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기념예배] 부인(否認)과 배반(背叛)
사람이 자기가 모시고 있는 사람을 과연 얼마나 진심으로 존경하고 받드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힘이 약해질 때 잘 나타납니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참 마음은 그 부모가 아직 재력이 있어 자식에게 물려 줄 유산을 가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 그 부모가 은퇴하고 이제 자녀에게 의지해야 할 때가 되어야 제대로 알 수 있게 됩니다.
당권을 쥐고 대통령직을 가지고 있을 때야 그 집 대문 드나드는 발걸음이 귀찮을 정도로 줄을 잇겠지만, 일단 정권 유수 현상이 일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하야한 이후에 가면 그 가신들이라는 사람들 중에 누가 정말 의리 있고 충성스러운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에게 그와 비슷한 때가 왔습니다.
갈릴리 공생애 시절에는 그래도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누렸고 제자들도 덩달아 예수님 따라가는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장미빛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꿈이 무르익어가는 듯이 보이던 중에 열두 제자들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전세가 순식간에 기울면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자기네 스승 예수님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모든 인기, 영광이 공든 탑 무너지듯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그들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비참한 처지,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시는 것을 보게 된 열두 제자들은 정말 3년 동안 ‘한솥밥 같이 먹던 사이’가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이 겁을 집어 먹고 예수님 곁에서 도망쳐 버렸는가 하면 게 중에서 그래도 수제자라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고 가룟 유다 같은 이는 아예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넘기는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짓까지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들이 진짜 어떤 제자였는지는 예수님의 3년 공생애 시절이 아니라 그 마지막 한 주간, 아니 마지막 며칠 동안에 완전히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극치인 십자가의 현장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 자리야말로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어떻게 모시고 있는지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어 주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기절정에 계시던 디베랴 언덕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우러러 보는가가 아니라, 세상 사람이 볼 때 가장 비참한, 그야말로 실패한 인생의 본보기처럼 보이는 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모시는가 하는 것이,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진짜 속을 드러내어 주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진짜 속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이 시간 우리는 그 수난의 주님 곁에서 실패했던 두 제자들의 마음을 거울삼아서 그 주님을 향한 나의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각자의 양심에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을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자는 곧 예수님을 부인(否認)하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26장 69절부터 75절에 “69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하며 71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신 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동안에 베드로는 그 집 “바깥 뜰”에서 어슬렁거리며 일이 어떻게 되어가나 하고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버린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는, 그래도 거기까지는 베드로가 좀 낫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비자” 즉 한 여종이 베드로의 얼굴을 알아보고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일당이지?”하고 추궁해 왔을 때 그는 그만 바짝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예수님을 직접 부인하지는 않고 그저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소.”라고 둘러대었습니다.
즉 정직한 대답을 회피하고 그저 시치미를 뚝 뗌으로써 그 난처한 지경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여종 하나가 재차 “이 사람이 분명히 나사렛 예수와 같이 있던 것을 내가 봤어요.”라고 주장하면서 나서자, 베드로는 그저 적당히 얼렁뚱땅 넘길 수는 없는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맹세하고 부인하여” 즉 무슨 증인석에 서서 말하는 사람처럼 아예 정식으로 맹세하면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자면 ‘손들고 서약까지 하면서’ 증언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태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즉 이제는 몇 사람이 입을 맞추어서 “너는 틀림없이 그 당에 속한 사람이다. 네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너의 말씨에서 갈릴리 억양과 사투리가 그대로 튀어 나오는 것 보면 너는 영락없이 그 갈릴리 예수라는 사람의 패거리 중에 하나다.”라고 다그쳐 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얼마나 급했던지 이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됩니다.
이 말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도 좋다.’라고 맹세했다는 뜻이든지, 혹은 베드로가 예수라는 사람을 마치 자기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예 그 이름을 직접 저주하면서 맹세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첫 번째 해석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베드로가 스스로 ‘저주의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것은 자기 입으로 저지를 수 있는 죄의 극한에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이처럼 단계적으로 올라갔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회피하려 하다가 그 다음에는 예수님 모른다는 말이 입에서 나왔고 나중에는 아예 저주의 맹세까지 동원하면서 예수님을 극구 부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가운데서 이 세 번째 단계의 부인까지 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예수 당원’이라고 하면 당장 총살시키겠다고 하는 그런 자리가 아닌 이상, 그래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이 자기 입으로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베드로를 보고 비웃어도 될 만한 처지에 있는 것은 또한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는 제1단계의 부인은 우리도 흔히 저지르기 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장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웃들이 모인 자리에서, 혹은 불신 친척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종교 문제가 화제로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9.11 사태 이후 이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게 되고, 중동 사태가 심각해질 때마다 이스라엘 민족과 아랍 민족의 종교적 대립이 자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도 불신 언론에서 기독교의 선교 정책이나 교회의 재정 등에 대해서 일방적인 비난을 퍼붓는 일들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게 될 때 정말 예수 믿는 신자라면 당연히 자신이 기독신자임을 밝히면서 우리 기독교 신앙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아주 자연스럽고도 좋은 기회로 삼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 자기가 기독신자라는 내색도 하지 않고 지나가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그 화제에 대하여 자기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그런 종교적인 문제는 자기에게 아무 관심의 대상도 아무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것처럼 슬쩍 회피하려 합니다.
