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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동호목사

[스크랩] 날마다 기막힌 새벽1. - 김동호 목사

  

 

 

 날마다 기막힌 새벽 - 김동호 목사

 

김동호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청량리 중앙교회 부목사, 영락교회 부목사를 거쳐 33살 나이에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 후 영락교회 협동목사(교육담당)를 거쳐 지금은 동안교회 협동목사(교육담당)를 거쳐 지금은 동안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현재 KOSTA(국제복음주의 학생연합회)의 주강사로 해외에 있는 유학생들의 복음화에도 헌신하고 있으며 청년들에게는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그의 설교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삶 속에서 살아 움직여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공부해서 남 주자. 돈벌어서 남 주자고 외치는 김동호 목사는 21세기 교계를 이끌어갈 차세대 리더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미래를 꿈꾸는 사람] [경주하는 삶이 아름답다][예수없는 큰 사람, 예수 있는 작은 사람], [자유케하는 멍에], [지혜로운 건축자]가 있다.

 

 주인공과 악역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을 때 보면 대개의 경우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연이 늘 따라나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며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인에 대하여 심한 분노를 갖게 되는데 심한 경우에는 그 악연을 맡은 배우까지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경향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주로 의인의 입장에서 읽는 경우가 많고 악인과 죄인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자신과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편 59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피하여 쫓길 때에 쓴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생명을 쫓는 사울을 ‘일어나 치려 하는 자’ ‘사악을 행하는 자’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 ‘그 입술에 칼을 가지고 있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다윗의 입장에 세우고 성경을 읽으면 누구에게나 사울과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에 대하여 표현한 모든 표현이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한지 놀라운 정도입니다. 그 사울과 같은 존재가 시어머니일 수도 있고 시누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직장의 상사나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나도 시편 59편을 읽을 때 다윗의 입장에서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사울과 같은 존재가 있었습니다. 특히 ‘입술에 칼을 가지고 있는 자’와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라는 표현이 어쩌면 그렇게도 적절하였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그의 입술에 칼이 있어서 말할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입장에서 성경을 읽으니 나에게 딱 들어맞는 말씀이기는 한데 은혜로운 말씀으로 나에게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는 새벽 기도회에서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말씀에 매달려 묵상을 하였습니다. 묵상 중에 그 사울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쉽게 인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서 생각하니 사울의 심정이 나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마음속에도 피흘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고 내 입술에도 교묘하게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상대방을 구석으로 몰아 꼼짝 못하게 하고 KO로 참패할 때까지 두드리며 상대방의 아픈 곳을 찾아 찔러 피를 보고 싶어하는 잔인한 본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사춘기 때 어머니와 다투는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논리적으로 어머니의 약점을 찾아 가장 아파하는 곳을 비수 같은 표현으로 찌르며 그것을 즐기곤 하였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도 그와 같은 비열한 본성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고 알게 모르게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그를 꼼짝 못하게 구석으로 몰고 정확하게 KO펀치를 날려 상대방을 제압하고 싶은 본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다윗이 아니고 사울 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니 은혜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아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바울 사울 입니다. 제 마음속에 아직도 사람 치기를 좋아하는 마음, 피흘리기를 즐기는 마음이 있으며 아직도 제 입술에 칼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서 이와 같은 마음을 없이 하여 주시옵소서”

네 손을 들라


나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목회에는 나름대로 독창적인 것이 가끔씩 나오곤 합니다. 그리고 내가 늘 소원하고 힘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창조적인 생각’ 그것이 바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요즘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창조적인 생각’이 나의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깨닫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수한 마음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요. 창조적인 생각을 부정하지도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 기도회에 오기 위하여 운전을 하는 동안 기독교 방송을 들었습니다. 방송에서 361장 ‘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 위해 너는 정성껏 기도했나’하는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나는 그 가사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많은 생각을 하기는 하였지만 요즈음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정성껏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순전한 마음으로 열심히 생각하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내가 무릎을 꿇고 정성껏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그 찬송을 들으며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화평을 원하거든 생각만 하지 말고 정성껏 하나님께 기도하라’ 이것이 오늘 아침 하나님께 나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교회에 도착하여 책상에 앉아 오늘 새벽 기도회에 읽을 말씀을 준비하는데 욥기 11장 13절 말씀이 깊이 와 닿았습니다.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하나님을 그 말씀을 통하여서도 나에게 손을 들라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손을 들라’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라는 말씀을 손을 들라는 표현으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손을 드는 것입니다. ‘ 손을 든다’는 말속에는 ‘항복합니다.’는 뜻이 있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는 찬송의 가사가 바로 그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의와 생각을 의지하지 말고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손들고 엎드려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포기하라 하심은 다 부인하라 하심이 아니요 그것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리라 하십니다.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은 우리의 의에 있는 것도 아니요, 순수함과 순전함에 있는 것도 아니요, 능력에 있는 것도 아니요, 창조적인 생각에 있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 손들고 나아가 기도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 위해 너는 정성껏 기도했나?
주를 향하여 네 손을 들라!
하나님이 오는 내게 주신 말씀과 은혜입니다. 이 말씀과 은혜로 인하여 오늘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날마다 기막힌 새벽 - 김동호 목사

