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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3) (마태복음 6:9~13)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3) (마태복음 6:9~13) 
   
마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하나의 모범적인 기도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주기도문,"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제자들의 기도문"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기도를 해서는 안 되고, 그저 주기도문만 계속해서 암송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주기도문만을 아무런 의미 없이 기계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암송한다면,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방인들의 잘못된 영향을 받아서 중언부언했던 기도와 전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순교자는 주기도문이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아무런 의미 없이 암송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고귀한 주기도문을 짓밟아 불쌍한 순교자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뜻은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원리에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정신을 잘 파악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 드리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로, "invocation," 곧 하나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마련입니다.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는 그 자녀인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주십니다.
둘째로, "petition," 곧 간구하는 부분입니다.
전통적으로 주기도문 안에는 모두 6개의 간구가 들어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루터교에서는 마지막 여섯 번째 간구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분리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섯 번째 간구를 두 개의 간구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루터교에서는 주기도문 안에 모두 7개의 간구가 들어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간구는 원인과 결과로서 사실은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빠져버리면 그것은 우리에게 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기면 그것은 우리에게 선이 되고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여섯 번째 간구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간주해서 주기도문 안에는 모두 6개의 간구가 있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6개의 간구 가운데 처음 3개가 하나님의 것을 먼저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먼저 간구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 마음의 초점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모아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인지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드려야 마땅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0:31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사실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요14:13에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마음 중심을 드리면서, "어떻게 하면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까? 어떻게 하면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까?"라는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해야 옳습니다.
주기도문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죄사함 얻기를 위해서, 승리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간구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는 분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승리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분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인 줄 알고, 범사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신 줄 알고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매사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힘있게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기도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중심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라는 마음가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 우리의 기도를 기쁘게 들어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doxology," 곧 송영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말 성경에는 이 부분이 괄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고대 신약성경 사본들 가운데는 이 부분이 빠져있는 사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우리가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는 이 마지막 부분도 함께 넣어서 암송합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시작해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찬미와 영광을 돌리면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부분은 주기도문을 끝맺음하는데 매우 자연스럽고 적절한 부분입니다.
단지 우리가 이 부분을 암송할 때 원문의 뜻을 좀 더 정확하게 살리기 위해서 한 단어를 덧붙여 암송합니다. 그것은 "대개"라는 단어입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서 "대개"라는 단어는 대충, 대략이라는 뜻입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께 대충은 있지만, 기도하는 우리들에게도 어느 정도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대개"는 헬라어 "호티"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 단어는 "왜냐하면," "그 이유는"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이런저런 여섯 가지 간구를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우리는 "대개"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암송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단어는 "아멘"입니다. 진실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는 헬라어 "아멘 아멘"을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간구들은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것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아멘"이라는 단어로 끝맺음을 합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아멘"이라는 단어를 쓸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입술 따로 마음 따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아멘"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의 진실된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주기도문의 후문에 나오는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간구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1절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넘어가서 6:25을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이유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하찮은 참새 한 마리라도 잊지 않고 먹이십니다. 들에 핀 백합화, 심지어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어질 들풀 하나까지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다 입히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녀된 우리를 왜 먹이지 아니하시고, 마시우지 아니하시고, 입혀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늘 하나님의 은혜에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을 알고,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수고해서 우리의 힘으로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러한 잘못된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해 농사가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곡간을 새로 짓고 그 속에 여러 해 쓸 곡식을 가득 채워놓았습니다. 그는 만족해 하면서 흐뭇한 나머지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수고했노라. 이제 여러 해 쓸 곡식들을 많이 쌓아놓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먹고 마시면서 편안히 즐기며 쉬자."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가 수고해서 자기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에게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셨습니까? 농사짓기에 적합한 단비와 햇빛을 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그의 심장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박동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부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저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2:20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일에 하나님 아버지를 힘있게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다시 보십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가 "오늘날"입니다. 똑같은 간구가 눅11:3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되 생각날 때마다 이따금씩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날마다 이 간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어린 아이 하나가 길을 가다가 자기 앞에 큰 바위 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는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니는데 지장이 될 것 같으니까, 내가 저 돌을 옆으로 치워야 되겠다."
아이는 그 돌을 움직여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아이는 그 돌을 밀어보았습니다. 당겨보았습니다. 그러나 큰 바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꾀를 내었습니다. 아이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지렛대를 한 번 이용해 보기로 했습니다. 나무 작대기를 구했습니다. 돌 밑에 작대기를 끼워서 한 번 눌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습니다. 바위 덩어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얘야,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 보았느냐?"
아이는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아버지.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써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합니다.
"아니야. 너는 제일 쉬운 방법을 잊고 있단다."
아들은 의아스럽게 생각하다가 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아버지, 그렇군요. 아버지께서 좀 도와주세요."
