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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 행복론 시리즈 - 권성수 목사

기독교 행복론 시리즈 -권성수 목사

 

 

기독교 행복론(1): 하나님을 기뻐하라 (시편 37:1-9)

Christian Hedonism(1): Take Delight in the Lord
권성수

1. 행복의 의미 (The Meaning of Christian Happiness)
* 무한한 갈망과 무한한 충족 (Infinite longing and infinite satisfaction)
* 행복 = 찬양, 기도, 뜻 순종 (Delight in praising, praying to, and obeying God)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 하나님을 기뻐하겠는 의지 (Will to take delight in God)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하박국 3:17-19).

2. 행복의 근거 (The Ground of Christian Happiness)
* 예수의 행복 (Jesus' happiness) (요한복음 15:11)
* 바울의 기쁨 (Paul the apostle's joy) (빌립보 2:17-18)
* 시편의 기쁨 (Joy in Psalms)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시편 36:7-8).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시편 43:4).

3. 행복의 효과 (The Effect of Christian Happiness)
* 하나님의 영광 (Glory to God)
* 고통속의 활력 (Energy amid adversity) (느헤미야 8:10)
* 유혹들의 극복 (Overcoming temptations)



기독교 행복론(1): 하나님을 기뻐하라 (시편 37:1-9)

어제 저녁 우리나라 야구팀이 쿠바 야구팀과 결승전을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3:2로 이긴 상태에서 9회 말. 쿠바가 한 점만 따면 동점이 되고 두 점만 따면 우리나라가 집니다. 온 국민이 조마조마하게 보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한꺼번에 쿠바의 두 선수를 잡았습니다. 그것을 병살(倂殺)이라고 하지요. 쿠바는 ‘쓰리 아웃’(three out)으로 물러났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번 베이징 올림픽 야구 게임에서 야구의 강호 일본을 두 번이나 이기고, 야구의 종주국 미국도 이기고, 4번 올림픽에서 3번 금메달을 딴 최강팀 쿠바도 이겼습니다. 우리나라는 전승으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쿠바를 이기는 순간 야구 선수들은 물론 서울 잠심 야구장과 대구의 국채보상공원에서 대형 전광판을 통해 야구를 보던 국민들과 텔레비전 앞에서 야구를 보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와, 우리가 이겼다!’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파트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온 국민이 짜릿한 승리의 쾌감을 맛보고 환호했습니다.

‘기뻐한다, 즐거워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심감이 났습니다. 승리를 기뻐한다는 말은 이해가 됩니다. 음식을 즐긴다는 말도 이해가 됩니다. 돈을 좋아한다는 말도 이해가 됩니다. 자식을 좋아한다는 말도 이해가 됩니다.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말이 선뜻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1. 행복의 의미

탁월한 수학자겸 철학자인 파스칼(Pascal, 1623-1662)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한 때 참된 행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그 흔적을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로 채우려고 하는데 그것은 헛수고입니다. ... 무한한 심연은 오직 무한하시고 불변하시는 존재, 즉 하나님 자신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행복했던 인간이 죄 때문에 행복을 상실했습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상실한 행복을 찾기를 원하지만 찾지 못해서 뻥 뚫린 가슴을 안고 삽니다. 돈이나 쾌락이나 자식으로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뻥 뚫린 가슴!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행복의 욕구, 이것은 무한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만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아기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만 있으면 행복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만 만나면 행복합니다. 아기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금방 엄마를 찾다가 엄마가 없으면 웁니다. 인간은 돈과 권력과 성공 등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행복을 줄 수 있는 뭔가를 또 찾습니다. 인간이 몰라서 그럴 뿐, 인간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가져도 행복하지 않고 공허하기만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만 행복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참된 행복을 맛봅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어야 참된 기쁨을 맛봅니다. 우리는 올림픽 야구 게임을 통해서 승리를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딸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엄마, 그 사람은 정말 좋아요.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해요.”라고 계속 그 사람을 칭찬합니다. 고향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저 고향 산천만 봐도 온갖 스트레스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좋다고 늘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난 예수가 좋다오! 난 예수가 좋다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찬양입니다. 온 국민이 승리의 환호성을 지른 것처럼, 찬양은 하나님 안에서 찾은 행복의 환호성입니다. 찬양은 행복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찬양이 살아날 뿐 아니라, 기도가 살아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좋아합니다. 여자 역도 무제한급 장미란 선수의 미니홈피에 “나의 작은 기도로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이란 표어가 나옵니다. 장미란 선수는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즐기는 선수입니다. 베이징 야구 시상식에서 애국가가 전 세계에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제일 높은 가운데 자리에서 서서히 상승할 때 우리나라 야구 선수들 중에 눈을 감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저게 바로 대한민국의 저력이구나!” 싶었습니다. 야구 선수들이 땀을 흘리면서 훈련도 많이 했지만,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게임을 한 것입니다. 올림픽 선수들이 세계인들의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은 대한민국 선수들 외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연인을 좋아하면 연인의 말을 들어주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다윗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고 했습니다(시 119:103). 하나님을 기뻐하면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미 6:8).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께 물질을 드릴 때도 인색하지 않고 즐겁게 드립니다(고후 9:7).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명령이 가능한 것입니까?

어떤 여성도가 “저년은 No, 이년은 Yes.”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년’은 예수님을 오래 믿었지만 화끈한 은사를 받지 못했습니다. ‘저년’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화끈한 은사를 받아 교인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질투가 난 여성도가 “주님, 저년에게는 은사를 주지 마십시오.”라는 뜻에서 “저년은 No”라고 기도하고, “주님, 이년에게는 화끈한 은사를 주시옵소서.”라는 뜻에서 “이년은 Yes.”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시편 37편의 저자는 불의를 행하면서도 잘 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악인이 자기 꾀를 이루고 형통합니다(7절). 의인은 가난하고 악인은 풍부합니다(16절). 악인이 무성한 나뭇잎처럼 큰 세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35절).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32절).

“하나님, 저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도 잘 되는데, 저는 바로 살려고 하는데 꼬이기만 하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 솔직히 질투가 납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 화끈한 은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저년은 No, 이년은 Yes.”라고 기도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불의를 행하면서도 형통하는 사람을 보고 불평과 질투가 절로 나오는 상황 속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웃음이 없는 얼굴에 웃음을 그려 넣으라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은 기쁨과 행복이 기분이라는 착각에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기쁨과 행복은 기분을 포함하지만, 기분만이 아닙니다. 기쁨은 의지의 선택, 의지의 순종, 의지의 결단입니다. 기뻐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합 3:17-19).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하박국은 하나님을 기뻐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각오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행복하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기로 각오하시면 항상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의지적인 선택입니다.


2. 행복의 근거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행복한 것이 정당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슬픔의 사람’(사 53:4)이셨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이루신 ‘기쁨의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 15:11). 예수님은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우리는 충만한 기쁨으로 행복하게 사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습니다(빌 2:17-18). 바울은 고통의 환경으로 보면 항상 “근심하는(sorrowful) 자” 같았지만 사실은 “항상 기뻐”했습니다 (고후 6:10). 바울 사도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행복하게 살려고 할 때에 큰 걸림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행복을 좋아하시는가? 하나님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을 좋아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20대 청년 시절 하나님이 제가 행복한 것을 차마 보시지 못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제가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고소해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행복한 것을 시기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많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행복을 좋아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후에 깨닫고 보니, 하나님은 제가 행복해지는 것을 싫어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많은 고통을 허용하신 것은 저를 다듬으셔서 더 나은 인물로 만드시려는 고귀한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가 더 행복해지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고난을 허용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죽게 하신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사망과 지옥의 불행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의와 생명과 천국의 행복한 삶을 보장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어이 행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을 참으로 원하십니다. 시편의 몇 구절만 보아도 그것은 확실한 진리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the river of thy delights)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시 36:7-8).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시 43:4).

베들레헴 침례교회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님은 목회는 아픔과 행복의 혼합이라고 했습니다. 목회는 너무 큰 황폐(devastation)와 너무 큰 기쁨(delight)이 섞여 있다고 했습니다. 목회자가 행복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행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존 파이퍼는 “내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내 안에서 가장 영화스럽습니다.”고 했습니다.

저는 100% 공감입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때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목회가 참으로 행복합니다. 저는 행복한 목회자입니다. 목회만이 아니라 인생은 아픔과 기쁨의 혼합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는 슬퍼해야 하지만(마 5:4), 은혜로우신 하나님 때문에는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의 현실 속에서 항상 슬퍼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겠다고 각오하고 살아야 합니다.


3. 행복의 효과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 장로교회가 받아들이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에 대한 답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즐기는 것은 같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우리에게 기쁨이 넘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기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얻으면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영광을 받으십니다.

18세기 미국의 부흥사요 신학자요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보일 때에 영광을 받으시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즐길 때에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수단이야 어떠하든 모두 그런 목적이 있습니다. 전쟁에 가는 것이나 전쟁을 피하는 것도 견해만 다를 뿐 행복하려는 갈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의 모든 동기, 심지어 목매어 죽는 사람들의 동기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행복추구는 죄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입니다. 중력의 법칙이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행복의 추구는 마음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 추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욕망이 너무 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작은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도 하지 못해서 슬럼가에서 진흙 놀이하는 것을 해변의 바캉스보다 더 좋아하는 아이처럼 살고 있습니다(C. S. Lewis).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마땅히 간절하게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기는 행복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우리의 어떤 역경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했습니다 (느 8:10).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니 우리는 힘이 납니다. 힘이 나니까, 어떤 역경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때에,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드러나게 하십니다(6절). 하나님은 우리로 땅을 차지하게, 즉 땅에서 잘 되게 하십니다(9, 11절).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붙잡아주시고 (17절) 우리의 걸음이 실족하게 않게 하십니다(31절).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져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게 하십니다(24절). 하나님은 환난과 기근 중에도 우리가 풍족하게 하십니다(19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한 미래를 보장하십니다(37절). 하나님은 우리를 삶의 모든 고통과 위험에서 구원해 주십니다(39-40절).

하나님을 기뻐하면 역경 속에서 견디는 힘을 얻을 뿐 아니라 죄악의 능력을 깨뜨리는 비결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즐기는 사람은 자기를 유혹하는 미끼가 맛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욕망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공장입니다. 죄는 강력하고, 죄를 짓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매혹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면 죄의 쇠고랑을 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면 죄악의 즐거움에는 끌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즐기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기면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기면 죄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아기는 엄마가 없으면 우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하면 불안합니다. 아기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엄마를 찾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존재입니다. 아기가 엄마 품에만 있으면 흡족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 만족합니다. 죄와 고통이 많은 세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기뻐하기로 작정하십시오.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기독교 행복론(2): 하나님의 행복 (시편 33:9-12)

Christian Hedonism(2): The Happiness of God

권성수

우리의 행복← 하나님의 행복← 하나님의 주권.
Our happiness← God's happiness← God's sovereignty

1. 하나님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God) (9-11절)

(1) 좌절 없음 (No frustration)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15:3).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다니엘 4:34-35).

(2) 재난 포함 (Including disasters)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사도행전 4:27-28).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 (창 50:20).
(3) 내면 조류 (Deep current)


2. 두 가지 렌즈 (Two Lenses)

(1)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2) 십자가, 191호기 (Cross, Flight 191)

(3) 하나님의 영광/ 아들/ 일 (God's glory/ Son/ work)


3. 절대 선(善)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Absolute Good)

(1) 최고 최상의 절대자 (Most High God)

(2) 하나님 찬양이 행복 (Happiness of praises)

(3) 하나님의 복된 백성 (Happy people of God) (12절)



기독교 행복론(2): 하나님의 행복 (시편 33:9-12)

며칠 전 서울 관악구 봉천동 ‘꿈꾸는 교회’ 담임 목사님과 사모님, 부목사님 한 분, 또 다른 부목사님과 사모님, 진해에 있는 ‘꿈꾸는 교회’ 담임목사님과 사모님과 다섯 살짜리 딸, 그리고 현지 교회 집사님 2명이 필리핀에서 선교센터 건립을 위해 자동차로 여행하시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만사를 통제하신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지난번에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의 근거라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가 항상 찡그리고 있으면 자녀들은 불편합니다. 아버지가 신경질을 부려도 자녀들은 초조합니다. 아버지가 불평과 원망을 털어놓으면 자녀들은 불안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행복하면 자녀들도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행복하십니다. 하나님이 행복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의 근거는 하나님의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의 근거는 하나님의 행복이고, 하나님의 행복의 근거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다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속이 상합니다. 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신용을 잃고 체통이 깎이고 수치스럽습니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하고 실망합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말하는 대로 되지 않고,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 때에 행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대로 다 되고, 말하시는 대로 다 되고, 계획하신 대로 다 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행복하십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주권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죄악과 역경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행복하실 수 있을까요?


