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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0)영적전쟁(출 17:8-16)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0)영적전쟁(출 17:8-16)

 

선교학자들은 계몽주의 시대이래로 현대인들이 수용한 세계관을 ‘닫힌 세계관’(closed worldview)이라고 부릅니다. 닫힌 세계관과 대조되는 세계관은 물론 ‘열린 세계관’(open worldview)입니다. 그러니까 계몽주의 시대 이전 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열린 세계관을 수용하고 살아왔던 셈입니다. 열린 세계관은 자연적인 눈에 보이는 세계를 둘러싼 초 자연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초 자연의 세계에 존재하는 천사나 악마들이 자연 세계의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던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소위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이 중시되는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사람들은 천사나 악마들이 활동하는 초 자연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연 세계와 단절된 비존재의 세계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초 자연과 자연의 세계가 단절된 것으로 보는 관점을 ‘닫힌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두개의 세계관 설명 그림표 참조)


그런데 20세기에 진입하면서 소위 포스트 모던의 현대인들은 갑자기 ‘닫힌 세계관’을 버리고 ‘열린 세계관’을 다시 수용하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 왔을까요? 더 이상 인간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거나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열린 세계관’에로의 전환의 징후는 특히 포스트 모던의 현대인들이 뉴 에이지 운동에 관심을 갖고 천사나 악마를 다시 믿기 작했다는 것에서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물론 하나님을 천사나 악마의 수준으로 격하시킨 뉴 에이지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초자연의 세계를 대하는 사고방식은 다시 열리기 시작했고 서점에 가면 이런 천사나 악마와의 교감을 말하는 신비주의적 서적들이 범람하게 된 것은 분명한 시대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래 전부터 ‘열린 세계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보이는 세상을 둘러 싼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의 악마의 활동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보이는 세상에서의 우리의 많은 고통의 원인이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인 사단이나 악령들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서 6장에서 이런 싸움을 가르쳐 ‘영적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씨름(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런 싸움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행진해 가는 광야의 도상에서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직면된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밀을 찾고자 합니다.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밀-무엇일까요?


1. 사단의 전략을 간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전쟁은 아말렉 족속의 도전으로 시작됩니다. 8절입니다.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장소는 여전히 르비딤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르비딤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출애굽 지도참조)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 르비딤에서 반석에서 쏟아져 나온 물을 마시고 목마름을 해갈하자 근처에 진치고 있던 아말렉 족속들은 그들의 식수원이 사라진다고 판단한 나머지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말렉의 정체를 이해하시는 일입니다. 본래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과 갈등관계에 있었던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아말렉 부족의 조상은 아말렉인데 그는 에서의 손자였습니다.(창36:12) 에서의 결정적인 실수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가 장자의 권한을 팟죽 한 그릇으로 판 것은 장자의 혈통을 타고 오실 메시아의 약속을 무시한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의 영성에는 이런 반 메시아적인 흐름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제 본문의 사건이 발생할 시점에서 에서의 후예들은 노골적으로 반 이스라엘 전선을 만들고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아말렉은 사단의 영성을 대표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사단이 아말렉을 도구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신25:17-18의 말씀은 이런 아말렉의 사단적 영성과 그 전략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한 불 신앙적 영성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공격 전략을 주목해 보십시오. 영락없이 성경이 묘사하는 사단의 전략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피곤하고 약해 질 때 공격해 옵니다. 우리가 언제 사단의 시험에 빠집니까? 우리가 피곤해 있을 때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들은 항상 우리가 뒤에 떨어져 약해 있는 모습을 하고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뒤에서 멀찍이 주를 따르다가 시험에 들지 않았습니까? 저는 교회에서 여러분이 앉는 자리도 여러분의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전심으로 받기 위하여 되도록 앞자리로 나아와 예배하는 자이십니까? 아니면 저 뒷자리에 있다가 예배 종료와 함께 도망가시는 일에 중요한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분들이 바로 사단의 타깃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은 엡6:11에서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마귀의 간계, 곧 그 간사한 전략을 간파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뒤에서 빌빌대지 마시고 바짝 앞으로 나아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십시오.


