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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 히브리서 13장 12 - 16절 마경훈 목사

본문 : 히브리서 13장 12 - 16절(개역개정)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사람은 자기정체성이 분명해야 자기답게 살 수 있습니다. 자기정체성이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자기인식입니다. 즉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입니다. 자기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은 평생 남 흉내나 내다가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어렵습니다. 세상 따라서, 사람 따라서, 유행 따라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1:1-10:18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을 다룹니다. 그리고 10:19부터는 성도의 생활적인 부분을 다룹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펴보는 본문에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12절).
장례식을 할 때 제일 안타까운 것은 젊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엄마가 죽었다는 것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래서 밥 달라고 투정하고,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장난치고 노는 것입니다.
그것 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왜 죽으셔야 했는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전 1:18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지만 십자가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도 않고 십자가의 의미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전 1:22, 23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말씀합니다. 표적도 중요하고 지혜도 중요하지만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표적과 지혜는 우리의 믿음을 돕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구원에 이르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는 내게 있는 연약한 것들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에게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강건한 것들이 내게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원리가 죄와 의에도 적용이 되고, 가난함과 부요함에도 적용이 되며, 미련함과 지혜에도 적용이 됩니다. 또 질병과 건강에도 적용이 됩니다.
죄 없으신 주님이 죄인의 모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자신을 믿는 자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믿는 자의 죄를 가져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주신 것입니다. 본래 부요하신 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의 가난함을 가져가시고 자신의 부요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미련함을 가져가고 주님의 지혜를 우리들에게 줍니다. 또 우리의 질병을 가져가시고 주님의 건강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지옥의 형벌을 가져가시고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인이 될 것이 아니고 이미 의인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부요해질 것이 아니라 이미 부요해 진 것입니다. 또 앞으로 건강해 질 것이 아니고 이미 건강해 졌으며, 앞으로 지혜로워질 것이 아니고 이미 지혜로워졌으며, 앞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2.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입니다(14절).
표준새번역에서는 14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실상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땅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다는 말은 결국 이 땅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도시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장차올 도시는 무엇입니까? 이 땅에 새롭게 만들어질 도시가 아닙니다. 판교신도시나 송파신도시가 아닌 장차 올 도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장차 오게 될 그 도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 도시를 계 21:1, 2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장차 올 도시가 바로 계 21:2에서 말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계 21:3에 보면 그 성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4절에서는 그 성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7절에 보면 새 예루살렘은 이기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승리를 믿음으로 자기 것으로 만든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약속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한 천국이 약속된 것입니다. 1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시는데 그 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처럼 맑습니다. 진주로 된 열두 문이 있고,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성은 정금인데 얼마나 맑은지 맑은 유리 같습니다.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계 21:27에 보면 그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이 나오는데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 22장에서도 계속해서 장차올 도시 즉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말합니다.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는데 그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 흐릅니다.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데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그 성에는 다시 저주가 없고 어둠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대한 광고문을 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완전한 도시에 아름다운 집이 무료로 제공됨” 그리고 설명하기를, “100% 깨끗한 물이 무료, 광열비 무료, 영원한 빛이 있는 곳, 영원한 도로 포장이 있는 곳, 원치 않는 것은 한 가지도 없고, 모든 것 새롭고, 완전한 건강이 보장되고, 최상의 사회이며, 아름다운 음악이 있고, 교통비도 무료임, 새 예루살렘을 위해 오늘 계약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여러분은 이미 천국 입성을 계약하셨고 계약금만이 아니라 잔금까지 지불하신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여러분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고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여러분은 계약대로 새 예루살렘에 입주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라도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그분은 교회를 얼마나 다녔고, 교회에서 얼마나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고,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느냐를 떠나서 천국입주자 명단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시간이라도 예수를 나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으로 믿는다면 당장에 새 예루살렘 입주 계약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판교신도시보다, 송파신도시보다 더 좋은 새 예루살렘성의 입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정말 새 예루살렘 성의 입주를 고대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투자해야 할 곳이 지금 사는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우리가 며칠만 지나면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새 아파트에 이사를 하게 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며칠이면 이사를 할 것인데 지금 사는 집에 베란다를 넓히고 도배를 새로 하고 전등을 바꿀 분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딘가 이상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베란다가 좁아도, 도배지가 더러워졌어도, 전등이 보기 흉해도 그냥 참고 견딜 것입니다. 헌집에 투자할 바에야 새로 입주하는 집에 투자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도시를 기다립니다.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새 예루살렘을 바라봅니다. 정말 그런 믿음으로 산다면 이 땅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영원한 세계를 기대하고 그 날을 위하여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들어갑니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간다고 다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받게 될 상급과 면류관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 4:8에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과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 나타남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단지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그 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게 되면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재능을 따라서 달란트를 맡깁니다. 한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다른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타국에서 돌아와서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과 결산을 하게 됩니다. 달란트의 활용은 주님이 돌아오기 전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들과 결산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산을 위한 준비는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기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주의 나타남을 사모하는 사람들, 장차 올 도시 새 예루살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 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주의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시므로 재림을 잘 준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려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무엇입니까?