본문 9절에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그가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고, 명령하신대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10절에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나라들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 그 계획들을 꺾으십니다. 하나님은 민족의 사상이 하나님의 목적에 위배될 때 그 사상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11절에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계획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시고, 생각하신 대로 그대로 실천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한 계획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대대로 유효합니다.

시편 115편 3절에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자신의 영광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의 유익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행복이 그리스도인들이 마시고 또 더 마시기 원하는 행복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절대로 꺾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좌절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으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사 46:9-10). 만일 하나님의 목적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하나님보다 더 큰 어떤 세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을 꺾는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큰 어떤 세력은 절대로 없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단 4:34-35).


하나님의 주권은 재앙까지 포함합니다.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램애 3:38).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암 3:6). 하나님은 악을 만드시지 않지만 모든 악이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욥의 경우처럼 사탄이 욥의 자식들과 재산을 다 날리는 재난과 욥의 몸에 악창이 나는 질병을 당하게 했지만, 사탄이 일으킨 그런 재난과 질병도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입니다(욥 2:10).

모든 악이 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다는 가장 명백한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누가 계획했습니까?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과 군중들과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여기까지는 인간들의 죄악)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 4:27-28).

하나님은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악한 왕들도 통제하십니다(계 17).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수로]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잠 21;1).

모든 재난과 고통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악한 의도가 하나님의 목적을 꺾지 못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 (창 50:20). 요셉의 경우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경우 하나님은 악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한 결과가 나타나게 하십니다(롬 8:28).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하나님이 모든 일을 작정하십니다(잠 16:33). 참새가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루어집니다(마 10:29).

그린란드의 차가운 바닷물 속에는 무수한 빙하들이 있습니다. 작은 빙하들도 있고 거대한 빙하들도 있습니다. 빙하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빙하 조각들은 이쪽으로 움직이는데 물속에 있는 큰 빙하들은 저쪽으로 움직입니다. 왜 그럴까요? 수면의 얼음 조각들은 바람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수심의 빙하들은 조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우리가 시련과 역경에 부딪힐 때에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두 종류의 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표면의 바람이요, 다른 하나는 내면의 조류입니다. 바람은 예측할 없는 인간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조류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한 결과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통제하셔서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원하시는 대로 이루시는데 왜 세상에는 이렇게 악과 고통이 많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왜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선교센터를 짓기 위해 가던 길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습니까?

18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겸 목회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주권 문제로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무시한 교리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에게 하나님의 주권이 “즐거운 확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제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죄악과 고통이 이렇게 많은데 하나님이 어떻게 행복하실 수 있을까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하나님은 두 렌즈로 세상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선교하러 필리핀에 나갔던 10명이 교통사고로 죽은 사건--좁은 렌즈로 보면 그것은 분명히 슬픈 일입니다(겔 18:32). 선교지에서 변고를 당한 그 10명이 바로 천국 낙원에 입성해서 주님의 품에 안겨 지복의 삶을 산다--이런 넓은 렌즈로 보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린 사건--좁은 렌즈로 보면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천사들도 그를 영원히 찬양합니다(사 53:4, 10; 롬 3:25-26; 히 2:10; 계 5:9-10). 이것이 넓은 렌즈로 보는 것입니다. 좁은 렌즈는 슬픔을 주지만, 넓은 렌즈는 기쁨을 줍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191호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비행기가 연착하는 바람에 그 비행기를 탈 수 없었습니다. 그는 254명의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추락 사고를 간신히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선하신 하나님이 기적적인 주권으로 보호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기사가 나가자 어떤 독자가 정반대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에드워즈 엘리어트라는 목사님이 191호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달려가셨고 그 목사님은 추락한 비행기 안에서 죽었습니다. 목사님이 추락한 비행기 안에서 죽은 것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보호하신 사건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비행기 안에서 세상을 떠난 목사님도 기적적으로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고통의 세상에서 기쁨의 천국으로 바로 불러가셨습니다. 목사님은 공항으로 달려가셨지만, 하나님은 목사님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달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추락할 비행기를 타지 않은 것도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이고, 공항으로 달려가 추락할 비행기를 탄 것도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추락한 것만 보는 것은 좁은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추락한 비행기로 달려가신 목사님이 천국으로 달려가셨다는 것을 보는 것은 넓은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투자자 중의 한 사람 존 템플턴은 불경기를 맞아 남들이 비관할 때는 주식을 사들이고 호경기를 맞아 남들이 낙관할 때는 주식을 내다 팔았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1997년 한국에 IMF 외환위기 때도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9.11 테러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도망치기에 바빴던 때에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템플턴은 “햇살만 내려 쪼이는 곳은 사막이 된다.”는 말로 호경기만 있는 사회는 오히려 위험한 사회임을 지적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폭풍우만 보는 것은 좁은 렌즈이지만, 그런 폭풍우가 대지를 적시고 동식물을 살찌우는 것을 보는 것은 넓은 렌즈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하신 뜻대로 이루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넓은 렌즈로 오늘의 현실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건을 다 사용하셔서 구원이라는 장엄한 모자이크 작품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넓은 렌즈로 보실 때 하나님은 항상 행복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행복의 기초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의 행복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절대 주권으로 통제하십니다. 하나님은 좌절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하시는 모든 일을 깊이 음미하시는 행복하신 하나님입니다(시 104:31). 하나님은 모든 것을 구원역사와 연결해서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각도에서 자신의 영광을 즐기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아름다우심, 경외심을 유발하는 광채, 도덕적으로 무한히 탁월하신 성품, 무한한 위대성과 가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무한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또 자신의 아들의 영광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시면서 행복해 하십니다(사 42:1; 마 3:17; 요 1:1; 골 2:9; 히 1:3).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일의 영광을 즐기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창조와 구원의 일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행복이 창조와 구원의 일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최고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은 없다. 나는 나의 영광을 위해 창조했고 구원한다. 나는 나의 영광을 즐긴다. 너희들은 나의 영광을 드러내라. 너희들은 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라.’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말씀하실까요? 사랑은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고전 13:5),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실까요? 하나님이 자기도취에 빠지셨을까요? 하나님은 자화자찬 하시는 분일까요? 하나님은 자기만 아는 폭군이실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위에 어떤 다른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존재이시기 때문에 더 이상의 존재에 관심을 돌리실 수가 없습니다. 최고의 존재이신 하나님이 누구에게 “저는 별 존재가 아닙니다. 제가 별 수 있습니까?”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의 무한한 가치를 부인하시면, 자신 외에 자신보다 더 높은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즐기시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즐기신다고 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 자신만을 위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무한히 완전하게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찬양할 때 우리는 행복의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아기를 볼 때도 “아, 귀여운 애기 좀 봐. 손도 예쁘고, 귀도 귀엽네.”하고 감탄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보면서도 감탄합니다. 우리는 폭죽으로 불꽃이 하늘을 수놓을 때도 탄복합니다. 귀여운 아기를 보고 가만히 있으면 답답합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다양한 색깔의 영롱한 무지개를 보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영혼의 고문입니다. 각양각색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을 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고역입니다.

우리가 무한히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이 답답합니다. 우리가 무한히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의 기쁨이 완성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은 고역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즐기시는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위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으로 행복해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찬양할 때 우리도 행복의 극치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엡 1:4-6, 12, 14; 살후 1:10).

본문 12절 말씀대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 하나님의 행복을 자기 행복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행복해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주권으로 우리를 괴롭히시는 폭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건져내셔서 천국 낙원에서 영원히 살게 하시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무서운 교리가 아니라 즐거운 교리입니다.

모든 것을 뜻대로 하시는 하나님은 행복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에는 죄악과 고통이 많아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넓은 렌즈로 보시고 행복해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넓은 렌즈를 가지고 오늘의 고통의 현실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행복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도 늘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에게 “즐거운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기독교 행복론(3): 회심(回心)은 행복의 문

 (계시록 3:14-22)

Christian Hedonism(3): Conversion, the Door to Happiness

 권성수

1. 미지근한 불행 (Unhappiness in Lukewarmness)

 * 생수 통로가 막힌 신앙 (Blocked channel of living water) * 스펄젼 목사님의 경고 (Warning from Charles Spurgeon) * 풍요 속에 잠든 신앙인 (Spiritual sleep in affluent society)

2. 죄를 회개하라 (Repentance from Sin)

* 미지근한 상태에서 벗어나라 (Arise from lukewarm faith) * 회개는 지정의(知情意) 반응 (Intellectual, emotional, and volitional change) *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 (Confession of Augustinus)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

3. 주를 신뢰하라 (Faith in the Savior-Lord)

* 예수님을 왕좌에 (Enthrone Jesus in your heart) * 믿음, 윤리, 비전 (Faith, proper conduct, and vision) * 믿음 = 지식 + 승인 + 신뢰 Faith = Knowledge + Approval + Trust 존 맥스웰 (John Maxwell), <실패해도 앞으로 나가라>(Failing Forward) “실패해도 그리스도에게 나가라” (Failing Christward).

 

기독교 행복론(3): 회심(回心)은 행복의 문

(계시록 3:14-22)

 

지난번에 우리의 행복의 근거는 하나님의 행복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행복은 하나님의 주권에 기초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원하시는 대로 하시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행복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전심전력 하십니다(사 48:11). 하나님은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전심전력 하십니다(렘 32:41).

그런데 왜 우리들 중에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까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데도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행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15절).

에스겔 47장 말씀대로 예수님의 생수가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생수가 흘러가는 곳마다 팔팔하게 살아나는 행복이 있습니다. 신앙이 미지근한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과 행복의 통로가 끊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생명의 약동이 없고 생명의 감격이 없습니다. 그것이 불행입니다.

 현재 터키의 서남쪽 히에라볼리(현재 파묵깔레)는 섭씨 35도의 뜨거운 온천으로 유명합니다. 히엘라볼리의 뜨거운 물이 라오디게아 근처에 오면 아주 미지근한 물이 됩니다. 그 물이 골로새에 가면 아주 차가운 물이 됩니다.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한 물은 마시면 토할 것 같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신앙은 주님이 토할 만큼 미지근했습니다.

19세기 세계 최고의 설교가 스펄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12명의 진지한 심령들을 주시고, 나를 런던 어디에라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좋은 도우심으로 곧 광야와 적막한 땅으로 즐거워하게 만들 것입니다. 마음을 절반만 바치고 결단력과 관심이 없는 여러분 모두를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단지 사람들의 열정과 진심을 막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미지근한 교인 5천명은 5천 개의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영혼들을 구원하기로 결심한 12명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심령은 너끈히 승리합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미지근하면서도 나름대로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17절에 의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시는 은행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직물업으로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안과대학에서 만든 안약으로 눈병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물질적으로 부유한 것을 영적으로 부유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물질적으로 잘 살다가 보니까 영적으로 “자장! 자장! 자장!”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무디 기념교회의 위어스비(Wiersbe) 목사님이 지적한 대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물질적인 부와 번쩍이는 통계가 사실은 썩어가고 있는 시체를 감싸고 있는 수의”였습니다. 17절 말씀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은행업으로 부유했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했습니다. 안과대학으로 유명했지만 영적으로는 눈이 멀었습니다. 직물업으로 유명했지만 영적으로는 벌거벗었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눈멀고 벌거벗은 거지”였습니다.

신앙이 미지근하면 불행합니다.