참된 신자라면 이슬람이나 불교나 천주교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당연히 한 마디 해야 할 자리인데도, 기독 청년들이 욕을 듣고 교회가 매도를 당하고 있다면 같은 신자로서 당연히 우리 기독교 신앙을 변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입 꼭 닫고 얌전히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이 예수당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아주 ‘교묘한 부인’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릅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만 예수님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 말할 것도 없고 괜히 복잡한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서 입장 곤란해지기 싫다.”라고 입 다물고 있는 것 역시 변명의 여지없는 부인입니다.
같은 직장에서 동료로 근무하거나 같은 아파트에서 서로 이웃하고 살아도 평생 예수 이름으로 전도 한 번 하지 아니하고 자연히 그쪽에서도 이쪽이 기독신자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지내는 것을 오히려 편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실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과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오늘날 같은 평화시대, 신앙생활에 대하여 아무 물리적인 박해는 없는 이 좋은 때에도 “나는 당신네 말하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라.”라고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당원임을 숨기는 교인들은, 약간의 압력만 더 가해지면 “나는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당장 그 말이 바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서 자기가 예수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 증거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 - 바로 이것이야말로 베드로의 전철을 밟아 예수님 부인의 죄로 빠져 들어가는 시발점인 것을 깨닫고 아무 두려울 것 없는 이 좋은 평화시대에, 아무도 우리를 막지 못하는 이 좋은 자유민주사회에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랑스럽고도 힘 있게 증거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에 대하여 불만을 품는 자는 이미 예수님을 배반(背叛)하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27장 3절부터 10절의 말씀에 “3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은 삼십에 팔아넘긴 것 역시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며 더 이상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예수님에게 대하여 개인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그 유다의 죄에 대하여 우리에게 한 가지 의아심을 던져 주게 됩니다.
본문에 기록하기를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이후에 사건이 진행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유다에게는 분명히 어떤 ‘뉘우침’이 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후회’(remorse) 혹은 ‘양심의 가책’이란 뜻으로서, 진정한 ‘회개(repent)’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참된 회개는 용서라는 해결책이 당장 따라오는 것인지만 그런 인간적인 후회는 아무 해결 방안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룟 유다가 자신의 양심의 가책에 대하여 무언가 해결책을 찾아보겠다고 한 것이 바로 자기가 예수를 팔아넘겼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런 가룟 유다의 ‘뉘우침’에 대하여 무슨 위로나 심령의 평안을 제공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었고 오직 사단의 앞잡이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들 앞에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하고 자기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지만 그들의 대답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 후회막심 하는 소리를 듣고도 제사장들이라는 사람들이 대답한다는 말이 “그건 네 문제지 우리가 알 바 아니다.”(It's your problem.)라는 지극히 쌀쌀하고 냉혹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자기의 죄, 스승 배반이라는 그 극악무도한 죄에 대하여 아무 위로도 해결책도 용서도 찾지 못한 가룟 유다의 최후는 그래서 자살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무엇이 갸룟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반하게까지 만들었습니까?
그 시초는 그가 예수님에게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물질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께 불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접하느라고 바치는 물질들이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렇게 비싼 것은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는 것이 훨씬 좋지 왜 예수님 발에 그냥 부어 낭비하느냐?’라고 반발심을 가졌었습니다.
