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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려 나온 세례요한 (마 3:1-12)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려 나온 세례요한 (마 3:1-12)

 

  벌써 한해가 저무는 문턱에 왔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았으나 우리는 여기까지 왔고, 또 예약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오늘을 떠나야 합니다. 또 한해를 돌아보며 결산해 보지만 아무것도 이루어놓은 것이 없어 부끄러움뿐입니다.
  그렇다고 축 처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열어 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 하나 그것을 열어봅니다. 그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내 눈과 귀와 손끝이 발걸음이 그것을 좋아하면 '기쁨'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이고, 사랑이라 느끼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불평과 불만의 상자가 될 것이고 걱정과 후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당신에게 힘들고 괴로운 날을 안기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미래가 좋은 것은 그것이 하루 하루씩 다가오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루, 하루 그것은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스스로 내용물을 결정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귀한 선물입니다. /할/
  여러분, 다시 한번 내일을 향하여 소망을 품고 살아갑시다. 저와 여러분의 하루 하루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기쁨과 감사의 선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우리는 지금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계교회는 매년 12월 첫째 주일부터 시작하여 12월 25일 성탄절까지 4주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오시다, 출현하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원래는 로마황제가 즉위한 후 지방을 순시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랍니다. 황제가 오면 황제를 영접하기 위해서 그 지방은 부산을 떱니다.
  군대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남자들은 잘 알 것입니다. 그 부대에 사단장이나 군단장이 방문한다고 하면 정말 난리가 납니다. 길을 고치고 온 연병장을 빗질하듯이 쓸고, 내무반을 대청소하고, 정말 부대 내에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청소하고 정비를 합니다.
  사단장이나 군단장이 와도 이러한데, 하물며 황제가 오면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 지역의 지도자나 주민들은 황제를 환영하기 위하여 수십 킬로미터 밖까지 나가서 영접해야 합니다.
  사람의 경우도 이러한데 이제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림절은 4주간입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면 교회마다 성탄절 장식을 합니다. 서양 교회에서는 한 주간마다 초를 켜기 시작하여 대림절 넷 째 주일에는 촛불 4개를 밝힌다고 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그분을 맞으려는 의식입니다. /할/ 대림절은 성탄절과 연말연시가 겹쳐 사람들이 흥분되기 십상이지만 원래는 경건과 침묵 속에서 이 기간을 보내야 합니다.
  대림절에는 가운의 후두가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슬픔과 참회, 소망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대림절 기간은 들뜬 분위기가 아니라 차분하게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며 예수님의 삶처럼 자신을 내려놓고 사랑과 봉사의 삶을 실천하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의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에 이미 예언해 놓은 그런 인물입니다. 말3:1절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복음서기자들은 이 예언이 바로 세례요한을 가리킨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사람들에게 비칠 '돋는 해'(눅1:78)로서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 그 빛을 준비한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할/ 이렇게 세례 요한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예언대로 세상에 태어나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을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제목 소개!▶


