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7-80
찬송: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세례요한의 출생(57~66)
인류 역사는 여러 차례 심각한 전염병을 경험해왔습니다. 14세기에는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1/3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500년대의 천연두는 남아메리카 문명을 몰락하게 만들었습니다. 1800년대의 콜레라도 역시 전 세계를 강타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치사율이 60%를 넘었습니다. 현재 전 세계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염을 예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적인 모든 부분의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소멸되지 않고 끊임없는 변형을 일으키고 있는 바이러스와의 험난한 싸움이 냉혹하고 처절하더라도,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보다는 기도하고 겸손하게 행함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싶어 합니다. 시험이나 취직을 준비하던 이들은 합격했다는 복음의 소식이 듣고 싶고,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에게는 임신소식이 복음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원인 모를 바이러스의 백신이 개발되고, 질병 속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치료제를 줄 수 있으며, 더 이상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다는 복음을 듣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들려주십니다. 나이가 들도록 아이를 잉태하지 못한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도 복음이 찾아와 이제 이 가정에 새 생명이 탄생하였습니다.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본문의 아이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선구자(先驅者)로서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알리기 위해 메시아보다 먼저 태어나 그 길을 평탄케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초기 기독교 문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언변이 좋았던 아볼로는 세례요한의 제자였고(행 18:24-25), 바울은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세례요한을 따르는 무리들을 만났습니다(행 19:1-3). 이는 세례요한의 사후(死後)에도 그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누가도 자신이 기록하는 복음서의 서두에 세례요한을 비중 있게 다룸으로,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출생한 요한은 사가랴와 엘리사벳만의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친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습니다. 당시 아이를 낳는 일이 무슨 큰일이라고 친족과 이웃이 함께 모여 아이의 출생을 축하하고 함께 즐거워하겠습니까? 요한의 출생이 이들에게 특별한 기쁨이 되는 이유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삶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친족과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나누었음이 분명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었던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삶은 글로만 되어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친족과 이웃에게 시현(示現) 했기에 요한의 탄생이 그들 모두의 즐거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보통 요한처럼 힘겹게 태어난 아이의 이름에는 부모와 가문의 의지와 뜻이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부정적인 의미의 이름보다는 긍정적이고 좋은 의미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양반이라도 이상한 별명 같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개똥이’입니다. 이름을 이처럼 의미 없이 부르게 된 것은 천하게 부름으로 악귀는 떠나고 복이 들어온다는 미신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도 좋지 않은 의미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아들을 낳습니다. 그 이름을 ‘가인’이라 불렀는데, ‘내가 얻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죄를 지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그럼에도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지은 이름일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벨을 낳았는데, 그 의미는 ‘허무함’입니다. 가인을 키우면서 인간의 완악함을 절실히 느낀 아담과 하와는 둘째를 낳아도 큰 기대가 사라져 그의 이름을 허무하다고 지었던 것입니다. 유다 광야 도시 마오에 살던 갈렙 집안의 나발은 ‘어리석다’는 의미입니다. 양털 깎는 축제 때 다윗은 나발에게 원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의 사절단을 모욕하고 거절함으로 분노한 다윗에게 보복을 당할 뻔했습니다. 당시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은 남편의 이름대로 정말 어리석다고 말하며 다윗을 위로하고 위기를 넘기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 따라 ‘사가랴’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 아이를 통해 부모의 아픔과 한이 해소되고 아이 없던 세월이 위로를 받으며, 사가랴 가문이 강성해질 것이라는 의미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짓겠다고 합니다. 요한은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 직무를 행하며 성전에서 분향하다가 기도하던 중 주의 사자가 명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아이의 이름을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의 당시 흔한 이름이던 요한으로 지으면서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믿음으로 인함입니다. 가문의 이름을 과감하게 거절하고 하나님의 섭리대로 요한이라고 짓는 믿음과 용기는 오늘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말을 못 하고 있던 사가랴도 서판에 요한이라고 기록하면서 이 아이를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만 키울 것이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이 부부에게 아이의 출생은 단순한 생명의 탄생만이 아닌 부모로서의 온 삶과 정신이 오직 하나님의 섭리와 그 말씀에만 있겠다는 각오와 결단이기도 했습니다.