대충대충 믿는 사람들은 행복을 모릅니다. 세상에도 한 발, 주님에게도 한 발을 걸친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그들 속에 예수님의 생명과 희망이 흐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희망이 흐르지 않으니 감격과 감사와 행복이 없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생활이 불행하다면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주님은 19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책망한다고 하시면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하면서도 부유한 것으로 생각하고 벌거벗었으면서도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생각하는 착각과 교만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편리한 생활을 하면서 빠져든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지은 죄를 지성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해 감성적으로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은 죄에서 의지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변화된 마음과 변화된 삶으로 나타납니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회개하는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믿는 회개가 진짜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주시는 구원자(Savior)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인도하시는 주님(Lord)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을 삶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데 필수이고, 그리스도를 삶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에게 굴복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배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사 55:6-7; 행 2:37-38; 3:19; 5:3; 17:30; 20:21; 롬 2:4; 고후 7:10; 히 6:1).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죄를 지적하심으로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의 경우 물질에 대한 탐욕을 지적하셨습니다(눅 18:22). 니고데모의 경우 지식의 교만을 지적하셨습니다(요 3:1-21). 삭게오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함과 동시에 예수님을 삶의 주님으로 삼아 부정축재와 횡령의 죄를 청산했습니다(눅 19:1-10). 회개는 하지 않고 믿는다고 하니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보아도 소용이 없더라. 아무 변화가 없더라.”고 하는 것은 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살던 잘못된 삶을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이 믿기만 하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악인이 그 악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앙심을 품고 있는데 행복할 수 있습니까? 결혼 테두리 바깥에서 간음을 하고도 행복할 수 있습니까? 악에서 돌이켜야 마음이 편합니다. 용서할 사람 용서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행복합니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길목에서 가장 놀라운 영향을 미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책 <참회록>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이웃집에서 노는 아이들이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고 부르는 노래를 듣고 쓰디 쓴 마음으로 회개하면서 통곡했습니다. 저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펴서 제일 먼저 발견하는 부분을 읽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저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닦고 일어났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가 쓴 성경을 다시 펼쳐서 조용하게 제 눈이 제일 먼저 닿는 곳을 읽었습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저 더 이상 읽지 않았고,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끝 부분을 읽을 때에 갑자기 평안의 빛이 제 마음 속으로 밀려들어왔고 의심의 모든 어둠이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방탕과 음란의 악한 길에서 돌이켰고, 그 결과 놀라운 행복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예수님에게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면 그것이 바로 행복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계속 믿으면서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서 몰아냈을 때에는 예수님을 다시 마음의 왕좌로 모셔야 행복을 회복합니다. 주님은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해결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다시 모시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18절 말씀대로 “불로 연단한 금” 같은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이 있으면 마음에 불이 붙습니다. 믿음이 강해져서 성경이 절실히 믿어지니까 생명의 양식을 먹어 행복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흰 옷”과 같은 바른 행위를 주셔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게 해 주십니다. 바로 살면 마음에 불이 붙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가 없으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가짜 영수증 쓰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혈기를 부리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미워하고 앙심을 품고 용서하지 않으니까 스스로도 부끄럽고 남들에게도 부끄러워서 불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바르게 살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약을 눈에 발라” 영적인 것을 밝히 보게 해 주십니다. 안약을 발라 보게 되니까 행복합니다. 천국도 보이고 지옥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고 하나님의 영광, 임재, 영생도 보이고 내가 왜 이 땅에 왔는지, 뭐하다가 가야 하는지도 보이니까 행복합니다. 귀로 듣기만 하다가 눈으로 보니까 행복합니다(욥 42:5). 영적인 소경이 눈을 떠서 하나님의 세계를 보니까 행복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35년 간 정확하게 말해서 허무주의자였습니다. 사회주의 혁명가가 아니라 아무것도 믿지 않는 허무주의자였습니다. 5년 전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 저의 삶 전체가 갑자기 변화되었습니다. ... 삶과 죽음이 더 이상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절망 대신에 죽음이 빼앗아가지 못하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톨스토이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절망 대신에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삽니다.

회심은 회개와 믿음을 합친 것입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knowledge)과 아는 것에 동의하는 승인(approval)과 아는 것에 동의한 대로 자신과 자신의 삶을 던지는 신뢰(trust)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롬 10:14).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을 알아야 믿습니다. 절벽 아래 사자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손만 잡으면 사자들에게 떨어져 먹히지 않도록 건져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지식입니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알고도 반항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롬 1:32). 귀신들도 예수님을 알지만 믿지는 않습니다(약 2:19). 지식만이 아니라 수긍이 필요합니다. 수긍이란 아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알고 수긍했습니다(요 3:2). 알고 수긍하는 것은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고집 부리는 것과 다릅니다. 절벽 아래 사자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손만 잡으면 사자들에게 떨어져 먹히지 않도록 건져주신다는 사실을 알면서 인정하는 것이 수긍입니다. 지식과 수긍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구약을 알고 수긍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았습니다(행 26:28). 지식과 수긍과 함께 신뢰가 있어야 참된 믿음입니다. 신뢰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생명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절벽 아래 사자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손만 잡으면 사자들에게 떨어져 먹히지 않도록 건져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수긍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는 것이 신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 1:12). 손님을 집안으로 영접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 영접해 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올인(all-in)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존 맥스웰은 <실패해도 앞으로 나가라>(Failing Forward)라는 책에서 싱가포르의 성공 비결을 소개했습니다. 싱가포르는 1959년 영국에서 독립했을 때 최고의 희망은 말레이시아에 배속되는 것이었습니다. 싱가포르가 1963년 말레이시아에 배속되었으나 2년 후에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와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 때 싱가포르는 스스로 그 난관에서 빠져나오는 길밖에 희망이 없었습니다. 싱가포르의 42세의 지도자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산업을 일으키고, 공공 주택을 건립하고, 국민들을 교육하고, 은행 시스템을 만들고, 여행 산업을 독려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싱가포르는 걸핏하면 파업하고 하루걸러 데모하는 등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콴유는 공장 건설은 일본과 독일, 은행과 금용은 스웨덴과 홀란드, 육군은 이스라엘, 공군과 해군은 뉴질랜드와 호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싱가포르는 한 때 실패했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감으로써 국민소득 세계 10위 안의 부국이 되었습니다. 싱가포르는 제주도의 1/3만한 작은 국토에 인구는 고작 400만 밖에 되지 않지만, 실패해도 꾸준히 앞으로 나감으로써 세계적인 강국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실패해도 그리스도에게 나가라”(Failing Christward)는 메시지가 떠올랐습니다. 실패해도 그리스도에게 나가고 죄를 지어도 그리스도에게 나가면 삽니다. 절망 밖에 없어도 그리스도에게 나가면 희망의 빛이 비춰옵니다. 살 길이 막연해도 그리스도에게로 꾸준히 나가면 살길이 열립니다. 우리를 불행에 빠뜨린 악한 길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에게 나가면 행복의 원천에서 솟구치는 행복의 생수를 매일 매순간 마실 수 있습니다.

회심은 죄에서 돌이켜서 그리스도에 나가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심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만 하는 것(마 11:28-30)이 아니라 평생 계속 하는 것(계 3:20)입니다. 주기도에 나오는 대로 우리를 용서해 달라는 회개는 평생 하는 것입니다(마 6:12). 바울은 평생 매순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평생 매순간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갈 2:20). 매일 회개하고 매일 예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습니까? 예수님을 삶의 주님으로 믿습니까? 예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믿습니까? 모든 것을 팔아 보물이 숨겨진 밭을 산 것처럼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예수님을 보배로 삼고 계십니까? (마 13:44).

행복의 문을 여는 비결은 회심입니다.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모실 뿐 아니라 삶의 주님으로, 삶의 보배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엇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기독교 행복의 출발점입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 보배 중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십시오.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의 가장 귀한 보배로 삼으시면 여러분 속에서는 행복과 만족의 생수가 솟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취향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갈망이 생깁니다. 관념이던 그리스도, 토론의 대상이던 그리스도가 기쁨의 보물이 됩니다. 새로운 행복이 태어납니다. 미지근한 신앙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즉시 청산하셔야 합니다. 악한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삶의 주님으로 섬겨야 합니다.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날마다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롬 15:13).

하나님을 사모하는 새로운 맛, 새로운 갈망, 새로운 열정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의욕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매일 매순간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가갈 때 행복은 여러분의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예수님을 대충 믿으면 행복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배로 믿으면 행복이 넘칩니다. 회개와 믿음, 즉 회심이 행복을 여는 문입니다.

 

 

기독교 행복론(4): 예배는 행복의 잔치

(요한복음 4:20-24)

 Christian Hedonism(4): Worship, the Feast of Happiness

권성수

 

1. 바로 깨달아야 예배가 잔치 (Understanding through Shock-Therapy)

 제1충격: 사마리아 통과 (Passing through Samaria) 제2충격: 윤락녀와 대화 (Conversation with a harlot) 제3충격: 물에서 생수로 (From water to living water) 제4충격: 영생하는 생수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제5충격: 남편 불러오라 ("Call your husband.") 제6충격: 영과 진리로 (Worship in spirit and truth) 제7충격: 내가 메시야 ("I am the Messiah.")

 2. 영으로 드려야 예배가 잔치 (Worship in Spirit)

* 마음(heat)으로 드리는 예배 (Worship in heart by knowing how to worship) * 성령님의 감동으로 영의 예배 (Worship in spirit inspired by the Holy Spirit) * 놀란 침묵(stunned worship)→ 경외 경탄(awe and wonder)→ 통회 갈망(contrition and longing) → 기쁨 희망(joy and hope)

3. 진리로 드려야 예배가 잔치 (Worship in Truth)

 * 머리(light)로 드리는 예배 (Worship in mind by knowing whom to worship) * 아버지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 (God is the fountain of living water) * 예수 그리스도로 아는 하나님 (4:13-14) (Know God through Jesus Christ) 행복의 잔치 (The feast of happiness) 행복의 샘물 (The spring of happiness)

 

기독교 행복론(4): 예배는 행복의 잔치

 (요한복음 4:20-24)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행복한 생활입니다(시 37:4). 우리의 행복의 근거는 아버지 하나님의 행복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만사를 자신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시는 행복한 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행복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와 믿음, 즉 회심(回心)의 문을 열고 행복의 집에 들어갑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느끼고 청산하는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수긍하고 영접하는 믿음을 통해서 행복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만 회개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평생 회개하고 평생 믿습니다. 평생 매일 매순간 잘못된 것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귀한 삶의 보배로 삼고 믿을 때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예배는 행복의 잔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드리는 예배에서 행복의 잔치에 참여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예배는 드려야 하고 드리게 되니까 드리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하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입니까? 말씀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있는 정도입니까? 예배의 감격이 있고 예배가 고대되고 예배가 삶의 원동력이 됩니까? 예배가 정말 여러분에게 행복의 잔치입니까?

 

1. 바로 깨달아야 예배가 잔치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과 오늘 우리들이 예배가 무엇인지 잘 깨닫지 못하고 덤덤하고 멍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영적인 잠을 깨우시기 위해서 충격적인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둘러서 갈릴리로 갔지만, 예수님은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피가 불순한 혼혈족으로 보고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9절).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시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6시, 지금의 12시에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할 정도로 여성을 멸시하고 천대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유대인 여자도 아니고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하셨습니다(7, 9절).

예수님은 두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하신 후에 그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알았다면 예수님에게 뭔가 달라고 구했을 것이고 예수님은 그녀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0절). 여인은 “두레박도 없는데 어디서 생수를 구합니까? 당신은 우리에게 이 우물을 준 우리의 선조 야곱보다 더 큽니까?” 질문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11-12절).

 예수님은 세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신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즉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하셨습니다(13-14절). 여인은 “세상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물을 제게도 주십시오.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러 오는 번거로움도 없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15절).

예수님은 네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느닷없이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을 때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는 여인의 남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15-18절). 여인은 자신의 삶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하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19절).
예수님은 다섯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를 묻는 여인에게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whom)과 예배의 태도(how)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20-24절). 여인은 또 다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섯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오면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이라는 여인에게 “내가 바로 그다.”고 하심으로써 결정적인 충격을 주셨습니다(25-26절).

예수님은 일곱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여인--생수--영생의 생수--남편--예배--메시야, 이렇게 7대 충격으로 잠든 여인을 깨우셔서 바른 예배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서 덤덤한 우리도 충격요법을 통해서 깨우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바른 예배를 드리게 하십니다.

