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
설교자 : 마경훈목사
본문 - 에베소서 1장 3 - 6절(개역개정)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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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서 바울로 하여금 에베소서를 쓰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는 교회가 어떠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잘 읽어보면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엡 1:1,2절은 인사말입니다. 3절부터 교회를 향한 권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한 권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권면입니다. 3절은 “찬송하리로다”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교회가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찬송생활이 중요합니다. 교회 생활 역시 찬송생활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그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성경 사 43:21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많은 사람 중에서 다윗을 특별하게 사랑하셨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이유가 그의 찬송 생활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의 절반 정도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시편이 무엇입니까? 찬송시입니다. 하나님을 기리고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가 시편입니다. 다윗이 그만큼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열심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시편 119편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길 때에 하나님을 찬송한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인 사울이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 다윗은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생명이 위협 받는 상황에 있던 다윗은 하루에 3번 기도했고 7번 찬송했습니다. 시 119:164에 보니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울에게 쫓기고 생명까지 위협받아도 다윗은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이 얼마나 예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찬송 중에 임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것입니다. 시 22:3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라고 노래했습니다. 다윗은 찬송할 때 자신에게 하나님이 임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찬송 중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함께 합시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계십니다.”
이제 몇 주만 지나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 행사 중에 새벽송이 있습니다. 요즘은 편의상 성탄 전야 행사를 마치고 밤중에 합니다. 보통 학생, 청년들이 교우들의 집을 돌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기다리던 교우들은 밖에서 찬송 부르는 소리가 나면 나가서 그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서로 축복하고 준비한 과자나 과일을 선물로 내놓습니다. 그 선물은 성탄절 아침에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돌아갑니다. 저는 참 좋은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낙중 목사님에게는 새벽송과 관련된 간증이 있습니다. 최 목사님이 시골에서 목회를 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절 새벽송을 위해 학생들에게 찬송가를 외우게 했습니다. 불신자 집에 가서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신자 집에 가서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기로 했습니다. 아마 작은 시골마을이니까 동네의 모든 집을 방문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새벽 4시쯤 귀신들린 무당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밖에서 들으니 징을 치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굿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 집이니까 학생들은 대문 밖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잠시 후 요란하던 징소리가 그쳤습니다. 그리고 집 주인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달려나와서 “굿하는 집에 웬 찬송가여. 우리 집 이제 망했어”라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찬송가 소리가 들리자 일어나서 춤추던 무당과 앉아서 징을 치던 무당이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 그 집에 임하신 것입니다. 능력의 하나님이 임하시니 귀신을 섬기던 무당들이 쓰러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 일로 인하� �그 집이 모두 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되었답니다. 하나님께서 찬송 중에 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 중에 임하십니다. 할렐루야!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찬송해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성경은 손바닥을 치며 찬송하라고 말씀합니다(시 47:1). 박수치며 찬송하는 것을 경건하지 못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경건하지 못한 것을 성경에서 하라고 할 리가 없잖아요.
성경은 기쁘게 외치며 찬양하라고 말씀합니다(시 71:23). 젊은이들 집회에서는 찬송을 하다가 “오~호”하며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 아닙니다. 감사하고 감격해서 기뻐서 소리치며 찬양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성경은 손을 들고 찬송하라고 말씀합니다(시 134:2). 저는 어릴 때 서대문구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살던 지역은 외국에서 국빈이 방문하면 청와대를 가기 위해서 지나가는 코스였습니다. 그래서 학생들 전체가 거리에 나가서 국빈을 환영하는 행사에 동원되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손을 들고 흔들면서 열정적으로 환영을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할 때 손을 드는 것도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찬송할 때 손을 드는 것은 이상한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입니다.
시 150편에는 온갖 악기를 동원해서 찬송하고 심지어 춤추며 찬송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 가서 유대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 춤을 추며 돌면서 찬송을 하는데 그야말로 축제입니다.
대상 23:30 서서 찬송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로 앉아서 찬송하는데 이게 한국의 문화입니다. 유교적인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서 외국인들의 예배에 참석하면 서서 열정적으로 찬송을 합니다. 이스라엘에 가보신 분들은 보셨을 것입니다. 거의 서서 찬송합니다.
