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한규목사

하나님을 사랑할 때 생기는 것요한일서 5장 1-5절

하나님을 사랑할 때 생기는 것
요한일서 5장 1-5절

< 잘못된 사랑의 개념 >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환경도 이길 수 있고, 고달픈 인생도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지혜와 명철과 창조력과 의욕이 생깁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녀를 사랑하면 다시 일의 의욕을 가지게 되고, 아무리 시집살이가 힘들어도 남편의 따뜻한 위로와 사랑이 있으면 그런 대로 견딜 만 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도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축복도 있습니다.

한국말에서 삶, 사람, 그리고 사랑은 원래 같은 어원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어떤 허물도 덮어줍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사랑을 위대한 편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키 작은 것도 보이지 않고, 인물이나 학력도 보이지 않고, 과거에 이혼한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를 자꾸 말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지옥도 천국으로 변화시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으면 청계천이 센 강보다 아름답게 느껴지고, 사랑하는 사람의 하숙방은 베르사이유 궁전보다도 아름답게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속삭임은 어느 음악보다 감동적이고, 사랑하는 사람과는 다툼마저 행복의 씨앗입니다. 그처럼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사랑이란 말이 별로 감동도 없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지 못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사랑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모든 부모들은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사실 진짜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개념이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된 사랑의 개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 지나치게 부드러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들을 지나치게 감싸서 가르칠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아이가 버릇없이 구는데 부모가 가만히 있으면 그 자녀의 나쁜 버릇을 고쳐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잘못된 사랑이 자녀를 망치게 됩니다.

둘째, 지나치게 엄격한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집에 가면 자녀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엄격합니다. 자녀의 기를 너무 살려서도 안 되지만 너무 기를 죽여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자녀의 창조성은 망가집니다.

셋째, 지나친 소유욕은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오냐? 오냐?” 하면서 자녀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은 자녀에게 독약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태도는 사실 부모의 사랑보다는 부모의 소유욕에서 나온 태도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필요를 잘 파악해서 채워주려고 힘써야 하지만 욕망을 채워서는 안 됩니다. 지나친 풍요는 어린이들의 꿈과 비전과 보람과 도전정신을 빼앗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넷째, 지나친 방임주의는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적절한 자유를 주는 것은 필요하지만 자유를 줄수록 더 깊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대화를 요청하고 스킨십을 요구할 때 귀찮게 생각하고 “너 왜 그래! 엄마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라고 외면하면 나중에 자녀가 사춘기가 되어 마음 문을 닫을 때 자녀와 대화하고 싶어도 “엄마! 저 바빠요”라고 외면할 것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할 때 생기는 것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사랑은 무엇일까요? 참된 사랑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사랑에서 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를 한 마디로 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을 할 때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형제 사랑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의 자녀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끔 보면 형제들 중에 마음에 안 드는 형제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때로는 믿었던 형제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형제에 대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래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때로는 실망스러워도 계속 그 사람을 믿어주면 나중에는 그 사람이 진짜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선교에 최선을 다합니다. 여름이 되면 멀리 오지로 단기선교까지 나갑니다. 그러면서 자기 곁에 있는 누군가에 대해서 담을 쌓고 살면 그것은 참된 선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불쌍한 형제도 사랑해야 하지만 내 곁에 있으면서 마음이 멀어진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내 곁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있어야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미국에 가면 한국 이민자들이 낮은 자리에서는 비교적 성공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가면 한국인들은 거의 대부분 탈락하고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같은 동족끼리 너무 경쟁하며 누가 잘 되면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형제가 아니라 마귀입니다. 형제와 지나치게 경쟁하고 갈등을 일으키면 신앙의 높은 고지와 축복의 높은 고지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형제는 경쟁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교인들끼리 더욱 사랑해주고 더욱 아껴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1주일에 한번 이상 만나는 교인들이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끼리 열심히 주기도 하고 열심히 받기도 해야 합니다. 받기만 하는 것도 안 되지만 주기만 하는 것도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주는 것은 잘하는데 받는 것은 잘 못합니다. 그러나 누가 주겠다고 하면 기쁘게 받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세히 보면 사랑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사랑을 줄 줄도 압니다. 어떤 분은 누가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면 다음번에는 자기도 식사를 대접해야 한다고 사양합니다. 그런 심리를 볼 때 받지 않는 삶도 주지 않는 삶만큼 인색한 삶입니다. 우리는 잘 받고, 잘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잘 주면 잘 받게 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그 사랑 가운데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2. 순종하는 삶

