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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 [로마서 9장 30절~10장 3절]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 [로마서 9장 30절~10장 3절]

 

요즘 아파트 단지 내부 등 보행자가 많이 다니는 지역의 도로면에 '스피드 범프'(speed bump)를 만들어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속도를 줄여야 할 곳의 노면을 일부러 볼록 튀어나오게 해 놓음으로써 지나가는 차들이 어쩔 수 없이 서행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조금 튀어나온 것이라고 우습게보고 빨리 지나가다가는 차바퀴의 완충장치가 그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게 되어 '쾅'하고 부셔지는 소리가 나게 되기 마련입니다.
  사실 별로 높은 것도 아니지만, 워낙 잘 닦여져 있는 평평한 아스팔트 노면인지라 그 정도 높이의 범프만 있어도 모든 차들이 크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는 작은 돌멩이 하나만 있어도 훨씬 더 위험합니다.
  만약 아스팔트에 주먹만한 돌멩이 하나가 박혀 있기라도 한다면 자동차를 길에서 튕겨나가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 레이싱을 보면 그런 고속 주행 중에는 한쪽 바퀴가 갓길 쪽에만 걸쳐지게 되어도 차가 전복되곤 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도 바로 같은 이치입니다.

  같은 돌이라 해도 원래 돌밭 길에 있는 돌이라면 별로 문제가 안 될 것입니다.
  차가 돌밭 길 간다고 해서 미끄러지고 뒤집히는 일은 없으며, 사람 역시 돌밭 길을 걸어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아주 드물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잘 닦여 있는 길에 돌멩이 하나가 있으면 큰 문제가 됩니다.
  작은 돌멩이라도 발이 미끄러질 수 있고, 좀 큰 것이라면 걸려 넘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처럼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나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걸림돌을 가리켜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미끄러져 넘어지게 하는 돌, 걸려 쓰러지게 하는 바위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자기 딴에는 신앙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걸려 넘어지고 있는 종교인들이 과연 어떤 자들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믿음' 대신에 자신의 '의로운 종교생활'로 구원 받으려 하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부딪히는 돌'이 됩니다.

 

  로마서 9장 30절부터 33절에 기록하기를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전혀 불가능하게 보였던 이방인에게 오히려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고 선포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습니다.
  본문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즉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하여 우리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는가?'라고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바로 그런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는데" "어찌 그러하뇨," 즉 의로운 삶은커녕 하나님의 '하' 자도 모르던 이방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반면에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 즉 율법을 지켜 구원받겠다고 그렇게도 애를 쓴 이스라엘은 오히려 "법에 이르지 못하게" 즉 그 율법 준행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말았으니 "어찌 그러하뇨"라는 의문이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 대답은 명백했습니다.
  바로 이방인들은 "믿음에서 난 의" 때문에 구원 받게 되었지만 유대인들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신득구(以信得救)'냐 아니면 '이행득구(以行得救)'냐 하는 여기에 그 불가해하게 보이던 문제에 대한 초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 즉 스스로 의롭게 살겠다고 특별히 노력하지도 아니하던 이방인들은 "믿음에서 난 의" 즉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의 구세주로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의를 단번에 얻게 되었습니다.
  '이신득구'는 이처럼 아주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구원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예수 믿음'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율법을 철저하게 준행하는 "행위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겠다고 하던 유대인들은 그 법 자체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었고 따라서 구원 역시 얻을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행득구'는 원래가 사람 스스로의 양심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을 끝까지 혼자 해 보겠다고 용을 씀으로써 실상 구원의 길에서 진퇴양난에 스스로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처럼 자기 행위로써 구원받겠다고 하던 유대인들은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고, 즉 100퍼센트 틀림없이 부딪히게 되어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사람 자신의 선행, 자신의 의로운 생활로 구원 얻겠다고 하는 종교는 꼭 부딪히게 되는 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3절에 인용된 말씀은 상반절과 하반절을 각각 독립된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둔다. 그러나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구세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누구든지 오직 당신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도록 만들어 놓으신 바로 그 예수님이 그처럼 이행득구의 구원관을 가진 종교인들에게 정통으로 맞부딪히는 돌이요 반드시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반석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 십자가의 공로'를 아주 깎아내리는, 아니 완전히 무시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사람이 무슨 의로운 일,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라는 의로움과 선함에 감히 비길 수 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도대체 무엇이 아직도 부족해서 거기에다 사람의 공로가 첨가되어야만 구원의 효력이 비로소 발생될 수 있다는 소리입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이처럼 당신의 십자가 사역을 우습게보고 그 대속의 공로를 평가절하시키는 종교인들을 인정해 주실 리가 만무합니다.
  아니 그런 자들이 그렇게 구원 받겠다고 권리 주장하는 앞길을 가로막으시고 그렇게 해서 천당 가겠다고 하는 그 걸음에 아예 태클을 걸어 반드시 넘어뜨리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직 "저를 믿는 자"만이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만 확실히 믿고 그 십자가 공로에만 철저히 의지하는 신자는 마지막에 가서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이행득구 종교인들의 수치스러운 꼴을 절대로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의 약속인 것입니다.

