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지갑이 회개할 때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너희에게 알게 하노라“ (고후8:1)
어느 목회자의 한탄
회심하지 못한 자의 대표적인 욕망은 물질에 대한 탐심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이 집요하게 계속될 때 그것은 인격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섬기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의 자유란 있을 수 없습니다. 헌금생활을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 교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부요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시는 항구도시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아 유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를 거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연보와 관련된 상황 속에서 이 교회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문맥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 기근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연보를 해서 고통 받고 있는 예루살렘교인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의하여 세워졌지만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거룩한 은혜들을 만족스럽게 지켜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헌금생활 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후서를 써 나가면서 헌금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 교회를 사랑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시련에 달린 교회
마게도냐 교회는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없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마게도냐는 바울이 아시아로 전도하러 가려고 애를 썼지만 성령이 끝까지 막으셔서 가게 된 곳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이 마게도냐 교회가 환난의 많은 시련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방세계에서 새로운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므로 박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물리적인 박해는 물론이거니와 철학이 파다한 이 마게도냐 한복판에서 복음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사상적인 박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을 낙인 찍으려하고 박해하고 핍박하는 환난과 시련을 많이 겪은 교회였습니다.
가난해도 부유한 교회
시련을 많이 당해도 원래 부유한 교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교회라면 풍족한 헌금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셈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교회는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헌금한 교회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부유한 항구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고린도 교회들을 부끄럽게 할 정도로 넘치는 헌금을 한 교회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헌금의 비결, 기쁨
성경은 그 비결이 ‘기쁨’ 이었다고 말합니다. 저희에게 하나님을 인하여 넘치는 기쁨이 있었기에 이렇게 넘치도록 연보를 드리는 삶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도 컸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위로는 그것들을 초월하였습니다. 시련은 컸지만 시련보다 더 큰 사랑을 알았습니다. 환난이 있었지만 환난을 능가하는 기쁨이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기쁨이 그들을 주관하였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환난도 시련도 사라지게 할 수 없는 기쁨이 있었기에 그들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해받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있는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주는 교훈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성도들이 모여 살아도 기쁨이 있는 교회, 많이 배우지 못한 교인들이 모였을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교회,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인하여 행복해 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 그렇게 복음이 있는 교회에는 언제나 헌신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하는 본보기로서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물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신앙의 고백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은혜로 산다는 고백
헌금 정신 중 하나는 우리가 사는 것이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는 것이 물질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분명히 인색한 헌금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사실을 삶에서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풍성한 헌금생활을 하고야 말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헌금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시험에 들거나 모이는 수가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설교자가 돈을 위해서 설교한다면 반드시 그런 결과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설교자가 복음을 알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전하고 그 복음이 요구하는 바를 따라 헌금에 대해서 정직하게 설교한다면 교회는 부흥하고야 말 것입니다.
헌금 설교로 부흥한 교회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담임목회자가 공석 중인 교회의 강단을 잠시 지켜 주도록 초빙 받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례적으로 육 개월 동안 헌금에 대해서만 설교를 하셨습니다. 교회가 문을 닫았을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강단을 지키는 육 개월 동안에 칠십 명의 교인이 늘었습니다. 최근 저도 유사한 상황을 경험하였습니다. 다른 설교에 감동받지 못하던 교인들 중 여러 사람이 헌금을 설교할 때 흐느끼며 복음의 감격을 경험하는 장면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생각 없는 헌금생활을 뉘우치고 각성하는 장면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지체는 지난해 설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설교로 헌금설교를 꼽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내는 헌금의 액수만이 아니라, 그 돈이 정말 깨끗한 헌금이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금이 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관심이 돈이 아니라 바르게 하나님 앞에 가르치고 지켜야 할 성도들의 영혼에 있을 때 그 설교가 무엇이든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가져오고 영혼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반드시 한 가지 욕망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무엇 이든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고 마다하여도 바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넘치는 기쁨이 내 안에 역사하고 있을 때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지는 법입니다.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불꽃같은 기쁨
불꽃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헌금도 불꽃처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확인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재물을 의지하거나 우리의 물질을 의탁해서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마음 중심에 담겨 있는 헌금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적인 예배에서 바치는 헌금뿐만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은 여러분의 달란트입니다. 그런 기회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주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할 상황이 될 때 그 기회를 지나가게 하지 마십시오. 넘치도록 도우십시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워지는지 모릅니다.
마케도냐 교인들의 마음에 넘쳤던 기쁨, 그래서 탁월한 물질의 섬김을 가능하게 했던 그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부요한지를 알고 그 은혜 때문에 살아왔고 또 살아가리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넘치는 헌금을 합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여기까지 살아오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까? 물질이었습니까? 주님의 도우심이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능력이었습니까?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였고 앞으로도 그 하나님의 은혜에 빚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일평생 힘닿는 대로 넘치도록 주님을 섬기다가 하나님께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원하는 마음
마게도냐 교회의 두 번째 헌금 실천 원리는 자원의 원리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고후 8:4) 마게도냐 교인들은 선교본부에서 할당한 회비를 납부하는 마음으로 연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너무도 가난한 교회였기 때문에 구제헌금을 낼 교회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헌금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자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헌금의 한 원리입니다.
자신을 주신 주님
“...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 8:5) 마게도냐 교인의 헌금은 자신을 먼저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쳐졌기 때문에 물질을 바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풍성한 연보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작고 죄송스러울 정도로 보잘것없는 헌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드린 사람은 모든 것을 드린 사람입니다. 자신을 드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드리는 것쯤은 어렵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의 헌금생활이 풍성하지 못한 것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못한 자기 헌신과 자기 부인의 부족에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맺음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와 함께 넘치는 연보를 한 마게도냐 교회를 기뻐하시는 것도 바로 그들이 드린 물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 연보를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것을 입증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물질은 우리를 위하여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다면 물질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은 얼마나 쉬울까요? 진정한 헌금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참된 예배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헌금도 불꽃처럼 드려져야 합니다.김남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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