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동원목사

[스크랩] 메시야의 리더십(사42장1-4;44장28)

메시야의 리더십(421-4;4428)


출 처이동원목사

 

 

여러분은 목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무엇을 연상하십니까?

물론 목자는 양을 기르고 돌보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특히 셀을 담당하여 목원 들의 믿음을 돌아보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는 목자라는 단어는 양 무리와 같은 성도들을 돌보는 영적 지도자를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는 오늘 날 이 목자라는 단어를 주로 종교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뜻 밖에 이 목자라는 단어가 정치 지도자를 뜻 할 때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의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살던 시대에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소위 이중적 의미를 갖고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면서 그러나 동시에 이 예언이 베풀어지던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서 메시야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구원할 정치 지도자를 의미하는 일에 이 목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 사44:28을 다시 읽어 보실까요?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고레스가 누구입니까? 고레스 혹은 사이러스(Cyrus)라 불리우는 이 사람은 페르샤 제국의 초대 왕(BC559-530)으로 소위 메대 바사를 통일하고 바벨론을 정복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정복 정책은 고대의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정복 민족의 전통이나 종교를 존중하고 자율권을 허용한 선정을 베풀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정책의 일환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위 고레스 칙령(BC538)을 발표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를 주어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이런 해방령을 발표한 고레스가 곧 구세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의 이사야 본문에서 구세주의 모형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고레스의 리더십의 이런한 측면이 메시야의 리더십을 예표하고 있었던 것으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1219일 앞으로 5년간 우리 민족을 이끌어 갈 민족의 지도자 곧 주의 목자를 선출하게 됩니다.

우리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가 있다면 이번에 선출되는 지도자가 이런 메시야의 리더십을 부분적으로라도 반영하는 그런 지도자가 세워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 리더십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1. 정의의 리더십입니다.

이사야 40-55장 사이에는 네 편의종의 노래가 등장하는데 42:1-4이 첫 번째 노래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예비하사 보내실 종을 소개하며 그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42:1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3절에서도 그는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라고 했고, 4절에서도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정의를 세우는 종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의 정의로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주목해서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고레스 왕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그가 시행한 가장 중요한 정의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이방에 노예가 되어있던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베푸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베푼 정의의 리더십은 백성을 자유하게 하는 정의였던 것입니다.

 

정의라는 가치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자유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의 자유를 위축하고 제한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정의일수 없습니다.

과거에 이 땅에 살던 우리의 선배들 중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상당한 수의 지식인들은 분배와 평등의 정의를 강조하는 공산주의가 민중에게 더 나은 정의를 제공할 것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북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물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도대체 누가 이 분배를 결정하는가? 이 분배를 어떻게 시행할 것인가? 이 분배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인가?>등의 질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당 독재의 불행한 전제 국가를 낳아 이 땅의 절반은 자유를 잃어버린 동토의 땅에 살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여러분은 말로만 정의를 외치는 사람을 뽑아서는 안 됩니다.

그가 주장하는 정책이 백성 전체와 우리 사회를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위축시킬 것인가를 신중하게 분별하여 우리의 주권을 행사하여야 하겠습니다.

 

자유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상위 가치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5: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메시야의 리더십은 자유하게 하는 정의의 리더십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선거를 통해서도 결과적으로 자유의 가치가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더욱 신장되는 그런 정의가 실현되도록 기도하십시다.

 

2. 긍휼의 리더십입니다.

본문2-3절이 묘사하는 리더십의 그림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이런 이미지를 종합하는 한 단어를 저는 긍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메시야의 리더십은 긍휼의 리더십인 것입니다.

마태는 마태12:17-21에서 정확하게 이 예언이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이야 말로 진실로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는긍휼의 리더십의 전형입니다.

 

그러면 긍휼의 리더십의 반대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정죄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네가티브 리더십입니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리더십으로는 건강한 새 사회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의 레슨입니다. 네가티브 많이 하는 사람은 절대로 뽑지 마십시오.