 

2. 영으로 드려야 예배가 잔치

23절과 24절에서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예배는 우선 “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감성을 동원하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위대한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때문에 미지근한 예배는 역겨운 것입니다. 빛(light)과 함께 열(heat)이 있어야 합니다. 머리에는 빛이 있고 가슴에는 열이 있어야 참된 예배를 드립니다. 진리의 빛에 근거해서 가슴의 열로 예배하는 것이 ‘영’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고 할 때 ‘영’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우리의 ‘영’입니다. 우리의 영은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냉랭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을 뜨겁게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성령님으로 불붙은 인간의 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살아나서 성령님으로 민감해진 우리의 영으로 예배합니다. 성령님은 진리라는 연료로 우리의 영에 불을 붙여 생동적인 예배의 뜨거움을 생산하십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이 아니라 사마리아 오경을 사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who) 바로 알고, 마음으로 생명력 있게(how)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기 위해서 진리(truth)도 깨달아야 하지만 영(spirit)도 팔팔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공허한 형식주의와 전통주의에 매인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습니다(마 15:8-9//사 29:13).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예배는 헛되고 공허한 예배입니다. 예배는 단순히 의지적인 행위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감성이 들어가야 참된 예배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0년대 미국 대각성운동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대각성 운동 중에 사람들이 기절하여 땅에 쓰러지고 비명들을 지르고 발작을 일으키고 소동하고 뒹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극단적인 감정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런 극단적인 감정 현상을 변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에 근거한 깊고 진지한 감성은 뜨겁게 표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리의 영향을 받은 감성이라면 최대한 뜨겁게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의해 하나님의 위엄과 성결에 마주칠 때 최초 반응은 놀란 침묵입니다(시 46:10; 합 2:20). 침묵에서 경탄과 경외가 나옵니다(시 33:8). 하나님의 의로운 능력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임합니다(사 8:13; 시 5:7).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대해 얼어붙게 하는 공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의식하지 못한 데 대해 마음이 아프고 통회하는 것입니다(시 51:17; 사 57:15). 통회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생깁니다(시 42:1-2; 73:25-26; 63:1). 하나님은 통회하는 심령에 기쁨과 감사로 채워 주십니다(시 30:11-12). 통회할 때 희망의 서광이 비춰오면서 기쁨이 충만합니다(시 42:5-6; 130:5).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좋은 선물만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하나님은 하나님을 갈급하게 사모하는 심령을 만족하게 해 주십니다. 여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가 있습니다(시 27:4; 16:11; 37:4).

 

3. 진리로 드려야 예배가 잔치

사마리아 여인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고 질문할 때,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에 관한 질문은 예배가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질문이라고 하셨습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습니다. 예배는 알고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3절과 24절에서 예배할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지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알고 드리는 예배가 진리(요 8:32; 17:17; 롬 10:2)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누구를 예배하는지,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23절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대상입니다.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제자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요 14:9).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신 분이십니다(4:34).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과 죽음과 삶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을 맛있는 음식처럼 즐기셨던 행복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압니다(3:16). 하나님은 우리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큼 영원만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영원히 지글지글 타야 할 벌레 같은 우리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최고 최상의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다 하실 수 있고, 어디나 계시고, 완벽하게 의로우시고, 완벽하게 진실하시고, 완벽하게 신실하시고, 완벽하게 아름다우시고, 완벽하게 위엄찬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완벽한 절대사랑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돈과 권력과 지위와 성공과 쾌락은 이스라엘 식으로 말하면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 우리 식으로 말하면 밑 빠진 독입니다(렘 2:13).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공허하고 허탈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시는 “생수의 근원”이십니다(렘 2:13).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3-14). 예수님을 매순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수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연결되기 때문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됩니다. 여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여기에 공허와 허탈이 없는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 마지막 날에도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요한은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해설을 덧붙였습니다(7:39).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영접할 때만 믿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실감나게 믿으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인격의 중심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생수가 펑펑 솟구쳐 흘러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맛이요, 하나님의 맛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바로 이런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심령 속에 거주하시면 좌절과 실망으로 속이 타는 영혼에 생수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해서 영혼이 그것을 깨닫고 만족하게 하십니다(요 14:2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마시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것은 생명과 능력이 없는 메마른 진리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으로 흠뻑 젖은 진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남편 다섯을 두었던 죄, 그 후에 자기 남편 아닌 사람과 같이 사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녀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심으로써 그녀의 어둠 속에 있는 영혼을 발가벗겨 노출시키셨습니다. 가려진 죄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영적인 감각을 무디게 해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지만 그것도 못 느끼게 하는 한센병과 같습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전한 것을 보면, 그녀가 한센병 같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실 때에(고후 4:6),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알고 드리는 예배,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면 “와, 하나님 대단하십니다. 앗다, 하나님, 굉장하십니다. 오 하나님, 제가 큰 절을 하겠습니다. 아니, 제가 무릎 꿇고 경배합니다. 영광과 찬송과 경배와 존귀를 세세토록 올려드립니다.”는 반응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기쁨입니다(시 4:7; 5:11; 9:2; 17:15; 40:8; 51:10, 12; 63:1-3; 73:25-26). 예배는 행복의 분출입니다.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가 행복의 잔치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배를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주연 배우이고, 하나님은 목사님에게 대사를 알려주시는 프롬프터이시고, 교인들은 연극을 보는 평가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회중이 주연배우이고, 목사님은 회중에게 대사를 알려주는 프롬프터이고, 하나님이 평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예배드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반주자가 열성적으로 반주하고 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찬양대와 교인들이 찬양을 하고 있는데,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간절하게 기도드리고 있었는데,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놀란 그 사람이 천사 가이드에 얼굴을 돌렸을 때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요. 들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모양만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예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한 번 들어보십시오.” 정적 속에 선명한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어린아이는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의 예배를 흡족하게 받으신 것입니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머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열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빛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이 우리 마음속에서 뜨거운 열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머리로는 차분하게 진리를 깨닫고 마음으로는 뜨겁게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예배입니다. 감성 없는 진리는 죽은 정통입니다. 진리 없는 감성은 공허한 열광입니다. 참된 예배는 건전한 교리에 깊은 감성이 결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로 하나님을 바로 깨닫고 마음으로 감격할 때 예배가 터져 나옵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과 진리로 예배하심으로 예배의 감격과 행복을 마음껏 누리시고 예배의 행복을 남들에게 전하십시오. 예배는 행복의 잔치입니다.

 

 

 

기독교 행복론(5): 사랑은 행복의 수고

(고후 8:1-5)

Christian Hedonism(5): Love, Labor of Happiness

권성수

 1. 사랑 = 은혜의 통로 (Love, Channel of Grace) * 사랑이 없는 희생 (고전 13:3) (Sacrifice without love) * 사랑이 있는 구제 (고후 2:1-5)(Sacrifice with love) * 은혜는 흐르는 것 (Overflow of grace)

2. 사랑 = 기쁨의 공감 (Love, Empathy of Joy) * 너의 기쁨 = 나의 기쁨 (고후 2:1-4) (Your joy = my joy) * 기쁨을 나눈 어떤 신자 (A Christian who shared joy) * 닫힌 마음→ 열린 마음 (Closed heart→ open heart)

3. 사랑 = 행복의 갈망 (Love, Desire for Happiness) * 가슴 아픈 행복 (Heart-rending happiness) * 주는 것이 행복 (행 20:35)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 사역을 좋아하라 (히 11:24-26) (Enjoy sharing ministry)

 

기독교 행복론(5): 사랑은 행복의 수고

(고후 8:1-5)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즐기는 행복한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시는, 우리의 행복하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의 유익을 이루시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함으로 수직적인 행복을 누립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감동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 즉 ‘영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의 감격을 맛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머리로 깨닫고 예배를 드릴 때, 즉 ‘진리로’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의 환희를 맛봅니다. 마음에 열(heat)이 있고 머리에 빛(light)이 있는 예배는 하나님의 행복에 동참하는 행복의 잔치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마십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수직적인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수직적인 행복을 누린다면, 무엇을 통해서 수평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수평적인 행복을 누립니다. 어떤 사랑을 통해서 수평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1. 사랑 = 은혜의 통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교훈입니다. 여러분, 동료 조종사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동료 조종사를 구해 주고 자신은 그대로 산화한 조종사가 있다면, “아, 대단하네. 동료를 사랑하는 마음이 목숨을 바친 희생으로 나타났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그런 희생도 사랑이 아닐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후세에 자신의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자신을 던져 산화(散華)한 것은 희생은 있어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8-9장에 마게도냐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구제 헌금을 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런 사랑이 행복의 수고라고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게도냐 교인들의 구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을 두고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했습니다(8:1). 그들의 구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가 예루살렘 교인들에게로 흘러넘친 것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8:2). 그들은 고통과 시련과 가난이 극심했지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넘치는 구제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들의 감격은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후하게 채워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고후 8:2).

수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즐거움이 수평적으로 사람들을 향한 후한 사랑으로 흘러넘친 것입니다. 그들은 억지로 구제한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구제했습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8:4). 그들은 기근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해서 구제할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본래 나를 통해서 남들에게 흘러가도록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도 아브라함에게서 멈춘 것이 아니라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천하 만민에게 흘러들어가야 하는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도 그 은혜가 우리에게 멈추어 있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가 흘러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복도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대로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멈추면 우리는 불행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과 사랑과 복이 우리에게 멈추어 있으면 우리는 아무리 많이 가져도 늘 불행합니다.

 ‘록은 롤의 대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죽기 6주 전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처음 음악을 하실 때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금 행복하십니까?” 그는 “저는 지옥처럼 외롭습니다.”고 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부자도 되었고 유명해지기도 했는데, 왜 지옥처럼 외로웠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자연은총과 구원은총)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흘러가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처럼 고독했습니다. 아동행동연구소의 소장 버나드 림랜드(Bernard Rimland)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남들을 돕는 사람들이다.”라는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남들을 돕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것은 그들이 은총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나를 통해서 남에게 흘러가게 할 때 나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잭 캔필드가 쓴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화가이자 도예가인 알이라는 사람이 큰 아들을 급성 맹장염으로 잃었습니다.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아이가 죽지 않았으리라는 죄책감 때문에 그는 정신이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얼마 뒤 그의 아내마저 여섯 살짜리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집을 나갔습니다. 비극에 비극이 겹치자 마음의 상처를 이기지 못한 그는 알콜 중독자로 살다가 어느 허름한 여인숙에서 혼자 쓸쓸히 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남겨 놓은 둘째 아들은 사랑이 넘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결혼해서 자녀들과 함께 사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평화롭고 활기가 넘치는 사랑이 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자상한 애정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떠날 때인 19세가 될 때까지, 아버지는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키스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해 주셨습니다. ‘얘야, 난 널 사랑한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알콜 중독자 아버지가 매일 밤 아들에게 키스하면서 “난 널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즉 아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흘러가게 할 때만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사랑의 통로가 될 때 아들에게 행복한 인생을 선사하게도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은혜의 막힌 통로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복음과 사랑과 복이 여러분에게서 멈추어 있다면, 이 시간부터 은혜의 막힌 통로를 뚫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복음도 흘러가고 사랑도 흘러가고 복도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2. 사랑 = 기쁨의 공감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2장 3절에서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한다고 했습니다(1:24).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을 근심하게 하면 자신의 기쁨도 사라진다고 했습니다(2:1-3). 바울은 이런 자신의 태도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그의 “넘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2:4). 여기에 매우 중요한 사랑의 또 하나의 원리가 나옵니다.

사랑이 행복의 수고가 되는 매우 중요한 비결이 나옵니다. 그것은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기쁨이 동시에 나의 기쁨이 될 때 사랑이 행복의 수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남의 자식이 잘 되면 질투가 난다고 합니다. 남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괜히 심술이 난다고 합니다. 남이 주머니를 털어 베푸는 것을 보면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라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형제자매가 잘 되고 친구가 잘 될 때에도 내 자식이 잘 되는 것처럼 내가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롬 12:15).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면, 남이 잘 될 때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사랑이 행복의 수고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 행복의 수고라는 것은 자식들을 위해 수고하시는 어머니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장을 볼 때 이를 박박 갈면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어머니가 있습니까?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어머니가 지은 밥을 먹고 좋아하면 절로 기분이 좋습니다. 자식들의 기쁨이 어머니의 기쁨입니다.