본문 2절과 3절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관계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처럼 진정한 사랑에는 상대방의 말에 순종하려는 종의 자세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말로만 사랑을 말하지 말고 실제로 종처럼 그를 섬겨줄 수 있어야 합니다. 종의 자세가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무엇보다 중점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도 종의 자세입니다. 요새 우리나라 출산율은 전 세계에서 제일 낮은 여성 1인 당 1.19명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고 최초로 주신 복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이었습니다. 또한 성경은 자녀의 축복에 대해서 무수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의 저 출산은 무서운 저주입니다. 성경적인 축복의 원리에 의하면 부부 2명이 자녀를 3명 이상은 낳아야 바람직합니다.

저도 자녀가 2명밖에 없어서 그 문제로 항상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다시 낳으려니까 엄두가 안 납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연타로 세 명을 한꺼번에 낳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면 할 수 없지만 안 주시면 영적인 아이들을 많이 낳든지, 아니면 입양을 하든지 하려고 합니다.

지금 저 출산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현재의 출산율이 유지되면 현재 4846만 명인 우리나라 인구는 2015년에 4900만 명을 정점으로 점점 줄기 시작해 35년 후인 2040년엔 4280만 명, 50년 후인 2055년엔 3400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때는 주택 보급률이 200%에 달해서 아파트를 재정적 목적으로 사려는 아파트 투기(投機)보다 낡은 아파트를 내다버리는 아파트 투기(投棄)가 곳곳에서 벌어질 것입니다. 물론 입시 지옥도 없어질 것입니다.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가면 약 300년 후인 2300년경엔 30만 명만 남고, 그나마 2950년쯤에는 한민족은 지구상에서 멸종된다고 합니다. 저 출산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제는 자녀를 3명 낳으면 각종 혜택을 주고, 5명 이상을 낳으면 국가 유공자로 대우해주고, 8명 이상을 낳으면 ‘금탑 자녀 훈장’을 주고 카퍼레이드를 열어준 후에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처럼 연금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 출산의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자녀들을 적게 낳다 보니까 자녀들을 다 왕자나 공주처럼 키우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면 다 해주려고 하니까 집에서는 늘 승자입니다. 그렇게 크다가 사회에 나오면 적응을 못합니다. 집에서는 다 자기 말을 들어줬는데 사회에서는 자기 말대로 잘 들어주지 않으니까 직장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하찮은 일에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그처럼 지는 법을 모르고 지는 상황을 다스리는 지혜가 없으니까 사회의 낙오자가 됩니다.

자녀가 승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면 미리 지는 법도 잘 가르쳐야 합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국가 지도자나 최고 경영자 중에 외아들은 극히 적다고 합니다. 외아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외아들을 너무 왕자처럼 키우는 부모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왕자와 공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종의 자세를 가진 사람을 원합니다. 요새 리더의 제일 덕목으로 ‘servant leadership(종의 리더십, 섬기는 리더십)'을 꼽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자기만 생각하는 왕자처럼 키우지 말고 섬기는 종처럼 키워야 합니다.

