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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한규목사

자랑스러운 성도고린도전서 9장 13-23절

자랑스러운 성도
고린도전서 9장 13-23절

< 절제하는 삶의 중요성 >

사람이 건강하게 살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질병을 부르는 가장 좋은 통로가 됩니다. 게으른 사람 중에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휴식도 열심히 일한 다음에 해야 제 맛이 납니다. 잠도 충분한 활동이 있어야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지나치게 잠을 자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잠을 많이 자면 뇌 세포도 둔해지고 뇌 기능도 떨어집니다. 어떤 분은 10시간을 자도 피곤하다고 하고, 어떤 분은 6시간만 자도 개운하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수명의 양이 아니라 수면의 질입니다. 짧은 수면을 취하고도 개운한 사람은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불면증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최고의 치료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지만 사람에게 적절한 스트레스는 필요합니다. 나룻배는 바닥짐이 있어야 균형을 유지하고, 트럭은 알맞은 적재량이 있어야 균형을 유지되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적절한 스트레스가 있어야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됩니다.

우리는 스트레스가 없기를 기도하지 말고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의 신기록은 연습할 때보다 실제 시합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있을 때 작성됩니다. 공부의 효율이 가장 높을 때는 시험이 임박해서 스트레스가 있을 때입니다. 가장 감동적인 연기는 리허설을 할 때가 아니라 직접 무대에 서서 스트레스가 있을 때 나옵니다.

그처럼 적절한 스트레스는 일의 추진력을 높여주고, 인간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깨우고, 심지어는 노화도 방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긴장이 너무 풀리면 노화현상도 촉진됩니다. 남자의 경우 실직이나 퇴직 후 1-2년 사이에 발병률이 높고 사망률이 급증합니다. 직장에서 과로로 쓰러질 때도 한참 일할 때보다 일이 끝나고 긴장이 풀렸을 때가 많다고 합니다.

그처럼 적절한 스트레스도 필요하지만 너무 일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왜 몇몇 사람들이 일의 노예가 됩니까? 지나친 욕심 때문입니다. 지나친 욕심은 목표 달성도 어렵게 하고 몸과 마음도 상하게 합니다. 일이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일을 몰아붙인다고 빨리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정상적인 단계를 거쳐 꾸준하게 일하는 것이 심신의 건강에도 좋고 일의 성취에도 좋습니다.

일과 휴식은 나룻배의 좌우편 노와 같고, 푸른 창공을 나는 독수리의 양 날개와도 같습니다. 일도 열심히 하면서 절제하고 휴식도 화끈하게 가지면서 절제함으로 일과 휴식을 잘 배분해서 관리하면 몸과 마음이 얼마나 건강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처럼 절제하는 삶은 몸과 마음도 건강하게 만들지만 신앙도 건강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이 일생 동안 그 많은 고난 중에서도 항상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절제하는 삶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자랑스러운 성도 >

고린도전서 10장 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반복적으로 “나도 이런 권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여러 가지 권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자유가 있지만 방종하지 않고,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삶에 바로 사도 바울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면 어떻게 자기를 절제하며 신앙생활을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랑스러운 성도는 어떤 성도인지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어떤 성도가 자랑스러운 성도일까요?

1. 복음 중심적으로 사는 성도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복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본문 바로 앞의 1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개척 목사로서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에 조금이라도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의 반대파는 바울을 모함하면서 “그 사람은 먹고 살려고 주의 종 노릇 해!”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라도 그런 오해가 있을까봐 그는 스스로 자기의 달란트를 활용해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자비를 들여서 복음 사역을 했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해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당연히 할 일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워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마음이 타는 듯하고 견딜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대개 그 일의 보상을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보상을 원했습니까? 아무 보상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복음을 값없이 전하고, 주의 종의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는 것이 그가 원하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그는 복음을 위해 어떤 일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주는 축복된 삶, 은혜로운 삶에 동참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철저히 복음 중심적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복음 중심적으로 살아야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교인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 복음 중심적인 삶입니까? 복음은 은혜입니다. 결국 은혜 중심적인 삶이 복음 중심적인 삶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그 은혜를 전파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푸는 삶이 바로 복음 중심적인 삶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면 가끔 속상한 일도 겪고, 마음에 맞지 않는 장면도 보게 됩니다. 그때 냉철한 머리를 가지고 비판하기보다는 넓은 가슴을 가지고 은혜로 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가장 다릅니까? 은혜를 앞세워 사는 것이 가장 다릅니다. 왜 은혜를 앞세워 살아야 합니까? 사실상 나 자신도 누군가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꿈을 꿨습니다. 누가 약간 제 차의 옆 부분을 받았습니다. 그 정도라면 다른 때는 그냥 보내주는 편인데 새 차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니까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꿈속에서 완전히 인간성이 드러났습니다. 제가 그 사람 멱살을 잡고 “이 사람아! 내 중학교 동창이 사준 새 차를 이렇게 만들면 돼!”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꿈에서 깬 후에 하나님 앞에 연약함을 다시 한번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그것이 저의 본 모습입니다. 저의 부족함을 지켜주세요.”

