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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편 10-19절)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편 10-19절)

 

기독신자의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새롭게 하소서"라는 유명한 표어는 바로 오늘 본문 10절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다윗의 기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구절 속에서 "정직한 영"은 바로 "정한 마음"과 같은 것이고 또 "새롭게 하소서"란 말 역시 "창조하시고"와 같은 뜻에서 병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편 51편 제일 앞의 괄호 안에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라고 그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책망 받게 되었을 때 다윗은 그제야 자기의 심령이 어느새 '죄를 죄인 줄로 깨닫지 못할 만큼' 둔감해져 있었으며 '지은 죄를 곧 하나님께 회개할 줄 아는 반사신경'이 사라져 버린 것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제 심령이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습니까? 제 심령이 얼마나 더럽고 어둡기에 간음과 살인이라는 엄청난 악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죄라고 깨닫지도 못할 정도로 둔감하게 악화되어 있었습니까? 하나님, 저의 심령을 정하고 정직한 상태로 새롭게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큰 범죄는 물론이고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것을 민감하게 알아채고 당장 회개할 수 있는 지극히 순전한 심령을 새롭게 창조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11절과 12절에 계속해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원하는 심령"(willing spirit)이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움직일 줄 아는 심령'을 뜻하는데, 특히 본문의 문맥에서는 '기꺼이, 속히 회개할 줄 아는 심령'을 가리킵니다.
  즉 그에게 회개하는 심령이 돌아오고 그를 쫓아내지 아니하실 주님으로부터 용서받고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그러하면"이라는 말로 이하의 구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10절부터 12절까지에서 간구한 대로 '새롭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되면 그 다음에 나타나게 될 구체적인 변화의 삶이 어떤 것들이 될지를 보여주는 내용이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2008년의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누구나 다 무언가 새롭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을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은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으로써 죄 사함을 입은 성도에게 나타나게 되는 새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함으로써 새해의 결단으로 삼고자 합니다.

 

  1. 죄 사함을 입은 성도는 '전도의 힘'을 발휘하는 새로운 변화를 나타내게 됩니다.

 

  본문 13절에 "13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그 이전에도 분명히 전도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밧세바와 동침하는 죄를 저지른 후에는 다른 죄인들에게 전도할 면목이 설 수 없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기가 살인하고 간음했는데 어떻게 다른 살인자나 간음자를 향하여 "당신은 죄인이오."라고 일깨워 주면서 회개하라고 말할 염치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 자신이 일단 회개하고 용서를 받게 된 후에는 상황이 전혀 달라질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의 도" 즉 무엇이 죄이고 왜 회개해야 하며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도를 이제는 당당하게 다른 "범죄자"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론적'인 전도가 아니라 '체험적'인 전도가 되는 까닭에 또한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힘 있는 전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죄 용서받는 것을 자신이 실제로 체험하게 된 사람은 그 충만한 기쁨으로 인하여 그 놀라운 복음의 도를 남에게 전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불가항력적인 충동을 받게 됩니다.
  한번이라도 스스로 죄 용서의 감격을 맛 본 사람은 만나는 사람마다, 아니 찾아다니면서까지 전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본인이 직접 체험한 것은 누군가 남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입이 근질거려서 견뎌낼 수가 없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 가 있을 때 어느 날 아르바이트 하러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앰뷸런스에 실려서 병원에 가보니 다행히 중상은 없었는데, 단 한 가지, 제 왼쪽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의사는 그저 약간 삐었을 뿐이니 시간 지나면 나을 것이라고 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는데, 한 주일이 지나도 조금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다시 병원에 갔더니 제 다리를 두드려 보고 흔들어 보면서 "아프냐?"고 묻기에 "아프다."고 대답했더니, 한 주일 지내보고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매주 병원을 찾아가면서 어언 한 달을 넘기게 되었는데도 다리는 여전히 구부러지지 않고 '이러다 영영 불구가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겁이 덜컥 솟아올랐습니다.

