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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랑의 섬김

사랑의 섬김

고린도전서 13장,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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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오늘은 유명한 고린도 전서 13장을 우리 같이 공부 하시겠습니다. 어떤 문인 한 사람이 참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그 꽃에 대한 글을 쓰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꽃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들어왔던 생각 하나가 뭐냐 하면 내가 이 꽃에 대해서 제대로 글을 쓰기 위해서 꽃을 분석한다든지, 꽃을 연구 한다든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 자체가 꽃에 대한 아름다움을 다 파괴할 것 같다 라는 느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대로 보고 느껴야지 그것을 분석 한다든지, 꽃에 대해서 어떤 묘사를 한다든지, 글을 쓰다 보면 오히려 이것의 아름다운 꽃을 오히려 미를 해치는 결과를 가지고 오지 않을까 라는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고백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고린도 전서 13장 같은 위대한 장을 접할 때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이 좋지 자꾸 공부하다 보면 오히려13장의 아름다움을 오히려 해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에,~ 그러나 왔으니까 공부를 해야죠. 하하하…녜, 이미 말씀 드린 것 처럼 고린도 전서 12장부터 시작해서 14장까지는 하나의 픽션 입니다. 12장, 13장, 14장, 석장은 바로 고린도 교회에 부딪혀 있었던 소위, 신령한 은사들의 문제, 영적 은사들의 문제를 바울이 다루다가 13장을 샌드위치 처럼 끼워 넣었습니다. 14장에도 은사 문제가 나옵니다. 14장. 우리 다음시간에 공부할 내용인데, 특별히 14장에는 예언과 방언의 은사가 아주 직접적으로 다루어집니다. .12장에는 영적인 은사들에 관한 일반적인 리스트를 쭉 기록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은사들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를 우리가 함께 공부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들 가운데서도 특별이 둘을 뽑아 냈습니다. 방언과 예언의 14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그 사이에 샌드위치 처럼 존재하는 13장은 우리가 은사들을 어떻게 제대로 활용할 수가 있느냐, 은사란 것은 궁극적으로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또 다른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섬김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입니다. 은사가, 은사답게 활용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사는 사랑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였습니다. 그래서 사랑장이 들어 가는 거에요. 사랑 그 자체를 뭐 가르치거나 또 그 사랑 자체를 묘사 할려고 했던 것이 바울 사도의 본래적인 의도, 오리지날한 의도가 아니라, 이것은 은사를 설명하다가 은사를 어떻게 활용해야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이 정말 교회에 유익하고 이웃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지고 올 수가 있느냐, 그것은 은사들을 우리가 사랑으로 활용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섬김을 위해서 바로 이 사랑의 특성을 고린도 전서 13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고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서 그래서 먼저 중요한 것은 먼저 사랑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13장을 통해서 사랑의 특성을 다시 한번 생각 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냥 보편적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여러가지 희랍어 단어들이 있지마는 신약이 사용하고 있는 매우 독특한 사랑의 단어, 여러분 많이 들었을 꺼예요. 무슨 단어예요? 아가페란 단어, 아가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 그 당시 이 단어는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든, 사장 되어 있었든 단어 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보편적으로 쓰여 지든 사랑의 단어를 가지고는 성경이 기대하는 사랑,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랑을 충분히 나타낼 수 없었다고 믿었든 성경의 기자들은, 그 당시 사장 되었든 이 독특한 단어 하나를 끄집어 내어서 오히려 그것을 썼어요. 그것이 바로 아가페라는 사랑 입니다. 이사랑은 무었일까?, 사랑이 뭐길래, 이사랑은 도대체 무었일까? 이 사랑의 특성, 우리가 고린도 전서 13장을 크게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가 있습니다. 1절 부터3절 까지, 4절부터 7절까지, 8절부터 마지막 절 까지,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의 특성을 크게 세가지로 넓게 우리는 그려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가치성, 사랑의 가치성, 그 다음에 두번째로 4절부터 7절까지는 사랑의 덕성, 사랑은 덕성을 가지고 있어요. 사랑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사랑은 덕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사랑은 영원성의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하다, 사랑의 영원성, 우리는 첫째로 1절부터 3절까지 사랑의 가치성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사랑의 가치성, 이것을 은사와 연계 시켜서, 은사와 연결 시켜서 생각하자면 사랑이 없는 은사, 사랑이 없는 은사는 무가치하다 이 말이죠. 사랑이 없는 은사의 활용, 그것은 무 가치성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그래서 반대로 사랑을 가지고 은사를 활용하게 되면은 그 은사는 가치 있게 사용됩니다. 또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결과적으로 세워 주는, 그런 결과가 될 것입니다.

