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겔15:2,요15:8-11
금년도 한국 교회 특히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다 준 사건이 있었다면 지난 5월에 발표된 2005년 인구 주택 총 조사 결과였습니다. 이 조사 중 1995년부터 2005년까지의 지난 10년간의 종교 인구 동향의 변동 상황이 교회 지도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이 땅에서 천주교 인구는 219만 명이 증가하여 74,4%의 증가율을 보였고, 불교 인구도 40만 5천명이 증가하여 3,9%의 증가율을 보였는데, 유독 개신교만은 14만 4천명이 감소하여 1,6%의 감소율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평소1,200만 혹은 1,300만을 자랑하던 개신교 인구는 사실상 860만 명에 불과하다는 통계 수치가 나온 것입니다. 이 수치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고 실제로 이 수치가 발표된 후 그 원인을 분석하는 여러 보고서가 나오고 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한국 개신교인들의 삶의 모습이 더 이상 매력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 믿는 분들의 관점에서 소위 개신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들과 달라 보이는 면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차별화에 실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이웃들이 교회를 찾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된 상황에서 그 원인을 분석하는 가운데 비슷한 정황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자부심을 지니고 이스라엘의 심장인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주의 백성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이방인들과 비교하여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 백성과 그 도시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루살렘 백성들의 상태를 주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계셨습니다. 자, 이 백성들을 향한 에스겔 선지자의 교훈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두 가지 교훈 혹은 우리가 할일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우리의 실상을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상이 무엇입니까? 다시 에스겔 본문 2절을 읽어 보십시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사랑하는 여러분,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비교하여 다른 것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포도나무는 큰 재목들을 생산하는 나무가 못 됩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건축용이나 가구 제작용이 못됩니다. 포도나무는 관상용으로도 크게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포도나무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열매입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하는 나무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 땅에 심으신 하나님의 기대였습니다. 호세아10:1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런데 그 이스라엘, 곧 주의 백성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이유를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이었습니다. 그것이 혹시 오늘을 사는 아니 금년 한해를 결산하는 우리의 실상은 아닌지요?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가 묻습니다.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우리가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에 대한 진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에스겔15:6에서 그들은 이런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현실에 대한 예언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수풀가운데에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같이 할지라”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를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유일한 용도는 불쏘시개 땔감 밖에는 효용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예언을 통해 다가오는 심판의 실상을 직면하는 일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도, 주일이면 교회당에 나와 예배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불신자들보다 정말 무슨 나은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우리에게도 불에 던짐을 당해야 하는 그런 심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떤 분은 “목사님, 그런 심판과 재앙의 레슨은 구약에나 존재하는 레슨이지, 새 언약(신약)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제발 그런 교훈만은 말아주십시오”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에스겔의 본문과 정확하게 동일한 교훈을 담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약 성경 요한15:2에서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를 어떻게 하시겠다고요? 제거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거한다’는 말이 우리에 대한 그분의 즉각적 포기나 버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여기서 ‘제거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가지치기’(pruning)라는 뜻입니다. 먼저 그는 가지를 다듬고 깨끗하게 하심으로 열매를 맺을 만한 나무가 될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가지치기’가 성도의 삶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징계인 것입니다. 가지치기는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기회인 것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고통이 많으셨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가지치기를 하신 것은 아닌가를 물으실 때입니다. 왜 고난이 필요했을까요? 만일 우리에게 전혀 고난이 없다면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삶을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기자가 시119:71에서 고백한 바를 기억하십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같은 시119:67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성도는 고통 중에도 감사할 수 있고 고통 중에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경고를 주실 때에는 약 3년이 경과되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믿고 3년이면 주께서는 열매를 기대하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돌이켜 우리의 인생 나무가 맺어야 할 열매의 이상을 묵상하십시다.