 

물론 네가티브가 필요한 상황도 있습니다.

지도자 주변에는 창조적인 비판을 해 주는 참모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지도자는 균형 잡힌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 자신은 네카티브해서는 안됩니다.

네카티브에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늘 사물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은 그의 판단과 시선이 부정적으로 고착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비판을 조심하라고 산상 수훈에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만일 최고 지도자가 매사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네카티브한 정책을 펼쳐갈 때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난 5년간의 국정의 교훈이 무엇이었는가를 우리는 냉철하게 살펴야 합니다.

최고 지도자는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향해 국가를 이끌어 갈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선거 캠패인에서 자신의 비전이나 정책을 제시하기보다 다른 후보를 네가티브하는 일에 더 몰두한 후보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일단 제껴놓으십시오.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한번 더 들려 드리겠습니다.

작년에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대통령에게 들려 드렸던 이야기입니다.

본래 헨리 나우웬이 그의 긍휼이란 책에서 소개한 긍휼의 리더십의 스토리입니다. 어떤 곳에 바보들의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 한 복판 밀밭에는 수박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그 수박들을 괴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가지고 아무도 그 밭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행자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이 광경을 보고 기가 막혀 내가 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교정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미련한 사람들아 나를 보라고 외치며 용감하게 밀밭으로 돌진하여 수박을 쪼개 먹어 보이며 나를 따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저 괴물까지 무참하게 살해한 자가 우리까지 살해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건초 갈퀴를 가지고 그에게 덤벼들어 그를 마을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러나 또 한 여행자가 이 마을에 들어서 이런 마을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 그는 시간을 두고 인내하며 마을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설득하고 가르쳐 마침내 그들 자신의 손으로 이 수박을 먹게 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것이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리더십이었다고 말합니다.

실로 오늘날 국민을 통합하는 이런 긍휼의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런 리더십에 가까운 후보가 누구인가를 잘 분별하시기를 기도하십시다.

 

3. 회복의 리더십입니다.

다시 본문 44:28을 보겠습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역사적으로 고레스가 직접적으로 예루살렘을 중건한다든지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정치적 결단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시온의 땅으로 돌아가고 예루살렘 성이 중건되고 성전이 다시 지어지는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녕 하나님의 기쁨을 성취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레스의 리더십은 회복의 리더십이었습니다.

메시야의 리더십도 궁극적으로 회복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성탄절은 타락한 인생, 무너진 인생을 회복하기 위해 예수께서 오신 사건의 기념이 아닙니까?

 

다시 한번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 바티간 뮤지엄에는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피에타’(pieta) 조각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 시체를 끌어안고 비탄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여러해 전 한 정신 이상자가 이 인류의 위대한 보고인 조각상을 망치로 훼손하는 사고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작품을 아끼는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에게 중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 작품은 다시 한번 원형 그대로 회복될 것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훼손된 후 뮤지엄에서는 즉각적으로 복구 팀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회의를 통해 한 가지 흥미있는 합의를 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복구 작업에 들어가기보다 상당한 기간을 이 작품 앞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무너진 작품을 보고, 그리고 오리지널 그림을 보고--무너진 작품의 슬픔을 느끼고 그리고 회복되어야 할 원형의 형상을 마음에 새기면서--.이렇게 시간을 보내던 한 날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 준비되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들이 원형 그대로 이 작품을 회복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으나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영광의 형상을 파괴하고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런 무너진 인생의 슬픔을 이 땅에 계시면서 공감하며 살아오신 어느 날 그는 마침내 최후의 결단을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로!--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회복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회복의 리더십이었습니다.

구원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세우기는 어렵지만 무너뜨리기는 쉬운 것입니다.

 

우리 개인과 가정 그리고 우리 민족 우리 국가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번영과 축복의 사회로 다시 일으키는 일에 기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가 누구인가를 분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기도하고 투표에 임하십시오.

그리고 1219일 또 하나의 고레스, 메시야의 리더십을 모방하는 지도자가 세워지는 기쁨을 다함께 누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