  ①유대 광야에 나타난 요한(1)
  본문은 '그때에'로 시작됩니다. 여기 '그때는 어떤 때'입니까?
  ㉠세례 요한이 나타날 때입니다. 당시 로마는 가이사가 지배하고 있었고, 유대는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분봉 왕 헤롯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또 종교적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는데 예수님을 오랫동안 대적한 자입니다.
  이러한 때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고, 예언자들의 소리, 즉 하늘의 소리가 끊어진지가 400년이 지났습니다. 유대의 경건한 사람들은 예언자의 소리를 고대하고 고대하다가 지쳐서 이제 체념하고 있을 때, 400년의 침묵을 깨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나타났으니 이것이 세례요한의 출현입니다. 학자들은 이 사이를 구약과 신약의 '중간 사'라고 합니다. /할/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거처를 정하시고 어린 시절을 지나 장성하여 이제 생의 황금기인 30세에 이르러 공생애를 막 시작하려는 때를 가리킨 것입니다.
  먼저 세례요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왕은 어디서나 혼자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수행원이 따릅니다. 그래서 그 길을 예비하는 행렬이 먼저 지나가고 모든 준비가 끝나 가면 팡파르가 울리는 가운데 왕이 등장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등장하실 때에 아무도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사는 한 괴상한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려 나온 세례요한입니다. /할/
  ㉢세례요한은 세 가지 측면에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탄생과 사역과 그의 죽음'입니다.
  ⑴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출생에 있어서도 예수님처럼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경건하고 거룩한 신앙 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애를 낳을 수 없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눅1:7절에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이런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눅1:13절에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이때 그 남편(사가랴)이 그 말을 믿지 못해 일시적으로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기도 했으나 하나님은 엘리사벳을 통하여 세례요한을 잉태케 하셨습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출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동정녀에게 잉태하여 태어난 것을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눅1:36절에 예수님을 잉태하게 될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이제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예언을 전하는데 마리아가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자 바로 세례요한의 잉태를 설명해 줍니다.
  눅1:36-37절에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또 예수님이 자라던 모습과 세례요한의 자라던 모습이 비슷합니다. 눅1:80절에서 요한은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고 했고, 눅2:40절에서 예수님은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할/
  ⑵그의 사역은 무엇인가? 세례요한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의 일성도 마4:17절에 보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세례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복음이 가까이 왔다는 말,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의 사건을 전한 것'입니다. 그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여 주시고 구원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곧 오셔서 구령운동을 일으키신다는 철저히 예수님을 예비한 사역입니다. 또 세례요한은 그 이름처럼 세례를 베푸는 것이 그의 중요한 사역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고,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세례, 불 세례였습니다. 이것까지도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한 것입니다.
  요한의 생활은 '유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 털옷과 가죽 띠'를 띤 청결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느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삶입니까?
  ⑶그의 죽음을 보자! 그는 자기 명에 죽지 못했습니다. 불의에 대항하고 부정에 항거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은 목 베임을 당해 쟁반에 올려 졌습니다.
  당시 갈릴리 분봉 왕으로 헤롯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었고, 그 사람에게 요한은 직언을 한 것입니다. 눅3:19-20절에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결국 헤롯의 칼날에 목 베임을 당해 쟁반에 그 목을 담겨 헤로디아에게 전해졌지만 그는 진리를 따라 살다가 갔습니다. 예수님도 33세에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과 삶이 비슷했습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태도는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본문 11절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또 요1:27절에서도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겸손합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3:30절에서 '그(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주님을 높였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아멘!/
  요1:19절을 보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의 능력과 인기와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방불케 함을 느끼고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누구냐?' 그때 세례요한은 큰 소리로 '나는 예수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가 예수 인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오직 예수님만 높였습니다. /할/
  요한의 설교는 능력 있는 불같은 메시지로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숨기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요1:23절에서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세례 요한을 예수님이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눅7:28절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이 보다 큰이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만 능력 받고 은사가 있으면 착각을 합니다. 성령의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에 덕을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아멘!/
  ㉣왜 세례요한이 광야로 나갔을까요? 아버지가 대제사장이었으니 아들도 그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 광야로 나가야만 하였을까요?
  ⑴영적 연단과 훈련을 위해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광야는 인간의 정신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인내심을 길러줍니다. 똑같은 동물이라도 집에서 기르는 가축과 산에서 이슬을 맞으며 살아가는 동물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집안에서 나약한 자로서 험악한 세상을 향하여 외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보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광야가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가? 세상입니다.
  ⑵광야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우리는 광야의 한복판에서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한복판에 서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곳, 모래바람이 불어 앞을 내다볼 수가 없는 곳, 때로는 먹고 마실 것조차 없는 허기진 곳에 서있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광야대학 고생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성적이 별로 좋지 못해서 입학한지 오래됐지만 아직 졸업을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총장님은 하나님이신데 대충 넘어가는 일이 절대로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커닝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시험을 볼 때에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광야학교의 교과는 성령님이십니다. 교과과목은 기다리는 훈련입니다. 포기하는 훈련입니다. 깨어지라는 훈련입니다. 내려놓는 훈련입니다. 하나님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순종하는 훈련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능력만으로 살아가는 훈련입니다.
  학비가 좀 비싼 편입니다. 인생을 모두 걸어야 할 정도이니까요. 때로는 목숨까지도 저당 잡혀야하니 결코 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과목은 버리기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되고, 내 고집을 버려야 되고, 내 생각도 버려야 되고, 인간적인 모든 수단방법도 버려야합니다. 그런데 나는 매일 낙제를 해서 이렇게 졸업을 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합격하리라 결심을 하고 도전해보고 있습니다. 합격하는 자에게는 졸업선물이 있습니다. 문제해결이라는 은혜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나는 그 선물을 받고 싶습니다. 어서 고생과를 졸업하고 헌신과에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할/
  우리는 어떤 광야학교 어떤 과에 들어가 있습니까? 우리도 고생과에 들어가서 아직까지 인생의 아픔과 슬픔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하나님, 이제는 헌신하겠습니다. 이제는 순종하겠습니다. 이제는 내가 있는 곳이 광야이든, 푸른 초장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를 향해 달려가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까? /할/ 이런 귀한 고백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⑶광야 같은 인생 길에서도 우리 주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광야를 생각할 때마다 좋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 할 때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이상하게도 40년 동안 똑 같은 옷을 입었는데 옷이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똑 같은 신발을 신었는데 신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농사한 적이 없는데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햇살 때문에 힘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차가운 추위 때문에 벌벌 떨어야 되는 밤 시간에는 불기둥이 나타나서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새벽이 되면 이슬과 함께 하루 먹을 양식을 만나로 내려주었습니다.
  고기도 주었습니다. 물도 주었습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과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도 노력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서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할/
  ⑷그렇다면 광야생활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나를 포기하는 곳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하는 곳입니다. 욕심이란 인간을 부끄럽게 하고 죄에 빠지게 합니다. ㈂혼자서 가야 하는 곳입니다. 혼자 있을 때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얍복강가에 야곱도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멘!/
 
