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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자가 부르짖은즉! (암 3:1-4:3)

사자가 부르짖은즉! (암 3:1-4:3)

 

 

사람이 어떤 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런 말을 하게 된 동기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 와서 “아빠, 저, 있잖아요.”하고 말을 시작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라고 돌아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런 자식을 가만히 그냥 돌려보낼 부모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어서 시작한 말임에 틀림없고, 부모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꼭 들어보아야 속이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의 사적인 대화에서도 그렇지만, 무슨 공적인 발표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대통령이 무슨 담화문 같은 것을 발표하면, 뉴스 해설자들은 그 단어 하나하나까지 정밀하게 따지면서, ‘대통령이 과연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을까?’하고 그 의중을 분석하려 합니다. 사석에서는 가볍게 흘려버릴 수 있을만한 말이라도, 그처럼 중요한 인물이 공식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다 의미가 있는 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앞에 그와 같은 공식 선포를 내리셨습니다. 아모스 3장 1절과 2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온 족속을 쳐서 이르시기를 /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공언은 이스라엘을 ‘쳐서 이르시는’ 매서운 말씀이었고, ‘모든 죄악을 보응하리라’는 엄중한 경고였습니다. 나중에 8절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사자의 부르짖음’ 같은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술을 통하여 그처럼 크고도 무섭게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무슨 말씀을 하셨다면, 거기에는 사람이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 될 중대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그처럼 하나님께서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로 말씀하실 때 어떻게 반응하고 무엇을 깨달아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로 말씀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모스 3장 3절 이하 8절의 말씀에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아모스 선지자는 직접, 그리고 즉시 이어지는 두 개의 연속적 사건들을 짝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같은 길을 함께 가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아모스 선지자의 메시지가 일치됨을 가리킵니다. ‘사자가 먹이를 움켜잡았을 때 소리를 지르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무서운 말씀을 발하실 때에는 그러실만한 무슨 이유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한번 심심해서 질러 보는 소리가 아닌 것입니다. ‘창애 즉 그물을 치는 것은 새를 잡기 위해서이며, 그 그물에 새가 걸리게 되면 그물이 펄쩍펄쩍 뛰어 오르게 된다.’는 말은, 심판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슨 공의를 시행하기 위하여 어떤 징벌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 해당자가 심판을 받도록 그물을 마련해 두신 것이며,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는 그물인 것입니다. ‘성에서 비상 사이렌이 울리면 사람들이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라는 말은, 그런 ‘여호와의 시키신 재앙’이 임박하게 된 것을 선지자가 경고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심판을 작정하시면 그것을 시행하기 이전에 반드시 거치시는 과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고의 메시지를 받은 선지자는 아모스 3장 8절에 있는 대로 반드시 그 말씀을 ‘누구라도 예언하지 않을 수 없게(who can but prophesy?)’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로 말씀하실 때 당연히 따라와야 할 현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반응입니다. 다른 그 누구보다도 그 소리를 전달하는 선지자 자신이 먼저 그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먼저 겁이 나야 남에게도 경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원래 남조 유다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북조 이스라엘까지 가서 원정 선지자 활동을 했습니다. 당연히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네 사람도 아닌 남조 유다 사람, 그것도 원래 출신은 천한 ‘목자’였던 사람이 무슨 선지자입네 하면서 하는 말이니 더욱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싫은 소리’였으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모스가 그처럼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멀리까지 찾아가서 그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자신이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 벌벌 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자가 우는 소리를 직접 들어 보셨습니까? 비록 우리에 갇혀 있는 상태라 해도 그것이 사람을 노려보면서 크게 한번 포효하면 누구나 다 절로 움찔하면서 뒷걸음질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조금도 겁을 내지 않는 정말 이상한 목사가 있습니다. 지옥 영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 그런 까닭에 교인들에게도 지옥을 두려워하라고 설교도 절대로 하지 않는 목사입니다. 그 목사가 남보다 특별히 담대한 강심장의 소유자라서 그렇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목사도 아마 사자 우는 소리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꼭 마찬가지로 겁을 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의 입에서 지옥 경고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조금도 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먼저 두려워 할 줄 아는 목사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뿐 아니라 두려운 심판의 경고 역시 그대로 선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목사의 입에서는 사람이 듣고 기분 나빠할 말은 절대로 나오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목사의 입에서는 그저 사람에게 위로가 될 말, 기쁨이 될 말, 뭔가 복 방망이 같은 말만 나오면 아주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만약 목사가 ‘사람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목사의 입에서는 그런 기대와는 달리 전혀 이상한 말이 튀어 나옵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라는, 도무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말이 목사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상대방의 기분을 좀 생각한다면, 사람이 기본적인 예의라도 차릴 줄 안다면 절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말이, 이상하게도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 목사가 아주 기본 인격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그 말이 목사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면 도무지 할 수 없을 것 같은 말이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 말은 분명히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육성인 것입니다.