  그때 같은 교회에서 사역하던 선배 전도사님 한 분이 제게 침을 한 번 맞아 보라고 권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는 한방의 침술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침 끝에다가 무슨 약이라도 발라서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어떤 효과가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그저 맨 침만 가지고 사람 살갗 여기저기를 찌르는 것인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치료를 할 수 있다는 말인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밑져야 본전이다.'라고 그야말로 '물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한의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무릎 주변에 한 이십 대 쯤 되는 침들을 맞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세상에, 한 30분 지나니까 지난 한 달 내내 꿈쩍도 않던 그 무릎이 거짓말처럼 90도까지 구부러지는 것이었습니다.
  한의사 선생님 말대로 한 주일 후에 다시 가서 한 번 더 침을 맞고 돌아왔더니 이제는 그 무릎이 180도까지 완전히 접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저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걸핏하면 "침 맞아 보세요."라고 '침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한 번 맞아보고 그 맛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가 직접 효능을 겪어본 일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에게나 절로 권유하는 말이 나오게 되어 있으며 또한 확신을 가지고 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 역시 꼭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죄 용서함의 맛을 '맞아 보아서 아는' 사람은, 만나는 다른 죄인마다 그 죄 사함을 얻게 해 주는 '주의 도'를 가르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체험적으로 전하는 성도를 통해 전도 받을 때, 죄인들은 주께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 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이 작정한 그날부터 평안한 맘 늘 있어서 이 복된 말 전함으로 내 할 본분 삼았도다" - 주님께서 내 죄 다 씻어 주셨다는 이 감격 때문에 이제부터는 바로 그 복음 전할 것을 자연히 내 할 본분으로 삼게 되는 것, '정한 마음'을 통하여 죄 용서 받은 성도만 할 수 있는 이런 전도의 능력을 새해에는 꼭 발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죄를 용서 받은 성도는 '찬송의 기쁨'을 맛보는 새로운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원래 노래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목동 시절 때부터 수금을 타며 그 심령에 감동되는 영감으로 찬송을 부를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기 죄를 감추고 있는 기간 동안, 그는 옛날처럼 찬송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의 혀는 더 이상 "주의 의를 높이는" 가사를 내지 못했고 그의 "입술은 찬송으로 열릴"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다윗이 하루아침에 음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악기 다루는 재주나 노래 부르는 목청이야 옛날과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심령이 죄 가운데 사로잡히고 어두워짐으로써 찬송의 제목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의 가장 기쁜 찬송의 제목은 구원의 은총인데 죄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바로 이것을 상실했으니 찬송을 부르려 해야 부를 제목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셔서 이전처럼 "주의 의"를, 죄인을 정죄하시는 의가 아니라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실로 신기한 의를 높이 노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죄 용서함 받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찬송의 제목이 주어졌습니까?
  실로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영감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201장 찬송을 작사 작곡한 필립 블리스(Philip Bliss)라는 성도도 바로 그와 같은 감격을 그 심령 속 깊이 체험한 성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찬송의 후렴은 "할렐루야 할렐루야"라는 가사로 시작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 - 정말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만 믿고" "예수의 도우심 믿고" 살아가니 '할렐루야'하지 않을 수 없고, "주의 보좌에 천사들이 둘러서서" "예언자들과 왕들이 반열대로 서서" '할렐루야'로 찬양하니 이 지상교회에서도 화답하여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 모두 다 그 반열대로 뒤따르며" 천당 갈 것을 생각하니 실로 기쁨에 겨운 '할렐루야'가 절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블리스 성도에게는 정말 '할렐루야'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더 큰, 더욱 뜨거운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는 후렴에서 "할렐루야 할렐루야"라고 할 때에는 가장 높은 음정에다가 힘찬 박자로 불렀습니다.
  '할렐루야'라는 의미 그대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가사는 당연히 그렇게 밖에 달리 부를 길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자신이 그런 기쁜 할렐루야의 가사로 찬양할 수 있게 된 이유를 생각하게 되자 차츰 목이 메었는지,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 - 여기에 가서는 점점 음도 낮아지고 박자도 차분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찬송을 작곡 작사하신 그 성도에게 직접 물어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가 이 찬송을 지을 때 그의 심령에 느껴졌던 감동이 바로 그러했기에 이 찬송의 후렴이 이런 곡조가 되지 않았나 하고 제 혼자서 짐작해 보는 것입니다.

  그는 그처럼 감격에 넘치는 가사를 도무지 한번만 부르고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 절마다 그 가사를 반복해서 다섯 번 부르려고 일부러 후렴 가사에 넣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 후렴마저 두 번 같은 가사를 반복하여 부르게 함으로써 도합 10번을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라고 부르도록 찬송을 지었던 것입니다.

