 아닙니다. 42, 43절을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분 자체가 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어느 정도까지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섬기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를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종으로 시작했다가 자꾸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섬김받는 주인공이 되려고 합니다. 목회자들도 그런 사람들을 참 많이 봅니다. 예수님 만나기보다 더 어렵고 예수님보다 더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교회에서 목사 이름 드러나는 것 그것 별로 좋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자 이름 드러나는 것 그것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39절 보십시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이 말씀대로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어 섬겼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할 때까지 갖가지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있는 순교자로 섬겼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죽기까지 섬긴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자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시록 7장 17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눈물을 다 하나님이 닦아 주십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29)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30)"

이번 주에 섬김에 대해 시를 지어 주보에 올려놓았습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도 향기를 줍니다.

집안 구석, 모든 도구가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듯
사람의 지체도 저마다 제 자리에 있지만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눈이 피곤하다고 눈을 감거나,
입이 아프다고 먹기를 포기하거나,
허파가 힘겹다고 숨쉬기를 쉬는 날이면
그 날은 죽음의 날이 되고야 맙니다.

모든 것은 섬김을 위해 지음받았으니
섬김은 제자리를 찾는 것이고
섬김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이 관심의 초점이 되고자 하는 중독에서
벗어나는 삶으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느낌도 고이면 병들고,
청년의 근육도 쓰이지 않으면 무기력해지지만
내어놓기 싫은 약점도
드러내면 아픔으로 다가오는 실패도
섬김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섬김에는 은퇴가 없고,
사람의 위대함은 신분이나
소유에 있지 않고 섬김에 있으니,
섬김의 위대한 기회를
조그마한 일로 위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평생 주님의 마음으로 세계를 품고 섬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세계를 품고 섬깁니다./마가복음10:35-45/ 김필곤 목사/ 2003.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