  ②요한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2).
  ㉠회개를 외쳤습니다. 여기 '회개하라'의 회개는 '메타노이아'로 '생각을 다르게 하라, 생각을 고치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성경 전체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회개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서 새 행실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전인격적인 참회인 동시에 철저한 변화를 가리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상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마음의 생각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1-2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엘타윌터'라는 사람은 '생각이 건강하면 행동이 건강하고, 생각이 병이 들면 행동이 병자 된다. 생각이 주고자 하면 언제나 부유하고, 생각이 인색하면 돈 많아도 가난하다. 생각이 깨끗하면 행동이 신사 되고, 생각이 추잡하면 생활이 부패한다. 생각이 예수이면 그리스도인이 되고, 생각이 부정적이면 한숨이 뒤따른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이 바른 사람은 바른 삶을 살게되고, 생각이 악한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눅6: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참된 회개의 시작은 그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변화는 곧 '생활'의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회개가 중요합니다. /아멘!/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바울도, 베드로도 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행2:38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할/ 초대교회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맨 먼저 베드로가 전한 복음도 알고 보면 회개를 외친 것입니다.
  행26:20절에서 사도바울도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외쳤습니다.
  ⑴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맨 먼저 회개의 의미입니다. 호6: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⑵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는 것입니다. 렘3:13절에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⑶죄를 자복했으면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겔18:30절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니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⑷죄를 떠난 사람은 이제 주님만 바로 보는 것이 회개의 마무리입니다. 호12:6절에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 /할/
  ㉡왜 회개해야 합니까?
  ⑴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눅15:7절에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⑵하나님께서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벧후3:9절에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⑶회개한 자는 다시 일어납니다. 욥22:23절에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아멘!/
  ⑷회개는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즉 눈물로 입으로 하는 회개가 아니라 열매 있는 회개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불태우라고 했습니다.
  폼만 좋은 크리스천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예수 믿다가 그만 둔 사람입니다. 또 회개하면서도 열매가 없는 사람이라고 고 하용조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전도할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안 믿는다고 하면 전도나 해서 새롭게 훈련을 시킬 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진정한 교회 부흥은 양적 부흥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부흥된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는 생활을 할 때,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회개에 있습니다.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생활의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일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온 죄요, 그 다음 큰 죄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죄입니다. /믿/
  ㉢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까? 그것은 천국 때문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지금 천국의 왕이신 예수께서 바로 지금 여기에 등장하실 것이니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곧 천국은 어떤 장소라기보다는 누가 통치하느냐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천국이 임했다는 말로 직접 해석했습니다. 천국의 지배자요 통치자인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천지가 진동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요, 예수님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아멘!/

