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동원목사

[스크랩] 영원을 향한 네비게이션(완)영원한 동행(창 5:21-24)

영원을 향한 네비게이션(완)영원한 동행(창 5:21-24)

 

저의 목회 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성도들의 진지한 믿음 생활을 위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면 하나는 구원의 확신이고, 또 하나는 신앙의 성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교회에 등록을 하시면 먼저 두개의 성경 공부 필수과정을 이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새 생명반이고, 또 하나는 새 가족반입니다. 새 생명반의 기본적인 목표는 구원의 확신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새 가족반의 초점은 신앙의 기본적인 성숙을 돕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교회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은 명목상의 교인(nominal members)들로만 머물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이런 명목상의 교인들의 실존적 고민은 그들이 교회에는 나오면서도 아직도 하나님(혹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간증을 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필연적인 다음 결과는 무엇이냐 하면 교회에 나온 세월은 오래되고 소위 교회에 적응하는 기술도 늘고 직분까지 받았어도 본질적인 내면의 신앙은 전혀 성숙하지 못하고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신앙 성숙의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났다는 확신도 없는 분들에게 어떻게 하나님과의 동행을 기대하겠습니까? 만나야 동행을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어느 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할 사명을 갖고 다메섹 길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강렬한 하늘의 빛을 만나 쓰러지는 순간 위로부터 들려오는 한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는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그날 바울과 예수님의 분명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를 증거 하는 일생을 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바울처럼 이런 분명한 회심의 경험이 없었던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주로 어려서부터 믿음의 환경 속에 있었던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을 우리가 디모데 형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도 그러나 성경공부를 하면서 아니면 기도의 체험을 통해서라도 신앙 여정의 한 때에 마침내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확신의 순간이 올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때부터 그런 분들에게도 하나님과의 동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그때부터 영원을 향한 하늘의 네비게이션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년 이년이 아니라,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여는 시간의 교차로에서 에녹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통해 성도들의 하나님과의 의미 있는 동행을 위한 네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1.동행의 계기는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에서는 에녹의 하나님과의 동행의 계기가 그 아들의 출생 사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여기 에녹이 므두셀라 라는 아들을 낳기 전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의 출생이 아버지 에녹의 일생에 어떤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는 가정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뉴베리(Newberry)라는 한 성경학자의 설명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는 ‘므두셀라’의 고대 중동에서의 통상적 의미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문자적 의미는 ‘창 던지는 사람’. 그는 부족들의 전쟁에서 앞장서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이었는데 그가 죽으면 끝이 온다는 뜻으로 통용되었다고 전함)는 뜻이라고 전합니다. 그러면 에녹은 아들이 출생한 후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들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했을 것입니다.


내가 산 인생은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결산되고 심판된다는 생각, 이 생각이 그로 하여금 그의 인생을 돌이켜 하나님과의 진지한 동행의 삶으로 들어가게 했다는 말입니다. 유14-15을 읽어 보십시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들이 주께 거슬려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분명한 것은 에녹은 심판을 믿고 심판을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심판의 각성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전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경건치 않은 행동, 모든 경건치 않은 말이 반드시 심판된다는 것. 이것이 에녹의 삶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새 다가온 마지막 주일, 그렇게 우리 인생의 마지막 결산의 순간이 빠르게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면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결단할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2.동행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부부의 동행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서로 다른 개성과 지성을 가진 두 사람이 부부되어 인생의 길을 함께 걷는 다는 의미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아모스 선지자가 그 대답을 일러주었습니다. 암3:3입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부부의 동행은 뜻의 조정을 통해 서로의 뜻을 맞추어 나가는 평생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부부들이 결국 파경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어서는 내 뜻대로 살아본 사람들이 그 내 뜻의 한계, 그 인간적 계획의 한계를 깨닫고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것이 동행의 전제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동행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 학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기도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드리신 기도였다고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도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태12:50)고 하십니다. 결국 우리 인생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삶을 결단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동행의 삶의 의미인 것입니다.