 

자, 사랑이 없는 은사의 무가치성이 1절부터 3절까지 어떻게 묘사 되고 있습니까?. 우리 1절부터 3절까지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첫째로 바울은 방언을 말합니다. 방언이나 천사의 말, 이것은 보편적을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특수한 종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이 방언을 말하고 천사의 말을 말합니다. 그래서 천사의 말이란 것은 직접적인 천사의 쓰는 말일수도 있겠지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천사의 말을 어떤 웅변 같은 은사, 아주 말을 특별히 잘하는 것, 이것도 은사죠. 아무나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그런 의미로 이해 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보편적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은사 받은 사람들만이 방언을 말하고 그리고 또 천사의 말 같은 유창한 웅변이나, 특이한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통역 되지 않으면 이웃들에게는 의미있게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는 유익이 될 수가 있어요. 방언 같은 것은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에게는 유익일 수가 있습니다. 통역 되지 않을 때는 이웃들에게는 구체적인 유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그 방언을 자기 과시의 목적으로만 사용한다면, 나는 방언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냥 사람들 앞에서 방언을 유창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아 듣지 못해요. 그 방언의 목소리 옥타브가 높아 질수록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시끄러운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웃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다.

 

특별히 우리가 14장에서 집중적으로 바울은 이 방언의 은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마는, 방언은 개인에게는 무척 유익일 수가 있지마는, 공적인 예배의 석상에서는 방언은 되도록 삼가 해야 한다고 14장에서 말합니다. 왜냐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방언의 소리가 높아질수록 그것은 더 크다란 소음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 은사는 무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가지고 방언을 말하고 방언을 통역 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 매우 유익한 은사로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는 역할을 할 수가 있다는 것 입니다. 두 번째로 예언 입니다. 예언, 만약 내가 타인의 어떤 비밀한 것, 혹은 타인의 앞길에 관한 것을 내가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면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종종 우리 주변에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네, 이것이 사랑으로 활용되면 사람의 앞길을 잘 가이드 할 수가 있고 그 사람의 용기를 불러넣을 수가 있고, 그 사람을 격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랑이 없이 예언의 은사가 활용된다면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콘트롤 할 수가 있어요. 다른 사람 들을 조종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 가이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그것이 심지어는, 그 은사를,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그 예언을 빙자로 해서 사람들에게 예언을 해주면서 그 사람들을 자기의 종으로 삼는 사례들도 종종 일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무서운 영적인 폭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적인 폭력이 될 수 있어요.

사랑이 없으면 예언이라는 은사는 가장 다른 사람들에게 파괴적인 역할을 하는 은사로 남용되거나 잘못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교회 안에서 굉장히 덕을 세우지 못하고 어려운 일들을 벌이는 경우들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유익하게 세워질 수도 있습니다.

 

또 예언과 함께 지식이 언급되고 있어요. 이것은 예언을 말하다가 그 한 부분으로 예언에 포함된 어떤 지식일수도 있어요. 따로 우리가 지식을 말할 수도 있겠지요. 지식도 분명히 은사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지식의 활용은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유익이 안 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만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유익한 은사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식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다, 마치 제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제일 많이 귀가 따갑도록 들은 것은 아는 것이 힘, 지식은 힘. 뭐 베이컨의 이야기를 열심히 독창했든 어린시절이 생각이 나는데요, 지식은 물론 힘이에요.