요새 많은 부모들은 자녀의 기를 살린다고 부모의 본분과 사명을 잊어버리고,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줍니다. 그래서 백화점에서 장난감 사달라고 자빠져서 떼를 쓰면 화장실에 가서 무섭게 혼을 내줘야 하는데 결국 사줍니다. 그러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도 자빠져서 떼를 쓰는 사람이 됩니다. 요새 가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님비(nimby)식의 데모를 목격합니다. 물론 정당한 데모는 필요하지만 데모가 떼모(떼쓰는 모임)가 되도록 하면 안 됩니다.

부모의 진짜 중요한 일은 자녀들에게 종처럼 섬기는 자세를 철저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가 CEO가 되는 비결이고, 사회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자녀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자녀는 약해지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자녀로 자라지만, 자녀에게 때로는 장벽도 놓고 순종을 가르치면 자녀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랑이 넘치는 자녀로 잘 자라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순종을 낳고, 순종은 사랑의 징표입니다.

3. 기쁨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즐겁고 기쁜 것입니다. 육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시기와 질투가 나오고 오히려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항상 기쁨이 수반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말씀을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그 구절에서 사랑의 열매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것이 희락의 열매, 즉 기쁨의 열매입니다. 사랑과 기쁨은 따로 떼어 놓아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쁨 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것입니다. 기쁨 없는 찬송과 기도도 허무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쁨 없는 사랑도 죽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고생스런 일을 해도 사랑과 기쁨으로 하면 그 고생은 희생으로 변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힘들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일을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변함없이 기쁨으로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기쁘게 실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보다 기쁘게 보시고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우리 집 옆에 얼마 전까지 제가 타던 똑같은 색깔의 누비라 스패건이 서 있었습니다. 색깔과 차에 난 상처가 너무 비슷해서 저와 제 아내가 우리가 타던 차가 아닌가 열심히 차를 살펴봤습니다. 5분쯤 살펴보고 결국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서서 집에 들어가면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옛날 누비라가 보고 싶다.”

지난 8년 동안 관리도 잘 못해주는 주인을 만나 고생하면서도 충성스럽게 우리를 태워준 생각을 하니까 정말 누비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때 세차라도 자주 해줄 걸.... 누비라야! 너는 지금 어느 하늘에 있니?”

교회 돌아와서 말씀을 준비하는데 누비라 생각에 말씀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가끔 말썽을 피우면서 목적지까지 안 가겠다고 고속도로에서 버티며 서는 경우도 있었지만 8년 동안 얼마나 수고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새 차를 타고 기분은 너무 좋지만 어려웠던 시절에 고생했던 조강지처를 버린 것 같아서 누비라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차를 자주 바꾸는 사람은 정말 매정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처럼 낡은 차도 묵묵히 충성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정이 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묵묵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인 줄 알고 묵묵히 충성하며 기쁘게 감당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보다 기뻐하시고,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다 살피시고, 우리를 누구보다 기억해주시고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다니엘서에서 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미친병에 걸렸습니까? 대제국의 황제라고 자기의 위대함에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정한 기한이 차서 제 정신으로 돌아옵니다. 다니엘서는 4장 34절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언제 그의 총명이 돌아왔습니까? “하늘을 우러러보았을 때”입니다.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병들고 깨진 부분이 급속히 회복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부르는 노래도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가 속된 말로 십팔번이었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내게 바다 같은 사랑 넘치네/ 내게 샘솟는 기쁨 넘치네.”가 십팔번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4. 믿음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세상을 이기는 놀라운 믿음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능력과 축복은 믿음 안에서 주어집니다. 아무리 물질이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그곳은 사막이 되고, 무인도가 되고, 심하면 지옥이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축복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지옥을 가게 되지만 지옥에 가기 전에도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반대로 믿음이 있으면 천국에도 가지만 천국 가기 전에도 천국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물건 살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거 진짭니까?”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누가 이 믿음의 흐름을 세상에 전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해야 하고, 믿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지금 환경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어떤 환경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서 엄청난 선교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믿음의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 중국에 갔을 때 그는 거의 정신병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할 일은 많은데 후원은 없고 자기 살기도 벅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그 말씀을 읽을 때 그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습기와 양분을 얻어 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이제 그냥 예수님께 붙어만 있자!” 그때부터 그는 주님께 붙어있는 일에 더욱 신경을 썼습니다. 그와 동시에 후원이 급증하면서 열매 맺는 사역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사랑과 믿음이 있으면 변화는 일어납니다. 남편이 믿어줄 때 아내는 힘을 얻고, 아내가 믿어줄 때 남편은 힘을 얻습니다. 힘들어도 용기를 잃지 말고 “나는 하나님 안에서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고 환경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미국 역사상 링컨 다음으로 존경받는 대통령이 소아마비 루주벨트 대통령입니다. 그도 젊었을 때는 건강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다리가 마르기 시작해서 결국 휠체어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그의 부인 엘레나 여사에게 말했습니다. “남편 때문에 마음이 힘드시죠?” 그때 엘레나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다리가 아닌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아요.”