 

 

의의 함정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의에 있지 아니하고 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이’에서 ‘의’로 돌린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힘쓰고 노력하고 그리고 기도하여서 우리의 관심을 의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생각하고 따지기 이전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의로운 일인가 불의한 일인가를 생각하고 따져 보는 습관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의롭게 살게 되었을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둘 있습니다. 이 함정을 잘 피하지 못하면 다시 실패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보다도 먼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세상의 이익을 더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의 첫째 함정은 의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의를 행한 후 보상을 바랍니다. 그 보상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할 때 낙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의’에 대한 보상을 ‘이’로 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욥기 35장 3절에 보면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기를 힘쓴 것을 다 소용없는 것으로 후회하는 것을 책망하는 엘리후의 말입니다.


욥도 ‘의’의 보상을 ‘이’로 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익이 무엇인고’ ‘이익이 무엇인고’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의 ‘의’를 행하면서도 여전히 ‘의’보다 ‘이’를 도 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를 ‘이’보다 귀하고 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고 하면 ‘의’를 보상은 ‘의’그 자체로서 충분할 것이고 ‘의’를 행하다가 낙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의롭게 사는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아예 ‘이’보다 ‘의’를 더 중히 여기는 믿음과 지혜를 주셔서 ‘의’를 ‘이’로 보상받으려고 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의를 행하다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그 ‘의’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의의 둘째 함정은 자신의 의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이 함정은 의의 첫째 함정을 성공적으로 넘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데 이 또한 아주 치명적인 것입니다.
의에 대한 보상 심리에서 벗어나 손해가 되어도 의를 행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와 같은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를 건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교인들 앞에서는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니하고 잘 될 것이라고 설교를 하고 말을 하지만 목사도 인간인지라 이것저것 걱정되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가장 부담이 되고 염려가 되는 것은 건축비입니다. 현재 20억 원만 더 있다고 하면 정말 문제도 없이 걱정도 없이 건축을 할 수 있을 터인데 한 20억원 정도가 부족하여 그 때문에 심리적인 압박을 이만저만 많이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를 건축하기 전에 개척 교회를 먼저 건축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선교와 구제를 건축 후로 미루고 모든 예산을 건축 중심으로만 몰아왔다면 최소한 지난 몇 년 동안 20억 원은 더 모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 부담없이 교회를 쉽게 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하여 그 20억원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그리고 만만치 않은 십자가를 스스로 졌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 십자가를 지면서도 의에 대한 보상이 무엇인가를 회의하지 않고 있으며 그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교인들도 이 일에 함께 동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동안 교회와 교인들, 특히 목사인 내가 자꾸 빠지는 함정은 그 의와 십자가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영적인 교만함입니다. 마음속에 자꾸 ‘우리 동안교회는 대단한 교회이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대단한 목회자이다. 아무나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목회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며 그것을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나를 향하여 하나님께 새벽에 욥기 35장을 통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7절)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8절)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일이 얼마나 우리의 경건생활을 위하여 중요한지 모릅니다. 의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아니하고 의를 행하다가 손해를 보고 십자가를 지게 되어도 그 자체로 감사하는 삶을 살며, 그 의를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우리의 의가 참 의가 될 것이며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자신의 의를 대단치 않게 여기는 믿음과 겸손함을 주시옵소서. 아멘.