사랑은 행복의 노동입니다. 사촌이 땅을 살 때 배가 아프더라도 축하해 보십시오. 사촌이 땅을 살 때 축하해 주면 사촌이 땅을 살 때 기뻐하는 여유를 배우게 됩니다. 경쟁관계에 있는 친구가 잘 될 때 질투가 나더라도 축하 메시지를 보내 보십시오. 친구가 잘 될 때 진심으로 축하하는 여유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행복의 수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답게 이웃을 사랑하다가 보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은 자다운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그 때에 사랑이 행복의 수고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사랑을 베풀면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남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서 기뻐할 때 나도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남이 기뻐할 때 내가 질투하는 것은 마귀의 뜻입니다. 남이 기뻐할 때 나도 기뻐해야 내가 행복합니다. 남이 기뻐할 때 내가 질투하면 나는 불행합니다.

입시 준비를 하는 자녀를 둔 어느 권사님이 입시를 앞둔 대여섯 명의 학부모들을 집으로 초청해서 다과를 대접한 후 함께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자녀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입학시험이 끝난 후 함께 기도하던 분들의 자녀들은 다 목표하던 학교에 들어갔는데 권사님의 자녀만 낙방했습니다. 권사님은 마음이 몹시 아팠지만, 다른 분들을 초청해서 자녀들의 합격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정말 하기 힘든 일을 하신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남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후 권사님의 아들은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남의 기쁨을 공유하는 마음은 열린 마음입니다. 남의 기쁨을 질투하는 마음은 닫힌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닫혔다면 이 시간부터 마음을 열어 놓으십시오. 남이 기뻐할 때 축하해 주는 쪽으로 마음을 여십시오. 여러분이 마음을 여시고 남들의 기쁨을 여러분의 기쁨으로 공유하시면 여러분은 행복해지십니다.

 

3. 사랑 = 행복의 갈망

 

하나님의 은혜가 남에게 흘러가게 하고 남의 기쁨에 공감할 때 사랑은 행복의 노동(labor)이고 행복의 레저(leisure)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이 아프면 울고, 자식이 시험에 떨어지면 슬픕니다. 사랑하니까 울고, 사랑하니까 슬퍼하는데 어떻게 사랑을 행복의 노동, 행복의 레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린다는 복음의 은혜가 예수님을 안 믿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에게 흘러가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불신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 때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것은 불신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바라는 갈망 때문입니다. 불신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누리기를 갈망하는 마음과 불신 가족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 현실 사이의 간격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바라는 갈망이기 때문에, 아픔이 따르지만 행복의 수고입니다.

<연탄길>이란 가슴 찡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에 이런 시가 실려 있습니다. “잠자는 아기를 등에 업은/ 몸빼바지의 젊은 여자는/ 조심스럽게/ 대합실 바닥을 청소했다./ 뚱뚱한 역무원은/ 그녀의 굼뜬 동작을/ 호되게 나무랐지만/ 바보처럼 미소지을 뿐/ 그녀는 말이 없다./ 잠자는 아가야/ 어서 자라서/ 엄마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저주렴./ 너의 평화로운 잠을 위해/ 가슴을 찌르는 말에도/ 웃고만 있는 네 엄마는/ 바보가 아니란다./ 말 못하는 바보가 아니란다.” 아기를 업고 대합실 바닥을 청소하는 엄마가 가슴 찌르는 말에도 웃고만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아가의 평화스러운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엄마의 사랑입니다. 역무원의 호된 질책에는 눈물이 나지만 아가를 위해 수고하는 엄마는 그래도 행복합니다. 우리는 가슴 아픈 현실 속에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님들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할 때에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20:35). 약한 자들을 돕기만 하면 되지, 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까?

우리는 흔히 행복하기 위해서 남을 돕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남을 도와주는 것은 정말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까? 돈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돈은 사랑의 자연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돈을 위해서 결혼을 하면 그것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돈은 사랑의 자연적이 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사랑은 자연적인 보상입니다. 결혼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은 불순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것입니다. 돈은 사랑의 자연적이고 정당한 보상이 아니지만, 결혼은 사랑의 자연적이고 정당한 보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정당한 보상은 어떤 행위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C. S. Lewis). 결혼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결혼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은 순수한 동기입니다. 남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게 하는 것, 즉 주는 것은 행복한 수고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사역하는 것은 순수한 동기입니다. “남들을 도와주니 정말 기쁘더라.”고 하면서 도와주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도와주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위해서 사역하는 것은 순수한 동기입니다. 행복은 주는 사랑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은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행복을 위해서 나누고 섬기는 삶을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벧전 5:1-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남들을 섬기는 사랑에는 고통과 희생이 따르지만 고통보다 기쁨이 훨씬 더 큽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속담에 “눈에 눈물이 없으면 영혼에 무지개가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에는 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행복의 무지개도 있습니다.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히 11:24-26).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사역에 고통이 따르지만 사역을 즐겼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통해서 남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남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기뻐할 때 남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고통보다 행복이 더 큽니다. 이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 보십시오. 미운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풀다 보면 사랑이 행복의 수고라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행복론(6): 성경은 행복의 빛

(시편 119:105)

Christian Hedonism(6): Scripture, Light for Happiness

권성수

1. 빛과 어두움의 충돌 (Conflicts between Light and Darkness) * 성령과 악령의 충돌 (Conflicts between the Holy Spirit and the Devil) * 진리와 허위의 충돌 (Conflicts between truth and lies) * 성령의 검을 뽑아야 (Wield the sword of the Holy Spirit)

2. 성경은 행복의 연료 (Scripture, the Fuel of Happiness) * 생명 (Life) (신명기 32:46-47) * 믿음 (Faith) (로마서 10:17) * 희망 (Hope) (로마서 15:4) * 자유 (Freedom) (요한복음 8:32) * 지혜 (Wisdom) (시편 119:98-100)

3. 연료로 빛을 비추라 (Light Your Life with the Fuel of Happiness) * 익명의 저자 (Anonymous writer) * 조지 뮬러 (George Mueller) * 나의 체험 (My experience)

 

기독교 행복론(6): 성경은 행복의 빛

(시편 119:105)

Christian Hedonism(6): Scripture, Light for Happiness

 

신앙생활이 행복하다고 해서 항상 맑은 가을 하늘만은 아닙니다. 흐리고 어두운 날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슬퍼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좌절과 실망이 몰려와서 주저앉아 울고 싶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밝을 때도 있지만, 어두울 때도 있습니다. 다윗도 시편 23편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을 소생시키신다고 고백했습니다(23:3). 이것은 다윗의 영혼도 소생이 필요할 정도로 맥이 빠진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하기 때문에 계속 회복과 갱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때때로 어두워지는 우리의 영혼을 밝히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혼은 빛과 어두움의 충돌 현장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사랑의 손을 맞잡게 하십니다. 성령은 기쁘게 하시고 서로 화목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오래 참게 해 주시고, 자애롭고 착하고 충성스럽게 해 주십니다. 성령은 온유하게 해 주시고 욕망을 절제하게 해 주십니다(갈 5:22).

악령은 반대로 우리의 부패한 성품을 자극하여 미움의 독화살을 쏘게 합니다. 악령은 우울한 먹구름이 일게 합니다. 악령은 이간시킵니다. 우리로 혈기를 부리게 합니다. 악령은 우리로 잔인하고 표독하게 만듭니다. 악령은 우리로 배신하게 하고 완악하게 합니다. 악령은 우리로 더러운 욕망의 고삐를 풀어놓고 죄를 짓게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실 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하나님은 너를 눈동자같이 지키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셔. 네가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조금만 참으면 마침내 복에 복을 받을 거야.” 성령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성령”이십니다(롬 8:2). 성령은 성경 말씀이 우리 속에 뿌려지게 하시고, 우리 속에 뿌리내리게 하시고, 우리 속에 열매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심령에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강한 생명체로 만드십니다(겔 37:4-5).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4-5).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이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악령은 성령과 반대로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악령은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의 말씀 대신에 거짓말이 심겨지게 합니다. 악령은 우리 마음속에 거짓말이 뿌리를 내리게 합니다. 악령의 거짓말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꺾어놓습니다. “너는 끝장났어. 너는 희망이 없어. 하나님도 너를 버렸어.” 악령은 이런 거짓말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캄캄하게 합니다. 악령은 우리의 마음에 불행의 어둠이 깔리게 합니다.

악령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말씀의 진리를 빼앗아가고 그 대신 거짓말을 심을 때에 우리는 “성령의 검”을 뽑아들고 악령을 물리쳐야 합니다(엡 6:17).

하나님의 말씀은 악령을 무찌르시는 성령의 칼입니다.

우리는 남의 칼집에서는 칼을 뽑아 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차고 있는 우리의 칼집에서만 칼을 뽑아 쓸 수가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늘 차고 다녀야 악령이 우리를 공격할 때마다 성령의 칼을 뽑아 악령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령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통해서 불행의 어둠이 깔리게 할 때에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령을 물리치면 우리의 영혼은 다시 행복의 빛으로 환하게 밝아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주합니다.

중국 내지 선교회를 창설한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 부부는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훈련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불행의 시련들을 이겨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 부부는 중국 북부 지방에서 마차 여행을 할 때 밤이 되면 여관방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간신히 구한 여관방도 한 방에 여러 사람들이 같이 자는 방이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다른 사람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을 잔 후에 새벽 2-4시까지 촛불을 켜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매일 성경을 묵상함으로 성령의 검을 항상 차고 다녔습니다. 테일러 선교사는 성령의 검을 언제든지 뽑아들고 유혹과 참소와 거짓의 무기를 휘두르는 사탄을 물리친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성령의 검으로 사탄을 이겼기 때문에 행복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기에 성령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까? 1) 생명: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줍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all the words)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They)는 너희에게 헛된 일(idle words)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By them) 너희가 요단을 건너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신 32:46-47).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 해 본 허튼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사를 가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생명을 얻기 시작하고(약 1:18; 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일 매순간 영적인 생명을 유지합니다(마 4:4; 신 8:3).

 15세기에 빌니(Bilney)라는 영국의 개혁자는 법률을 연구하면서 철저하고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속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헬라어 신약성경의 라틴어 번역판을 얻게 되었다. 그 때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의 말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저의 영혼에 가장 큰 위로를 준 가장 아름다운 말씀은 이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 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이 한 구절 말씀이 하나님의 교훈과 내면적인 역사로 내 마음에 환희를 주었습니다. 과거에는 죄책감으로 상처를 받고 거의 절망했지만, 즉시 저는 놀라운 위로와 평안을 느꼈습니다. 저의 상한 뼈들이 기뻐 뛰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성경은 제게 꿀이나 꿀 송이보다 더 큰 기쁨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2) 믿음: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줍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이 이것을 밝혀 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납니다. 믿음을 나게 하는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들으면 믿음이 생기고 믿음은 생명을 얻는 수단입니다. 생명은 성경을 믿을 때에 얻는 것입니다.

1918년 일본 도쿄에서 살인죄로 교수형을 당한 도끼치 이치라는 일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과 20여범으로 사자처럼 잔인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한 번은 간수를 공격한 혐의로 재갈을 물리고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게 매달렸지만, 그래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형 선고 받기 전에 웨스트와 맥도날드라는 여자 선교사 두 사람이 그에게 신약성경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재판과 처형 장면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눈이 다음 구절에 꽂혔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 구절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제 눈이 거기에 멈추었습니다. 저의 가슴이 마치 10센티 대못에 찔린 것 같았습니다. 그 구절이 제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의 사랑이라고 할까요? 그리스도의 자비라고 할까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다만 말할 수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제가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공평무사한 하나님의 판결”로 받아들였습니다. 성경이 그에게 믿음이 생기게 했고 그의 믿음을 놀랍게 보존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사형 집행을 앞에 두고 고린도후서 6장 8-10절에 근거하여 “슬퍼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저는 작은 감방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을 모를 때 죄를 짓던 시절보다 무한히 더 행복합니다. 매일 밤낮으로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고 고백했습니다. 형장에서 그는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영혼은 깨끗해져서 오늘 하나님의 도성으로 입성합니다.”

3) 희망: 하나님의 말씀은 희망을 줍니다. 믿음은 희망하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히 11:1). 우리가 환난 중에도 기뻐하는 것은 환난은 인내는,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희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롬 5:3-4). 우리가 희망이 있으면 기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희망을 얻고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15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인내와 위로를 받게 되고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해서 희망을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4) 자유: 하나님은 말씀은 자유를 줍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유는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8:34). 그것은 죄로부터의 자유, 거룩함을 위한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거룩함을 위한 자유가 없이는 행복이 없습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행복의 원천인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히 12:14).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면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시 119:9).