 

   ③요한의 사명이 무엇인가(3)
  본문은 사40:3절의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하신 이 말씀을 이룬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사명과 사역에 대하여 눅3:5-6절에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⑴마음의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는 축복의 길을 만들려면 우선 심령의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사람마다 남이 알지 못하는 부정적인 골이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골짜기가 깊이 있는 사람은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축복의 길이 없습니다.
  또 부족의 골짜기들을 메워야 합니다. 기도가 부족하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부족하면 더욱 열심을 내야 합니다. 헌신이 부족하면 시간과 정성과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부족하면 더 잘 믿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길, 은혜의 길, 축복의 길, 성공의 길이 열립니다. /아멘!/
  사람마다 정말 주님이 아니면 메워 줄 수 없는 깊은 골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하기만 한 골이 있습니다. 그 골이 메워져야 합니다. 절망의 골짜기를 소망으로 메우고 불신의 골짜기를 믿음으로 채울 때 비로소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로부터 많은 배신을 당했더라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어도, 아무리 상하고 찢겨졌어도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만은 믿어야 합니다. 절망과 불신의 골짜기를 주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으로 채울 때 능력과 치유의 길이 열려집니다. /아멘!/
  ⑵마음의 높은 산을 낮추어야 합니다. 산은 높은 곳입니다. 산이 있어서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산은 교만을 의미합니다. 교만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의 길이 생겨집니다. 벧전5:5절에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독선과 교만에 빠지면 잘못을 잘못으로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불의를 기뻐하고 정의를 배척하게 됩니다. 그 당시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도 모두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가 오셨을 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멸시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왜 그들은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마음속에 있는 교만의 높은 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명예, 자기 존중, 자기 우월감에 빠지면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만의 높은 산을 깎아서 낮은 겸손의 평지를 만들 때 주님도 보이고 진리도 보이고 은혜도 받습니다. /할/
  ⑶마음의 굽은 것이 곧아져야 합니다. 길을 잘 닦으려면 굽은 곳은 곧게 해야 좋은 길이 됩니다. 마음이 굽은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 삐뚤어지고, 생각이 삐뚤어지면 말하는 것이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길을 닦으려면 굽은 것을 곧게 해야 합니다.
  한 어린 소녀가 거미줄을 쓸면서 기도하기를 '주여, 내가 방을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온전히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딸아 매일 거미줄을 치운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거미줄을 치는 거미를 잡아죽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때에는 거미줄을 쓸 필요가 없어진다' 소녀는 그때부터 마음의 거미를 죽이는 일에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할/ 
  비뚤어진 마음의 거미는 자아 중심적입니다. 비뚤어지고 굽은 것을 평탄한 길로 만들기 바랍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구부러진 사람은 모든 것이 구부러져 보입니다.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나쁘게 봅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바로 된 사람은 매사를 바로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닫고, 그 은혜 속에서 밝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구부러진 마음은 말씀의 빛이 굴절되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무슨 말씀을 하든지 아멘하며 은혜를 받습니다. /할/

 