어떤 교도소의 교도관 하나가 여기 교도소에 들어 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된 것은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교도관이 있었어요. 보니까 실제로 문맹자들이 많아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오직 글만 알 수 있다면 지식만 갖는다면, 이들은 모두가 다 사회의 훌륭하게 기여할 수가 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인제 글을 깨우쳤습니다. 이 사람은 흐뭇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이제 다시는 재범하지 않고 좋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기대 했어요. 자기가 글을 가르쳤던 사람 중에 얼마 중에 어떤 사람이 사회에 나갔다가 얼마 후에 또 들어왔어요. 그래서 왜 들어왔나? 범죄 제목을 보니까, 문서위조 죄로 들어 왔습니다. 하하하. 글을 가지고 잘못 써 먹었단 말이죠. 녜, 글을 왜 배웠느냐? 이 글을 가지고 이웃들에게 유익하게 할 목적으로 글을 가지고 있다면, 지식을 갖고 있다면, 그 지식은 유익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지식이 파괴적인 역할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예언도 지식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여기서 믿음은 기적적인 믿음 일 것입니다. 어떤 이런 특별한 종류의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기적이 막 일어나요, 녜, 불가능한 것을 믿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견고하게 믿는 사람을 통해서, 이런 신념 있는 사람을 통해서 기적적인 역사들이 창출 되는 경우들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믿음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만약 자기 과시욕으로만 쓰여진다면, 마술적인 믿음으로 쓰여진다면, 이것도 전혀 이웃들에게 유익 하지 못한 결과를 가지고 올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높이는데는 다행스러울 일지 모르지만, 공동체의 유익을 가지고 오는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제, 구제도 믿음이 없는 구제, 사랑이 없는 구제는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구제를 받으면서도 모멸감을 받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 목적으로 자기의 이름을 선전하기 위해서 나를 구제 했다면 이런 경우에는 나는 이용만 당했구나, 상처를 받을 수가 있어요. 얼마나 많은 고아들이 상처를 받습니까? 고아원에 고아를 도우러 가는 사람들이 정말 사랑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사진 찍는 일에만 관심이 있어요. 모아 놓고 집합! 사진 찍고, 우리 고아원에 갔다 왔다! 선전해요. 차라리 안 가는게 났죠, 고아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줄 따름입니다. 이런 구제는 결코 도움이 될 수는 없어요.

 

어떤 크리스챤 젊은이 하나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는 어느날 좀 실험을 해보기로 했대요. 교회 근처 에~ 굴다리에 가서 아주 추운 날 예배 끝나고 나오는 교인들이 얼마나 좀 구제를 하나, 자기가 걸인의 모습으로 행길에 앉아서 거기서 지나가는 사람들, 특별히 교회 끝나고 그 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를 도울까, 녜, 별로 안 돕드래요.그냥 지나 가드래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돕드래요. 어떤 사람들은 돕는데, 그런데 그냥 거지가 있으니까 차마 크리스챤이니까 그냥 지나갈 수는 없고 그래서 마지못해서 그냥 돈을 몇 푼씩 던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꼭 한 사람이 크리스챤인지 아닌지 교회서 나오는 사람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곁에 다가 오더니 아이 참 미안해요 저가 오늘 좀 돕고 싶은데 아무것도 제가 가진 것이 없군요. 용기를 내어서 잘, 열심히 사셔 야죠하고 손을 잡아 주드래요. 이 청년이 나중에 글을 썼는데, 그날 자기에게 가장 격려가 되었든 것은 몇 푼의 돈을 던져준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그 사람이였다. 사랑이 없으면 구제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사랑이 없으면 순교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뭐에요? 아무것도 아니다. 저는 사랑이 없이 순교도 가능할 수 있을까?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죽을 때, 에라, 내가 평생 이름 못내고 죽는데 한번 그냥 멋있게 죽자! .한번, 한번만 눈 딱 감아 버리고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죽어버리면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하하….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다시 말하면 자기 “쑈’의 목적으로 순교도 어쩌면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교는 무슨 유익이 되겠어요? 하나님 나라에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에~ 그런, 그런 잘못된 모티브, 동기에 순교란 것은 그 동기가 곧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순수하지 못한 동기, 자기 이름을 위한,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동기의 순교, 그것은 결국 사람들에게는 감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유익이 될 수는 없습니다.그것은 죽어도 남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죽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있을 때만 모든 것에 가치는 살아난다. 사랑이 있을 때만, 그리고 사랑이 동기가 될 때만 우리의 모든 은사들도 제대로 그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 여기 사랑의 가치성을 확인할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유 우리 교회 교인들은 참- 다 나를 닮았는지 이렇게 아멘 않하는지..