5) 지혜: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를 줍니다. 미로 같은 인생에서 바른 길을 찾아나갈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일일이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화살표를 보여줍니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림으로 나의 명철함이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시 119:98-100).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면 나를 죽이려는 원수보다 더 지혜롭고, 나를 지도하는 모든 스승들보다 더 명철하고, 삶의 체험을 통해 얻은 노인들보다 더 슬기롭게 됩니다.

성경은 생명의 빛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빛입니다. 성경은 희망의 빛입니다. 성경은 자유의 빛입니다. 성경의 지혜의 빛입니다. 생명이 있고 믿음이 있고 희망이 있고 자유가 있고 지혜가 있으면 행복이 있습니다. 성령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시 119:105)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행복의 빛을 비춰 주십니다. 어떤 익명의 저자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 인간의 상태, 구원의 길, 죄인의 파멸, 신자의 행복이다. 그 교리는 거룩하고 그 규례는 강력하고 그 역사는 사실이고 그 결정은 불변하다. 지혜롭기 위해서 그것을 읽고, 안전하기 위해서 그것을 믿고, 거룩하기 위해서 그것을 행하라. 거기에 당신을 안내할 빛이 있고, 당신을 지탱할 음식이 있고, 당신을 응원할 위로가 있다. 성경은 여행자의 지도, 순례자의 지팡이, 조종사의 나침반, 군인의 칼,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다. 성경에서 낙원이 회복되고, 천국문이 열리고, 지옥문이 닫힌다. 그리스도가 그 장엄한 주제이고, 우리의 유익이 그 설계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그 목표이다. 성경이 우리의 기억을 채우고,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우리의 발을 안내해야 한다.

성경은 부의 원천, 영광의 낙원, 기쁨의 강이다. 그 규례를 따르라. 그러면 그것이 당신을 갈보리로, 빈 무덤으로, 부활생명으로,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할 것이다.” 성경에 푹 절여진 삶을 사는 사람은 항상 행복한 삶을 삽니다. 다윗은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heritage)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는 체험을 고백했습니다(시 119:111). 예레미야 선지자도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고백했습니다(렘 15:16). 예수님도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 속에 있으면 제자들의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1).

조지 뮬러(George Mueller, 1805-1898)는 영국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한 기도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항상 행복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삶에는 항상 행복의 불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조지 뮬러의 자서전>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내가 매일 주의해서 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은 주님 안에서 내 영혼이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어느 때보다 더 확실하게 깨달았다. 첫째로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내가 주님을 얼마나 많이 섬기느냐,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내 영혼을 행복한 상태로 유지하느냐, 내 속사람이 어떻게 양식을 얻어먹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임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위로와 격려와 경고와 책망과 교훈을 받는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마음은 주님과의 체험적 교제로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저에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최근에는 새로운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제가 늘 성경을 읽지만, 최근에는 소리를 내서 성경을 읽습니다. 제가 매일 소리를 내서 성경을 읽으니까, 저의 마음이 마치 영적으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 같습니다. 맑고 깨끗한 영기(靈氣)를 마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매일 소리 내어 읽으니까, 진리의 빛이 저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는 것 같습니다. 진리의 빛, 진광(眞光)이 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성경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맑고 깨끗한 영적인 공기를 마시고 환한 진리의 빛을 받으니 영이 훨씬 더 맑아지고 훨씬 더 밝아집니다. 요즈음 설교를 할 때 그것을 더 확실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이 답답하십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캄캄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불행의 어둠에 휩싸여 있습니까? 매일 성경 한 장씩이라도 소리를 내어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영적으로 맑은 공기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답답하던 마음이 후련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진리의 빛을 받을 것입니다. 캄캄하던 마음이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막막하던 인생에 희망의 빛이 비춰올 것입니다. 성경은 행복의 빛입니다. 여러분이 소리 내어 성경을 읽으시고, 교회 안의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서 성경을 공부하시고, 읽고 공부한 내용을 묵상하시는 동안 여러분의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하실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계속 행복의 빛을 주입받으셔서 행복한 삶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행복론(7): 기도는 행복의 능력

 (요한복음 14:13; 16:24)

Christian Hedonism(7): Prayer, Power of Happiness

권성수

1.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요 14:13) (Prayer for God's Glory)

1)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4:13). 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3)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4)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요 15:8). 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5). 6)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이가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 73:25-26).

2. 기도는 우리의 행복(요 16:24) (Prayer for Our Happiness)

1)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2)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눅 21:34-36). 3) 1984년 나의 체험 4) 1857년 제레미야 랜피어(Jeremiah Lanphier)의 체험

 

기독교 행복론(7): 기도는 행복의 능력

(요한복음 14:13; 16:24)

 최근에 인기 연예인 최진실씨의 자살 소식에 모든 국민들이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각오로 살지언정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절대로 스스로 끊으면 결코 안 됩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최진실씨의 위패에 ‘성도 최진실’이라고 되어 있고 그녀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영결식 집례를 맡아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아까운 목숨을 끊었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지 못하면, 신앙이 실제로 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체험하고 기도 응답을 체험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한 성도는 우울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7주에 걸쳐서 기독교 행복론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적인 회개와 믿음, 즉 회심을 통해서 행복의 문을 열고 행복의 집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수직적인 행복을 누립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수평적인 행복을 누립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행복의 빛이 우리 마음에 계속 비춰오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행복의 능력을 계속 공급받습니다.

 

1.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요 14:13)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3절에 기록된 대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까요? 여러분의 몸이 마비되어 말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가정합니다. 말만 하고 꼼짝 못하는 여러분에게 믿음직한 친구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의 친구는 몸이 튼튼하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에게 손님이 찾아오면 여러분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김 형, 날 좀 도와주게. 내 뒤에 베개를 넣어주게. 안경 좀 씌워 주게. 내가 손님을 뵐 수 있게 해 주게.” 손님은 여러분의 친구에 대해 “참 착하신 분이시구나.”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친구를 의지함으로써 친구를 대단한 인물로 높여 줍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무 선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좋은 친구가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을 걸고 믿을 수 있는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요 15:15).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거주하는 상태에서 기도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요 15:8).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탄 배가 파선했습니다. 그는 외딴 섬에 혼자 남았습니다. 그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혼자 살다가 열병에 걸렸습니다. 열병으로 오래 동안 시달리는데 돌보아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 한 컵을 갖다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죽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선원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를 다 지었었습니다. 열병에 걸려서야 그는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펴서 읽다가 이런 구절에 부딪혔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 날 밤 그는 평생 처음 기도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천국 생명의 탄생이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5). 최진실씨가 “하나님, 저 외로워요. 하나님, 저 억울하고 괴로워 죽겠어요. 저를 도와주세요.” 하고 하나님을 불렀다면, 희망의 서광을 보았을 것입니다. 교회를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받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동업입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을 받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내가 행복해지기를 갈망한다는 것은 내 속에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뻥 뚫린 깊은 구멍이 있다는 것입니다. 뻥 뚫린 구멍은 나의 ‘필요’이면서 나의 ‘반역’입니다. 내가 그 구멍이 채워지기를 원하니, 그것은 나의 필요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그 구멍을 채워주시는 것을 싫어하니, 그것은 나의 반역입니다. 나의 펑 뚫린 구멍을 돈이나 명예가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펑 뚫린 구멍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나의 뻥 뚫린 구멍을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뻥 뚫린 구멍을 채우실 수 있는 분이라고 인정해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 대신 자신의 정욕을 채우려는 잘못된 기도도 있습니다(약 4:3-5). 자기 남편이 착한 틈을 이용해서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욕구를 채우는 것은 서방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착한 남편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추구해야 할 쾌락을 세상의 죄악 된 쾌락을 통해서 추구하면 서방질하는 것이 됩니다. 심지어 세상의 죄악 된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는 것은 남편에게 돈을 달라고 해서 외간 남자와 놀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정욕으로 쓰려고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즐기되 그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이가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재산]이시라” (시 73:25-26). 하나님이 내 마음의 반석인데 왜 낙심하며,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재산인데 왜 자살하겠습니까? 새의 노래를 들을 때, 매순간 공기를 마실 때, 황금벌판의 벼 이삭들이 바람에 춤추는 것을 볼 때, 그 모든 것을 작은 신현(神顯, tiny theophany), 즉 하나님이 작은 규모로 나타나신 것으로 인정하면 됩니다. 새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공기를 마시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족이 건강하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직장생활과 사업이 잘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할 때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십니다(대하 16:9).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염려를 다 주께 맡기면 주님이 우리의 염려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벧전 5: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 보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의 염려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 보십시오. 우울한 인생이 아니라, 행복한 인생이 되실 것입니다.

 

2. 기도는 우리의 행복(요 16:24)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24절에 기록된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면 충만한 기쁨을 체험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별로 기도하지 않으면 별로 기쁨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깊은 기도를 하면 충만한 기쁨을 체험합니다. 기도가 어째서 충만한 기쁨을 줍니까? 기도는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충만한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22절에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예수님과 교제하는 신경 중추(nerve center)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면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멀어지는 것이 슬프고 예수님과 가깝게 교제하면 행복합니다.

기도는 예수님과 친하게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한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오늘도 직장에 나갑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을 모시고 하게 해 주시옵소서.” 매순간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 교제를 나누어야 기쁩니다. 예수님과 생명적 교제를 나누지 않는 삶은 기쁨이 없는 짐입니다(요일 1:3-4). 예수님은 이 자리에 계시지 않지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신 것처럼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교제합니다. 여기에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는 또한 능력을 얻는 수단이기 때문에 충만한 기쁨을 줍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고 싶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무엇이 충만한 기쁨을 줍니까? 떵떵 거리며 살 수 있는 안락한 생활이 충만한 기쁨을 줍니까?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과 똑 같이 비참하고 불행합니다.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주는 것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능력이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줍니다.

기도가 기쁨의 원천인 것은 기도가 사랑할 능력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과 연결될 때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요 15:7-8, 16-17). 기도가 사명과 연결될 때 충만한 기쁨을 줍니다. 기도의 목적은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직장인으로 동료들이 다 잘 살도록 하는 사랑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교사로서 학생을 사랑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순장으로서 순원들이 다 잘 되도록 하는 사랑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교인으로서 교회가 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사랑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엡 6:10-20).

 영적인 전쟁터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동지들, 사령관께서 여러분에게 사명(임무)을 부여하셨소. 그분은 여러분이 사명 완수하기를 바라시오. 여러분이 사명을 완수하도록 사령관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이 송신기로 사령관님에게 직통 연락을 할 수 있도록 하셨소. 제 이름으로 사령관님께 직접 통화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분이 주신 사명에 충실하고 그분의 승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면, 그분은 항상 송신기에 귀를 기울이시고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즉각 공수해 주실 거요.” 사명을 망각하고 전시용 송신기를 지하 참호에 삼겹살을 주문하는 것에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복음 21:34-36의 경고가 필요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우리는 사랑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라는 송신기를 사용하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병사가 졸면 송신기는 무용지물입니다. 깨어서 적들을 살피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용하면 송신기는 매우 유용합니다. 기도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송신기를 돌리는 것입니다(엡 6:19; 골 4:3; 롬 15:30-31; 살후 3:1; 마 9:38). 우리가 사랑의 사명을 감당할 때 충만한 기쁨을 체험합니다. 영혼은 남들에게 사랑을 줄 때까지 아무리 많이 받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제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남들에게 흘러 들어가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인색한 사람은 결코 행복을 모릅니다. 기도의 펌프로 길은 물을 남들이 마시게 할 때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저는 1984년 영국에서 1년 간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데 생활비 7천불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다만 기도만 드렸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에게 매일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물고 온 것처럼 저에게도 현대판 까마귀가 매일 날아왔습니다. 저의 우편함에 어떤 때는 200불, 어떤 때는 300불, 어떤 때는 800불, 매일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돈이 들어왔습니다. 영국으로 가기 직전 송별회 때 청년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저의 아내와 제가 살던 이층 집 거실이 무너질까 염려스러웠습니다. 송별회 때까지 17일간 들어온 돈이 정확하게 7,000불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이 주신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렇게 놀랍게 응답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저는 펄쩍펄쩍 뛰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1857년 7월 1일 조용하면서도 열정적인 제레미야 랜피어(Jeremiah Lanphier)라는 비즈니스맨이 뉴욕에서 북부 교회(North Church)에 의해 도시 선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교인들이 새로운 주택지로 이사함에 따라 숫자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제레미야 선교사는 열심히 심방하면서 매주 한 번 수요일마다 정오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1857년 9월 23일 수요일 정오에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는데 5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믿음의 충돌 속에서 방에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10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5분, 20분, 25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30분이 지나 12시 30분에야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사람이 나타나고 또 한 사람이 나타나고 드디어 6명이 모여서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다음 수요일에는 40명이 모였습니다. 10월 첫 주에는 매 주 대신 매일 기도회를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6개월 이내에 1만 명의 비즈니스맨들이 뉴욕에서 기도회로 매일 모였습니다. 2년 이내에 1백 만 명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들에 등록했습니다. 뉴욕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흥이었습니다. 전국이 주목하는 부흥이었습니다. 열광주의도 없고, 히스테리도 없고, 단지 조용한 기도의 운동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제레미야 랜피어의 기쁨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셔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시면 충만한 기쁨을 체험합니다. 매일 5시나 6시 반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하십시오. 금요일 기도폭풍집회에 나와서 기도하십시오. 10월 20일부터 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시면 행복한 성도가 됩니다. 행복한 성도는 우울증을 이기고 힘차게 살아갑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기도를 통해서 충만한 기쁨을 체험하는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행복론(8): 돈은 행복의 통화

(디모데전서 6:5-10, 17-19)/

권성수

Christian Hedonism(8): Money, the Currency of Happiness

1. 자족 (Contentment)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1) 공수래공수거 (Come empty, go empty, 7절).

