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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거기 너 있었는가-군중들-

군 중 들
(마 21:6-9, 마 27:20, 막 15:6-15, 행 2:23-37)

군중들의 세 가지 얼굴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그 많은 군중들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무리들인 군중들을 통해서 세 단계의 얼굴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얼굴: 예수님을 환영하는 얼굴(마 21:6-9)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8-9)

종려주일날, 이 많은 무리들은 입성하시는 주님을 환영하기 위해서 왕되신 주님이 가시는 그 길에 그들의 겉옷을 벗어 펴며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뒤에서 예수님의 행렬을 따라가며 소리를 높여 찬양을 드렸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우리가 마태복음의 기사를 조심스럽게 관찰해 보면 21장 6절에서 겉옷을 먼저 펴기 시작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마21:6-7)

제자들이 먼저 그들의 겉옷을 펴면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이와 같은 환영의 행렬 바로 직후에 무리들이 또한 제자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있는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많은 무리들인 군중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자들이 하는 그 모습을 본받아 "이렇게 하는 것이 아마도 우리의 왕되신 그 분을 환영하는 모습이리라"고 생각하면서 제자들의 결단과 그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적어도 이 순간 제자들의 입술에서 나왔던 그 찬양처럼 "동일한 내용의 찬양"과 이 찬송을 통한 "동일한 내용의 고백"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고백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으로 인정했으며 그 분이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 찬양을 드리며, 그리고 그들의 입술에서 이 고백을 나타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33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이 날 예수께서는 이 장면에서 한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마21:33-44)

그 많은 인파들의 환영을 받으시면서도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십자가가 멀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이 무리들이 주님을 배신할 것이며, 주님을 거절할 것이며,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보시고, 바로 이 비유를 통해서 그 분이 어떻게 될 것이며 사람들이 그분을 어떻게 버릴 것인가를 예언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비유의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45절)

이 아들을 죽이는 농부들의 비유 속에서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요 사회 지도자이었던 소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4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더라"(46절)

이 시점에서 아직까지도 무리들은 예수님의 편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분노하며 예수님을 향한 적의와 악의를 품기 시작하는 바로 이 장면에서,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무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해서 기울어져 있었고 그들이 예수님의 편에 서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려주일을 중심으로 한 사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 날을 중심으로 본 시각 속에서 무리들은, 그것이 어떤 마음의 동기였든간에 예수님의 편에 서기를 원했고, 그들의 입술을 열어 예수님을 찬양했으며, 그리고 그것이 비록 제자들을 모방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 행렬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주변에 있었던 그 무리들의 첫 번째 얼굴입니다. 그러나 닷새 후의 장면을 통해서 변신하는 그들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2. 두 번째 얼굴: 예수님을 배반하는 얼굴(마 27:10, 막 15:6-15)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마27:10)

본문을 보면 무리들을 충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 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마태복음 21장에서는 무리들의 입장과 대제사장들의 입장이 달랐던 것을 보았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기를 원했으니 그렇게 못한 것은 무리들의 마음이, 이 많은 군중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고 그분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바로 이 무리들을 충동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에 따라서,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를 죽이자고 무리들을 충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사를 좀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15장 6-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막 15:6-15)

이것이 무리들의 두 번째 얼굴입니다. 바뀐 얼굴입니다. 지나간 주일,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에서 입성하는 왕이신 예수님을 왕으로서 인정하며 선지자적 기대를 갖고 그분을 선지자로 믿으며 예수님 편에 서서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무리들의 얼굴은 닷새 후에 완전히 돌변하여 변신합니다.
"바라바를 놓으소서 십자가에 저를 못박으소서"
그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그 당시의 지도자들의 충동에 의해서 예수님을 못 박는 일에 앞장서는 무리들의 모습으로 돌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리들의 두 번째 얼굴입니다.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날 이 군중들의 세 번째 얼굴을 봅니다.

3. 세 번째 얼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얼굴(행 2:23-37)

오순절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고 예루살렘에 몰려든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주의 영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는 무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3-24)
"너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 사실이다.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무법한 자들의 충동에 의해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계획대로 된 것이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 분을 다시 살리심으로 부활의 영광 속에 들어가게 되셨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제 36절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26-27)

사도행전 2장에서 보는 무리들의 얼굴은 이제 회개하고 있는 얼굴들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시고 사도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그들이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그 일을 회개하며 가슴을 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행위 자체는 절대로 합리화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악입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군중들은 악을 범한 것이고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들의 메시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악을 선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은 악이고 잘못이고 죄이지만, 하나님은 이 악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엄청난 구속의 계획을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수정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그분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의 구속과 구원의 위대한 경륜과 하나님의 놀라운 비젼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들으면서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실을 마음 아프게 회개하며 가슴을 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여기에서 우리는 회개하고 있는 군중들의 얼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십자가를 둘러싼 세 현장을 통해서 바뀐 군중들의 세 얼굴을 보았습니다. 첫째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송하며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님을 선지자로 받아들이던 무리들의 얼굴입니다. 그러나 불과 닷새 후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충동을 받아 예수님을 못 박은 일에 앞장 서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차라리 바라바를 놓으소서"라고 소리 소리 지르고 있었던, 폭도들의 모습으로 변한 군중들의 배반의 얼굴이 두 번째 얼굴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는 성령이 강림하는 오순절의 현장에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있는 무리들의 얼굴입니다.