이처럼 목사 자신이 먼저 떨면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들 역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창경원에 가서 사자 소리 들은 아이가 “에이, 기분 나빠.”하는 것 봤습니까? “엄마, 무서워.”하고 당장 엄마 치맛자락으로 파고 들 것입니다.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는 기분 나빠 하라고 주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두려워하라고 들려주시는 소리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 선포도 겁내지 않는 기독교인이라면 그 사람이 평소에 하나님을 과연 얼마나 ‘경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자의 소리’로 부르짖으실 때에도 까딱도 않는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을 높이 받들고 섬기고 있겠습니까? 지옥에 대한 경고의 소리는 여러분 보고 그저 기분 나빠하라고 들려주시는 소리가 아니라 마땅히 두려워하라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소리입니다. 오늘날도 참된 주의 사자(messenger)의 입을 통하여 ‘사자(lion)가 부르짖는’ 소리가 선포될 때, 결코 그것을 사람의 말로 무심하게 흘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비로 베풀어 주시는 마지막 경고인 줄로 알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받을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로 말씀하실 때, 우리는 자신의 죄악을 돌이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그런 죄악들의 대표적인 것 세 가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바른 일 행할 줄 모르는 정치적인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모스 3장 9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에 아스돗의 궁들과 애굽 땅 궁들에 광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의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스돗의 궁들’ 즉 블레셋의 통치자들과 ‘애굽’의 통치자들을 증인으로 호출하시면서 ‘사마리아의 성중과 궁궐’ 즉 이스라엘의 정치가들이 자국 백성에게 저지르고 있는 ‘학대, 포학, 겁탈’을 한번 보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정치가들이 저지르는 짓들은 이방 나라의 불신자들이 보기에도 악한 것들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여전히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나쁜지 그 선악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어떻게 행하는 것이 바르고 의롭고 선한지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면에 대적을 일으켜서’ 즉 앗수르 제국을 들어 북조 이스라엘을 전면 공격하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런 심판을 당하게 될 때면 이스라엘은 ‘힘이 쇠하게 되어’ 적군의 침략 앞에 무력하게 패하고 약탈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백성을 못 살게 만드는 정치가들은 외적 앞에서 스스로 국력을 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처럼 무력한 백성을 마음대로 압제하는 정치가들일수록 외적의 침략 앞에서는 전혀 나라 지킬 힘을 못 쓰는 무력한 존재가 되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이처럼 기본적으로 무엇이 옳은지도 모르고 오직 악정만 저지르는 통치자들이 사마리아의 산들 위의 궁궐을 차지하고 ‘침상’과 ‘비단 방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때에는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건져냄을 입으리라(암 3:12)고 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목자는 자기가 지키던 양이 맹수에게 잡혀 가게 되면, 그 찢긴 사체의 일부라도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보여 주어야 변상의 책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 다리 조각이나 귀 조각이란 것은 아무 가치도 없는, 그저 그 당한 비참한 결과에 대한 증거일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중 심판을 피하고 남은 자가 있다 해도 그 현실은 그처럼 그저 껍질이나 뼈다귀 조각 조금 남은 형편이 될 것이었습니다.

국민을 리드해야 할 정치 지도자들이 ‘바른 일’에 대한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그 대신 아직도 고질적인 정경 유착과 부정부패만을 일삼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정말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해 놓았을 때에는 나라를 바로 이끌어 갈 리더쉽을 발휘해 달라고 뽑은 것이지, 무슨 ‘공론 중재인’ 노릇 하라고 뽑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는 ‘몇 백억 부정’이란 기사가 나와도 별로 놀라지도 않을 만큼 국민들은 단련(?)되어 있지만, 사실 그런 액수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나라가 망하면 자기네 자리도 없어질 것을 몰라서 하는 일입니까, 아니면 그런 때 오기 전에 내 살 길만 미리 다 챙겨 놓자는 심보입니까? 이 나라가 민주화되었다 하면서도 그 내실은 어디까지 썩어 들어가고 있는지 참으로 암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상 숭배에 빠지는 종교적인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모스 3장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 /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꺽어 땅에 떨어뜨리고 /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 결단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벧엘의 단’이란, 북조의 여로보암 왕이 남조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항해서 만든 것으로, 단은 단이지만 하나님이 아니라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던 제단이었습니다. ‘단의 뿔’은 그 제단의 네 귀퉁이에 붙어 있는 것인데, 제물을 바칠 때 짐승의 사지를 거기에다 잡아매었었습니다. 원래 진짜 제단에서는 누구든지 그 뿔만 붙잡으면 아무도 그 사람을 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서, 바로 절대적 구원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벧엘의 단의 뿔들은 결코 그런 구원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었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꺽어 땅에 떨어뜨릴’ 저주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벧엘의 단’은 ‘예루살렘의 단’과 모양은 비슷하게 만들어졌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단은 하나님 아닌 우상 신을 섬기는 단이었고 구원 능력이 전혀 없는 단이었습니다.

종교가 다 비슷하게 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종교는 오직 ‘벧엘의 단’일 뿐입니다. 아무리 비슷한 기독교처럼 보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능력’이 없는 기독교는 마지막 날 오직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상 종교를 심판하시면서 ‘겨울 궁과 여름 궁’을 함께 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의 정치가들이 바로 그 같은 벧엘의 단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돌려놓음으로써 자기네들 개인의 사욕과 특권을 마음껏 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자기네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백성의 신앙을 타락, 배교시켰던 자들이었습니다.