1)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13절).
12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로써 택한 백성인 저와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13절에서는 우리도 주님처럼 십자가를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고 말씀합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있고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는 속죄를 위한 십자가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로마시대의 사형 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으로 주님의 뜻, 즉 사명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정말 올바른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목숨 걸 사명을 발견하고 그 길을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대한 비전을 발견하고 그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얼마나 이름을 날렸느냐 얼마나 큰일을 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는 길 즉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사명을 발견하고 힘들어도 외로워도 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명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명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명의 십자가는 내팽개치고 먹고 사는 일에만 매달려 있습니까?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은 알지만 내가 원하는 다른 길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명의 길을 가고 싶지만 목숨을 걸만한 사명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목회사명과 함께 해외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선교 제의가 들어오고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면 거절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타지키스탄 선교 제의를 받았습니다. 선교하기에는 좀 위험한 회교국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변에서 저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라고 권면을 했고 그분들의 사랑 넘치는 권면을 들으면서 타지키스탄 선교를 접을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러다가 지난주 감림산 기도원 집회 중 ‘하나님의 부르심이 확실하다면 가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주님은 저에게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숨 걸 사명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2) 찬송의 제사입니다(15절).
찬송은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15절에서는 “찬송의 제사”라고 했습니다. 제사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엡 1:5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6절에서는 자녀가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주님을 찬송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중에 하나가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22:3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찬송하는 중에 하나님은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찬송은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찬송을 기뻐하시고 찬송 중에 만나주시는데 찬송을 힘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찬송을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호사밧 왕의찬양대가 찬송할 때 천사들이 활동하여 적군을 물리쳐주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졌습니다.
찬송은 실력이나 기교 이전에 먼저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찬송의 제사라고 했는데 구약에 보면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보다도 제주의 마음입니다. 아벨과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고 가인과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 합당했기에 아벨의 제물이 열납 되었고, 가인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인의 제물이 열납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엡 5:19에 보면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말하고, 골 3:16에서도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라고 말합니다.
찬송은 전심으로 드려야 합니다. 시 138:1에 보면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형식적으로 시간 데우기 식이 아니라 영과 혼과 몸을 다하여 전심으로 찬송해야 합니다.
시 150편에 보면 온갖 악기를 동원해서 찬송해야 합니다. 심지어 춤을 추며 큰 소리로 찬송하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 낮 예배시간에 박수치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시 47:1에 보면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박수도 치고 함성도 지르라는 말입니다.
장로교회는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본래 영국은 기독교가 국교이었기에 왕과 내각 대신들이 함께 나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전통으로 점잖게만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잖은 예배가 장로교회의 전통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영국 장로교회가 모델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찬송을 좀 많이 하는 편입니다. 어떤 분들은 찬송을 많이 부르는 것을 힘들어하시고 그래서 일부로 찬송이 끝날 때 쯤 오시는 분들도 있는데 한 번 생각을 고쳐보시기 바랍니다. 시 69:30, 31을 보면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황소 한 마리가 얼마인데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찬송을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찬양인도자는 회중을 하나님 앞에 세워 찬송을 드리게 만드는 사람이기에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가 하기 좋은 찬송을 선곡하면 안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시는 곡을 선곡해야 하고, 둘째는 회중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곡을 택해야 합니다. 특별한 음악성을 가진 사람들만이 부를 수 있는 곡은 피해야 합니다. 그런 곡은 특송으로 올려드리면 됩니다.
찬양단은 특별히 선택된 직분입니다. 다윗 시대에는 4000명의 찬양단이 있어서 하나님을 찬송했고 그들은 골방에서 찬송하는 일만 하기도 했습니다.

3) 선을 행함과 나눠주는 제사입니다(16절).
선을 행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선은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선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악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일이 선한 일입니다. 마 4:23에 보면 주님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료하시는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행 10:38에서는 가르치시고 전파하신 일을 선한 일로 요약해서 선한 일과 치료하시는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선한 일을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셨고,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눠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줄 수 없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다른 교회보다 좀 더 중보기도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난주부터 40일간 지역회복사역을 합니다. 이 사역은 주로 중보기도와 땅 밟기를 통해서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면 우리가 가진 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12절).
2.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입니다(14절).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려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무엇입니까?
1)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13절).
2) 찬송의 제사입니다(15절).
3) 선을 행함과 나눠주는 제사입니다(16절).


[비전교회]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361-4
(02) 443-9197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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