사람은 천사가 아닙니다. 성인도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다 서로에게 은혜를 주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 은혜를 나눠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머리로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판단이 정확하면 할수록 사람의 마음은 멀어집니다.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슴으로 부드럽게 감싸 안는 것입니다. 그런 넓은 가슴을 가진 성도를 하나님은 자랑스럽게 보아주실 것입니다.

2. 헌신의 가치를 아는 성도

고린도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주장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본문 13-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구약 시대에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전에 공급되는 것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만 해도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즉 성도들이 물질적으로 헌신하면 그것을 통해 사역자들이 생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이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그는 대가를 바라고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그렇게 헌신할 수 있었습니까? 진정한 축복과 은혜는 헌신하는 삶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헌신을 모르는 사람은 봄에 뿌릴 종자를 먹는 사람과 같고, 펌프에 넣으려고 보관한 바가지 물을 마시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 바가지 물을 펌프에 넣으면 엄청난 물이 펌프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급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그 바가지 물까지 마셔버리면 펌프에서 더 이상 물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왜 인생 펌프가 메말라서 은혜의 생수가 솟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의 물까지 자기가 마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진정 축복받기를 원하면 헌신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쁘게 헌신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헌신을 하지 않는 미지근한 모습 속에서는 결코 축복된 삶이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인생의 고통만 가중될 것입니다.

요새 저도 나이가 조금 들다 보니까 약간의 신경통이 있습니다. 이번 주 초에 약간의 신경통이 찾아와서 몸이 힘들었습니다. “왜 그런가? 음식을 잘못 먹었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장맛비가 시작된 것입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고 기분일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비가 오기 전에는 신경통부터 옵니다.

그처럼 신경통이 비가 오기 전에 습도가 많고 날씨가 우중충한 때에 생긴다면 이론적으로는 장맛비가 쏟아질 때에는 신경통이 더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장맛비가 쏟아질 때에는 오히려 말끔히 신경통이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까 우중충한 날씨가 문제입니다. 건조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비가 오는 것이 낫습니다. 더 나아가 본인이 샤워를 하면서 온몸을 물로 씻으면 몸이 상쾌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보면 믿음생활을 하면서 십자가를 피하고 우중충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고통도 많고 걱정과 근심, 염려와 두려움, 그리고 고민과 같은 영적 신경통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차라리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샤워를 맞이하겠다고 적극 나서면 삶의 고통과 영적인 신경통도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왜 현대인의 불행합니까? 헌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조금 힘든 일이라면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태도를 가지면 곧 불평과 불만과 분열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디에 가든지 십자가를 지고 힘든 일을 맡아서 하려고 할 때, 본인에게는 기쁨과 보람이 넘치게 되고, 교인들도 인정해주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가장 자랑스러운 교인이 될 것입니다.

3. 주는 삶을 실천하는 성도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을 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에서도 종처럼 자신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주는 사람에게는 자랑이 있고, 받는 사람에게는 자랑이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주는 기쁨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주고자 하면 감사가 충만하게 되지만 받고자 하면 불평이 충만하게 됩니다.

가끔 보면 어떤 분들은 자기도 어려운데 힘써 남을 돕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눈물이 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저를 경제적으로 축복해 주시고 저의 앞날과 가정을 지켜주소서!”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그 사랑의 씨앗은 언젠가 신비한 축복의 열매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저는 1984년에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버님으로부터 매달 3만원씩 용돈을 받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30만원쯤 될 것입니다. 남자가 술 담배를 안 하고, 화장도 안 하고, 옷도 안 사 입으니까 그 돈을 쓸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교회 생활에 올인 했습니다. 특별히 교회 대학부 일과 관련해서는 항상 먼저 냈습니다.

그러다가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대학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돈이 생겼습니다. 아무리 많이 베풀어도 돈이 남았습니다. 남들은 결혼을 위해 아파트를 장만한다고 적금을 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결혼은 그냥 하는 줄 알았습니다. 미래를 전혀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저도 지금 생각해보니까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기쁨과 보람은 잊을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돈 한 푼 없었어도 결혼은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처럼 대책 없이 사는 것은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도는 저축도 하고, 모으는 재미도 느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아껴야 할 곳에서는 최대한 아끼고, 써야 할 곳에서는 최대한 써야 합니다. 벌기는 내가 벌어도 쓸 때는 보다 많은 사람이 같이 쓰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물질 생활할 때 꼭 지켜야 할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열의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 써야 합니다. 둘째, 한달에 하루 버는 몫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써야 합니다(신 14:28-29). 즉 하나님을 위해 10분의 1, 선교와 구제를 위해 30분의 1을 쓰라는 것이 성경의 기준입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여러 선교사님들이 저희 선교회에 기도편지를 보내옵니다. 지난주에는 대학 때부터 선교회 활동을 같이 했던 필리핀의 김일로 선교사님으로부터 기도편지를 받았습니다. 산 마태오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땅 500평을 3000만원에 구입했는데 다음달 말까지 잔금을 치러야 한다고 합니다. 그 기도제목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또한 어제 모슬렘권 사역을 하시다가 잠시 방문하시는 김진영 선교사님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정길진 목사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김진영 선교사님 가족이 7월 29일에서 8월 20일까지 한국을 방문하시는데 방 두개가 있는 집과 자동차 한 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난 한 달간 자원자를 찾았는데 아직도 자원자가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자원자가 나서지 않으면 호텔비와 차 렌트비만 상당한 비용을 아깝게 지출해야 합니다. 그 자원자가 속히 나설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우리는 좋은 일을 위해 항상 앞서 나설 줄 알아야 합니다. 선교사님들이 전방의 선교지에서 고통을 식탁을 대할 때 후방에 있는 우리만 맛있는 음식을 사먹으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먹었던 것은 음식물이 아니었고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기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위해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할 때 각종 문제와 장벽들이 무너지고, 하나 됨의 역사가 일어나고, 내 영혼이 소생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는 봉사가 아닙니다. 선교는 우리의 생존과 축복을 위한 마땅한 행위입니다. 남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 살기 위해서도 우리는 선교해야 합니다.