2. 성도의 교제로 대처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종 종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사단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전지한 존재는 아니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영적 지식을 소유합니다. 사단은 전능한 존재는 아니지만 우리 보다는 훨씬 더 많은 능력을 소유합니다. 그러므로 나 홀로 사단과 대결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다른 성도들과 함께 사단을 대적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란 단순히 성도들이 함께 모여 식사하고 친교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함께 기도하며 함께 싸우는 것이야 말로 성도의 교제의 절정의 모습입니다. 자,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어떻게 싸우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우선 모세는 9절에 보면 여호수아로 하여금 최전선에 나아가 싸우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 꼭대기에 서서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우리는 쉽게 모세가 쉬운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12절에 보면 모세의 팔이 피곤을 느껴 내려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기도는 노동이요 영적 전투입니다. 실제적인 전투 이상의 전투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전장에서 선배 모세와 후배 여호수아는 멋진 팀워크로 이스라엘을 르비딤 전투의 승리자로 만들게 됩니다. 성도의 교제의 중요한 목적은 바로 이런 팀 워크를 만들어 공동체의 승리를 도모함에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특새’를 하는 동안 많은 은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강사님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저 밖에서 특새 한 시간전에 나아와 차량 봉사를 해주신 분들, 예배실 안내로, 그리고 강사를 섬겨주신 분들 이 모든 팀워크가 아름다운 새벽의 은혜의 장을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목장 교회에서 여러 지체들이 은사에 따라 각각의 부장을 세우는 것도 바로 이렇게 분담 사역을 통한 공동체의 승리를 누리고자 함인 것입니다. 전4:9은 이런 팀워크의 중요성을 아름답게 증언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이어지는 전4:10을 보십시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당신은 이런 성도의 교제의 축복을 누리며 사십니까? 아니면 인생의 들에서 고군분투하십니까? 그러면 이제라도 어서 목장 모임에 들어가 성도의 교제의 축복과 영광을 누리십시오.


3. 중보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금세기에 와서 영적 전쟁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부흥하게 된 새로운 영적 운동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 운동입니다.(우리 교회는 지난 14년 동안 한국 교회에 중보기도 운동을 전파하는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영적 중보 운동의 놀라운 무대를 여기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 지금 아말렉을 상대로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용사는 여호수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싸움의 결과가 좌우되고 있는 것은 르비딤 골짜기가 아닌 저 산 꼭대기였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십시오. 1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가 높이 든 손-그 손이 바로 중보의 손이 아니었습니까. 그 손이 바로 이 전쟁의 승리를 좌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손이 내려오자 어떻게 했습니까? 12절에 보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팔 아래 놓게 하고 다시 아론과 훌이 옆에서 모세의 손을 들어 올리지 않았습니까. 아론과 훌은 바로 모세의 중보 사역의 동역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중보 사역 동역 자들을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당시 영적 전쟁의 승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중보자가 없는 성도들은 영적인 패배를 피할 수 없을까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복음을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저는 우리 집안에서 제가 처음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저의 친구 사역자들이 자기 부모 형제가 혹은 친척이 혹은 선배가 기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복음을 접한 것입니다. 롬8:34을 읽게 된 일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치 여호수아를 위해 모세가 저 산 꼭대기에서 기도하듯이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힘입어 우리가 누릴 삶의 약속을 바울 사도가 롬8:35이하에서 어떻게 증거하고 계시는지 기억하십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렇습니다. 인생의 광야 길에는 오늘도 여전히 환난이 있고, 곤고함이 있고, 신앙의 박해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인 기근도 있고, 우리를 아프게 하는 질병도 있고, 갑자기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경험하며 이 모든 환난을 버티고 견디며 믿음으로 우리 성도들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그 이유를 아십니까? 주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때문입니다. 저 하늘 높은 곳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지켜보며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절의 의미이며 우리가 그분의 부활을 흥분하며 기뻐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살아가시려면 전제가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으셔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을 믿으셔야 합니다. 기도를 응답하시는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아니,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고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시고자 부활하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네,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다시 사심으로 우리도 이 고단한 인생의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주일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부활절의 의미를 설명하는 짧은 글을 쓰게 하는 과제를 내고 부활 주일에 발표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어린아이가 그냥 노트를 펴 보였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마침표와 물음표와 느낌표만 있었다고 합니다. 설명을 요구 받은 아이의 해설은 이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표를 찍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때부터 질문을 시작했지요. 왜 당신은 우리 곁을 이렇게 떠나셔야 했느냐구요. 물음표를 던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제자들은 살아계신 주님의 임재 앞에서 느낌표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달라진 것입니다.”얼마나 멋진 설명입니까? 오늘 이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이 날-당신의 인생은 마침표입니까? 물음표입니까? 느낌표이십니까?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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