  죄 용서받음을 맛보아 안 성도에게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찬송의 제목은 다시 있을 수 없습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 정말 찬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직한 영'이 새롭게 되어 죄 용서함을 받게 된 성도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훌륭한 지휘자나 연주자나 성악가라 할지라도 결코 맛볼 수 없는 이런 감격스러운 찬송의 기쁨을 꼭 새롭게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속죄함을 얻은 성도는 '예배의 감격'을 뜨겁게 체험하는 새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본문 16절로 19절에 "16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밧세바와 범죄한 이후에도 다윗은 여전히 성소에서 드리는 정기예배에는 참석했겠지만, 그것이 결코 하나님께 상달되지는 못하는 형식적 제사였던 것을 다윗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제사에는 결정적인 제물 바로 "상한 심령" 즉 자기 죄를 통회자복하는 심령의 제물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소니 양이니 해서 바쳐도 이 필수적인 제물이 결핍되어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고""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다윗 자신이 자기 양심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곧 진정으로 회개하는 심령이 제물로 드려졌을 때에는 모든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한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아" 주시는 "은택" 즉 다윗이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직무에 이전처럼 축복해 주실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다윗의 상한 심령을 결코 "멸시치 아니하시고" 그가 드리는 제사를 "의로운 제사""온전한 번제"로 인정해 주시면서 이제부터는 다윗이 드리는 "수소의 번제"도 이전과는 달리 "기뻐하시면서" 받으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상한 심령'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오히려 귀찮아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신 말씀에 빗나간 죄, 그 율례의 기준에 벗어난 죄를 지은 인생이 그 추한 모습으로 내어놓고 당신 앞에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오히려 '멸시'해야 마땅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는 그처럼 지저분한 모습으로 상해 있고 그처럼 더러운 모습으로 애통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결코 멸시치 아니하시는 정말 놀랍고도 신기하기 짝이 없는 성품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1절에 기록된 "주의 인자""주의 많은 자비"의 성품인 것입니다.

  군사정권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대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사형 날짜만 남은 감옥 안에서도 밥만은 삼 세끼 꼬박꼬박 잘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통령의 특사를 받아 형이 면제되고 출옥할 날짜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날부터 그 학생은 밥을 먹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기뻤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도 자기의 밥맛을 빼앗아가지는 못했는데, 삶의 기쁨은 밥 먹을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던 것이었습니다.

  부당한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사실 특사를 받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경우에도 그런 정도였다면, 하물며 정말로 죽어 마땅했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그 죄를 용서 받게 될 때야 어떠하겠습니까?
  꼼짝없이 지옥 가게 되어 있었는데, 아무 이유도 조건도 없이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특사를 얻어 천당으로 가게 된 것을 정말 확신하게 된 성도라면 그 '생의 기쁨'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디에다 비길 수나 있겠습니까?

  바로 그 감격이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모여 예배드릴 때 나누게 되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제 잘난 모습을 겨루는 곳이 아니라, 세상에서 멸시받던 창녀 같은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품으로 영접을 받고 죄 용서함 받는 기쁨을 맛보는 자리입니다.
  그 무슨 죄를 지었던지 간에 일단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애통하는 상한 심령을 내어놓고 나오기만 하면, 그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결코 멸시치 아니하시는 신기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당장 체험하게 되는 곳이 바로 이 예배시간인 것입니다.