성경은 유다가 그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한 마음보다는 그렇게 해서 그 돈이 회계인 자기 수중에 들어오면 더 많이 도적질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평소에 늘 물질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게 된 동기가 순전히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로마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는 유대인 대중의 지지도가 압도적인데도 예수님이 그런 일을 마다하시는 것을 보고, 자기가 나서서 예수님에게 어떤 자극을 주고 푸시(push)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라는 영화에도 보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산헤드린 공회라는 막다른 골목에 세워 놓으면 예수님이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정치적인 결단을 내리고 과감히 거사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대부분이 다 ‘갈릴리 지방’ 출신 즉 촌사람들이었지만 이 가룟 유다만은 ‘유대 지방’ 출신 즉 오늘날로 치자면 서울사람이었다는 사실과, 그가 열두 제자들 중에서 ‘돈궤’를 맡은 회계가 될 정도로 어쨌든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그가 남달리 ‘정치적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높고 그런 추론 역시 일리는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사 그것이 예수님 배반의 동기였다 하더라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수난 예언을 하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비하된 종이 될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불만이 극에 달했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즉 그런 메시아는 자신의 물질적 욕구도, 정치적 욕구도 조금도 채워주지 못할, 적어도 가룟 유다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메시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불만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팔아넘겨 버리는 배반으로 이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그래도 아직 예수님 믿는 믿음만큼은 가지고 있을 가망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진정 내 죄를 사해 주신 구세주로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도하기를 좀 부끄러워하거나 충성이 좀 약한 것은 아직 남아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예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하여 아직도 불만이 남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천당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하여 다른 무슨 사소한 불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공로를 모르는 사람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교인처럼 보여도 항상 자질구레한 일들을 두고 예수님께 불만이 가득 차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대하여 가진 불만의 배경에는 바로 이런 불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만큼은 끝까지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결국 진정한 회개를 했고 그 결과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양심의 가책을 뼈저리게 느끼고 후회를 하기는 했지만 바로 그 믿음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바로 믿지 않았던 까닭에 예수님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고 결국 예수님을 배반했으며, 그 후에도 끝까지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했던 까닭에 그처럼 큰 뉘우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용서와 구원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있습니까?
예수님 배반의 길 쪽으로 이미 한쪽 발이 올라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공로로 인하여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이 다 깨끗이 용서받고 천당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수 믿는 것이 내 인생에 뭐 별 도움 되는 것 같지도 않다고 불만스러운 사람 있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실상은 가룟 유다의 정서를 고스란히 닮아가는 사람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도 여러 가지 불만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내가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는 것 아닌지, 아니 아예 믿지 않고 있는 증거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살펴보면서 오늘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만족과 행복을 찾고 앞으로는 결코 변심치 아니하고 이 주님만을 더욱 사랑하고 더 가까이 따라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아예 모르는 불신자들은 불신의 죄은 있지만, ‘부인’이나 ‘배반’의 죄는 저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인’이나 ‘배반’은 둘 다 일단 예수님을 알던 사람이라야 해당될 수 있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것은 교회에 몸담고 교인 노릇하던 사람들, 함께 예수님의 상에서 떡을 먹던 사람들 중에서 나타나는 죄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들이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겸손하게 자기 자신의 심령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경종인 것입니다.
죄의 경중으로 따지자면 물론 부인보다는 배반이 훨씬 더 중하기는 하지만 죄의 성격으로 볼 때에는 양자가 비슷한 ‘오십보백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죄를 저질렀느냐보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었느냐 여기에 최종 갈림이 달려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베드로의 부인’과 ‘유다의 배반’은 그 끝에 가서는 오십보백보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쪽이며 영원히 다른 종말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성자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유다는 그것이 아예 없었습니다.
아마 유다도 그 믿음만 가지고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배반했던 그 죄까지도 틀림없이 용서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며, 반면에 베드로에게 그런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죄는 결국 영원한 파멸과 저주로 이끌어 갔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즉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같이 알고는 있었지만 같이 믿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같이 예수님 앞에서 중죄를 저질렀지만 ‘예수님을 믿는 중에 연약하여 저지른 죄’와 ‘원래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까닭에 저지른 죄’는 그 마지막에 가서는 그처럼 완전 반대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대하는가, 어떻게 믿는가,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수천수만의 군중을 이끌고 다니실 때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풀 때야 누구나 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자고 난리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만 해도 모두들 앞을 다투어 겉옷을 벗어 땅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환성을 질렀습니다.
그런 때에는 누구나 다 예수님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람의 진짜 믿음은 예수님의 수난의 현장에서 깨끗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정말 어떻게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주님께서 원수들에게 묶여 재판 받으시는 자리, 대중이 욕하고 조롱하는 십자가 밑에 가서 뚜렷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수욕당하시는 예수님을 자기도 모르는 척할 때, 그 사람은 예수님과 완전히 모르는 관계가 될 위험한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저주하고 침 뱉을 때 자신도 그 예수님에 대하여 불만을 토하고 있다면, 그 사람 역시 결국에 가서는 예수님께로부터 완전히 등 돌리게 되기 십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세주로 진정 믿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런 죄에서 회복될 길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이런 범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이 비참한 십자가 밑에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신앙을 증거하며, 사람들이 불만의 욕설을 내뱉는 이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오히려 그 구원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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