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어느 사형수의 노래
“이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출15:1)
왜 그렇게 살았는지
지난해 서울에 있는 어느 교도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를 초청한 교도소 간부는 제게 여기 예배에 모인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예배하고 찬양할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라고 귀띔 해 주었습니다.
은혜로운 집회를 마치고 막 예배실을 걸어 나오는 중에 우연히 교도소 안에서 제작되어 배포되고 있는 소식지를 받아들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실린 간증 편지 하나가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편지의 주인공은 ‘김현양’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엽기적인 살인 행각으로 온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불러 일으켰던 지존파 살인범이었습니다. 그는 사형 언도를 받고 형 집행 일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집사님의 끈질긴 전도를 받고 회심하였는데 그분께 보낸 편지의 사본이 그 소식지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는 편지 속에서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준 이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집사님, 생각하면 제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제 눈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죄에 대한 대가로 죽지만 세상에서는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기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눈물만 흐릅니다. 저는 요즘 늘 이 찬송을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은혜 받은 성도의 노래
은혜 받은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이처럼 영혼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야비하고 비열한 노래들을 천박하게 흥얼거리는 사람들은 그런 정서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신령한 노래가 있습니다. 마음도 싣지 않은 채 뜻도 없고 생각도 없이 간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섞어 있는 말을 기도라고 할 수 없듯이, 단지 교회 안에서 불려지는 가락이라고 해서 모두 찬양일 수 없는 것입니다.
노래할 이유
찬양다운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신 위대한 일들에 대한 경험을 주시시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대한 구원을 경험하자 그 백성 전체가 장엄한 성가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있을 때 찬양은 우리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있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변하여 찬양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격하였고 그 감격은 자연스럽게 찬양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찬양을 통해 자신들의 무엇을 바꾸어보려는 계획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자신들을 위한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노래가 되었습니다.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되었습니다.
찬양은 부흥의 수단인가?
요즈음은 찬양을 통해서 무엇인가 인간들에게 감동을 주고 변화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시도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기를 과도히 동원하고 심리적인 기법을 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못된 것입니다. 찬양은 언제나 찬양할 이유가 있는 찬양자에 의하여 불려지는 것입니다. 찬송 자체를 통해 무엇인가 사건을 만들어보려는 의도는 예배정신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광스러운 찬양이 신령하게 울려 퍼지는 교회생활을 기대한다면 노래하는 일 자체보다도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 보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우리를 위하여 이미 행하시고 앞으로도 이루실 큰 일에 대해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참된 부흥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있고, 이것이 언제나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규모와 자유
찬양에서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규모와 자유의 조화입니다. 분명히 예배에는 일정한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예배에서 자유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예배에서 자유가 아무리 강조되어도 규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몇 시간 내에 끝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규모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격식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찬양에도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참된 자유는 설교에서뿐만 아니라 찬양에서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의 예배가 그런 파격을 경험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한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해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가 없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아무리 노래해도 찬송의 가락이 우리의 마음에 마르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두 찬양을 마치고 설교를 듣고 주일오전예배를 마치니까 하늘의 별이 총총하더라는 간증이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은혜 경험을 동반하라
예배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현재적으로 경험되지 않으면 우리의 찬양은 달라질 수 없습니다. 악기와 성가대와 음향시설을 의지하기보다는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 하나님이 그 임재 속으로 우리를 불러주시길 고대하며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찬양입니다. 찬양을 부를 때 생각이 딴 곳에 가 있는 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을 부를 때 가락이 아니라 가사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여러 번 같은 찬송을 부르는 것이 유익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대장간의 추억
지금은 이미 다 사라진 광경이기는 합니다만 어릴 적 시골 장터에 가면 볼 만한 구경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대장간입니다. 평범한 쇳덩어리로 낫이나 칼, 호미 같은 것을 만드는지 보신 적 있습니까? 화로에서 갓 꺼낸 시뻘건 쇠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결코 크지 않은 망치로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아주 빠르게 망치질을 합니다. 그러면서 불과 몇 초 만에 그 기다란 쇳덩어리가 활처럼 휘면서 낫의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몇 차례 더 화로와 모루 사이를 오가면 예리하게 날이 선 기구로 변합니다. 만약에 차가운 무쇠를 갖다놓고 망치로 두드린다면 결코 그런 기구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정서로 달아오르고 심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는 그분의 심정과 일치하면 고함치는 설교가 아니라 속삭이는 설교로도 사람들은 위대한 회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번개를 동반한 우레와 같은 설교를 통해서만 위대한 각성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합니다. 예배에서 찬양의 이러한 기능이 중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에서 가장 우위적인 요소인 깨닫게 하시는 기능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를 찬양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경은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이고, 둘째는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며, 셋째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예배 중에는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이 중요한 찬양의 제목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 가운데 가장 약화된 신앙 사상 중 하나는 바로 이처럼 하나님이 온 우주를 지으신 분이라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엄, 모든 피조물들이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영광과 전능하심, 그러한 주님 앞에 자신이 지극히 작고 초라한 피조물일 뿐임을 예배 속에서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인식과 자기 확인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예배현장이어야 합니다. 창조주를 찬양하는 것은 예배의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십자가를 노래할 이유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과 함께 반드시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찬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백성들임을 확인하게 되고, 이 시대를 향한 거룩한 소명을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구원의 선택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선택과 구원이 예배 중 중요한 찬양의 제목이 됨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배 중에 우리를 구속하신 찬송을 부르면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지 못한 것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찬양을 부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보다 더 큰 자랑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은혜를 찬송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연합의 축복을 누립니다. 예배 중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노래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은혜로운 구원행동
하나님을 향한 또 하나의 찬송제목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배를 경건하게 하기 위하여 찬양순서를 계획하고 준비할지라도 진정으로 거룩하고 살아 있는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위대한 일들을 목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간증이 담긴 고백의 찬양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것은 찬양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런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지금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노래할 때가 아니라 참된 부흥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언젠가 반드시 노래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옵니다.”
맺음말
우리는 예배 중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이 땅의 온 조국 교회가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위대한 은혜를 경험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못해 예배하던 성도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감격 속에서 경배하고, 단지 노래 부르던 교인들이 영혼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예배현장을 그리워하면서 이 땅에 임할 거룩한 부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부흥을 경험할 때 노래가 찬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김남준목사
'추천 설교 > 김남준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8. 더 값진 예물 (0) | 2015.05.11 |
---|---|
[스크랩] 강가에서 흐느낄 때 (0) | 2015.05.08 |
[스크랩] 6. 지갑이 회개할 때 (0) | 2015.05.08 |
[스크랩] 5. 밤나무의 추억 (0) | 2015.05.08 |
[스크랩] 들어야 할 목소리 (0) | 2015.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