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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엇보다 사랑으로 사십시오(롬13장8-14)

무엇보다 사랑으로 사십시오(138-14)


출 처이동원목사

 

 

오늘은 십계명 강해 설교를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몇일 전 우리 교회 성도 한분이 십계명을 잘 기억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유머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제가 약간 바꾸어 보았습니다.

일부터 십까지 숫자로 암기하기 쉽게 만든 것입니다.

들어보시지요.

(일계명), 일단 여호와 하나님만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라.

이는, 이상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

삼은, 삼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사는, 사업을 핑계로 안식일을 범하지 말라.

오는, 오마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라.

육은, 육신의 생명을 누구의 생명이든 귀히 여기라.

, 칠계는 부부행복의 근본임을 기억하라(칠보단장한 여인을 조심하라)

, 팔팔한 힘을 남의 것 빼앗는 일에 쓰지 말라,

, 구라치지 말라.

, 십원이라도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이제 잘 기억하시겠지요.

 

오늘의 본문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면 1-11장까지가 첫 부분인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설명하는 교리(칭의의 교리)입니다.

둘째 부분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속에 들어간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윤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기독교 윤리의 근본인 십계명을 바울 사도가 다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 10절에서 바울사도는 한마디로 기독교 윤리의 핵심을 설명하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고 건강한 웰빙가정을 만드는 유일한 열쇠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다시 우리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사랑의 빚을 기억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이 말씀의 강조점은 할 수 있는 한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중요한 전제는 우리는 모두 별수 없이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인 로마서 1:14에서 자기 스스로도 빚진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가 복음을 받아 드리고 예수를 믿는 순간 그가 비로소 빚지고 사는 인생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나 한 사람이 예수 믿고 복음을 받아 드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려야 했는지요?

우리는 기독교 역사의 도상에서 먼저 복음을 받아드리고 복음을 위해 수고한 모든 믿음의 선배들, 선교사님들,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양육하는 일에 평생을 바쳐온 모든 목회자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전해온 모든 전도자들에게 진실로 빚진 자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진실로 이웃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으시나요?

그동안 오늘의 나다운 내가 되어지기 위해 나를 가르쳐 온 모든 스승들에게 빚을 지지 않으셨나요?

 

마침 오늘이 6.25를 앞둔 주일인데 우리 나라가 오늘의 한국이 되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 오는 도상에서 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희생한 모든 분들에게 우리는 빚진자가 아닌가요?

 

우리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스스로를 인정하는 일에 인색한 면이 있습니다.

사실 세계 역사상 전쟁의 잿더미에서 이처럼 빨리 일어나 세계 여러 나라가 평가할 만한 경제 재건을 이루고 이웃의 소위 대국인 중국이나 러시아인들에게 까지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어 본적이 과거의 역사에 어느 때에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런 민족재건의 도상에서 땀흘리고 희생한 소위 산업화 시대의 우리의 선배들에게 얼마나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을까요?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에 보면 소위 유명한 절기의 제정은 모두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날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 그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명절의 존재 이유는 일종의 자녀 교육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12:26-27에 보면 유월절 제정을 주께서 명하시며 이런 명절 제정의 의미를 친히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이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명절은 단순히 노는 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속에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도우심을 잊지 않도록 자녀들과 함께 기억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건한 히브리인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날 그날은 우리가 인생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포기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 바셈(Yad Vashem)이라는 유대인 학살 추모 기념관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경구가 쓰여 있습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너무나 빨리 잊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채찍도 하나님의 사랑도 말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만은 기억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이라는 것은 크게 말하면 율법의 한 부분입니다.

율법은 십계명을 포함하여 무려 613개의 계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대하고 세밀한 계명의 내용을 들여다 볼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런 계명을 모두 지키는 일이 우리에게 과연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에서 바울은 새 언약아래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가르침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계명에 신경쓰지 말고, 사랑하는 일에만 신경쓰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율법은 절로 지켜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십계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십계명은 두 개의 돌비에 쓰여졌다고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

첫째 돌비에 1-4계명까지로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상을 만들고 경배하겠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경배하기를 소원하는데 어떻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돌비를 생각해 보십시오.

