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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이 주신 아들

하나님이 주신 아들
설교자 : 마경훈목사

본문 - 이사야 9장 1 - 7절(개역개정)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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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학교 선생님이 한 어린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성경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니?” 아이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죠. 다 알고 있어요.” 아이가 다 알고 있다니 선생님이 설마하며 말했습니다. “그래, 대단하네. 그럼 성경 속에 뭐가 있는지 말해볼래?”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성경에는 헌금 봉투하고 피자 쿠폰 두 장이 들어있어요. 그리고 누나 성경 속에는 뭐가 있는 줄 아세요? 선생님, 우리 누나 성경 속에는 요 연애편지가 있어요.”
   성경은 예수님이야기를 하는 책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 순신 장군 전기를 읽어보면 모두가 이 순신 장군 이야기이듯이 성경은 모두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본문도 예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기에 관해 말씀합니다. 이 아기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아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절에 세계의 패권을 잡은 나라는 앗수르였습니다. 앗수르는 많은 나라를 정복했습니다. 그 중에 북 이스라엘도 앗수르에 의해서 정복 되었습니다. 앗수르는 그 여세를 몰아 남 유다를 침공하려고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다는 앗수르의 대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남 유다를 다스리던 웃시야 왕까지 죽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유다와 동맹관계를 맺어서 앗수르를 대적할만한 이웃나라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믿을 만했던 나라가 애굽인데 애굽도 그 힘이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유다 백성들은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렇게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서 희망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크게 두 가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오셔서 유다를 어떤 나라로 만들어주실 것인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보내실 아기는 어떤 분인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라는 나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적인 것을 통해서 영적인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책이고, 구약의 민족적인 전쟁을 통해서 신약의 영적 전쟁을 보여주는 책이고, 구약의 물질 축복을 통해서 신약의 영적 축복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다에 관한 예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게 되는 신령한 복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먼저는 예수님이 오셔서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입니다.
1. 예수님이 오셔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 되었습니다. 마 12:28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입니다. 이미 시작 되었지만 아직 완성 되지 않았습니다. 현세에서 시작 되었고 내세에서 완성 되는 나라입니다. 현세에서는 부분적으로 누리지만 내세에서는 완전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즐거운 나라입니다.
   3절입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즐거움이 몇 번 나옵니까? 4번입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나라의 특징은 즐거움입니다.
   롬 14:17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합니다. 롬 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세 번째 특징이 희락입니다. 희락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라’라는 말인데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이 낳은 세계적인 석학 임어당은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도 거의 한평생을 비기독교인으로 살면서 교회를 향한 반감의 글을 썼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파란만장한 삶을 주셨나 봅니다. 그가 아끼고 사랑하던 딸이 자살을 하고, 집안에 우환질고가 계속해서 밀려왔습니다. 그에게 인생은 지옥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가정부는 언제나 천사 같은 얼굴로 기쁘게 집안일을 했습니다. 남의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한두 달이 아니라 몇 달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렇게 일하는 가정부를 보고 그가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이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 어찌 그리 즐겁습니까?”,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 이렇게 기쁘고 즐겁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좋은지, 선생님도 예수님을 믿어 보세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그 가정부에게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면서 ‘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하며 교회를 옹호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었� 윱求�
   예수님 진실하게 믿으면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예수님 제대로 만나면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2) 평화의 나라입니다.
   4, 5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주님께서 유다를 괴롭히던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꺾으시는데 미디안의 날과 같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평화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기드온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의 압제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백성들이 괴로우니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실 때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 샬롬”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용하셔서 미디안 사람들을 쳐부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평화를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기도온을 통해서 평화를 주신 것처럼 평화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7절에 보니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영원한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마치 파도가 계속해서 바위를 때리듯이 염려와 근심, 초조와 불안, 두려움과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계속해서 마음을 때리기 때문에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는 것이 괴롭습니다. 환경이 좋아도 마음이 늘 괴롭습니다. 인생이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주님을 제대로 만나면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마음에 가득하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던 파도가 사라지게 됩니다. 마음이 고요한 호수처럼 됩니다. 진정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3) 공의로운 나라입니다.
   7절 하반절에 보니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공의로운 나라 정의로운 나라입니다.
   암 5:24을 보면 하나님이 만드시는 나라는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는 나라입니다.
   공의로운 나라가 평안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고려대 4학년생이 붙인 “안녕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이슈입니다. 안녕이라는 말은 아무 탈 없이 평안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니 자신은 안녕하지 못하는데 여러분은 안녕하냐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의 문제 중에 하나는 평안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을 봐도 날마다 싸움만하지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평안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경제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편향적이기 때문입니다. 편향적이라는 말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말하는데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말은 공의롭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권력자도, 정부도, 당도, 방송도, 경영자도, 노동자도 편향적이기 때문에 평안하지 못하고 늘 시끄러운 것입니다. 모두가 공의로우면 시끄러울 일이 없습니다.
   대부분이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쪽을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좋아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싫어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사회의 문제입니다.
   저는 좀 보수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보수냐 진보냐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보수도 좋은 점이 있고 진보도 좋은 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지나친 것이 문제입니다. 극우 극좌가 되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기준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편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진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좌나 우의 기준을 잡아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이 세상에는 억울한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공의롭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모두가 정의를 행하면 억울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억울함이 없습니다. 상을 받던지 벌을 받던지 자기가 행한 대로 받으니 억울할 게 없습니다. 거기다가 은혜를 입으면 더더욱 억울할 게 없습니다. 공의대로 하면 지옥가야 하는데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나는 공로가 없는데도 주님의 공로 때문에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천국에 가니 억울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공의로운 나라입니다.

