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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몰랐지만 이제 알았으니까

몰랐지만 이제 알았으니까  

창 28:16-22  성경본문보기    

청교도 작가인 나다나엘 호손의 “데이비드 스완”이라는 이야기를 기억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스무살 난 스완이라는 청년이 고향을 떠나 보스톤으로 취직을 하러 길을 가다가 단풍나무 숲 한가운데 있는 샘터 옆에 누워 단잠에 빠져 있는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들입니다. 상속자가 없었던 부자 상인 부부가 그 곁을 지나다가 어쩐지 죽은 아들 헨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속삭이며 아들 삼을까 하다가 하인의 ‘떠나실 준비가 되었다’는 말에 생각을 거두고 그의 곁을 떠나갑니다. 그 다음 사랑을 찾고 있는 어여쁜 소녀가 그 곁을 지나다가 그의 얼굴이 닿으려는 벌을 쫒아주고 ‘핸섬한데’ 하고 속삭이며 그가 깨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가 쉽게 깨어나지 않자 그녀는 사랑을 포기하고 떠나갑니다. 그녀가 떠난 후 두 악당이 스완의 보따리를 가져가려고 접근합니다. 만일 그가 깨면 처치하려고 비수를 그의 가슴에 겨누고 있는데 개 짖는 소리에 개 주인이 올까봐 그들은 서둘러 그의 곁을 떠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그가 부자가 될 기회, 사랑을 만날 기회, 그리고 그가 도둑맞을 기회 혹은 살해당할 기회들이 계속 지나가고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이런 기회들을 인지할 수 있었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오늘 본문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야곱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었다면 그는 조금 늦었지만 자기 옆에 찾아온 은총의 기회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의 깨달음이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16절 본문의 시작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러나 이제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달인 12월 첫 주일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도 얼마나 많은 기회들이 우리 곁을 지나갔을까요? 이제 다시 한해를 돌아볼 시간입니다. 이제 이 지나간 시간들, 그 시간 들 속에 명백한 하나님의 인도와 개입이 있었음을 알게 되신다면 이제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설교 제목을 다시 기억해 주십시오. “몰랐지만 이제 알았으니까” 자, 이 지나온 시간, 하나님이 주신 기회에 대한 마땅한 반응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야곱에게는 각성할 것이 있었고, 결단할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것은 오늘 이 자리에 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 각성할 것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 각성은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셨는데, 혹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셨는데 내가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이런 하나님의 인도를 혹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아왔는지요. 존 올트버그(John Ortberg)라는 설교가는 이런 현상을 가르쳐 ‘영적 방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죠지 버나드 쇼의 희곡 “세인트 존”에서 등장 인물중 한 사람이 주인공 아크 존에게 하나님은 항상 당신에게는 말씀하면서 왜 나에게는 말씀하시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존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는 항상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듣지 못할 따름입니다.” 두 사람이 꼭 같은 책을 읽었는데 한 사람이 감격하는데 한 사람은 무엇을 읽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무 메시지를 듣지 못한 경우, 십중팔구 집중하지 못한 채 방심하고 읽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소년 사무엘도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아이 시절 하나님은 계속해서 세 번씩이나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 엘리의 도움으로 비로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본문에 나타난 주인공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 이삭에 의해 처갓집으로 보내어 집니다. 그의 형 에서가 야곱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 가면 네가 아내를 얻고 새 출발을 할수 있다고 설득하여 그를 떠나보냅니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지만 목숨을 보존하고 새 인생을 열기 위한 실낱같은 가능성에 인생을 걸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외로웠고 피곤했고 두려웠습니다. 그가 이렇게 홀로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 벧엘이라는 들에서 밤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밤에 그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모습을 보고 이어서 사다리위에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때 소스라쳐 놀라 깨어 일어나며 고백한 말씀이 바로 16절 말씀이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는 비로소 형에게 쫓겨 먼 길을 가고 있었던 그 피곤한 여행길에도 그리고 아무도 없는 외로운 빈들에서 한 밤을 지날 때에도 하나님이 거기 계셨던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 아침 야곱이 깨어 일어나던 그 순간 그는 영적 방심에서 깨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런 순간을 영적 각성의 순간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이런 영적 각성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 저의 둘째 아들 범이가 미국 변호사 시험을 치러놓고 10월 초 발표 날이 가까워지자 지나치게 초초해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마침 우리 교회 스태프 수련회가 설악산에서 있어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거기 가서도 안절 부절이었습니다. 밤에 보니까 잠을 못 이루더라구요. ‘자자’고 해도 “아빠는 당사자가 아니라서 몰라 그렇게 말하지 내가 잠이 오겠어요”하더라구요. 제가 그런 아들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냥 신경 건드리지 말아야 하겠다고 맘먹고 제가 먼저 잠을 청했습니다. 새벽에 일찍 깨어 보니까 아들이 뒤늦게 곤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평생 그날 새벽처럼 제 아들이 잠든 모습을 그렇게 오래 지켜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새벽 제 아들 곁에서 그의 얼굴을 지켜보며 이런 독백을 했습니다. “내가 네 맘을 왜 몰라 알지--알아--지금도 넌 모르지만 내가 너 이상으로 걱정하며 이렇게 네 얼굴을 보고 있잖아” 그 순간 제 뇌리에는 또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 우리는 몰라도 내가 내 아들 침상 곁에서 이렇게 그의 얼굴을 주목하듯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 것이 아닐까” 그때 제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섬광처럼 솟아난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시121:4-5) 그 새벽이 저에게는 영적 각성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가 각성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몰랐지만 그분은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 그분의 인도를 이제라도 각성하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결단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각성에 이어 결단할 일-무엇일까요?