2. 우리의 이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상 곧 비전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열매를 맺고 사는 인생의 모습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찾기 위해 다시 요한복음 15장을 열고자 합니다. 다른 어떤 성경의 대목보다 주님은 여기에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 인생의 이상을 분명하게 그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열매는 무엇보다 우리의 인격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께서 두드러지게 강조하신 열매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사랑이고, 둘째가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기대하신 열매 맺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다른 무엇보다 사랑하며 살고, 기뻐하며 사는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는 열매하면 전도의 열매부터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전도의 열매를 먼저 강조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사랑과 기쁨의 사람됨을 우선적으로 강조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에게 참 사랑과 참 기쁨의 삶의 모습이 없이 우리의 전도는 진정한 결과를 산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확하게 한국 개신교 성도들이 전도를 많이 하면서도 열매 맺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이 매력이 없는 겁니다. 그들에게서 사랑의 냄새도 기쁨의 향기도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 다시 요한15장 본문으로 돌아오십시다. 여기 주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열매 맺음을 가르치십니까? 먼저 그분은 8절에서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우리가 참된 그의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요15:9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을 기대하십니까? 요15:13을 읽겠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우리가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이런 사랑의 열매와 함께 본문에서 또 주께서 강조하신 열매는 무엇입니까? 요한15:11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에게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안에 진실로 주님의 기쁨이 거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기쁨을 모르고 사는 세상을 향한 얼마나 큰 변화의 증거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이런 열매가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까? 이런 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자주 만나는 사람 중에 누군가가 당신에게 “뭐가 그렇게 기쁘십니까? 선생님은 우리가 갖지 못한 비밀을 갖고 사시는 분 같군요”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런 열매들은 예수를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들안에서 맺어지는 자연스런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갈5:22에서 성령의 열매를 가르치실 때 정확하게 열매의 순서가 주님이 요한복음 15장에서 가르치신 순서와 일치하는 것을 보십니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희락이 기쁨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서 말한 기쁨은 단지 세상적으로 기뻐하는 기쁨이 아닌 성령의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충만을 경험할 때 비로소 주어지는 하늘의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사랑, 이런 기쁨이 충만하다면 어떻게 우리가 매력 없는 존재가 되겠습니까?
미국 역사상 가장 걸출한 판사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s Jr.)는 한때 그의 명석한 위트, 좋은 신앙, 설득력있는 화술로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번은 혹시 당신은 설교자나 성직자가 되라는 권면을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많이 받았지요” “그런데 왜 안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장의사가 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목사님들의 표정이 다 장의사 같았습니다.” 혹시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이유가 혹시 장의사 같은 우리의 이미지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런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를 갖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나무를 통해 영양과 수분을 공급받음으로 가지는 절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 나무에 붙어 있어 나무의 능력을 공급받는 상태를 가르쳐 예수님은 “거한다”는 단어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가지가 나무 안에 잘 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거한다’는 말이 11번이나 등장합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의 제자들에게“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안에 거하는 단순한 비결이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교통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새해가 열매 맺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씀과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이것은 전도보다도, 새해를 향한 어떤 새로운 계획보다도, 어떤 위대한 결심보다도 더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요한15:7의 말씀이 그려주는 이런 열매 맺는 삶의 비전, 그 이상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일단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면 주안에 거하는 자, 주께 붙어있는 자가 됩니다. 그 다음은 말씀에 순종하고 지속적인 기도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에 빠지고 결합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랑의 열매로 자녀가 태어나지 않습니까? 영적인 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성도의 자연스러운 교제와 연합의 결과가 바로 영적인 열매, 주님을 닮은 인격의 탄생인 것입니다. 진정 열매 맺는 삶을 사모하십니까? 그러면 이제라도 주님과의 교제의 자리,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이 년 말 부산한 만남들과 지친 마음에 쫓겨 다니는 대신 주님 앞에 엎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의 은혜, 성령의 임재를 갈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유럽의 한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한때는 성령 충만했으나 사업과 씨름하다가 제대로 신앙생활도 못하고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수도하고 있는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수도사 친구를 만나 자기 사업을 운영하며 당하고 있는 심적 고통을 고백하며 어떻게 하면 좋을 가를 물었다고 합니다. 수도사는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마른 땅에서 죽듯이 자네도 세상에 뒤엉키면 파멸케 되어있네. 고기가 물로 돌아가야 하듯 자네도 다시 성령께 돌아가야 하네” 그러자 사업가 친구가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자네처럼 나도 사업을 그만두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수도사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아닐세. 사업은 그대로 불들고 있고 이젠 자네 마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게. 거기서 자네는 자네의 인생의 주인을 새롭게 만나 그분과 사업만이 아닌 자네 인생 전부를 그분과 의논해 보게” 지금 바로 우리가 아니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과 다르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지금 당장 당신의 마음의 지성소로 들어가 거기 당신을 기다리는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이동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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