흉 예언자와 명의
그 동안 설교나 강의 중에 나 자신을 가리킨 표현 중에 가장 많이 쓴 말이 ‘젊은 목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아이가 제 엄마에게 “아빠가 젊기는 뭐가 젊어요?”했다는 이야기를 아내로부터 전해 듣고 정말 내가 이제는 젊은 목사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나이가 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안 되어 약국에서 약을 한병 사 왔는데 약병에 씌어 있는 작은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이렇게 작은 글씨로 인쇄를 해 놓으면 어떻게 하는가 불평하였는데 우연히 안경을 벗고 보니 그 글씨가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야 나는 내눈이 노안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작은 글씨를 보려면 안경을 벗어야 하는데 아내는 그것이 우스운지 볼 때마다 웃곤 합니다.
작은 글씨가 잘 안 보이가 시작하면서 몸도 왠지 좀 좋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 몇 날을 벼르다가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아 보게 되었습니다. 전처럼 병원에 입원을 하여 받는 검사는 아니지만 제법 여러 시간에 걸쳐서 꼼꼼히 검사를 받아 보았습니다.
며칠 후 병원에 가서 의사로부터 결과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는데 어느 교회의 집사라는 그 의사는 목사인 나에게 아주 자세히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검사는 꽤 여러 항목에걸쳐서 진행되었는데 다행히도 크게 문제다 되는 부분이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수치가 정상 범위 안에 들어 있었고 세개 정도의 수치만 정상 범위에 미달되거나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수치가 정상으로 나온 대부분의 항목에 대하여 기분이 좋았고 또 감사도 했지만 자연 나의 관심은 수치가 정상이 아닌 그 몇 가지 부분에 집중되었고 의사도 자연 그 부부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자세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나의 약한 부분에 대하여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아픈 곳을 잘 찾아내는 사람을 명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의사가 아프고 약한 곳을 찾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해주면 해줄수록 믿고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의사를 통하여 자기의 약하고 병든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를 기대하고 바랍니다.
목사도 영적인 면에서 볼 때 의사와 같습니다. 목사는 교인들의 영적인 건강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자신의 영적인 약점을 찾아 지적해 주는 목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허물과 부족에 대하여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만하면 좋습니다. 괜찮습니다. 말만 듣고 싶어하고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하며 그런 말을 잘하는 목사를 은혜로운 목사라고 하고 그렇지 않고 자신의 영적인 치부를 찌르고 지적하는 목사를 은혜가 없는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에게 자신의 건강하고 문제없는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건강하지 못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급적 이야기를 삼가하고 대충대충 넘어가 달라고 알게 모르게 요구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하여 옳지 않은 일입니다. 건강 진단을 받은 후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곳에는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원리는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보면 자신들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아니하고 칭찬만 하며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선지자들을 사람들은 길 예언자라고 불렀고, 그렇지 않고 자신들의 죄와 약점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를 흉예언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참 예언자는 백성으로부터 흉예언자로 불리던 사람이었고 백성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던 길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는 아픈 곳과 연약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면서도 교회에서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아프고 약한 부분을 찾아내어 그곳을 치료해야만 건강한 사람이 되듯 신앙적으로도 자신의 약한 부분과 부끄러운 부분을 찾아내어 회개함으로 치료해야만 건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목회자들은 흉 예언자가 되기를 힘씁시다. 그리고 교인들은 참 명의를 알아보고 좋아하는 교인이 되기를 힘씁시다. 그래야만 건강한 교회와 교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정신만 차리면
96년도를 시작하면서 연초부터 나름대로 참 견디기 힘든 시험들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제법 어려운 일들이 있었지만 아마 그중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시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중에 새벽기도회 시간에 욥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91년 12월에 부임하면서 새벽기도회 시간에 마태복음 1장부터 하루에 한 장씩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 욥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때가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지내는 사순절 기간과 겹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욥기를 읽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사순절 기간이었다는 것이 우연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나는 확신하였습니다. 이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새벽마다 정해진 대로 한 장씩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기가 막히게도 꼭 그때 필요한 말씀들이 주어지는 것을 매번 경험을 하면서 ‘성경을 오늘 아침에 배달된 잉크 냄새 나는 신문과 같다.’는 표현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벽마다 은혜 중에 욥기를 읽으며서 막연하게나마 사순절이 끝나고 부활절을 맞을 때 나의 어려움도 끝이 나서 정말 모든 죽었던 것들이 살아나는 그런 부활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제목을 놓고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새벽(4월 4일 목요일)에 욥기 40장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이나 계산을 해보니 이 욥기가 모래 토요일 새벽이면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을 때 읽었던 욥기가 정확하게 사순절 기간이 끝이 나고 바로 그 다음날 부활주일을 맞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활렐루야!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기도한 대로 그 동안의 모든 문제가 다 풀려서 정말 찬란한 부활주일을 맞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욥기 4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마 이야기를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마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가장 강하고 힘있는 동물 중의 하나로 꼬리를 휘두르는 것 같고 요단강이 흘러 넘친다고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고 요동치 않는 담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마 이야기를 하시면서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하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마 이야기를 하시는 까닭을 깨달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강하고 힘있는 하마를 지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강조하심으로 우리 또한 그렇게 만만하고 호락호락하게 쓰러지고 무너질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욥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에 누구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고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욥 40:24)
하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욥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정신만 차리고 있는다면 어느누구도 너희를 잡을 수 없으며 너희 코를 꿰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서는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이라는 말입니다. 정신은 혼을 의미하는데 본시 인간의 혼과 정신은 하나님의 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불어넣어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정신이요 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에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늘 믿음에서 깨어서 은혜 충만하고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기만 한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힘이 되어 그 어느 누구도 붙잡지 못하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의 코를 꿰지 못할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승천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것이 정신을 차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너지고 자빠지는 중요한 이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삶 속에서 소멸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늘 믿음이 깨어 있어서 은혜 충만한 생활을 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넘볼 수 없는 강하고 담대한 하마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ㅡ 계속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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