 

녜, 그 다음에 4절부터 7절까지는 사랑의 덕성, 사랑이 없는 은사는 부덕한 태도, 덕스럽지 못한 태도나 결과를 얼마든지 초래 할 수가 있다. 사랑을 가질 때만 덕 있는 모습으로, 덕 있는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다. 이것이 사랑의 덕성이죠 사랑은 오래참고, 반대는 뭡니까? 응? 참지 못하고죠 뭐, 참지 못하고. 네, 우리는 종종 우리주변에 참지 못하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지요 어떻습니까? 참지 못하고 있는 이웃들의 모습이, 보기 좋아요? 안 좋아요, 녜? 종종 끈질기게 참는 사람들, 아주 참지 못하는 사람도 참는 부분이 있어요. 아마 자식 기르면서 많이 참으실거예요. 자기 자식들 만은 참아요, 제대로. 그래도, 왜 참을 수 있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뭐 간단해요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만은 그래도 잘 참아요. 녜,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참을 수 있어요. 우리 쟌 웨슬리, 요한 웨슬리는 자녀들을 굉장히 많이 두었는데 아주 자녀들을 다 잘 교육시켰다. 뭐, 이런 걸로 유명한 사람이죠? 그러나 그 부인이 더 유명합니다. 스쟌 웨슬리, 그 어머니가 아주 독특한 교육법을 가지고 자녀를 잘 교육을 시켰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중에 하나는 뭐냐하면 이 부인이 아주 잘 참았다고 그래요. 남편조차 감동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은 남편이, 쟌이, 요한이, 요한 웨슬리가 자기 부인보고 스쟌 보고 여보! 어떻게 당신은 그 아이에게 그똑 같은 일을 가지고, 내가 보니까 거의 20번이나 당신은 참은 것 같애, 어떻게 20번이나 참을 수 있었소? 그랬더니 부인이 이렇게 대답을 했더래요. 내가 19번 까지만 참았더라면 그 애를 어떻게 했을 것 같애요? 20번 참았으니까 그 아이가 좀 변했잖아요. 사랑은 참게 하는 것 입니다. 참지 못하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이웃들 앞에 부덕한 모습들을 나타낼 뿐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이 온유라는 덕성은 특별히 콘트롤 된 인격을 말합니다. 콘트롤된, 절제된 인격, 절제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되요? 특별히 분노의 절제, 우리가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분노를 절제 하지 못할 때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합니까? 혹시 이런거 안 해보셨어요? 네?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수밖에 없어요? 폭발 하죠, 폭발, 폭발 할 수밖에 없어요. 자, 폭발하면 도움이 됩니까? 안됩니까? 녜 폭발하면 파괴 밖에 나오지 않아요. 폭발의 결과는 파괴에요. 많은 파괴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그것은 교육이 아니에요. 그것은 도움이 안되요.그래서 페스탈로찌라는 교육학자가 한 유명한 말 가운데 네, 교육이라는 것은 온유의 교실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유명한 말을 했어요. 교육이란 것은 온유의 교실에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막 폭발하고 있을 때, 성질 낼 때, 그럴 때 하나도 교육은 안되요. 폭발하면서 교육이 되겠지 성질 내면서,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건 절대로 교육이 안돼요. 그럴 때는 차라리,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아요. 차라리 침묵이 났다구요.