이와 같은 군중들의 모습은 2.000년이 지난 오늘, 이 사건을 사건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던지고 있습니까?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의 교훈을 우리의 마음 속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집단적 신앙의 위험성입니다.
군중심리의 위험성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니까, 제자들도 그렇게 하니까 함께 찬양을 하고 덩달아 주님을 환영했지만, 그것은 개인적 확신에 입각한 행동이 아니었으며 개인의 신앙의 추구를 통해서 얻어진 결론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종려주일의 광경을 소개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함과 같더라"(요12:12-15)

이제 이 사건이 조금 진행된 이후 그 다음의 사건을 20절 이하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 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20절)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예배하기 위해서 올라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 큰 소동과 그 사건 직후에 있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그 중 헬라인들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감히 자부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 몇 사람만 이 예수님의 숙소를 찾아옵니다.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21절)
군중 심리의 뜨거운 열기와 물결이 다 스러진 뒤였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며 법석대던 그 부리들 중 대부분은 예수님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헬라인 몇 사람이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빌립을 찾아와 예수님을 만날 것을 요청합니다. 이 몇 사람만이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참으로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가에 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구도(求道)을 하고 있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 추구를 통해서 개인적 확신에 도달하지 못한 신앙은 결국 군중심리의 흥분의 물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군중들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주님을 환영하고 내일은 주님을 배신할 있었던 군중들, 이것은 개인적 확신이 없는 신앙의 위험성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마치 "율법을 주십시오.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모세에게 큰 소리쳤으나 모세가 율법을 가지고 내려올 때에 이미 금송아지를 만들어 율법을 파괴하고 있었던 시내 산의 그 백성들처럼, 혹은 그렇게도 부풀리는 가슴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것을 기대하며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가나안의 우상 신들을 섬기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기 시작했던 그 많은 백성들과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호수아는 자기의 마지막 확신을 가지고 그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결단으로 도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희는 오늘날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선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이것이 군중 신앙의 위험성인 것입니다. 갈멜 산에 있었던 그 많은 무리들을 기억하십시오. 바알 신을 추종하다가 엘리야의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인 것이 입증된 순간 그들의 마음은 다시 돌아섭니다. 바알 신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서 결단하지 못하고 이리저리로 방황하고 있었던 그 많은 군중들처럼, 오늘은 예수를 내일은 우상을, 오늘은 하나님을 내일은 세상을 섬기는 군중의 물결 속에서 휩쓸려 다니는 군중 신앙의 위험성을 이 무리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신앙을 추구하고, 개인의 구세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온 세상이 버려도 "그리스도와 나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개인의 만남과 개인의 체험에 의해서 확인하지 못한 신앙은 결국 이 군중들의 흥분과 열기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그 많은 무리들의 얼굴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군중 신앙의 위험성에 대한 첫 번째 경고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입니다.
이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 역할을 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의 충동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입술을 열어 소리쳤던 장본인들은 바로 이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들의 입술로 예수님을 저주한 것 때문에, 그들의 입술로 예수님을 못 박을 것을 충동한 것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순절 날 그들에게 또 하나의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성령을 보내시고, 당신을 못 박았던 이 무리들, 이 백성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내 가슴에 못질을 했던 그들, 그리고 내 얼굴에 침을 뱉었던 장본인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던 이 무리들, 이 군중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며 성령을 보내시사,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의 가슴과 영혼 속에 역사하셨던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이 하나님의 용서를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이 무리 중에 여러분과 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분은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분은 왜 십자가로 가셔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2.000년 전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그 현장에 있던 무리들 속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군중들의 공모자들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다면 그 날 그 군중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바라바를 놓으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치는 이 폭도들의 현장, 그 무리 속에 여러분이 있었고 내가 있었다는 이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주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죄가 내 죄인 것을 가슴 아프게 지적하셨고 우리의 가슴을 치셨습니다. 우리는 내게 역사하시는 이 성령님의 사역을 따라 회개하며 다시 십자가 앞에 돌아왔습니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이 은혜 때문에 우리는 지금 다시금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나갈 용기를 얻습니다.

이 군중들 속에 끼여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친 폭도가 바로 나였음을 알면서도 이제 우리가 다시 십자가 앞에 설 수 있는 것, 그것은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 근거하여 오늘 우리의 신앙은 결코 군중들에 휩쓸린 그 열기 속에 파묻힌 신앙이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다시 그 예수님과의 깊은 개인적 만남과 확신에 도달할 수 있어야만 하겠다는 것, 이것이 그 날 그 십자가의 주변에 있었던 무리들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교훈인 것입니다.

이동원목사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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