4. 평화를 위해 애쓰는 성도

오늘 본문 20-2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거룩한 변신의 천재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본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아도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되었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처럼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얻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서든지, 그리고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평화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힘든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에 있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면 인간관계의 불화 때문입니다. 왜 인간관계에 불화가 생깁니까? 높은 마음을 가지고 대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낮아지고 약해지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진정한 권위는 권위주의를 버릴 때 주어집니다. 잘난 체 하는 자는 반드시 낮아지지만 겸손한 자는 반드시 높아질 것입니다.

또한 평화를 위해서는 어떤 사람에 대한 악 감정과 원한을 버리고 “내가 이 원수를 꼭 갚겠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한은 하나님이 다 갚아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손대기 시작하면 문제는 커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원수를 공정히 심판할 능력이 없고,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우리에게 “원수를 축복하라!”고 합니다. 원수 갚지 않는 것도 힘든데 원수를 축복하라니 미칠 지경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원수를 축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구해보십시오.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그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축복하는 능력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이고, 가장 놀라운 축복을 불러오는 힘입니다. 그 능력을 지금 이 시간에 구해보십시오.

사실 원수를 축복하라는 것은 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만약 원수에게 원한을 품으면 누가 잠을 못 잡니까? 원수는 그 시간에 잠을 잘 자도 우리가 오히려 잠을 못 잡니다. 우리가 원수에게 원한을 품으면 원수는 소화도 잘 되어도 우리는 소화가 안 됩니다. 그러면 잘못은 원수가 했는데 축복하는 마음이 준비하지 않아서 벌을 우리가 받는 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잠 잘 자고 밥 잘 먹게 원수를 축복하라고 합니다. 알고 보면 원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원수는 사단입니다. 사람은 오직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이고, 이해해야 할 대상입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원수의 입장이었다면 우리도 그렇게 행동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남의 입장이 되어보면 원수를 축복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 남의 입장이 되어보십시오 >

우리는 인간관계에 갈등과 아픔이 있을 때마다 항상 남의 입장을 생각해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그 다른 성격, 다른 처지, 다른 상황을 이해하면 됩니다. 오늘날 왜 가정이 어려워집니까?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이 자기중심적으로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베스트셀러 중에 존 그리샴 박사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부부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 즉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결혼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것이 오히려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는 여자보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닮으라!”고 하고, 여자도 남자보고 “왜 여자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느냐?”하고 싸웁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랑이 식어진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상 남자와 여자는 다른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그 다른 것도 좋게 보이는데, 사랑이 식어지면 같은 것도 싫게 보입니다. 또한 사랑이 있으면 의무에 대한 생각을 더 하게 되는데, 사랑이 없으면 권리에 대한 생각을 더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권리보다 의무를 조금 더 생각하고, 나의 입장보다 남의 입장을 조금 더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해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아침에 집에 돌아오다가 학교 가는 은혜를 보았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은혜야!”하고 소리쳤는데 은혜는 저의 말을 듣고 모른 척 외면하면서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나중에 은혜에게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장난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때 딸의 장난에도 그렇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불현듯 26년 전에 제가 길거리에서 속이 상하다고 어머님의 사랑의 손길을 뿌리쳤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때 얼마나 어머님이 마음이 아팠을까? 그때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님의 마음과 사랑을 조금씩 알아갑니다.

사람은 자신이 그 상황을 당해 봐야 상대방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JOY 선교회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교회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런 구호를 내세웁니다.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 third.” 예수님은 첫째, 다른 사람은 둘째, 당신은 셋째라는 구호입니다. 그런 구호대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가장 자랑스러운 교인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누구나 충분히 행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기에게 행복의 재료가 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행복의 원천이 있고,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자랑거리가 없는 것 같으면 만들면 됩니다.

어떻게 자랑거리를 만듭니까? 오늘 말씀처럼 복음 중심적으로 살고, 하나님께 조금 더 헌신하고, 이웃과 조금 더 나누는 삶을 살며, 언제 어디서나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보다 더욱 자랑스러운 성도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