원래 개혁주의 교회는 ‘국교 분리’, 즉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어야 하는 원칙을 철저히 지킵니다. 하지만 사이비 종교나 유사 기독교는 항상 정권과 결탁하기 마련이고, 세상의 독재자들은 항상 그런 것들을 자기 어용 종교로 이용하는 법입니다. 지금 북한의 공산당이 세워 놓은, 그리고 남한의 정치 목사들이 빈번하게 교류하고 있는 무슨 ‘조선기독교연맹’인지 뭔지 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가짜 기독교입니다. 중국 공산당이 인정하는 ‘삼자 교회’도 역시 어용 교회이고 진짜 교회는 여전히 지하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독교라는 이름, 교회라는 간판 밑에서 살았으니까 하나님께서도 좀 봐 주시겠지,’ ‘어쨌든 아무 종교라도 가지고 착하게 살려고 했으니까 좀 낫겠지.’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시는 날’에 그렇게 ‘봐’ 주실 것으로 생각하면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런 이단 종교의 단들을 어김없이 ‘벌하고’ 그런 뿔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꺾어 버릴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미 사자처럼 부르짖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물질과 향락 추구의 윤리적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아모스 4장 1절로부터 3절에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산’은 요단 동편 길르앗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비옥한 초장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산 암소들’이란 거기서 마음껏 풀을 뜯어 먹고 살찐 암소란 뜻인데,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타락한 상류 사회의 귀부인들을 가리킨 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통치자들만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남편들을 내조(?)한 아내들 역시 꼭 같이 저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빈자와 약자를 압제하더라도 일단 권력부터 잡고 돈이나 끌어 모으자고 남편들을 부추기는 아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권력과 돈을 자기네들 ‘술’ 마시고 호화 사치 생활하는 데에 갖다 부었던 것입니다.

그런 아내들과 그런 아내를 가졌던 남편들에게는 반드시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셨습니다. 포로들을 ‘갈고리로 꿰어 끌어가는’ 광경은 앗수르 제국의 비석 따위에 실제로 나타납니다. 이들은 사마리아의 무너진 성벽 틈으로 그렇게 하나씩 끌려 나가서 ‘하르몬’에 던짐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산’에서 호화롭게 사치스럽게 살던 그들이 적지 ‘다메섹’에서 비참한 꼴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물질에 대한 욕심, 세상 향락에 대한 동경은 항상 자기 파멸을 최고 속도로 빨리 부르는 망조 중의 망조입니다.

부부 사이는 아무래도 서로 조르고 부추기는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두고 하느냐가 진짜 문제입니다. “여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돈부터 많이 벌어 와요.”라고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는 말과, “여보,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 잘 믿고 살아야지요.”라고 남편을 볶는 말은 아주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재물 축적의 끝이 행복이라고, 모을 만큼 다 모으면 그때부터는 호화 사치 누리면서 여생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세상 향락을 인생의 최고 목적으로 삼고 그것 누리겠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모으는 일에만 혈안이 된 인생의 끝은, 그저 그 돈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결국 ‘자기를 찌르는’ 심판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죄만 계속 쌓으면서 살면 반드시 심판 받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두고 맹세’하신 사실입니다. 신자의 구원도 그렇지만 불신자의 심판도 꼭 같이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당 구원이 있으면 지옥 심판도 틀림없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쪽만 지키고 한쪽은 공갈로만 끝내실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죄와 심판, 이것은 도무지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확실한 인과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로 경고하실 때마다, 혹시 나 자신에게 숨겨 놓은 죄가 남아 있지 않은지, 이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 앞에 지금 저지르고 있는 죄가 없는지 다시 한번 살피면서 겸손히 회개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뭐라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로 말씀하실 때, 그 이유를 하나님 쪽에서 찾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저런 식으로 겁주는 말씀을 하시나?’라고, ‘왜 하나님이 하나님답지 않게 저렇게 흥분하시나?’라고, 하나님 쪽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상대방을 화나게 할 일을 자기가 저질러 놓고서는 ‘저 사람, 왜 저리 펄펄 뛰고 난리야?’라고 오히려 상대방 약을 더 올리는 사람처럼, 감히 하나님을 조롱하려는 자들입니다. 절대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뻔뻔스럽게 비비꼬는 무례한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로 말씀하실 때, 그 이유는 반드시 내 쪽에서 하나님을 노엽게 한 것이 있는 줄로 겸손하게 깨닫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 이것은 사사로운 객담이나 동네 소문으로 떠도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 우주의 주권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 인류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한마디 한마디에 천근같은 무게와 권위가 있는 말씀이며, 결코 가볍게 듣고 흘려버려도 될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사자가 부르짖는 소리’처럼 오늘도 우리에게 엄중히 들려주시는 이 경고의 예언을 마땅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듣고 자신의 죄를 찾아 회개함으로써, 그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는 틀림없이 용서받고 구원받는 반열에 함께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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