대하 20:19에서는 심히 큰 소리로 찬송하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해봅시다. “심히 큰 소리로” 여러분! 찬송할 때는 큰 소리로 찬송하기를 바랍니다.
찬송을 많이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과 육체의 건강에도 좋습니다. 심지어 찬송을 많이 듣고 찬송을 많이 하면 머리도 좋아집니다.
수년 전 미국의 박사님 두 분이 연구하고 발표한 내용입니다. 6개월간 모차르트 곡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은 미취학 아동들이 그렇지 않은 아동들에 비해 뛰어난 학습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특히 수학과 과학에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좀 더 확실한 근거를 위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해 봤는데 역시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후 한 쪽엔 10분간 모차르트 곡을 들려주고, 다른 한쪽은 들려주지 않고 수학과 과학 시험을 보게 했답니다. 그랬더니 음악을 들은 쪽 학생들이 반대쪽 학생들에 비해 평균 30% 높은 점수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음악은 어떨까 비슷한 실험을 했답니다. 록 뮤직(rock music) 등 시끄러운 음악을 들려주고 시험을 치렀더니 평소보다 낮은 점수가 나왔다고 합니다. 참 신기하죠.
더욱 흥미로운 것은 식물들도 음악에 대해 반응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미국의 도로시 리틸락 박사는 하루 3시간 록 뮤직(rock music)을 식물에게 들려주었더니 애호박에 주름이 생기고, 토마토가 납작해지고, 옥수수가 구부러졌다고 합니다. 반면에 왈츠나 세레나데를 들려준 식물은 싱싱하게 잘 자라고 열매도 실했다는 것입니다.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유익합니다. 두뇌 활성화, 학습 능력과 생산성의 향상 등의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의 장애나 질병을 치료해 준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음악 치료학’이라는 것도 나오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 음악을 가리켜 ‘영적인 언어’라고 했는데, 이 말처럼 음악은 육체뿐 아니라 영혼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음악을 선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음악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찬송’입니다.
홀스타인이라는 젖소가 전에는 한 마리가 600 파운드 젖을 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홀스타인에게 찬송가를 들려주며 기르는데 4,750 파운드의 젖을 짜고 있답니다. 같은 젖소인데 찬송가를 들으니 무려 8배나 많은 우유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영적인 면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유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찬송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에(3절)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무슨 복입니까? 공동번역에서는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복이란 영적인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영혼과 육체를 지닌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복도 받아야 하지만 반드시 영적인 복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대부분 영적인 복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서울의 한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는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이 어린이들이 선택한 세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로 살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 그리고 편하게 살고 싶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이의 눈에 비쳐진 자신들이 복되다고 생각하는 삶의 기준이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영혼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습니다.
문제는 하늘을 보고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영적인 복에는 별로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냥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들어가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건강하게 살고, 부자로 사는 것 정도를 생각합니다. 내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신령한 복을 등지고 사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고 말하고, 하늘에 속한 복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영적인 복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일에는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두 종류의 복을 주십니다. 첫째, 일반적인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가리지 않고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리는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햇빛도 주십니다. 아주 적당한 온도로 비춰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지구상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적당하고 지구가 23.5도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지구에는 물이 얼음으로도 액체로도 수증기로도 존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햇빛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셨습니다. 선인에게는 햇빛이 비추고 악인에게는 늘 그늘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셨습니다. 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에도 비를 주시고 교회 주변에 있는 절인 원적사에도 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인과 악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악인은 하나님께 전혀 감사가 없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벌어서 내 능력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풀 한 포기도 감사하고, 작은 열매 하나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대부도에서 농사를 짓는 김광명 집사님과 신옥희 집사님이 배추를 주어서 교회 김장을 1차로 했습니다. 배추가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소금에 절였는데도 씹으면 아삭 아삭 하니 질감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어제 저는 교회에서 설교 준비하다가 점심식사를 하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농사를 지은 두 분 집사님에게도 감사하고 이렇게 맛있는 배추가 자랄 수 있도록 햇빛도 주시고 적당한 바람도 주시고 적당한 비도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인 은혜에 감사를 드립시다. 