2.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주님은 즐겁고 평화롭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분입니다. 그럼 그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예수님은 통치자이십니다.
   6절에 보면 “그이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정사라는 것은 통치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통치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시며 심판자이십니다. 롬 11:36에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말씀합니다. 만물이 준미에게서 나왔습니다. 주님이 창조주이십니다. 만물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입니다. 주님이 통치자이십니다.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주님이 심판자이십니다.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우연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필연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우연처럼 생각되는 것도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왕상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죽이시기로 작정하시고 아람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게 하십니다. 아합은 전쟁에서 죽지 않으려고 왕의 옷을 입지 않고 일반 병사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 중에 한 병사가 무심코 활을 쏘았는데 아합이 맞아서 죽습니다. 개역개정에는 ‘무심코’라고 번역 되어 있는데 개역성경에는 ‘우연히’라고 번역 되었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아합이 우연히 활에 맞아서 죽은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우연도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자이십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전에서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고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찬양의 내용 중에 보면 한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고 고백합니다. 삼상 2:6-9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9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우리 주님은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의 통치자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혜입니다.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위대한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행 13:36에는 다윗의 생애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갔던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생애가 성공적이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대통령 취임 연설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저는 워싱톤 대통령 이래 그 어떤 역대 대통령이 겪었던 어려움보다도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전임 대통령들이 항상 의지하였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결코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링컨은 주님의 통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주님은 통치자이십니다.

   2) 예수님은 위대한 상담자이십니다.
   6절에 보면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고 말씀했는데 바른 성경에서는 ‘위대한 상담자’로 번역을 했습니다. 제가 본 영어 성경에는 ‘Wonderful advisor’, ‘Wonderful counselor’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위대한 상담자이십니다.
   좋은 상담자를 만나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마음 놓고 상담할 수 있는 좋은 상담자가 주변에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양 정신 목사님이라는 맹인 목사님께서 쓴 [이 어두움을 비추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간증입니다. 군대에서 탈영한 신 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군생활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는 수류탄을 한 발 훔쳐 가지고 안동 극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있는 군중 속에 서서 수류탄을 던지겠다고 위협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 사건으로 사형언도를 받고 복역중이었습니다. 이 때 양 정신 목사님 설교를 듣고 크게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목사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 양 목사님은 감옥으로 찾아 가서 상담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신 하사는 양 목사님과 이야기하고 상담할 때마다 변화되어 나중에는 자기 눈을 빼 다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신하사의 변화에는 양정신 목사님의 상담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 중에 좋은 상담자를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언제나 부족함이 있고 실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상담자이신 주님에게 상담을 받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14년 전에 주님을 의지하여 기가 막힌 상담을 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아주 난감한 문제로 제게 상담을 했습니다. 도저히 제 머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저는 저에게 묻는 그분에게 대답하기 전에 마음으로 주님에게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상담을 하고 있었지만 저는 진정한 상담자는 예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상담자이시니까 제가 예수님께 묻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지요. 제가 주님에게 묻자 주님은 제가 생각지 못했던 지혜를 생각나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저에게 주신 응답을 그분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분은 제게 상담을 받은 대로 순종을 했고 주님은 기막힌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문제가 해결 된 후에 저에게 찾아와서 “목사님은 솔로몬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칭찬을 들었지만 사실 그 상담은 제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상담자 되시는 주님께서 저를 통해서 상담을 해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위대한 상담자이십니다.