2) 생활필수품 (Be content with necessities, 8절).

3) 부의 함정 (Remember the trap of riches, 9-10절)

 2. 자선 (Charity)

 1) 마음을 낮추라 (Make yourself humble, 17절)

2) 하나님께 희망 (Hope in God, 17절)

3) 선행을 힘쓰라 (Be rich in good deeds, 18-19절)

* 박정윤, <행복한 부자> (How to Be Rich and Happy),

“재무 팔복” (Eight Financial Beatitudes): 의로운 청지기로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의 집에 부요와 재물이 있을 것임이요 예산을 생활화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의 삶이 여유로울 것임이요 빚지지 않고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빚의 근심으로부터 자유할 것임이요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유업의 상을 받을 것임이요 지혜롭게 소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의 가정이 화목하고 번영할 것임이요 저축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불황 속에서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임이요 분산투자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위험을 줄여 곤경에 빠지지 않을 것임이요 사랑으로 베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천국은행으로부터 영원한 배당을 받을 것임이라

 

기독교 행복론(8): 돈은 행복의 통화

(디모데전서 6:5-10, 17-19)

 

어느 청소년 수련원에서 “하나님과 돈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물었더니 청소년들이 거침없이 “돈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요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사채놀이를 하며 돈 때문에 폭력도 서슴거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청소년 성매매 등, 위험수위를 넘은 돈 맛에 어린 영혼들이 썩어간다고 합니다. 돈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시대의 풍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으나 두뇌는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식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장신구는 살 수 있으나 아름다움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주택(house)은 살 수 있으나 가정(home)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쾌락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존 록펠러는 “나는 수백만 달러를 벌었으나 그것이 내게 행복을 주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나는 기계공으로 일할 때가 회장 때보다 더 행복했다.”고 했습니다. 앤드류 카네기는 “억만 장자들은 별로 웃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돈으로 무엇을 하시고 계십니까? 돈으로 무엇을 하시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여러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1. 자족의 원리

바울은 본문에서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을 주의하도록 경고합니다. 그들은 돈 사랑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돈을 제일 사랑하고 진리를 돈보다 못한 줄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진리와 함께 기뻐할 줄을 모릅니다. 바울은 여기서 임마누엘 칸트처럼 경건은 그 자체로 옳은 것이기 때문에 추구하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이익에는 관심을 갖지 말고 오직 경건 자체를 위해서 경건을 추구하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경건이 큰 이익”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익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익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익보다 더 큰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건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바로 사는 삶이 우리에게 더 큰 이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6절 말씀대로 우리에게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됩니다. 자족은 돈이 많은 환경이나 적은 환경이나 외부적인 환경에 관계없이 마음에 행복을 유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바울은 자족의 비결을 삶에서 배워 익혔습니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했습니다(빌 4:11-12). 바울이 돈이 있든 없든, 많든 적든 어떤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빌 4:13). 바울은 자신에게 어떤 환경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환경도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 즉 자족의 비결은 주님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자족의 반대말은 탐욕입니다. 9절에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본래 기업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그 기본 정신입니다. 성경은 돈을 버는 비즈니스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돈을 더 많이 주는 직장을 찾는 것이 나쁘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을 벌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먹고 살고 남들이 먹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돈, 돈, 돈’ 하면서 탐욕을 채우고 사치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겠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을 버리고 자족하면 늘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탐욕을 버리고 자족해야 합니까? 우리가 탐욕을 추구하지 말고 자족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1) 공수래공수거(7절).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대도시 미술관에 빈손으로 들어온 사람이 미술관 벽에 걸린 그림들을 하나 둘 챙겨 들고 나간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아이,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은 “저는 미술품 수집가가 될 겁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니, 그렇지만 그 미술품들은 선생님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여기서 미술품 하나라도 밖으로 들고 나갈 수 없습니다. 빈손으로 들어오신 대로 빈손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말하는데, 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미술품들은 다 내 겁니다. 내가 내 걸 가지고 나가는데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괜히 내 기분을 망치지 마십시오.” 그가 만일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면 여러분은 그를 정신 나간 바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미술관에 들어오는 사람이 빈손으로 들어가서 빈손으로 나가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빈손으로 들어와서 세상에서 빈손으로 나갑니다.

태평양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해서 273명이 세상을 떠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탑승객 중에는 유명한 정치가도 있고 수십억 달러 기업인도 있고 교사와 유학생도 있고 목회자와 그 자녀도 있습니다. 비행기 추락 이후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의 손에는 VISA 카드도 없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도 없고 증권도 없고 콘도 회원권도 없습니다. 정치가와 기업인과 교사와 유학생과 목회자와 그 자녀가 다 똑 같이 빈손입니다. 거기서 볼 때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도 없이 돈만 버는 데 평생을 보낸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하겠습니까. 평생 열차표를 집채만큼 모았는데 마지막 열차를 놓침으로 열차표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것처럼 얼마나 공허하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들어올 때 빈손으로 온 것처럼 세상에서 나갈 때도 빈손으로 나가는 존재입니다. 고귀한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없이 돈만 버는 일에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자족하라는 것입니다.

2) 생활필수품(8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소박한 삶에 필요한 정도만 있으면 자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에 자족할 수 있습니다(히 13:5-6). 참된 만족은 마음의 경건에서 오는 것이지, 손의 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1800년대의 자연주의자 헨리 쏘로(Henry Thoreau)는 “사람은 없어도 살 수 있는 물건의 숫자만큼 부유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남이 가진 것이 하나라도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은 그만큼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이 가진 것이 없어도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고, 먹고 살 수 있으니 만족한 사람이 진짜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계 금융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든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돈보다 더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공짜로 구경하고 공기와 햇빛을 공짜로 즐기고 가족들과 오순도순 사는 것도 공짜로 즐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공짜 선물이 있고, 사랑의 인간관계의 공짜 선물이 있으니 자족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50만 원짜리 호텔에 들어가서 희미한 불빛 아래 낯선 여인과 고급 칵테일을 마시는 사람과 허름한 모텔에 들어가서 석양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3) 부의 함정(9-10절): 9절에 “부하려 하는” 것은 성공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더 많이, 또 더 많이 가지려는 것입니다. 부는 만족을 주는 대신 더 많은 욕망을 줍니다. 자유를 주는 대신에 속박을 줍니다. 건강과 평안을 주는 대신에 상처와 근심을 줍니다. 부를 믿고 항해에 나섰는데 근심의 폭풍이 불어 빠져버렸습니다. 자꾸 더 가지려는 사람은 “파멸과 멸망”의 함정에 빠집니다. 탐욕과 사치를 위해서 부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파멸에 빠져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오직 돈만 벌겠다는 것은 사탄의 함정에 빠져 평생 지옥의 쓴맛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2. 자선의 원리

 바울은 우리가 자족할 줄 알아야 행복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또한 돈을 바로 사용해야 행복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돈을 바로 사용하는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1) 마음을 낮추라(17절): 돈 때문에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마음이 쉽게 속습니다. 돈이 많으면 ‘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일까?’ ‘이만하면 나도 잘 했지.’ 하는 식의 우월의식이 내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돈이 매력이 있는 것은 돈이 있으면 힘(power)이 생기고 돈이 있으면 떵떵 거리며 살 수 있는 교만(pride)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돈이 부풀어 오르게 하는 교만의 풍선에서 계속 바람을 빼야 합니다. 왜 돈 때문에 교만해집니까? 자신을 오해하고 부(富)를 오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부를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부는 우리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재산입니다(신 8:18). 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우리는 청지기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2) 하나님께 희망(17절): 불확실한 부에 희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막 10:23). 돈이 주는 세상의 모든 희망에서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 하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거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선물을 주신 분보다는 선물 자체를 사랑하기 쉽습니다(신 8:17-19).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누리는 것에 가책을 느끼면 안 됩니다. 금식과 금욕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 때때로 필요하지만, 항상 반드시 금식하고 금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누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배해야 합니다(딤전 4:2-5).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 수 있도록 하신 모든 것들을 사서 감사하면서 즐기면 우리가 돈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대왕의 자녀가 왜 거지처럼 살아야 합니까?” 이 말은 절반만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면서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치하면 안 됩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이 떵떵거리고 사는데 돈이 최고니까 돈에 희망을 걸면 안 됩니다. 돈에 희망을 걸지 말고 후하게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희망을 걸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전 2:24; 3:12-15, 22; 5:18-20; 11:9-10).

3) 선행을 힘쓰라(18-19절):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릴(enjoy) 뿐 아니라 선용할(employ)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부해야 합니다(6:18). 교만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께 희망을 고정하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의 돈을 하나님의 다양한 사역을 더 힘차게, 더 많이 전개하는데 투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박정윤 장로님이 쓰신 <행복한 부자>에 “재무 팔복”이 나옵니다. 의로운 청지기로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의 집에 부요와 재물이 있을 것임이요 예산을 생활화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의 삶이 여유로울 것임이요 빚지지 않고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빚의 근심으로부터 자유할 것임이요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유업의 상을 받을 것임이요 지혜롭게 소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의 가정이 화목하고 번영할 것임이요 저축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불황 속에서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임이요 분산투자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위험을 줄여 곤경에 빠지지 않을 것임이요 사랑으로 베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천국은행으로부터 영원한 배당을 받을 것임이라 월드 뱅크의 자료에 의하면 2005년 하루에 1불 25센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14억 명입니다. 전 세계 4명 중의 1명꼴입니다. 월드 비전에 의하면 식량이 없어 죽어가는 아이가 매 7초 당 1명, 하루에 14,000명입니다.

브라질에서 어떤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도나 줄리타네 집에 날 팔아 주세요. 그 집에는 맛있는 음식이 많아요.”라고 했답니다. 우리는 이런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주는 것입니다(잠 19:17).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부자가 죄인은 아닙니다. 성경은 부자이기 때문이라고 죄인이라 하지 않습니다. 욥은 갑부이면서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솔로몬도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 최고의 갑부였습니다(왕상 3:13; 10:23).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하면 하늘 문을 여시고 쌓을 곳이 없도록 채워 주시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말 3:10).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자신의 돈을 사용해서 예수님의 장례식 비용으로 썼습니다(마 27:57-61). 고넬료도 부자로서 구제를 많이 했습니다(행 10:2).

