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기막힌 새벽2. - 김동호 목사
나는 성경을 믿는다.
학생 때 ‘천국의 열쇠’하는 소설을 아주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치셤이라는 신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인데 목회자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차 목회자 상을 아주 강하게 심어준 소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기회를 다 뒤로하고 중국 땅에 가서 참으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평생을 헌신하는 치셤 신부의 삶을 읽으면서 얼마나 뜨거운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치셤 신부의 삶에 비교도 할 수 없지만 나의 목회 밑바닥에 그때 그 소설을 읽으며서 느꼈던 감동과 결심이 숨어 있음을 느끼고 그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소설에는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치셤 신부의 신학 사상입니다. 그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꼭 하나뿐인 아니 것과 같이 구원을 얻는 기도 꼭 예수뿐이 아니라는 생갹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떠한 종교든지 양심적으로 성실히 믿으면 결국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즈음 우리가 이야기하는 종교다원주의입니다.
나는 그 소설을 밖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치셤의 생각이 옳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것이 합리적인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고 있는 지금도 내 이성과 판단은 치셤과 같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에 끌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교다원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의 종교라고 믿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그다지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나의 이성과 판단을 믿지 아니하고 성경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4:12)
나는 밤중에 방향 감각을 잃고 어려움을 겪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 느낌에는 오른쪽이 서울 방향인 것 같은데 도로표지판에는 왼쪽이 서울 방향이라고 씌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내 느낌애로 운전을 하지 않고 느낌과는 달라도 도로표지판에 씌어진 대로 운전을 하곤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이성적인 판단과 말씀이 서로 다를 때가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많습니다. 그래도 나는 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성경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생각하고 행동을 합니다. 도로표지 만대로 운전을 하여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듯이 성경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실수를 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성경을 믿습니다.
변방 예루살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수축하였을 때 성전은 다 수축이 되었지만 예루살렘은 아직도 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변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루살렘에서 살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성을 지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곳에서 살아야만 했는데 성경에 보면 당시 세 종류의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생활을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의 두목이었고, 둘째는 자원하는 사람들이었고, 셋째는 백성들 중에서 제비 뽑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 백성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백성 중의 십분의 일을 제비 뽑아 예루살렘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 예루살렘은 언제나 처음에는 변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루살렘은 사람들이 보기에 변방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축복의 땅 예루살렘은 오히려 한적한 경우가 많았다. 예수님도 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요,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은 길이라고 하시며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찾는 이가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찾는 이가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땅 예루살렘을 찾으려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고 매력이 없는 변방을 먼저 찾아보아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이 몰려 있는 곳은 예루살렘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은 언제나 나중에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변방에 살게 되었습니다. 시편에 보면 악인은 풀과 같은 생장하고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풀은 나무보다 빨리 자라고 왕성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면 풀은 마르고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라 나무는 더디 자라는 것 같으나 계속 자라나 결국에는 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아 사는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좇아 사는 사람의 삶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처음에는 언제나 변방이지만 나중에는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 변방 예루살렘에 제일 먼저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백성들의 두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두목들이 먼저 변방을 선택하는 나라는 부흥하고 발전할 나라요 두목들이 먼저 중심을 차지하고 힘없는 백성들만 변방에 내모는 나라는 쇠퇴하고 망할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흥할 나라인가를 알아보려면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변방에 있는가 알아보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교회가 될 교회인가 아닌가를 알아보려면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떤 자세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힘들도 낯 안서는 변방에는 교인들만 있고 낯이 서는 존귀한 자리에만 중직자들이 몰려 있다면 그 교회는 결코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도자가 선한 목자인가 아니면 삯꾼 목자인가를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변방에 있기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중심에 있기를 좋아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목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그리고 변방에 가기를 힘쓰십시오!
넷째,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성 예루살렘을 지켜주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는 분이십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시 121:5,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경의 표현대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 채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기를 기뻐하시며 또한 즐겨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을 우리가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을 지킬 힘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은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변방에서 당신의 성을 지켜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선악과 법칙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는 먹어도 좋지만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선악과에만 손을 대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에도 다 손을 댈 수있는 허락을 받은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행하게도 그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생명의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금하신 하나의 열매에 손댐으로 말미암아 손 댈 수 있었던 수많은 것들마저 손댈 수 없도록 금지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할 것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선악과로 주어져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과지위 그리고 간음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손대지 않아도 하나님은 의로운 재물로 우리의 삶을 충만히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물에 손을 대면 하나님께서 는 불의한 재물과 함께 의로운 재물도 걷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아내와 남편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대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한평생 한 아내와 남편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대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한평생 한 아내와 한 남편만을 사랑하며 살면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온 삶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 불의한 관계를 맺고 손을 대면 그것을 마치 선악과에 손을 대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이 주신 올바른 사랑의 관계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의 법칙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 중의 하루는 주일로 우리의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입니다. 그날은 선악과와 같은 날입니다. 우리는 그날에 손을 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날에 손을 대면 나머지 엿새를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선악과의 법칙을 생각할 때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의 소득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니 손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일조는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와 같은 것입니다. 열의 아홉은 얼마든지 우리의 필요를 따라 손을 댈 수 있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 손대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한 선악과와 같은 것입니다.
십일조에 손을 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머지 아홉으로도 얼마든지 우리의 살을 충족케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손을 대면 하나님께서 나머지 아홉도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선악과의 법칙은 선악과에 손을 대면 모든 열매를 잃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면 선악과에만 손을 대지 않으면 그 밖의 모든 열매들이 보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더 중요한 선악과의 법칙인 것입니다. 주일에 손을 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머지 엿새를 축복해 주실 것이며 십일조에 손을 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머지 아홉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억만금이 생겨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것에는 손을 대지 않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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