그 다음 뭐랍니까? 사랑은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이 투기나 자랑은 공통점이 있습니다.그것은 둘 다 이기심에 뿌리박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심, 투기라는 것은 자격이 없는 것, 자격이 없는 것,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탐하는 것, 그게 투기죠, 나는 없고 남이 가지고 있어요. 남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성질 나요 보기만 해도, 막 질투가 나고, 하하하 네, 투기에요. 나는 없고 남이 가지고 있는 것, 자랑은 뭐에요? 나만 가지고 있는 것, 남은 없고 나만 가지고 있는 것,그걸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 그것을 과장 하고 싶어하는 것, 그것이 자랑이죠. 둘 다 이기심에 뿌리박고 있어요. 그리고 이기심에 뿌리박은 어떤 행동도 이웃에게 유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교만하지 않다. 우리 이미 교만에 대해서는 8장 1절에서 말했죠? 기억합니까? 잊어버리셨습니까? 8장 1절, 다시 한번 돌아가서 다같이 읽겠습니다. 8장 1절 다같이 시작,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녜, 지식은 뭐한다고 그랬어요? 교만하게 하며, 그 다음에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그랬어요. 사랑만이 비로소 덕을 세워요.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덕성이 있어요. 그래 사랑의 특성은 덕성이에요. 그러나 그 반대가 바로 교만이에요. 반대가 바로 교만 입니다. 녜, 교만은, 교만한 지식, 특별히 교만한 지식,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어요. 내가 교만에 근거한 어떤 이웃을 도울려고 하는 것, 그것은 이웃에게 더 크다란 상처를 줄뿐이지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여기서 무례 라는 낱말은 질서가 파괴된다는 뜻이에요. 질서가 파괴된다. 우리가 질서를 파괴할 때, 왜 질서를 파괴 합니까? 교통신호를 왜 안 지킵니까? 나만 좀 빨리 가자! 오늘 아침에도 내 앞에 있는 차, 두 인간이 빨간불을 그냥 지나갔어요. 내가 적어 놓았는데 사실은, 그래 보니까 나중에 성가대에 와서 앉아 있더라구요. 발표 할까 말까 막 갈등하다가 내가 발표를 안했습니다만 상처 받을까 봐 녜, 나만 빨리 가자! 나만 빨리 가자, 혹시 뭐 성가대 할려고 또, 성가대에 늦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죠. 어쨌든 우리가 질서를 파괴할 때 보면은 주로 이기심에 근거하고 있어요 그것이, 이기심에 근거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웃들에게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 안에 무례한 일들이 참 많았든 것 같에요. 성찬식을 할 때, 우리가 이미 성찬 공부를 했죠? 애찬식, 성찬식 할 때 뭐에요 응? 옛날 초대교회 성찬식은 떡을 많이 했으니까 집에서 안먹고 교회서 하는 성찬식, 요때가 기회다! 남이 먹기 전에 낼름 다 먹어 버렸어요.그래, 남이, 먹을 사람이 없어요. 예, 금년에 우리 추수 감사절 안 그랬대요. 잘 질서를 지켜가지고 적절하게 많이 남았다고 그럽니다. 적절하게, 많이 남지 않고 적절하게 남았다고, 그래서 적절하게 분배가 되었다고 그러는데, 이, 이 참 예의가 필요해요. 예절이 필요하다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그뿐만이 아니라, 뭐 여인들이 해방되고 나니까 너무 너무 좋아가지고 해방되는 것 까지는 좋은데, 해방된 아내가 된 것 까지는 좋은데, 오히려 또 남성들을 지배 한다든지, 또 예배에서 혼자 튄다든지 말이죠. 예배의 무질서, 14장에 보면은 또 나와요. 이런 현상들이 나왔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 여기에서 아가페 사랑의 진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은 뭐냐? 저는 한마디로 이 아가페적 사랑의 진수를 정의 한다면 그것은 뭐예요?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뭡니까?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 그것이 아가페 사랑의 진수이에요 또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여기서 성이나 분노라는 것은, 내게 대한 혹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담이나 비방, 네, 내게 대한 악담이나 비방을 듣고 성을 낸다든지, 혹은 또 남을 험보기 위해서, 헐뜯기 위해서 성을 내면서 말한다든지,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은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자기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고 남에게도 유익이 될 수가 없어요.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 하지 않습니다.사랑은 남에게서 선을 찾습니다. 끊임없이 선을 찾습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계속 찾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성은 뭐냐하면 상대방의 장점을 보고 상대방을 귀히 여기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행치 않습니다. 