5-10계명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계명들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절로 지켜지는 계명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데 어떻게 이웃을 간음하며 이웃을 살인하고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본문 9절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것과 그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 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그래서 8절에서는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고, 10절에서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웃 사랑은 결코 하나님 사랑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찍 성 어거스틴은 이런 위험하게 들릴수도 있지만 심오하게 성서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맘대로 하라. 결국은 사랑입니다.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사시면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질문은 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3. 오직 예수를 옷입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옷을 입는 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말에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정한 옷을 입으면 단정하게 행동하고 싶어집니다.

경건한 옷을 입으면 경건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야한 옷을 입으면 야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과거에 학생들에게 제복을 입힌 이유가 학생다운 행동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청년들이 군에 입대하면 군인의 옷을 입히는 이유가 군인 정신을 잊지 않고 행동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경찰이 제복 없이 돌아다닌다면 경찰의 위신이 서겠습니까?

 

그런데 바울 사도는 오늘의 로마서 본문에서 마지막 결론에서 우리가 사랑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예수로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14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의 옷을 입는다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요?

예수님처럼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정말 예수로 옷을 입었다면 어떤 상황을 직면하든지 저 유명한 쵤스 쉘돈(Charles Sheldon)의 제안처럼 이 한가지 질문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같으시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 같으시면 무어라고 대답하셨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순간 오직 한 벌 옷을 입고 살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들입니다.

3:27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침례)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라

 

우리는 벗을 수 없는 옷-예수의 옷을 입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수 있는 한 이 옷을 벗으려 합니다.

교회에 올 때 만 이 옷을 입으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옷을 입고 가정에서 살고 계십니까?

예수의 옷을 입고 직장 생활을 하십니까?

예수의 옷을 입고 사업을 하십니까?

아니면 우리는 여러 벌의 옷을 준비해 두었다가 교회에서는 예수의 옷을 입고 교회당을 벗어나는 순간 편리한 대로 이방인의 옷을 입고 사는 이중 삼중 다중인격의 인생들은 아닌가요?

 

한가지 물어야 할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의 옷을 입고 사는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의 인생이어야 하겠습니까?

그분의 옷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3:12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이어서 사도 바울은 14절에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긍휼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자비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겸손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온유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오래 참음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사랑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그분은 지극히 작은 소자 한 사람에게 베푼 사랑이 곧 내게 대한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이웃사랑의 시작은 본문 10절의 권면처럼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려는결심, 아니 이웃에게 피해나 부담을 끼치지 아니하려는 작은 배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주차할 때도 이렇게 주차하면 남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생각하는 작은 배려, 노약자나 장애 이웃들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도록 배려하는 작은 노력-바로 이런 행함이 율법을 이루는 사랑의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TV에세이 좋은 생각글모음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떤 암과 투병하시며 병석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식구들이 없을 때 외출을 하셨습니다.

식구들이 한바탕 소요를 하며 찾는 중에 아버지는 외출하신 지 서너 시간 후에 말없이 돌아 와 다시 병석에 누우셨다고 합니다.

어디 갔다 오셨느냐고 자식들이 다그쳐 물어도 워낙 말수가 없으셨던 아버지는 대답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그후 갑자기 아버지는 병세가 악화되셨고 자식들은 그 몸으로 외출을 하셨으니 이 모양이 아니냐고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그로부터 몇 주를 지내지 못하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 병상 머리 위에 큰 봉투가 하나 있어서 열어보니 아버지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병색이 완연한데 억지로 웃으시는 모습이셨습니다.

그때 식구들은 비로소 그 사진이 아버지가 마지막 외출하여 찍으신 사진인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진 뒤에 아버지의 힘없이 내리 쓴 글씨가 눈에 들어 왔다고 합니다.

나 죽은 후 내 변변한 장례식 사진 하나 없어 당황할까봐 한 장 찍어 둔 것이니 장례식 조촐하게 치른 후 화장할 때 함께 태워 없애거라.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내 마지막 배려라고 받거라. 부디 자식들, 형제들, 그리고 이웃들 사랑하며 살거라

 

이 글은 자녀의 이런 고백으로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요, 알겠어요, 그것도 아버지의 사랑인 것을. 그런데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불효가 적었을 것을 후회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당부처럼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살겠습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십계명의 교훈과 사랑의 관계를 말해 보십시오.

2.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말해 보십시오.

3.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4. 십계명 중 내가 제일 잘 지키지 못하는 계명은 무엇인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나누어 보십시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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