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모하는 미래의 조국
갈라디아서 5:1, 로마서 14:17
저는 우리 민족사에 가장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기여를 남긴 인물이 있다면 바로 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분이 누구인지 알아 맞추어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한분도 빠짐없이 이 분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빨리 이 분을 인지하느냐가 이 퀴즈의 관건입니다. 그래서 이 분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들을 먼저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분은 한마디로 비저나리 지도자입니다. 이 분은 1300년대 말 이 땅에서 태어나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분입니다. 이 분은 로얄 패밀리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이 분의 어렸을 적 별명은 책벌레입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 평생에 안질로 고생했던 분입니다. 이분은 지도자로서 드물게 정치뿐만이 아닌 문화, 경제, 과학의 영역까지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지도자이었습니다. 이 분은 이런 여러 영역의 진보를 당시 지도자들에게는 파격이라고 할 수 있는 토론이라는 방식으로 발전시켰고 연구팀을 만들어 한 사람의 지혜가 아닌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는 협력적 리더십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스태프들과 무려 1,898회에 걸친 토론으로 생각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그는 한국의 고전 음악을 정리하고 발전시켰으며, 당시 최첨단의 과학 기구들을 발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국민 개개인이 하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지도자의 책임은 백성들을 잘 섬기고 돌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최근에 많이 읽혀진 책인 “코리아-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를 쓴 배 기찬은 그를 가르쳐 “두 발은 코리아에 두고 두 눈은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문명을 바라보며 살아있는 하늘 백성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코리아를 태양계의 지구로 만든 지도자”라고 평합니다. 그는 이 나라의 백성들이 잘 읽기 어려워하는 한문대신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언어인 한글-훈민정음을 펼쳐낸 지도자입니다. 이분이 바로 잘 아시는 킹 세종 곧 세종 대왕이십니다.]
“코리아-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의 저자 배 기찬은 우리나라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코리아의 이상을 킹 세종이 추구한 나라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줄곧 킹 세종이 추구한 궁극적인 이상의 나라,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사모해야 할 완벽한 모델의 나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우리의 인생의 핵심가치로 수용한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그 나라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다시 한번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사모할 미래의 조국의 모습을 그려 보고 그 나라의 실현을 위해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사모할 미래의 조국은 어떤 나라이어야 할까요?
1.자유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자유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의 근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이시며 그분은 그분을 닮은 자유로운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 선물로 인간이 죄 짓고 타락할 것을 아시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지으신 분입니다. 만일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닮은 숭고한 존재일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유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근본적 가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인간이 죄를 범하고 결과적으로 죄의 노예가 되어 그의 자유가 왜곡되고 더럽혀졌을 때 우리를 다시 자유롭게 하시고자 그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자유롭게 하신 분이십니다. 갈라디아 본문이 말씀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천명합니다. 흔히 이 본문을 가르쳐 그리스도인의 마그나 카르타 곧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우리 민족이 과거 종의 멍에를 벗고자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여 일어섰던 이유도 우리 백성의 자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개개인의 참된 존재의 자유를 위해서 이었고, 해방 후 다시 6.25 남침의 공산화에 기도에 맞서 수많은 우리의 선배들 그리고 유엔 참전 용사들까지 이 땅에서 피를 흘린 이유도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사모할 미래의 조국은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가 존중되고 실현되는 나라이어야 합니다. 좀처럼 정치적 의제에 발언을 하지 않던 제가 지난 사학법 파동에서 사학법 개정 반대편에 개인적으로 서명을 한바가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일부 사학의 부패를 염려하는 마음이 동일하게 있었지만, 그러나 부패를 빌미로 사학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가치는 어떤 다른 가치보다 우선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은 부패를 단죄하기 위해서 자유를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니라, 더 중요한 자유를 위해서 타락을 허용하시고, 그리고 자유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조국은 자유의 마당에서 이상의 꽃을 피우고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지게 하는 나라이어야 합니다.