   3)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6절에 보니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33년을 사셨지만 그분은 사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딛 2:13에도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귀한 것이고 우리에게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죽으심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한분의 죽음이 어떻게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사랑이 많으시니 쥐 10마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을 수 있습니까? 없죠. 10마리로는 부족해요? 그럼 100마리면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한 사람의 생명과 1만 마리 아니 1천만 마리의 쥐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왜요? 쥐의 생명보다 인간의 생명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온 인류가 구원을 받고도 남는 것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4)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6절에 보니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온 인류의 참된 통치자이시고, 위대하신 상담자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앞집 아저씨가 능력이 있고, 인격이 좋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아버지가 그런 분이어야 나하고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우리의 자랑입니다. 주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내가 그분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의 아버지가 자녀에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은 잠시 뿐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는 능력이 있어도 몇 년이 지나면 헤어지게 됩니다. 저는 제 육신의 부모님과 산 세월보다 제 아내하고 산 세월이 더 깁니다. 저는 20살까지 아버지 품안에 있었습니다. 군대를 가면서부터 아버지 품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대 후에 잠시 아버지 집에서 살았지만 곧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집을 나왔고 결혼하면서부터는 제 아내하고 살았습니다. 세상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잠시 잠간입니다.
   주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몇 십 년 몇 백 년 동안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분은 몇 십 년 몇 백 년 정도 우리를 도우시는 것아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를 도우시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담대하게 만들어주고, 평안하게 만들어주고,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자신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부하는 사람은 결코 불행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확신하면 결코 불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품에 있으면 행복합니다.
   여러분! 늘 하나님의 품에 거하십시오. 그것이 행복한 인생의 비결이고 성공적인 인생의 비결입니다. 아버지가 능력이 있고 사랑이 풍성해도 아버지가 싫다고 가출을 하고 아버지를 멀리 떠나면 아버지가 도와주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그랬습니다. 그가 집을 나가니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탕자가 고통 중에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결심대로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아버지 떠나면 고생입니다. 불행입니다. 아버지 품안에 거할 때가 행복이요 성공입니다.
   이슬람교는 알라에 대한 이름이 99개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불교에도 부처, 석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습니다. 유교에서도 공자나 맹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저를 따라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아버지 품에 거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5)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6절 뒷부분에 보니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평강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주님의 나라의 특징이 평화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말한 평화와 여기서 말하는 평강은 같은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입니다.
   눅 2:14에서 천군천사들이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늘엔 ‘영광’ 땅에는 ‘굴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시므로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땅에는 평화입니다.
   여러분! 누가 행복한 사람일까요? 내면에 평강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평강을 환경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환경적인 편안함은 잠시 잠간입니다. 우리 주님 안에 영원한 평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이 분은 제일 먼저 LA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지진을 만났습니다. 지진 때문에 집이 무너지고 살림살이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이 분은 평화롭고 안전한 곳에 살아야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당장 짐을 싸들고 플로리다 지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플로리다는 제가 금년 2월에 부흥회를 갔던 곳입니다. 플로리다는 아주 살기 좋은 곳입니다. 은퇴한 노인 분들이 플로리다에서 노년을 보내기를 소망할 정도로 살기 좋은 곳입니다. 이 사람은 가족들과 함께 플로리다 가운데에서도 바다가 멋지게 내려다보이는 해안 경계선의 언덕 위에 있는 집을 샀습니다. 그런데 이사 간 그 해에 허리케인을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허리케인이 그 멋진 집을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습니다. 크게 낙담한 이 분들은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지역이 없나하고 찾다가 오클라호마를 생각해냈습니다. 오클라호마는 지진 피해도 거의 없고 또 바다를 끼고 있지 않으니 허리케인과 같은 태풍으로부터도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클라호마로 가서 몇 년 동안 잘 지내다가 ! 이번에는 토네이도가 불어와서 집이 또 한 차례 파괴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세 차례의 큰 어려움을 겪고 난 뒤에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안에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 14:27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샬롬의 왕으로 우리들에게 샬롬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플로렌스(Florence)의 한 화랑에 가면 아주 독특한 그림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그림에는 성난 파도가 넘실대고 검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무서운 번개와 폭풍우를 내리 꽂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간 한 남자가 물에 빠져 필사적인 구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비탄」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표현하는 그림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그림은 첫 번째 그림과 마찬가지로 성난 파도와 먹구름, 무섭게 몰아치는 폭풍우 등을 똑같이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난 파도 한 가운데 작은 바위 하나가 솟아 있는데 이 바위의 갈라진 틈 사이로 아름다운 꽃과 푸른 풀이 조금 피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깨어진 바위 틈 한 가운데 비둘기 한 마리가 모진 풍파에 조금도 아랑곳없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 이 그림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화」입니다. 무섭게 파도가 치고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쳐도 반석 안에 있는 새는 평화롭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고 파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폭풍우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석 되시는 주님 때문에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두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환난이 있습니다. 환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거하면 우리는 환난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요 16:33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러분! 제가 왜 예배를 강조하고 기도를 강조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강조하는지 아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주님 안에 거하기를 원해서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평강이 있습니다. 로마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참다운 평안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 거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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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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