  ④광야에서 요한의 생활은 어떤 것인가?(4)
  ⑴낙타 털옷은 광야에서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들이 입었습니다. 낙타는 사막지대, 광야지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교통수단, 운반수단이었습니다. 평생 주인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다가 늙어서 죽으면 세례요한은 죽은 낙타의 털을 깎아서 옷을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⑵여기 가죽띠는 정확하게 무슨 짐승의 가죽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⑶메뚜기를 먹고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메뚜기를 이야기하면 들에서 뛰면서 날아다니는 메뚜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먹었다고 하는 메뚜기는 곤충의 메뚜기가 아닙니다.
  곤충인 메뚜기를 1년 내내 식용으로 먹으려고 하면 매일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직 메뚜기만 잡으러 다녀야 합니다. 매일매일 메뚜기를 잡으러 다녀도 메뚜기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간혹 한두 마리, 많아야 열 마리 정도 있을 정도이지 매일매일 식용으로 먹을 수 있을 만큼 메뚜기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령 메뚜기가 많아서 많이 잡았다고 하더라도 저장해 둘 수가 없습니다. 또한 매일매일 메뚜기를 잡으러 다닐 만큼 세례요한이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매일매일 바쁘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먹었다고 하는 메뚜기는 곤충인 메뚜기가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종류의 메뚜기일까요? 우리는 탕자의 비유의 말씀을 잘 압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고는 다 팔아서 이웃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돈이 많을 때는 그렇게 많던 친구들도 다 떠나가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먹을 양식을 주지 않아서 굶주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돼지 키우는 일을 해보라고 해서 그 일을 하는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주는 자가 없어서 먹을 수 없구나' 하면서 탄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쥐엄 열매는 돼지뿐만 아니라 가축들의 사료로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쥐엄 열매는 가축들의 먹이로 주기는 하지만 아주 가난한 시절에는 가난한 서민들의 식량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쥐엄 열매는 쓴맛도 있지만, 단 맛도 있다고 합니다. 이 열매는 10-12월에 열매가 다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 쥐엄 열매를 나타내는 히브리어가 '하루브'라고 하는데, 메뚜기는 '하가브'라고 하는데 쥐엄나무의 열매인 하루브라는 말과 메뚜기라는 말인 하가브가 서로 혼돈 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브'라는 말을, 어떤 때는 쥐엄나무 열매로, 어떤 때는 날아다니고 뛰어다니는 곤충인 메뚜기로 사용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이 쥐엄나무를 영어로는 Locust tree라 하여 '메뚜기나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쥐엄 열매를 '세례요한의 빵'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도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 사이에는 쥐엄 열매를 세례요한의 빵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쥐엄 열매는 말려서 보관이 가능하고, 당분과 단백질이 풍부하여 은둔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더 없이 좋은 양식이 된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이 유대광야지방에서 운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쥐엄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난하고 빈천하게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할/
  ⑷여기 또 '석청'은 아주 귀한 꿀입니다. 여러분, 꿀이 만들어지려면 무엇이 먼저 있어야 합니까? 먼저 꽃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꽃이 있는가에 따라서 꿀의 이름이 달라집니다. 아카시아 꽃이 있으면 아카시아 꿀이 되는 것이고, 밤꽃이 있으면 밤 꿀이 되는 것이고, 유채 꽃이 있으면 유채 꿀이 되고, 구별 없이 여러 가지 꽃들이 모이면 잡화 꿀이 됩니다.
  또 뭐가 있어야 합니까? 꿀벌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적당한 온도가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살던 유대광야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광야에 꽃이 있겠습니까? 전혀 꽃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꿀을 만들어 낼만큼 꽃이 많이 없는 지역입니다. 꽃은 예루살렘 지역인 올리브 산에 많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 감람산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산이 올리브 산입니다.
  올리브 산에는 올리브나무 꽃이 있습니다. 그런데 올리브 산에서 유대광야까지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직경거리로 25km라고 합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꽃들이 많아야 가까운 곳에서 꿀벌들을 왕성하게 꿀을 모아서 꿀을 따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광야에는 꽃이 별로 없습니다. 또 낮의 기온이 섭씨 45도를 넘는 곳입니다. 이렇게 높은 온도에서는 꿀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꽃도 없고, 낮의 기온은 너무 높고, 바위들로 넘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꿀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대신에 무엇이 많은가 하면 대추야자나무가 많은 지역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 종려나무라고 번역되어 있는 나무가 대추야자나무입니다.
  유대광야는 여리고 지역을 가리킵니다. 여리고 지역은 '대추야자나무의 성읍'이라는 별명을 부를 만큼 대추야자나무가 많은 곳입니다. 대추야자 열매가 8월경에 익어서 추수하게 되는데 간혹 바위틈 사이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법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폐아 법'입니다. 즉 가난한 사람, 고아들, 과부들, 나그네들을 위해서 추수할 때 떨어지는 곡식이나 밭 모퉁이에 있는 곡식이나 열매를 추수하지 않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 고아들, 과부들, 나그네들이 먹어야 하는 음식이기 때문에 추수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무에 달려있는 한 줄기의 열매도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위틈에 떨어진 대추야자 열매를 억지로 거두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둡니다. 그러면 지나가던 나그네나,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바위틈에 떨어진 열매를 주어다가 양식으로 먹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대추야자열매를 가지고 시럽을 만들거나 말려서 보관하게 되는데 이 시럽을 유대인들은 '드바쉬'라는 꿀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말린 대추야자 열매는 설탕에 다린 것보다 더 달콤하고 맛이 좋아서 유목 인들이 저장음식으로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추야자 열매를 가지고 일부러 꿀로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바위틈에 떨어진 열매가 시간이 좀 흐르면 끈쩍끈쩍하게 조청처럼 시럽이 되는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석청'이라고 부른다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이 석청을 먹었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남겨놓은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할/