2.정의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롬14:17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설명하며 맨 처음 의를 강조합니다. 그 나라는 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시행하려 할 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의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일찍 철학자 파스칼이 “피레네 산맥의 이 쪽에서의 정의가 저쪽에서는 불의가 된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바로 이런 정의의 주관성 혹은 정의의 딜레마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의의 드러남이 곧 하나님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본질은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이 공의롭게 시행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선물하시며 신4:8에서 이렇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따라서 이상적인 나라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혹은 거기에 근접하는 법을 세우고 제정된 법과 질서를 지키는 사회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사회가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자가 법에 따라 동등하게 취급되고 동등하게 존중되는 사회인 것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수량의 평등이 아닌 동등한 기회와 노력에 따른 상급의 공정성이 보장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종들이 다 꼭 같은 달란트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심판은 기회 제공과 노력의 보상의 관점에서 보면 차별 없이 동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법이 하나님의 의의 반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롬13:10)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성경이 그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냉혹한 정의가 실현되는 법정의 모습이 아니라, 공의와 사랑이 함께 어우러져 숨쉬는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똑 같은 수량을 나누어 받는 나라는 아니지만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돌보고, 배운 자가 배우지 못한 자를 이끌어 섬기고,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자원해서 짊어지고, 힘 있는 자가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힘없는 자들을 섬겨주는 나라인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는 동일한 수량의 재정을 관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의 필요를 사랑으로 공급하고 그리고 어느 날 부모가 반대로 허약해질 때 자식의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으로 정의가 시행되는 가정의 그림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정의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에 가까운 나라가 아니라, 법의 시행이 정의로우면서도 사랑과 자비가 넘쳐나는 자유 민주주의 이상에 더 가까운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래의 우리 조국이 이런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3.평화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며 의와 함께 가장 많이 강조하는 가치는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평화라는 개념의 가장 소극적인 정의는 전쟁의 종식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싸움이 없는 나라를 소망합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그 나라(사2:4)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부터 사용된 평화 곧 샬롬은 그보다는 훨씬 더 깊고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샬롬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총체적 건강의 회복 곧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까지 임하는 복지의 개념을 갖습니다. 총체적 웰빙을 뜻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성경적 가치가 투영된 근사한 오늘의 개념을 찾는 다면 선진사회와 복지 사회를 아우르는 개념이 아닐까 합니다.
지나간 20세기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은 이런 사회의 이상을 너무나 쉽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간과한 가장 중요한 오해는 이런 사회의 실현이 인간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복지 사회가 아닌 통제 사회나 독재 사회의 비극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모한 조국의 미래는 그런 나라는 아닙니다.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사로 복수가 아닌 용서를 선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사로 나태한 무위가 아닌 근면한 노동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사로 낭비가 아닌 저축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사로 이기적인 소유의 삶이 아닌 이타적 나눔의 삶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사로 이웃에 대한 착취가 아닌 섬김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사로 증오가 아닌 사랑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기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 인생의 최고의 덕목으로 선택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선택의 결과로 누리는 삶을 우리는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상에 근접한 사회를 우리는 ‘샬롬 공동체’ 혹은 복지 사회라고 일컬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의 조국은 이런 평화의 나라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4.기쁨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다시 롬14:17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희락의 나라 곧 기쁨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단순히 우리가 많이 먹고 마실 수 있음에서 오는 것이 아닌 성령의 다스림의 결과입니다. 이 말을 보다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표현으로 묘사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문화가 꽃피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떡을 물론 필요로 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정신적인 풍요함 곧 영적 행복을 추구하는 문화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묘사하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흥겨운 놀이가 있고, 잔치가 있고, 노래와 춤이 있고, 예배가 있고, 음악이 있습니다. 이것을 포괄하는 단어가 기쁨이고 좀더 고상하게 말하면 문화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미래의 조국이 이런 기쁨의 나라 혹은 문화의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오늘의 설교 서두에 소개한 배 기찬씨가 지은 “코리아-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라는 책을 우리나라 최고 지도자가 추천한 책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 책의 모든 관점을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저는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고 더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나눌 수가 있었음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제시한 코리아의 비전은 이의를 달만한 여지가 없어 보였고 제발 이 책을 추천하신 분이 앞으로 남은 임기동안 이 책의 비전대로만 우리나라를 이끌어 달라고 기도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이 책의 423p에 기록된 그의 문화 한국의 비전을 그대로 읽어 보겠습니다. “이 나라는 문화 수준이 높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 코리아는 이 점에서 가장 인간적인 나라이자 가장 매력적인 나라이며 전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코리아라는 말이 고려 즉 높을 ‘高’와 아름다울 ‘麗’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코리아는 명칭 그대로 과학 기술과 생활 문화의 수준이 높고 나라가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 '언덕위의 빛나는 성'처럼 높고 매력적인 나라가 바로 코리아의 모습이다. 코리아의 이런 모습은 우리 역사로 치면 세종 시대의 모습이다. 세종은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과학 기술과 문화 수준을 이루었고, 가장 민본적이고 인간적인 체제를 만들었다. 창의성이 넘쳤으며 경제는 발전했고 주변국들의 모범이 되는 코리아의 문명을 꽃피웠다.” 여러분! 아-멘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배 기찬씨가 문화 한국의 미래를 묘사하며 사용한 ‘언덕위의 성’이란 표현은 사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사용하신 “언덕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는 대목에서 빌려온 것이고, 유명한 청교도 존 윈스럽(John Winthrop)이 1630년 대서양을 횡단하며 신 대륙을 찾아가던 중 선상 설교를 통해 청교도들이 건설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이상을 피력한 메시지와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도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의 제일성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결론적으로 배 기찬 씨의 글에 한 마디만 더 추가할까요? 세종 대왕이 추구한 나라의 비전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꼭~ 한 마디만 더 추가할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가 사모하고 기도해야 할 우리 조국의 미래라고 말입니다. 아-멘 ...이동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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