3.동행의 방편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무엇을 하며 동행한단 말입니까? 한마디로 믿음과 소통입니다. 믿지 않고 동행할 수 없고, 소통하지 않고 동행할 수 없습니다. 모든 가정 붕괴의 비극은 결국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부부 상호간에 더 이상의 소통을 거부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저 유명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살아간 영웅들의 열전에서 에녹을 잊지 않았습니다. 히11:4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증언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남길 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어떻게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그런 증거를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응답을 받아 움직이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모든 의사소통의 혼란의 출발점은 상대의 뜻을 확인하려는 노력이 없이 상대의 뜻을 자기 본위로 해석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다윗 왕이 인간적인 결함이 적지 않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끊임없는 소통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사무엘 23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라는 마을을 점령해 들어오자 다윗이 보인 반응을 삼상23:2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삼상23:4은 다시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이토록 집요하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뻐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새해, 그리고 남은 생애를 사시시를 기대하십시다.


4.동행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기대할 수 있는 궁극적인 결과는 무엇일까요? 본문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지에 하나님과 함께 도달하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분이 우리 인생 길에 주인되사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우리 인생이 결국 그분이 도달하는 목적지에 도달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24절을 읽어 보십시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아마도 하나님은 에녹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에녹아, 오늘은 우리가 좀 먼 곳으로 함께 여행을 해야 할 것 갔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지상에서 저 영원한 것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드디어 그의 지상 순례의 여정이 마무리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네비게이션은 마지막 안내를 하게 됩니다.-“목적지에 도착하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나라-그곳이 우리의 마지막 도착지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종착역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의 종착역인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은 특히 이 사실을 에녹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사실 창세기 5장의 처음은 아담의 족보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창5:1을 보십시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그리고 본문 21절까지 이어지는 모든 아담의 족보에 속한 모든 인생들의 종말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죽었더라-죽었더라”입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 죽음을 극복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것이 바로 에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그냥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 가시는 것입니다. 저 영원한 나라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영원한 여행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실로 성도들의 죽음의 모습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질병으로 어떤 이는 사고로, 어떤 이는 극히 예외적으로 에녹처럼 신비한 방법으로 저 세상으로 옮겨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우리는 죽음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들과 작별을 해야 할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의 마지막엔 하나의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은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데려 가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12월 8일 정오경 미국 샌디에고에서 미 F-18전투기가 훈련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사고를 일으켜 평화로운 주택가를 덥쳐 한국인 그리스도인 가정의 일 나간 그 집의 가장을 제외한 한 가족 전체, 아내와 두 딸 하영이 하은이 그리고 산후 조리를 위해서 한국서 방문 중인 아내의 어머니가 함께 운명하는 사건이 보도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런 사고가 하필이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감동을 일으키게 되는 사건으로 귀결된 것은 그 다음 날 그 가장의 간증 때문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사고 현장에서 있었던 기자 회견장에서 가장인 윤 동윤(37세)씨는 이렇게 말 한 것으로 보도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 아내와 딸들 그리고 장모님을 데려 가신 것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제 가족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조종사도 최선을 다한 것이므로 그를 용서하고자 합니다.” 장례 후에 교회에는 수 백통의 전화와 이 메일이 답지하고 있으며 묘지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사람들, 무료로 법적 자문을 자원한 변호사, 정신과 치료를 제공하겠다는 의사, 헌금을 보내온 사람들, 장미꽃들이 답지하고 추모 웹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윤 동윤씨의 간증에 대한 감동을 고백하는 사연들이 답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례식에 참여한 한 기자는 이렇게 소감을 적고 있습니다. “동윤씨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교회가, 이웃들이, 아니 온 국민들이 함께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고.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에녹처럼 혹은 윤씨 가족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옮기우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는 마지막 간증을 남기고 그 영원한 나라로 떠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 인생이 그분과의 영원한 동행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