사랑은 결코 남들의 실수나 죄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들이 실수하는 것 또 남들이 범죄 속에 빠지는 것을 보면 불쌍히 여깁니다.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궁휼과 자비의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사랑은 무엇을 기뻐합니까? 반대로? 진리를 기뻐합니다. 진리를 기뻐합니다. 사랑은 최선의 것을 추구합니다. 사랑은 최고의 것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진리를 기뻐해요. 왜냐하면 진리는 최고의 것이니까. 진리는 최선의 것이니까. 사랑은 가짜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받아드리고 모든 것을 참습니다.이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믿습니다.하나님의 선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에 관한 덕을 세워요 덕을 세워요.이게 사랑의 덕성이에요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을 파괴 합니다. 파괴가 있는 곳에 미움이 있습니다. 그 뿌리에 미움이 있습니다.건설이 있고 세워지는 곳에 항상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은 세우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기 사랑의 덕성이 있어요.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세번째. 사랑에 영원성, 8절부터 13절까지 우리는 사랑의 영원성을 볼 수가 있어요. 자! 우리 8절, 8절, 고린도 전서 13장 8절, 9절, 10절, 석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8, 9, 10, 시작,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세 가지하고 비교했어요. 세가지, 세가지 뭡니까? 예언, 방언, 지식. 이것은 탁월한 은사들이에요 아주 놀라운 은사들입니다. 예언 방언 지식, 그러나 이 세가지에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영원한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에요. 특별히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여기서 폐하리라고 그랬는데 신학자들은 언제 폐하느냐, 이 아주 신랄한 논쟁을 벌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이 초대교회에 다 폐기 되었다! 지금 예언 방언은 다 가짜다! 뭐 이렇게 말하는 학자들도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온전한 것을 꼭 초대교회적인 것, 혹은 신약 정경에 완성, 이렇게 볼 수 있는 신학적인 근거는 매우 저는 취약 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온전한 것은 그리스도의 제림에 때, 역사의 완성의 때를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그렇다면 지금도 예언이나 방언이나 이런 은사들은 얼마든지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할찌라도 그것은 천국까지 가서 써 먹는 것은 아니에요. 천국 가서 예언이 필요 할까요? 천국? 천국계 가서, 잘 생각해봐요. 예언 필요할 것 같애요? 안 필요할 것 같애요? 녜, 뭐 다 아는데 그기 가면, 저절로 다 알게 될꺼에요. 네, 또 천국 가서 방언이 필요할까요?전 절대로 방언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주님과 직접 대화를 하고 그러는데 뭐 무슨 방언이 필요 하겠어요? 지식이 필요할까요?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그 상태 속에서 저는 지식도 천국에 가서는 필요 없을꺼라는 생각을 해요. 천국에 가서 설교가 필요할까요? 저는 천국에 가면을 실업자가 될 확신이 있습니다. 천국에는 틀림없이 설교가 필요가 없을 꺼에요. 그러나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일시적인 세상에서는 설교도 필요해요. 예언도 필요하고 방언도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것들이 도움이 될려면 언제나 사랑으로 해야 돼요 이미 말씀드린 것 처럼, 사랑이 없다면 이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죠. 아마도 사랑이 없이 이것들을 추구한다면 차라리 추구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어요. 못하는 것이 더 나아요.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는 것 가지고 상처를 주고, 아는 것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남들에게 파괴적인 역할을 한다면 차라리 훨씬 더 없는 것이 났습니다. 그러나 사랑, 그 사랑은 영원히 있어요. 천국에 가도 사랑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에 주인이신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영원한 거죠. 사랑은 그대로 있는거죠. 뿐만 아니라, 영원에 도달하기 까지, 그 영원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바로 이 사랑이 우리를 성숙시켜가는 거에요 사랑이, 사랑이 있을 때만 우리는 정말 성숙할 수가 있어요.