  이런 감동, 이런 감격 없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겠습니까?
  이런 회개의 감동이 없다면 예배당에 와서 지루하게 앉아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연속극이나 보는 것이 훨씬 더 감동스러울 것이요, 이런 죄 사함의 감격을 누릴 줄 모른다면 차라리 운동장에 가서 프로야구 홈팀이 이기는 스릴을 맛보는 것이 백배 더 감격스러울 것 아니겠습니까?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성도만이 예배의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맛볼 수 있습니다.
  "못 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라고 십자가를 통한 사죄의 은혜를 뼛속 깊이 느끼고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라는 '온전한 번제'를 드림으로써, 실로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심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는 성령감동의 예배를 새롭게 드릴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교인이라는 사람이 죄 용서를 비는 기도를 제 입으로 한 번도 해 보지 않고 살 수 있으며,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 죄를 돌이켜 보면 어떻게 눈물 한 방울도 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남을 미워하는 마음의 살인죄 한 번도 저질러 보지 않은 사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마음의 간음죄 한 번도 짓지 않은 사람 정말 있습니까?
  비록 다른 사람 눈에는 점잖고 괜찮은 사람처럼 보인다 해도 실제로 여러분 가운데 부모에게 불효한 죄, 아내의 가슴에 대못이 박히게 한 죄, 자식의 마음에 피멍이 들게 한 죄를 한 번도 짓지 않고 지난 한 해를 보내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리 여러분들이 경향교회 목사고 전도사라고 해도 그 맡겨 주신 성도의 영혼을 위해서 진실로 나 자신을 완전히 낮추고 100퍼센트 썩는 밀알로 충성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주간이 지난 52주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있었으며, 아무리 여러분들이 경향교회 장로고 집사고 권사라 해도 교역자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새벽기도 시간에 피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일은 절대로 없이 지금까지 완벽하게 신앙생활해 오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예수 믿은 이후에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의심하는 죄를 단 한 번도 저질러 보지 않은 사람 정말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도대체 그 누가 그렇게 스스로 '죄 없는 자'라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런 저와 여러분의 죄, 자기 양심으로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그 분명한 죄가 한 순간에 깨끗이 씻기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예수님 앞에서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만 하면 그 모든 죄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즉시 완전히 씻기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간단하다고 못 믿겠습니까?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간단하고 쉽게 용서를 받을 수 있으니, 그래서 '오직 은혜'인 것입니다.
  이게 사람 상식 가지고서는 염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쉽게 우리에게 실제로 베풀어지니,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고 고백하고 찬양하고 감사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신자라는 사람이 이런 죄 사함 체험이 없다면 '새 사람'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감동이 주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서야 도대체 무슨 재미로 예수 믿고 산다는 것입니까?

  군대에서 병사가 자신을 적군의 직사화기로부터 숨기려 하는 것을 '은폐(隱蔽)'라고 합니다.
  즉 소총 탄환처럼 똑바로 날아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적군의 직선시야에서만 숨겨지면 되니까 은폐 즉 '숨기어 덮음'만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적군의 곡사화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가리켜서는 '엄폐(掩蔽)'라고 합니다.
  포탄이나 폭탄처럼 위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는 무언가 방어물을 머리 위에 덮어야 하니까 벙커 따위를 통한 엄폐 즉 '가리어 덮음'의 방어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폐'는 전혀 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그저 '은폐'되었다고만 마음을 놓고 있다가는 곡사화기나 공중투하의 공격 앞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죄가 '직선으로 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는 가리어져 있다고 즉 은폐되어 있다고 해서 아무 문제없는 줄로 착각하면 바로 그 꼴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모든 죄를 저 위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내려다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의 죄는 '은폐'고 '엄폐'고 간에 스스로는 결코 숨기거나 가릴 재간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그런 우리의 죄를 덮어 주시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 '은폐'하려 하고 있는 죄는 없습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 앞에서는 감추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조차 보지 못하고 계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죄는 없습니까?
  기독교에서는 천주교처럼 신부 앞에서 일일이 부끄러운 고해성사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아예 마음을 턱 놓고서 하나님께도 찾아가서 아뢰지 않은 '숨은 죄,' 아니 고백할 기억조차 사라져 버린 '미결의 죄'가 아직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디모데전서 5장 24절은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당신 앞에 고백하는 죄는 사람 앞에서는 친히 덮어 주시지만 사람이 당신 앞에서 은폐하려 하는 죄는 반드시 '그 뒤를 좇아서' 결국에는 '밝히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으려' 하는 아담의 '은폐' 행위를 이제 정말 그만하고 그 대신에 '십자가로써 우리 죄를 가리어 덮어 주시는' 우리 예수님의 '엄폐'의 은혜를 입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모두 다 변명할 길 없는 죄인임에 예외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이미 거룩하고 의롭게 된 '옛날의 죄인'들입니다.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함'으로써 숨은 죄를 내어 놓고 회개하며, 그래서 죄 용서함의 은총을 받아 절로 힘써 '전도'하며 뜨겁게 '찬양'하며 기쁨으로 '예배'하게 되는 새 삶의 축복을, 저 하늘의 거룩한 시온에 서게 되는 그날까지 새해에도 바로 이 경향제단을 중심으로 주일마다, 날마다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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