일전에 비무장지대에서 지뢰 사고로 다리를 잃은 한 대대장도 위문 온 사람들이 너무 슬퍼하니까 정작 본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걱정 마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바뀌지 않았고, 다만 제 길이 조금 바뀐 것뿐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사랑이 있는 사람에게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그런 놀라운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 끝까지 사랑으로 받아주십시오 >

이제 어떤 경우에도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말씀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조금 더 참아주고, 계속 사랑으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 사랑을 찾고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산디아고에 있는 한 저택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전쟁 나간 아들의 전화였습니다. “어머니, 저예요. 전쟁에서 간신히 살았어요.” 그 전화를 받고 어머니는 기뻐하면서 빨리 집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제가 갈 때 불쌍한 내 친구와 함께 가도 되지요? 저의 전우였는데 전쟁으로 지금은 눈과 팔과 다리가 하나씩 없어요. 그런데 갈 데가 없어서 제가 같이 데리고 가려고 해요.”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래! 며칠 동안 같이 지내려무나!” 아들이 말했습니다. “며칠 동안 같이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형제처럼 같이 지내고 싶어요.” 그 말을 듣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나중에는 큰 짐이 될 텐데.” 그래도 아들은 평생 같이 있겠다고 했습니다. 참다못해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네가 전쟁터에 나가더니 감상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기가 쉬운 줄 알아!” 그 말을 듣고 아들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다음 날, 군에서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했음. 급히 와주기 바람.” 급히 달려가 죽은 아들을 보니까 아들에게 눈과 팔과 다리가 하나씩 없었습니다. 아들은 불구자가 되고 고민 끝에 어머니와 전화를 한 후에 부모의 짐이 되지 않겠다고 자살한 것입니다. 그 아들은 자기를 받아줄 사랑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언제 절망합니까? 대개 사랑을 받지 못할 때 절망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렇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사랑과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입니다. 이제 쉽게 사랑을 포기하지 말고 그 사람을 끝까지 믿어주고, 끝까지 받아주고, 끝까지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참은 것 이상으로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사랑에는 결코 손해가 없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우연히 마술 지우개를 발견했습니다. 그 지우개는 무엇이든지 지워지는 지우개였습니다. 그는 그 지우개를 가지고 신문을 지워보았습니다. 정말 지워졌습니다. 신나서 책도 지우고, 사전도 지워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단어만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지우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문지르다가 마침내 지우개가 다 닳아졌습니다. 그 마술 지우개가 지우지 못한 단어는 바로 사랑이라는 단어였다고 합니다.

이 마술 지우개는 시간을 상징합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지울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사랑만은 지울 수 없습니다. 그처럼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져도 내가 사랑했던 시간들과 추억들과 사랑의 열매들은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내 안에 있는 사람의 샘물에서 더 많은 사랑의 샘물을 퍼 올려서 나 자신도 살고, 각박한 이 세상에 사랑의 샘물을 많이 흘려보내는 복된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anqyu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