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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1)시내 광야에서(출19:1-6)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1)시내 광야에서(출19:1-6)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 리챠드 바크의 <영혼의 동반자>중에서 “무언의 약속”이라는 시가 인용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우리의 무언의 약속 때문이었다./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몹시 지쳤거나 아프거나 다쳤을 때나/ 또는 심한 충격을 받았을 때는 다른 한 사람이/그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고도원의 멘트가 실려 있었습니다. “좋은 사이는/ 무언의 약속으로 살아갑니다./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고/ 말없이 상대의 눈물을 닦아 줍니다./ 좋을 때, 잘 나갈 때도 무언의 약속은 힘을 줍니다./그러나 어렵고 힘들 때, 아프고 지쳤을 때/더 빛이 나고 더욱 큰 힘을 발휘 합니다.”


우리는 아무와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네 삶의 장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사람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속은 희망이 되고 기대가 되어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어 주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행진해 가는 과정에서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과 맺게 된 소위 ‘시내산 언약’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러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을 떠난지 3개월이 지나가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 시내 반도에 들어와 드디어 시내 산이 위치한 시내 광야에 도착한 것입니다.(지도 참조) 2절에 보면 시내 광야 산 앞에 장막을 쳤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산이 ‘시내 산’입니다. 여러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만, 아직도 가장 유력한 전승에 의하면 이 산의 위치는 성 캐터린 수도원이 위치한 곳에 있는 성지 순례 객들의 발걸음이 머무는 지금의 ‘제벨 무사’, 모세의 산이라고 불리워지는 그 곳입니다.


사실 여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과의 약속의 실현이었습니다. 출3:12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예배하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드디어 그 산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마침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인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새로운 또 하나의 중요한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바라보며 자신의 백성들이 그들의 행군을 완주해 주실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한 약속의 책(구/신약)을 주시며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의 순례의 행진을 완수하실 것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기억하고 있어야 할 하나님의 기대는 무엇일까요?


1. 우리를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실 기대입니다.


시내산 언약의 내용을 5-6절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정확하게 말하면 3가지의 약속이 있습니다. 첫째, 내 소유(보물, 왕의 보물, segulla)가 되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제사장 나라가 되겠다는 것이고, 셋째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핵심은 제사장 나라입니다. 제사장이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중보자 곧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내산 언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선택된 민족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는 민족, 그리고 민족과 민족사이에서 더 나아가 모든 민족들과 하나님을 맺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는 민족이 되리라는 기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한 민족을 향한 기대로 나타나 있습니다만, 신약에서는 이스라엘 대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교회가 바로 이런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기대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우리가 ‘만인 제사장직’ 혹은 ‘전신자 제사장직’(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라고 부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으로 살던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된 것만 해도 감사한데 다른 이웃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일에 특별히 주님 모르는 백성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 열방을 복음화하는 일에 여러분과 저를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히5:4을 보실까요?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제사장 직분은 존귀한 직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이 존귀한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분들을 보셨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과 비교될수 없는 한 지역이 아닌 세상 모든 열방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의 명예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의 특별한 보물 ‘세굴라’이십니다. 감동하십니까? 감격하십니까?


2. 우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함께하실 기대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존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훈련의 시간을 잘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자기의 백성들을 쓰시기 위해서 훈련을 하십니다. 때로 훈련은 아프고 고통스러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훈련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훈련을 두려워 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이 훈련을 받는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 본문의 약속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4절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 시내 광야까지 오는 동안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나르듯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챤 환타지 작가인 톨키엔의 작품(반지의 제왕, 호빗)에 보면 주인공이 결정적인 위험에 처할 때마다 독수리가 등장합니다. “독수리다! 독수리가 온다!” 그리고 주인공은 구원을 받고 보호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부모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어떻게 훈련하시는지 알고 계시지요? 새끼 독수리가 성년이 되면 아빠 엄마 독수리는 벼랑 모서리에 지어진 보금자리를 파헤쳐 새끼를 밀어낸 다음 벼랑 바깥으로 인도합니다. 두려움에 잠긴 그를 창공으로 날려 보내면서 “날아라. 넌 창공을 날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독수리다!”고 외칩니다. 한동안 필사의 날개 짓을 하며 나르던 새끼 독수리가 힘에 부쳐 날개의 힘을 잃고 공포의 추락이 시작되면 재빨리 부모 독수리는 하강을 하며 새끼 독수리 아래 내려가 그 넓은 날개를 펴며 말합니다. “걱정 말아. 아빠 엄마가 함께 하고 있어. 잘 했어. 다음에 넌 더 높이 나를 수 있어” 이 과정이 반복되며 마침내 새끼 독수리는 부모 독수리의 도움 없이도 혼자 나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부모 독수리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넌 이제 혼자 나를 수 있지만 그러나 이 부모의 도움이 필요할 땐 넌 큰 소리로 우릴 불러. 우린 저 높은 곳에서 너와 함께 하며 너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말이야” 다시 이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여는지--[잊지 말아라]” 신31:11-12을 읽어 보십시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할렐루야! 그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이 광야 길을 두려움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영광스런 제사장으로 쓰시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살아갈 기대입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제사장 공동체로 그리고 명예로운 제사장으로 쓰임받기 위해 꼭 한 가지 조건을 첨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내산 언약을 ‘조건부 언약’(conditional covenant, if-covenant)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언약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쓰임받기 위해 필요한 언약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본질입니다. 이제 잠시후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 율법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게 됩니다. 이 율법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요구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체험하고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이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 제사장 나라로 쓰임받기 위해 필요한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자, 5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실까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if you obey me) ‘내 언약을 잘 지키면’(if you keep my covenant) 너희는 모든 민족중에서 내 소유(보물)가 되겠고”


자, 여러분, 하나님의 보물스런 존재로 쓰임 받다가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게 서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쓰레기처럼 살다가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서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과 저의 몫입니다. 제사장 나라로 보물같은 존재로 쓰임 받는 인생을 사모하신다면 우리는 이제라도 주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율법을 지키며 살아갈 이유입니다. 어둠의 인생을 살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악한 귀신이 7개나 그 안에 있어 그녀의 인생을 쓰레기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녀가 주님을 만나고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교회 역사상 가장 거룩한 여성 지도자중 한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쓰레기 마리아가 보물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어둠의 여인이 빛의 여인이 된 것입니다. 날마다 죽지 못해 살던 여인이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악녀 마리아가 성녀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마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로마에 고용된 세리였습니다. 민족을 등치고 살던 민족 반역자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여 무거운 세금을 부과함으로 어려운 이웃들이 더 어렵게 살도록 만든 돈의 노예였습니다. 그가 세관에서 들고 장부를 기입해 내려가던 펜은 부정과 거짓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제자가 된 후 그는 파티를 열어 과거와의 결별을 선언합니다. 그는 이제 함께 하던 동료 세리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늘 세금 장부만을 들여다보던 그가 구약성경을 읽어가며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구약성경은 약속의 책이었습니다. 그가 만난 예수는 정녕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 구세주였던 것입니다. 그는 로마 정부와 유대 세관청을 속이기 위해 언제나 들고 쓰던 동일한 펜을 들어 이제는 마태의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서의 마지막 지상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까지 나아갔다고 교회의 전승은 증거합니다. 쓰레기 인생이 보물인생이 된 것입니다. 민족 반역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광야 길로 나아가시겠습니까? 약속의 땅을 향하여 말입니다.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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