 

11절의 말씀이 그거죠? 다같이 읽겠습니다. 11절, 시작!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네, 어른이 되어서는 더 이상 유치한 일을 우리는 하기를 원하지 안습니다. 여기서 바로 어른스러운 것, 성숙한 것, 사랑이에요, 사랑. 사랑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것이죠. 사랑으로만 성숙한 자가 될 수가 있어요. 지금까지 묘사한 사랑의 모든 특성들, 그것은 성숙한 사람만이 지향할 수 있는 것들 입니다. 자,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고, 거기서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에 어린 아이들을 한번 대입시켜서 읽어 보세요. 어린아이는 오래 참고, 어린아이는 온유하며 어린아이는 투기 하지 않고,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말도 안되죠? 녜. 말도 안돼요. 어린아이의 특성은 오래 참지 못해요. 어린아이는 절대로 온유할 수 없어요. 방방 뛰어요. 어린아이들은 계속 시샘하고 투기하고 그래요. 쟤는 가졌는데 아빠, 나는 왜 안 줘? 계속 그래요. 그게 어린아이예요. 그러나 어른 되어서도 그러면 뭐에요? 에? 어른 아이에요 이게 어른 아이, 어른은 어른인데 아이, 그게 바로 성인아이에요. 아이를 극복하지 못한 모습이에요. 내 모습이, 그 유치한 모습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내 모습이에요.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하면 성숙한다 이 말이에요. 사랑하면 성숙하고 성숙한자는 오래 참을 수가 있어요. 성숙한 자는 온유할 수가 있어요. 성숙한자는, 성숙한 사람만이 질투하지 안을 수가 있어요. 남이 가진 것, 내가 없는데 남이 가진 것을 보면은, 형제여! 내게 없는 것을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또 형제를 통해서 나도 유익을 얻고 싶습니다 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이것이 성숙한 사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자꾸만 남이 가진 것 보면은 가짜일꺼야! 허허허, 그러고 말이지, 성숙한 사람만이 남을 축복할 수가 있습니다. 왜 웃나? 나는 웃는 이유를 모르겠네? 자!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믿습니까? 사랑만이 성숙 시킵니다. 믿습니까? 마지막까지 남을 수 있는 것 무얼까요? 사랑입니다. 최후에는 사랑만이 남아요

 

제가 데이빗 리빙스톤의 전기를 읽다가 아주 이 부분이 오래 전에 깊이 감동이 된 적이 있었어요. 데이빗 리빙스톤의 전기 작가가 마지막에 다 써놓았던 말이에요, 그 책에 마지막에다가 전기 작가가, 데이빗 리빙스톤의 일생을 좀 취재하고 싶어서 아프리카로 날라갔습니다. 그리고 리빙스톤을 접촉한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어요. 리빙스톤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리빙스톤이 어떤 설교를 했습니까? 리빙스톤이 어떤 일을 한 것이 제일 감동적이였습니까?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이 눈을 깜빡 깜빡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전기 작가의 마음을 감동 시켰데요 우리는 데이빗 리빙스톤이 무슨 설교를 했는지는 다 잊어버렸습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를 기억합니다. 데이빗 리빙스톤은 우리를 사랑 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에 남을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사랑을 위해서 그 영원한 사랑, 그 성숙한 사랑을 위해서 투자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 합니다. 이동원목사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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