산소를 주신 것도 감사하고, 햇빛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사계절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밥 먹고 사는 것 감사하고, 좋은 환경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건강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가정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자녀를 주신 것도 감사하고 아내 혹은 남편을 주신 것도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은혜에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감사한 것은 우리들에게 영적인 은혜, 영적인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특별은혜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도록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도록 예정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하셨고 또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어떤 계기로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셨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특별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특별은혜를 어떻게 알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선택하셔서 이 특별은혜를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들이 이 복음을 듣게 하셨고 또 성령께서 우리에게 감동하셔서 그 사실이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일반은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특별 은혜, 영적인 은혜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2. 창세전에 택하셨기 때문에(4,5절)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4,5절에 보니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만드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군대에 입대 후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에 가면 대기하는 시간이 좀 있습니다. 대기하고 있으면 인사계라는 직분을 가진 부사관들이 와서 병사를 선택합니다. 그때 내가 어느 인사계에게 선택을 당하느냐로 나머지 군생활을 어떤 일을 하면서 보내느냐가 결정됩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 병사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보직이 보일러 병이었습니다. 보일러 병은 훈련도 거의 없고, 보초도 서지 않습니다. 일반 병사들의 눈으로 볼 때는 그냥 여기저기 다니면서 놀고먹는 게 일이었습니다. 보일러가 늘 고장나는 게 아니잖아요. 가끔 고장 나잖아요. 고장나면 슬슬 수리하면 되고 고장이 없을 때는 이 소대 저 소대 돌면서 일과시간에는 낮잠 자고, 쉬는 시간에는 고참들과 장기나 두니 병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일러 병의 군생활이 언제 결정됩니까? 부대 배치 받고 대기 상태에 있을 때 인사계의 선택으로 결정 된 것입니다.
제가 속한 부대는 1,2,3,5,6 중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고생했던 사람들은 6중대 사람들이었습니다. 6중대는 공개된 장소에서 보초를 서는 일이 임무였습니다. 하루에 몇 차례씩 근무를 나가서 부동자세로 서있어야 했습니다. 여름엔 덥지요. 겨울엔 춥지요. 부동자세로 오래서 있으니 무릎관절염에 걸리는 병사들이 많았습니다. 보이는 곳에 근무를 서기 때문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되니까 군기를 많이 잡고 구타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군 생활 할 때 6 중대에서는 자살하는 병사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6중대원들이 6중대원으로 언제 결정되었습니까? 부대 배치 받고 대기 상태에 있을 때 인사계의 선택으로 결정 된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선택으로 결정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그 중에 전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부모와 자녀관계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자녀도 내 부모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 중에 지금 내 자녀가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만들어진 자녀 있습니까? 없지요. 내가 원하는 모습 그대로 사는 자녀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요. 여러분 중에 누구 자기가 원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태어나 보니 그분들이 나의 부모님이신 거죠.
내 의사와 내 선택과 상관없이 부모를 만납니다. 하지만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좋은 부모 만났으면 인생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아주 나쁜 부모를 만나면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1996년도에 미국에서 14살 된 여자아이가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범인이 11살 먹은 흑인 아이였습니다. 경찰에서 용의자를 추적한 결과 그 아이도 동료갱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엄마는 27살이고 4번째 남자에게서 얻은 일곱 번째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에게 버림당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어릴 때부터 갱단에 들어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죽은 아이의 온 몸에는 피멍든 자국, 담배 불로 지진 자국, 그리고 마약주사를 맞은 자국이 많았답니다. 그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낳기만 하고 버렸습니다. 양육되지 못한 아이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간섭이 없으니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불행한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를 창세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자녀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지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결국은 선택한 자녀를 영원한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저는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칼빈주의라는 말은 칼빈의 후배 지도자들이 17세기 초에 수립한 하나의 신학체계입니다. 제가 칼빈주의를 공부하면서 붙들었던 가장 중요한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칼빈주의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칼빈주의 5대강령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전적인 타락입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몸이 어느 한 부분도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소망이 없습니다.
둘째,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선택할만한 조건이 있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제한된 구속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입니다.
넷째,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할 수 없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그 은혜를 거부할 수 없고 결국은 다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성도의 견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구원하셨으면 우리의 구원을 책임지신다는 교리입니다.