 

  ⑤요한의 세례현장에서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 책망하는 모습을 보세요! (5-7)
  여기서 세례 요한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 강력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⑴여기서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무시무시한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잘못할 때, 지도자들이 바로 서지 못할 때 이런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가 오히려 사회로부터 이런 욕설을 듣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5: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을 책망하고 질책하는 시대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기독교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우리는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항상 어떤 큰 사건 뒤에는 크리스천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사건에 들어 있으면 감사할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불경스러운 사건에 더 많이 들어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들어 각성하고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할/
  그런데 왜 세례요한이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까? 이들이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기 위해 왔다면 왜 그런 책망을 했겠습니까? 세례요한이 민중들에게 점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게 되자 자신들에게 '어떤 위험이 오지 않을까?' 하고 그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선지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었고, 신앙의 각성도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정체가 무엇인가? 세례를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알아보기 위해서 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종교를 빙자해서 권력을 쥔 자들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런 사람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을 타락한 종교지도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공격한 것입니다. /할/
  ⑵'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가 없는 자는 지금도 주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철학자인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인간은 천사도 아니거니와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들은 천사처럼 살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의 고민 중에 하나가 회개하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또 죄짓고 또 죄짓고.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늘 회개하며 늘 같은 죄를 반복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열매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사람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몇 가지 보호장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⑴변명입니다. ⑵비판입니다. '너도 그랬지' ⑶거리를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개는 하겠는데 '좀 더 있다. 아직은 이르다. 회개를 해도 하기야 죽기 전에 해야지. 예수님 옆에 있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도 직전에 회개했는데 아주 직전에 그곳까지 가서 해야지.' ⑷그런가 하면 배제형이 있습니다. 이건 아예 문제삼지를 않습니다. '나만 죄인이냐?' 세상을 탓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은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참 엄격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강요된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자발적이래야 됩니다. 탈무드에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마음 가벼운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할/

 

  ⑥'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래야 알곡신앙이 됩니다(8-12).
  그들은 구원이 자기들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합니다. 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런 상식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알곡이냐 쭉정이냐?'의 문제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복음은 심판을 예고하는 소리이며, 회개하지 아니하면 본절에서 말하는 '임박한 진노'를 피하지 못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하심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들은 다 찍혀 불에 던지울 것입니다. 손에 키를 들으시고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시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 주님이 다시 오시는데 나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습니까? 나는 쭉정이입니까? 아니면 알곡입니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알곡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렇습니다. 알곡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내용이 있는 믿음이냐? 형식적인 믿음이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 나무는 형식만 갖추었지 내용이 없는 쭉정이였습니다. 마25장 열 처녀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형식에다 내용을 닮은 사람이고, 등만 가진 다섯 처녀는 내용이 없고 형식만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십니다. /할/
  ⑴알곡은 열매가 있는 사람이요, 쭉정이는 열매가 없는 사람입니다.
  ⑵알곡은 무게가 있는 사람이요, 쭉정이는 무게가 없는 사람입니다.
  ⑶알곡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지만, 쭉정이는 고개를 쳐드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⑷알곡은 세상과 구별되지만, 쭉정이는 세상과 짝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⑸알곡은 환난을 이기지만, 쭉정이는 못 견디는 자입니다.
  ⑹알곡은 천국백성이요, 쭉정이는 지옥백성입니다. /믿/할/
  사랑하는 참 행복한 성도 여러분, 2013년도가 저물어가고 있는 이 대림절주간에 바른 회개 자 되어 알곡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3년 12월 15일 대림절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