  '인간 자신의 의롭고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은 모든 종교계에 완전 공감되고 있는 제일의 교리처럼 되어 있습니다.
  실상 이 구원관이야말로 종교통합운동의 '복음'이요 '슬로건'이요 그들이 만들어 낸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해당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바로 그런 구원관이야말로 참된 구원 얻는 길을 막는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선행이 죄 용서를 받게 하는 공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무 반박할 여지없이 너무나 당연하게만 들리는 것 같지만 사실 여기에는 중대한 맹점이 있습니다.
  만약 죄 지은 것이 있을 때 선행으로써 그것을 상쇄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일단 선행을 먼저 많이 해 놓으면 그것으로 상쇄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앞으로 죄를 좀 지어도 괜찮다는 논리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먼저 지은 죄를 확실하게 상쇄시킬 수 있는 공로라면 당연히 나중에 짓는 죄 역시 상쇄시키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는 말하지 않고 또 그렇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행득구를 주장하는 사람, 선행이 죄 사함의 공로가 된다고 철석 같이 믿고 가르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미리 선행을 많이 쌓아 놓으면 앞으로는 죄를 더 지어도 된다고는 결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국내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께서 텔레비전 방송 성경공부 시간에 아주 훌륭한 예를 들어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살인이나 간음을 저질렀을 때 그 죄를 상쇄할 수 있는 어떤 선행이 있다고 한다면, 누가 미리 그런 선행의 공로를 다 채워 놓는다면 앞으로 살인이나 간음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말이냐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처럼 행위로 구원 얻는다는 사고방식은 대다수의 종교인들에게 너무나 잘 통하는 상식 같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는 엄청난 자체 모순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공로가 나를 구원한다는 이 사실을 믿지 못할 때, 그런 사람에게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이행득구의 종교인들,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 하고 의롭게 생활하려 하고 남을 도와주려고도 하고 무언가 신 앞에서 올바르게 살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공로만을 믿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딱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는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꼭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성경 진리' 대신에 자신의 '열정적인 종교심'으로 구원 받고자 하는 자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거치는 반석'이 됩니다.

 