우리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부자라고 죄인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후하게 바치고, 남들의 유익을 위해 후하게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화폐개혁이 있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까요? 옛 화폐는 최소한으로 가지고 새 화폐 쪽으로 많이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옛 화폐는 무용지물이 될 때 후회의 탄식이 적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화폐 개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쓰는 돈은 천국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돈은 최소한으로 가지고 있고, 나머지 돈은 천국 화폐로 바꾸어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남들을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은 이 세상의 화폐를 천국 화폐로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남들을 섬기기 위해서 쓰는 돈은 다 천국 은행에 저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창고로 살지 말고, 축복의 통로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19절 말씀대로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누고 베푼 공로로 영생을 취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돈으로 나누고 베풀면 천국 은행에 저축하는 참된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후 9:8).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에 먹고 살 것이 있으면 자족해야 합니다. 탐욕을 가지고 자꾸 더 가지려고 함으로써 많은 근심으로 자신을 찌르는 파멸의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도 자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희망을 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후하게 바칠 수 있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도 후하게 베풀 수 있습니다. 자족(contentment)과 자선(charity)이 돈을 행복의 통화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기독교 행복론(9): 결혼은 행복의 모체

(에베소 5:22-33)

 권성수

Christian Hedonism(9): Marriage, Matrix of Happiness

“결혼은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다. 결혼은 연옥이다.” (A. Lincoln). “Marriage is neither heaven nor hell; it is purgatory.” 1.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 (Your Happiness is My Happiness)

1) 아내의 행복 (Wife's happiness, 22-24절): 그리스도에게 하듯 복종하라 (Obey your husband) 2) 남편의 행복 (Husband's happiness, 25-29절): 희생의 사랑 (Sacrificial love) 성화의 사랑 (Sanctifying love) 제공의 사랑 (Supplying love) 3) 불신 남편도 존대 (Respect your unbelieving husband, 벧전 3:1-6) 4) 서로의 발전 (Mutual progress): 죄인(sinner)→ 성자(saint)

2. 결혼 생활 심오한 비밀 (Marriage is a Profound Mystery)

1) 인간은 축복의 통로 (Channels of blessings) 2) 제창이 아니라 합창 (Not unison, but chorus) 3) 하나님이 결혼 모델 (Divine marriage as the model of human marriage) 행복한 결혼을 위해 노력하라. (No perspiration, no progress).

 

기독교 행복론(9): 결혼은 행복의 모체

(에베소 5:22-33)

여러분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시고 계십니까?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지금의 아내나 남편이 ‘짱돌’ 들고 죽이려고 달려오는 악몽을 꾸실 때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런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의 배우자와 다시 결혼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사람은 매우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과 매우 불행한 결혼생활 사이에 스펙트럼을 그려 놓는다면 여러분은 어디 쯤 해당되십니까? 결혼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의 행복의 모체입니다. 부모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행복하고, 후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결혼은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다. 결혼은 연옥이다.”고 했습니다. 저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연옥을 믿지 않지만, 결혼생활이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은 맞습니다. 결혼을 천국으로 만드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나의 행복이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지난 주 토요일 저녁 우리 교회 청년부에서 간증을 한 션(노승환)은 둘째 하랑이를 위해서 그 동안 모은 2천만 원을 3명의 어린이 다리 수술, 합병증 치료, 인공 와우(달팽이관) 수술비로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그들은 첫째 하음이 때도 역시 돌잔치를 위해 준비한 돈을 이웃을 위해 쾌척했습니다. 돌잔치에서는 흔히 아기가 돈을 잡으면 부자가 되고, 연필을 잡으면 학자가 된다고 합니다. 션은 자기 아이들이 돌잔치에 “이웃의 손을 잡았어요.”라고 했습니다. 노승환 정혜영 부부는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나의 행복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습니다. 본문 28절에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남편이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같은 원리로 남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내가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불행하게 사는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편이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 마음대로 살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아내가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이 내게 해 준 것이 뭐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편은 아내를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자신이 행복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자신이 행복합니다. 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 후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부러워할 정도로 자기의 여자를 행복하게 하는 남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기 남자를 이 세상 모두가 존경할 수 있게 만드는 여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행복의 비결을 정확하게 지적한 말입니다. 본문 22절부터 24절까지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자식들 앞에서 남편의 권위를 세워줍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해도, 남편이 내세울 것이 별로 없어도, 자식들과 가족들 앞에서 아내가 남편의 체면을 세워줍니다. 남편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무시당해도 세상에서 자신을 인정해 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행복을 느낍니다. 남편이 밖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짓밟혀도 집에 돌아와서 자신을 인정해 주는 아내만 보면 위로가 됩니다. 자기 아내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남편은 행복한 남편입니다. 아내는 자기 남편을 존대하는 만큼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25절부터 28절 말씀에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남편이 목숨을 걸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좀 못났어도, 아내가 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어도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이 행복합니다.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남편은 행복한 남자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희생의 사랑(sacrificial love)을 해야 합니다.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미국 컬럼비아 성경 대학의 전 총장 로벗슨 맥킬큰(Robertson McQuilkin)은 아내가 치매에 걸리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총장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지금까지는 저의 아내가 그래도 저 없이 잠시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저 없이는 잠시도 견딜 수 없어서 제가 아내를 풀타임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저는 42년 전에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가지 아내를 돌보기로 언약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내는 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저를 돌보았습니다. 앞으로 제가 40년 동안 아내를 풀타임으로 돌본다 하더라도 저는 사랑의 빚을 다 갚지 못합니다.” 얼마나 멋진 희생의 사랑입니까? 맥킬큰 총장은 매우 행복한 남자입니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니까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는 남편은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는 남자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는 아내를 거룩하게 하는 사랑(sanctifying love)을 해야 합니다. 26절과 27절을 보면, 예수님은 교회를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셔서 티나 주름이나 흠이 없는 영광스럽고 정결한 신부로 만드십니다. 남편도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만드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남편이 가정의 신앙생활에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와 가족들을 위해서 가정 예배를 인도해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아내가 나를 만나서 더 좋은 사람이 되었는가? 아내가 나를 만나서 더 좋은 어머니가 되었는가? 아내가 나를 만나서 더 좋은 신자가 되었는가?’ 아내가 남편을 만나서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신자가 되었다면, 그런 남편은 매우 행복한 남편입니다. 그런 남편을 둔 아내도 매우 행복한 아내입니다.

29절을 보면 남편은 아내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고 아내를 보호해 주는 공급의 사랑(supplying love)을 해야 합니다. 남편이 열심히 일해서 아내와 가족의 생활비를 제공하고, 강도가 들어오면 남편이 일어나서 아내와 가족들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와 가족을 질병과 사고와 기타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본문 23절에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할 때 ‘머리’는 폭군이 아닙니다. 아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아내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고 아내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서 아내를 보호하는 ‘섬기는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발을 씻기신 ‘섬기는 지도자’이셨던 것처럼, 남편도 아내의 발을 씻기는 ‘섬기는 지도자’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희생의 사랑, 성화의 사랑, 제공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런 남편을 둔 아내는 매우 행복합니다.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도 행복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서 ‘제 남편은 희생의 사랑, 성화의 사랑, 제공의 사랑과 거리가 멀어요.’라고 말씀하시는 여성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성경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남편이 이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면서 남편이 바로 서도록 온유하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랑으로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면서 남편이 바로 서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내의 행복을 키워나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편에게도 아내가 희생적 사랑으로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면 남편은 그런 아내 때문에 행복하고 남편의 그런 행복이 결국 아내가 믿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도록 문을 여는 것입니다(벧전 3:1-6).

25년간 교회에 다니면서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어떤 신자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저의 아내와 결혼하고 30년 동안 매일 싸웠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당혹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목사님은 대답할 말을 찾는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서 “매일 싸우십니까?”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예, 매일 싸웁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오늘 교회 오시기 전에도 싸웠습니까?”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싸움이 어떻게 끝났습니까?”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두 손을 땅에 대고 무릎으로 내게 기어왔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도 궁금해서 “아내가 뭐라고 하시던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내는 제게 ‘비겁쟁이야, 침대 밑에 숨어 있지 말고 이리 나와서 남자답게 한바탕 붙잔 말이야.’라고 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과 한바탕 붙어 싸우면 행복하겠습니까? 남편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비겁쟁이야,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와 나랑 한바탕 붙잔 말이야.”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남편이 하는 일이 못 마땅해도 남편을 소중하게 여기고 남편을 세워주어야 아내가 행복합니다. 남편이 노래를 부를 때에 옆에서 박수를 쳐주면 남편이 행복합니다. 행복한 남편을 보는 아내도 행복합니다. 배우자를 사랑할 때 이미 거룩한 사람이 되어 있는 성자(saint)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은 죄인(sinner)을 사랑하여 점점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다시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아내가 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게 되었는가? 아내가 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친구, 더 좋은 엄마가 되었는가? 남편이 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게 되었는가? 남편이 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친구, 더 좋은 아빠가 되었는가?’ 자메이카 속담에 “결혼하기 전에는 두 눈을 뜨십시오. 결혼한 후에는 한 눈을 감으십시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남편, 내 아내가 부족해도 한 눈을 감아 주는 것이 결혼생활입니다. 한 눈을 감고 너그럽게 대하면서 배우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결혼생활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5장 31절에서 창세기 2장 24절을 인용하면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5장 32절에서는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신비’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째서 심오한 신비일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복의 막다른 골목으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복이 내게 와서 내게만 머물러 있게 나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복이 한 인간에게서 다른 인간으로 흘러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전기가 여기서 저기로 흘러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복이 한 인간에게 다른 인간에게로 흘러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의도입니다. 인간은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나눌 수 있는 다른 인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로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셨으니 여자는 남자의 몸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의 갈비뼈로 다른 남자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는 남자와 같으면서도 남자와 다릅니다. 여자가 남자의 몸에서 나왔으니 남자와 같지만, 남자와 달리 생겼으니 남자와 다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똑 같은 남자가 합해서 한 몸을 이루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남자와 다른 여자와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같은 멜로디를 함께 부르면 제창(unison, one voice)이 됩니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서로 다른 멜로디를 함께 어울리게 부르면 합창(harmony)이 됩니다. 똑 같은 멜로디를 같이 부르는 것보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화음으로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동성의 연합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성의 연합을 만드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한 몸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과 한 몸이 됩니다(갈 3:28).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내시는 유기체(organism), 예수님의 영이 거주하시는 유기체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몸인 것처럼 남편과 아내가 한 몸입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의 연합을 기준으로 삼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기준으로 삼아 남편과 아내의 연합을 이루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의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을 본 따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언약의 연합이 남편과 아내의 결혼의 연합의 본(pattern)입니다.

 지오프리 브로밀리(Geoffrey Bromiley)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 닮은꼴로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이 결혼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인간의 결혼 닮은꼴로 만드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결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결혼을 닮아서 그 놀라운 신비적 연합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이 원형이고, 남편과 아내의 결혼이 모형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원한 결혼이 본이고, 남편과 아내의 결혼은 그것을 본 뜬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심오한 신비입니까! 남편과 아내의 결혼이 하나님과 인간의 결혼을 본 뜬 것이라니, 와, 얼마나 깊은 신비(profound mystery)입니까! 남편과 아내의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어쩌다가 만나서 같이 사는 차원이 아닙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에게 유익한 조건을 걸고 맺은 계약이 아닙니다. 계약은 조건이 불리하면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결혼을 본 뜬 언약입니다. 아무리 조건이 불리해도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로 목숨을 걸고 맺은 언약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결혼은 우주와 인류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우주와 인류보다 무한히 더 크신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결혼을 본 딴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결혼의 의미가 이리도 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남편으로서 여러분의 결혼을 이렇게 깊은 차원에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아내로서 여러분의 결혼을 이렇게 깊은 차원에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앞으로 결혼할 사람을 두고 결혼을 이렇게 심오한 신비로 생각해 보셨습니까? 정조를 지키면서 서로 신뢰할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상호 신뢰가 결혼반지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낙원을 지키는 화염검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결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땀 흘려 노력해야 합니다. 땀이 없는 곳에 발전이 없고(No perspiration, no progress), 고통이 없는 곳에 소득이 없습니다(No pain, no gain). 아내 여러분,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하나님이 주신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세워줌으로써 남편을 행복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아내 여러분의 행복입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처럼 목숨을 걸고 아내를 사랑함으로써 아내를 행복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남편 여러분의 행복입니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원한 결혼을 본 따서 인간의 결혼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각자가 배우자의 행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때, 각자의 행복과 가족의 행복은 최고조로 달할 것입니다.

 

출처 : 목회자의 요람 한서노회
글쓴이 : 다비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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