(60~63)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사가랴는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가 아닌 ‘요한’이라 짓는 믿음의 행동을 통해 말을 못 하던 상황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믿음의 행위는 불신으로 찾아온 모든 것을 풀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언은 모든 불가능과 두려움을 몰아내고 확신과 담대함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들려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 못하고, 현실의 어려움과 나이의 한계를 이야기하며 온전히 믿지 못했던 사가랴는 불신앙의 대가로 긴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하는 순간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사가랴는 10개월간의 긴 침묵과 고통을 끝내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전히 믿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와 동시에 모든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합니다. 또한 사가랴의 찬미로 인해 그 찬양을 들은 모두가 강한 설렘과 기대감을 가지고 주의 손이 함께한다는 합창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가랴의 찬양(67~80)
사가랴의 찬양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오는 노래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의해 부르는 노래입니다. 선지자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노래하는 하는 찬양이었습니다. ‘베네딕투스(Benedictus)’이라고 불리는 이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는 68~75절입니다. 이 부분에서 사가랴는 요한의 출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에 대해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찬양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가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해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지극히 유대적인 노래이며, 시편의 많은 노래들과 사해사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노래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곤고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희미해지지 않으며, 모든 원수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뿔에 의해 망하게 될 것이라는 주제의 찬양입니다.
(68~69)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사가랴는 요한의 탄생이 이 백성을 기억하시고 돌보시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계획의 시작이라 생각했습니다. 적극적인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우리를 향해 두 팔 벌려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원수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난 400여 년간 철저하게 침묵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침묵을 깨고 우리를 향해 달려오십니다. 과거에는 심각한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렵고 무서웠다면, 이제는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 화해와 평화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두 번째 부분인 76~79절도 역시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강조되어야 할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돋는 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77~79)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해가 떠오릅니다. 새벽이 밝아옵니다. 이제 어두운 밤의 시대가 종식되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눈에 보기엔 비록 작은 아이가 태어난 것밖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 이 아이의 출생은 400년간 단절되었던 영적인 암흑기의 마침 점이며, 하나님의 밝은 빛이 비취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생명입니다. 해는 모든 것을 밝히 드러냅니다. 부끄러운 우리의 죄악도 모두 드러나겠지만, 드러나지 않으면 회복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우리는 고통스럽더라도 밝은 아침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또다시 밝은 아침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를 더 죄를 지으며 살아가게 될지, 아니면 말씀 안에서 살아가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제보다는 더 나은 삶을 원하지만, 정체될지 아니면 더 퇴보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사가랴의 굳게 닫힌 입술처럼 이 사회의 모든 것이 마치 굳게 닫힌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할 때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릴 것이며, 우리 입술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질 때 이 하루가 의미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이 사순절이 지나면 부활절이 찾아옵니다. 어둠과 절망의 시기가 지나면 밝은 아침이 찾아올 것을 믿으며 묵묵히 말씀의 길을 걸어갈 때, 주의 손이 함께하심을 우리 모두가 보게 되며 영광의 찬양을 올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원하는대로 얻을 수 있노라고 착각하는 이 시대에 불가능과 가로막힘을 만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이 시기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교만은 얼마나 높아질지 모르며, 우리의 완악함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이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시기를 아무 생각없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낮아지는 침묵속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임을 알기에 주님께서 해처림 비춰주실 그 날만을 기다립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은 그 해아래에서 멀리 물러나게 하옵시고, 오직 우리 입술의 절망과 탄식이 주를 향한 찬양으로만 가득하게 하옵소서. 나의 힘이신 하나님만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나는 지금 어떤 복음을 듣고 싶어 합니까? 복음을 나의 말로 정의해봅시다.
2. 나의 친족과 이웃, 동료에게 나는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시현(示現)하고 있습니까?
3. 믿음은 세상의 ‘사가랴’를 포기하고, 말씀의 ‘요한’을 붙잡는 것입니다. 내가 버릴 ‘사가랴’는 무엇이며, 내가 붙잡을 ‘요한’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만이 희망입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해가 비춰져야 할 곳을 묵상하며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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