  로마서 10장 1절부터 3절의 말씀에 "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종교생활에 있어서 저지르고 있던 결정적인 실패, 즉 구원받지 못할 헛된 종교생활을 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마음에 원하는 바"를 따라 "하나님께 구하는 바" 역시 오로지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일 뿐이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그 모든 종교생활이란 것이 모조리 착각과 외식과 헛수고로 끝날 뿐 아니라 그 대신에 오히려 지옥 형벌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헛된 종교생활에 빠져 있으니 사도 바울로서는 너무나도 답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행득구' 사상과 함께 또 하나의 큰 착각과 오류를 범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실패는 적어도 잘못된 신을 따랐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다고 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섬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열심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이 '열심'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열정'(zeal)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문자 그대로 열과 성을 다하여 믿는 이 종교심의 '열심'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둘째가라면 정말 서러워할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회심하기 전의 바울 자신 역시 갈라디아서 1장 14절에서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라고 스스로 회상하고 있듯이 대표적으로 '열성적인 유대교 신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종교적 열성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닌" 것이라는 사실이 문제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바른 진리를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참된 구원론은 사람의 논리에서 유추되어 상식에 의하여 공감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로지 말씀이 계시해 주는 진리와 성령이 감동하여 믿게 해 주시는 것이 되어야 할 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종교적 열심은 그런 성경의 진리를 좇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쓰는" 열정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에 열심이 있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며 또 당연히 나타나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열심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명령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열심이 되어야 마땅한 것인데, 이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고 전혀 엉뚱한 방향 곧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한 방향으로' 그 열정이 잘못 흘러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네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하나님께 무슨 빚을 지워 주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그런 행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반드시 자기네들을 구원해 주도록 만드는 무슨 의무를 부과해 주는 것인 양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그들의 인격을 하나님 중심으로 인도해 주는 '성경 말씀'이 그들 머릿속에 없고 그 대신에 그저 자기중심적인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감정적 열심'만 그들 가슴 속에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유대인들은 자기네들의 죄의 빚을 벌써 다 갚아 놓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불신앙의 무지에 빠지게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미 성취되었고 선포되고 있던 그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 불순종의 반역행위에 오히려 열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하기 전에는 그런 '조상의 유전'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발 벗고 나섰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인지라, 그는 그처럼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는' 광신적 교도의 심리상태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뜨거운 열심이 필요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열정 그 자체가 마치 자기 신앙생활의 주체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잘못된 상태에 빠지게 되면 결국 자신의 열정적인 감정이 모든 면에서 앞서고 가장 중요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이 명백히 가르쳐 주시는 사실을 깨닫고 순종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자기 자신의 어떤 종교적인 느낌이나 신비적 충동에만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 대신 '자기의 기분'이 앞장서는 종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이런 열정적인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불교의 중들은 날마다 꼭두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열심히 참선이라는 것을 합니다.
  그 신도들 역시 걸핏하면 무슨 삼천 배니 하는 절을 허리 아픈 줄도 모르고 하지 않습니까?
  이슬람교도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마를 땅바닥에 대고서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또한 이들은 자폭이나 테러행위를 하면서도 소위 '성전(聖戰)'이라는 미명의 구호를 그 얼마나 열렬히 광적으로 외칩니까?
  그런가 하면 이단 기독교의 추종자들은 우리 정통 기독교 신자들이 흉내도 못 낼 정도로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평생토록 전도 한 번도 하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수두룩하겠지만 지금까지 이단으로부터 한 번도 전도 받아 보지 못한 교인은 아마 한 명도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처럼 강렬하고 뜨거운 신심이 있다고 해서 그 때문에 그들의 종교가 바른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결코 구원을 이루어 주지는 못하는 헛된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아도취 상태의 종교적 열정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때,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실상 십자가에 걸려 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회에서도 그저 열정만 뜨거운 사람은 '사상'만 가지게 되고 '철학'이 없는 사람이 되기 십상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람들 아닙니까?
  이들은 어떤 합리적인 논리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자들은 다 서민들을 착취하는 나쁜 놈들이다,' '미(米)국 놈들은 씹어 먹어야 한다.'라는 식의 감정만 부채질하여 대중을 선동함으로써 공산주의라는 정치체계를 마치 국교처럼 유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단 종교들이 예외가 없이 다 광적인 열정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끌어 모으고 있는 것도 꼭 같은 수법인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종교,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종교는 오직 '성경중심의 기독교 신앙'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감정만 앞서는 열정적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는 진정한 '지적 신앙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순전히 자기도취에 빠진 환각 상태의 종교인이 아니라 성령께서 성경을 통하여 똑똑히 가르쳐 주시는 진리를 따라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증거할 줄 아는 전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신앙 즉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오직 '지식을 좇는' 신앙 즉 오직 '성경 중심'의 신앙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깨닫고, 자기만을 힘써 내세우고 결국 스스로 걸려 넘어지게 되는 자기감정 중심의 종교인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바른 구원의 지식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의에 복종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처럼 철저히 종교적인 나라였던 이스라엘,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종교인들이었던 유대인은 오히려 전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헛된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실패의 원인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자기네 자신의 행위와 열심만을 앞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종교는 스스로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길 가던 사람이 길바닥에 큰 돌부리가 튀어나온 것을 보게 된다면 당연히 조심하고 피하여 갈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바지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거나' 심지어는 '제발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한순간에 자기 체중의 중심을 완전히 잃고 쓰러지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크게 다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믿는 것 같고 스스로는 꽤 의롭고 선한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아도 그 자체 속에 자기도 모르는 걸림돌이 있으면 정말 넘어져도 '큰 코 다치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은 외견상으로는 다들 꼭 같이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해 주는 잘 닦여져 있는 길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길들을 따라가는 자들에게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숨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를 두고 자기 스스로 의롭게 사는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종교인들은 이미 죄인을 의롭게 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세주에게 부딪힐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신을 섬기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으면서 이만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종교생활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는 빗나가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오직 죄를 더하는 행위가 될 뿐인 까닭에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심판주에게 여지없이 거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좋은 길처럼 보이는 종교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모르면 바로 그 십자가가 그 길에 치명적인 범프가 되는 것이며, 아무리 열심 있는 신심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것 같아도 '오직 성경'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바로 그 말씀의 법대로 심판하실 재림주 예수님께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대다수의 종교인들이 아니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자들 중에서도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돌에 걸려 넘어지고들 있겠습니까?

  우상 종교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독교만큼은 결코 그런 실패 종교로 전락시키지는 말아야 합니다.
  참된 기독교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공로로써 거저 구원 받는 것입니다.
  진정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는 성도는 자신의 열정적인 종교심을 따라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신 대로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시는 대로만 따라갈 뿐입니다.
  이처럼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되는 돌'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모퉁이 돌이요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한 신앙과 충성된 생활을 지킴으로써 바로 그 '만세반석 열린 곳'을 따라 천국까지 이어져 있는 구원의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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