 

II. 결단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은 두 가지 결단을 합니다.

 

1)평생에 경배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2)십일조를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첫째 결단으로 야곱은 이 빈들에서 지난 밤 베개 삼아 잠을 청했던 돌을 기념비로 기둥처럼 세우고 기름을 부은 다음 여기가 바로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고벡합니다. 일종의 예배 행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분을 경배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진지한 예배 행위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는 때문일지 모릅니다. 저는 한해를 돌아보며 새해를 기다리는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금년 한해 나의 예배 행위가 온전한 것이었는가를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온전한 예배 없이 쓰임 받는 생애를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의 성공 없이 인생에 성공할 수 없는 독특한 존재들입니다. 예배에서 은혜 받고, 예배에서 새 힘 얻고, 예배에서 비전보고-그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비밀인 것입니다. 예배 제대로 드리기-이것이 새 해의 경건한 계획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결단은 십일조의 실천이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성경이 십일조나 헌물을 강조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헌금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고후9:5에 보면 바울 사도가 마게도니아 교우들의 희생적인 헌금 행위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 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헌금은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십분의 일도 드릴 수 없다면 성경은 그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건강과 능력, 일을 처리하는 지혜, 일이 가능한 환경 이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주님께서 함께 하셨고,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신 것을 참으로 믿고 안다면 이제 그분께 수익의 십분의 일을 드림이 무슨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저는 여러분과 제가 한 해를 돌아보며 십일조를 실천 못하셨다면 새 해는 다른 무엇보다 이 경건한 실천으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시작해 보시기를 도전하고 싶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아마도 “하나님은 내게 분명히 자신을 나타내신 일이 없으십니다. 그래도 이런 헌신의 삶을 결단해야 할까요?”묻고 계신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왜 많은 경우 야곱의 체험처럼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꿈이라도 나타나셔서 당신의 임재를 분명히 알려주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나 한번 사고를 바꾸어 이렇게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일일이 간섭하시고 지시하신다면 우리는 스스로 어떤 결단도 선택도 할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성숙한 성인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경우 하나님은 기적으로 자신을 나태내시기 보다도 성경을 통해 명백한 삶의 원리를 가르쳐 놓으시고 우리가 이 원리를 붙잡고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 부모들이 우리의 자녀들이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무슨 음식을 먹어야 할지, 누구와 데이트를 해야 할지를 다 지시하고 결정해 준다면 어떻게 자녀들을 성숙한 성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 이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의 인도나 하나님의 임재가 분명하게 경험되지 않아도 고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땅 끝까지 그의 자녀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고 사시면 됩니다. 이제 말씀의 명대로 사시면 됩니다. 날마다 순종을 결단하며 사시면 됩니다. 말씀이 경배를 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실한 예배 자가 되십시오. 말씀이 헌신을 명하고 헌금을 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실한 헌신 자가 되십시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일일이 지시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시는 기적의 징표를 보여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숙한 성인됨의 기대를 이해하시고 말씀의 원리를 따라 최선의 결단을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식당에 가서 누군가가 메뉴를 나대신 다 결정해주는 것이 반드시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성인됨에 대한 대접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도 때로 우리에게 “이것을 먹어라”고 하시는 대신 “무엇을 먹겠니?”라고 묻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우리가 건강을 해하지 않을 메뉴를 선택하신다면 빙그레 웃으시며 우리의 선택을 지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이런 칭찬을 받고 싶지 않으신가요? “잘 선택했어. 잘 한 일이야. 내 아들, 내 딸아. 좋은 선택이야-Good Choice!” 이런 좋은 결산, 좋은 선택으로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주님, 몰랐지만, 알았으니까 이제는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이제는 순종하겠습니다. 이제는 헌신하겠습니다. 이제는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동원목사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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