견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릅니까? 저는 견인차가 떠오르더군요. 견인차가 무슨 역할을 합니까? 고장난 자동차를 끌고 정비소까지 가는 역할을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견인하신다는 말도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책임지시고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의 밥이 되지 않도록, 우리가 타락하지 않도록, 우리가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전적으로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3. 거저주시는 은혜 때문에(6절)
6절에 보니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세상은 사람을 선택할 때 조건을 보고 선택합니다. 대학교에서 학생을 뽑을 때도, 회사에서 직원을 뽑을 때도, 결혼할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조건을 보고 선택합니다. 세상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실력을 쌓아야 하고 스팩을 쌓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10월에 나온 뉴스 기사에 보면 미스코리아선발대회에 참가하려면 약 1억 정도의 돈을 써야 하는가 봅니다. 그런데 그걸 개인이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후원사들이 후원을 하나봅니다. 그런데 후원사들이 어떤 사람에게 후원을 할 까요?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투자하면 뽑을 수 있는 사람에게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판이 괜찮은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입니다. 보통 정도의 인물을 가진 사람이 미스코리아 나가겠다고 하면 누가 투자를 하겠습니까? 조건이 되어야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들에게 투자를 하셨습니다. 무슨 투자를 하셨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투자하셨습니다. 우리가 조건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칼빈주의 5대 강령에서 첫 번째가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고 했습니다. 완전히 타락해서 완전히 소망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우리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6절에서는 아들 안에서 거저 주신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 받을 수 없는 우리들에게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3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훌륭하고, 더 똑똑하고, 더 잘 난사람도 많습니다. 나보다 더 많이 배우고, 돈도 더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버려두시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초라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청송 감호소에서 신앙으로 죄수들을 전도했던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청송감호소는 가족들도 포기한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가족들도 포기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이겠습니까? 박효진 장로님이 처음 부임해서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야단을 쳤더니 자꾸 괴롭히면 자기 입을 꿰맨다고 하더랍니다. 설마하면서 해보라고 했는데 갑자기 이쑤시개를 꺼내더니 양쪽입술을 아래위로 뚫으며 꿰매더랍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눈을 자기가 빼어버립니다. 거기에서 1등한 사람은 자기 배를 갈라서 창자를 어깨에 메고 애국가 부르다가 쓰러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몸서리 쳐지지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포기를 해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과거에 제가 청송감호소에서 부흥회를 인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은혜를 받고 출소해서 우리교회에 몇 개월 다녔던 형제가 있습니다. 그 형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주의 종이 되겠다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 아니면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주의 종이 되겠습니까?
칼빈주의 5대 강령 중에 첫 번째인 인간의 전적인 타락이라는 교리로 보면 청송 감호소에 있는 사람들이나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나 다 같은 죄인이며 구제불능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구제불능인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송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찬송 중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하 20장에 보면 모압과 암몬과 마온 사람들이 유다의 여호사밧을 치려고 군사를 동원했습니다. 그 당시 여호사밧은 그 전쟁을 이길 능력이 없었습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서 백성들을 모으고 하나님에 기도하며 여호와께로 낯을 향했습니다. 이 때 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에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고 그를 통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전쟁에 유다가 승리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예언이었다. 여호사밧은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성가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였습니다. 전쟁을 하는데 군인들 앞에 성가대를 세웠으니 적들이 볼 때 얼마나 웃겼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찬송이 시작 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으로 적들을 쳐서 유다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천사들로 하여금 적들을 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천사가 역사를 하니 적진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적들이 자기들끼리 서로를 쳐 죽이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의 군대는 찬송으로 승리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을 당하면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했던 바울처럼 찬송을 하십시오. 바울이 찬송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옥문이 열린 것처럼 여러분이 찬송할 때 하나님의 역사로 여러분을 묶고 있는 것들이 끊어질 줄 믿습니다.
어느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이 좀 큰 땅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땅이 공원 부지로 묶였습니다. 그 땅은 내 땅이지만 국가에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권사님은 너무 속상해서 날마다 그 땅에 가서 찬송가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를 1절만 100번씩 불렀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릴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 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힌 일을 만나면 기도도 안 됩니다. 아마 그 권사님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권사님은 그렇게 날마다 그 땅에 가서 찬송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몇 달 만에 공원부지가 해제 되면서 그 땅을 70억에 팔았다고 합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 내 처지에 딱 맞는 찬송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 찬송을 하나님께 불러드리세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 기적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찬송을 해야 하는 이유 3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거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비전교회]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361-4
(02) 443-9197
비전교회 : http://www.visionchur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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