아버지는 그제야 빙그레 웃으면서 단숨에 그 큰 돌을 옮겨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일하고 싶은 마음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주시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의 힘을 믿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미국 뉴욕시 근교에 있는 한 공동묘지에 가면 특이한 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그 비석은 생김새가 이상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재질을 가지고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 비석에 쓰여있는 비문이 특이합니다. 한 단어만 쓰여 있습니다.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연도가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무덤에 묻힌 사람의 가족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딱 한 단어만 적혀 있을 뿐입니다. "Forgiven," 곧 "죄사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무덤에 묻혀있는 사람이 모든 죄를 다 용서함 받고, 평안하게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그 한 단어만 적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지 못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결단코 설 수 없습니다. 죄사함을 받아야만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죄사함을 받아야만 마음 속에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롬8:1∼2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영생이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계십니다. 이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도 송구한 나머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제 발을 씻기시려 하나이까? 절대로 제 발을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얼른 자기의 말을 고쳤습니다.
"주여, 만일 그러하시다면 내 발뿐만 아니고 내 손과 내 머리도 함께 씻겨 주시옵소서."
그때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미 목욕을 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여 졌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이미 목욕을 한 자들입니다. 온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악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죄악의 먼지가 우리의 발에 묻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더러워진 우리의 발을 내밀어야 합니다. 우리의 발을 예수님께 내밀어야 예수님이 씻겨주시지, 내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발을 씻겨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간구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목욕을 해서 깨끗해졌지만, 더러워진 우리의 발을 씻음 받기 위해서 예수님께 우리의 발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엿새 동안 세상에 살면서 온갖 죄를 다 지었습니다. 그리고 주일마다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낯 간지럽습니다. 하나님께서 화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롬5:20에서 무엇이라고 기록했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지은 죄보다 훨씬 더 큽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십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아무리 우리의 죄가 크다 할지라도 주 앞에 나아와서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간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 없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옮겨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유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사함을 얻기 위한 간구에는 하나의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다른 점입니다. 마5:43∼44을 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웃만 사랑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원수를 용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이웃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원수까지라도 사랑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용서해 줍니다.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질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인 우리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호적에서 자녀들의 이름을 제외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 자녀가 되면 싫으나 좋으나 우리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가 계속해서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칭찬 대신 꾸중을 합니다. 상 대신 벌을 줍니다. 용돈도 깎아버립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랑하니까 징계의 채찍을 들기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심하게 되면 우리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대상이 되어야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만 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함을 받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함을 받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데 인색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행여 형제를 향해서 마음 가운데에 미움의 쓴 뿌리를 아직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다 떨쳐버릴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마음의 거리낌이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이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승리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3절 상반부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는 매우 간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엄청난 깊이가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는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와 들풀조차도 잊지 않고 먹이시는 성부 하나님을 향한 간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사함을 얻기 위한 간구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리시고 죽으신 성자 예수님을 향한 간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승리로운 삶을 살기 위한 간구는 누구를 향한 간구입니까?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지금도 우리의 발걸음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향한 간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짤막한 간구 속에 성삼위 하나님을 향한 간구가 다 들어있습니다.
또 시간적으로 보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는 현재적인 간구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에 필요한 양식을 위한 간구이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을 얻기 위한 간구는 과거적인 간구입니다. 이미 과거에 지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한 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반면에 마지막 여섯 번째 간구는 천국에 가는 그 시간까지 승리로운 삶을 살기 위한 미래적인 간구입니다. 이 짤막한 기도 속에 현재, 과거, 미래가 총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내용이 얼마나 깊이가 있습니까?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참으로 악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지금도 삼킬 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절실하게 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시험"이라는 단어가 좋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지만, 나쁜 의미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너의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드려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망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런 시험을 주셨던 것은 아닙니다. 더 큰 축복,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좋은 의미의 시험입니다. 이런 것을 영어에서는 "test"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악한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가지고 아담과 하와를 시험했습니다. 또 마귀는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한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시험했습니다. 이것은 나쁜 의미의 시험입니다. 이런 것을 영어에서는 "temptation," 곧 "유혹"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말이나 헬라어에서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시험을 좋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여섯 번째 간구는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하나님, 지금 제가 당하고 있는 이 시련에 낙심하거나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그 옛날 욥이 믿음으로 그가 당한 모든 시련을 인내하고 하나님이 주신 갑절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저도 이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로운 삶을 삶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주시옵소서."
이러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시험을 좋지 못한 의미로 해석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지금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옛날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승리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렸던 것처럼, 저도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로운 삶을 삶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러한 뜻이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시험이 좋은 의미로 사용되든지 나쁜 의미로 사용되든지 간에 결과는 같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미의 시험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시험에 빠져버리면 그것은 우리에게 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쁜 의미의 시험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되고 선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헛되게 남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셨으면 그 깨끗함을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도 힘쓰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간구하면서도 시험에 들 자리를 찾아가고, 시험에 들 일을 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기도는 죽은 기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우리도 열심히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성경에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기도했으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받기를 원하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기도했으면 우리의 입, 우리의 눈, 우리의 손, 우리의 발이 실족치 아니하고 바른 길을 가도록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도우신 것처럼,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여호와 이레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고, 여호와 닛시가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로운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고전10:13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은 허락지 않으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도 얼마든지 시험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든지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시험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얼마든지 내가 시험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악한 마귀를 대적해서 시험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리고, 하나님 아버지깨 큰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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