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의 기쁨 말라기3:7-12
(청지기 주일)
I.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시편 23편을 패러디 한 「돈은 나의 목자시니」라는 글이 있습니다.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안락한 침실에 눕게하고 달콤한 술집으로 인도하는 도다. 내 영혼을 병들게 하며 타락의 길로 인도하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호주머니에 돈이 있음이라. 돈의 권세와 보호가 나를 안전케 하는 도다. 돈이 원수를 만들고 나를 괴롭게 하니 내 머리에는 항상 돈 생각으로 근심의 잔이 넘치는 구나. 나의 평생에 욕심과 정욕이 따르리니 내가 돈을 믿고 살다가 죽으리로다.
돈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은 중성적입니다. 누가 어떻게 벌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위의 노래는 돈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그 돈을 악하게 벌어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의 저주를 비웃는 노래인 줄로 압니다.
스텐리가 쓴 책 가운데 「헌금의 기쁨」이란 책이 있습니다. 스텐리는 어릴때부터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어린시절부터 십일조 하는 것을 생활화했습니다. 어머니가 깨끗한 돈 열 개를 바꾸어서 용돈을 주시면, 하나님 앞에 기도한 후 먼저 하나님 것을 떼고 나머지 가지고 쓰는 법을 훈련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점차 커지면서 헌금의 액수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릴때부터 평생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했지만 언젠가부터 마음속에 헌금하늠 기쁨이 없고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스텐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액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갈등과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헌금의 중요한 가치를 깨닫고 회복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는 헌금에 대한 열정, 헌금에 대한 기쁨이 온전한 헌금, 정직한 헌금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헌금의 기쁨」입니다.
1년에 한 번씩 매월 1월이 되면 청지기 주일을 선포하고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새로 교회에 나오신 분들은 오늘 설교가 부담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만약 부담이 된다면 거룩한 부담이 되기를 바랍니다. 의외로 오늘 청지기주일 설교말씀에 은혜 받고 신실한 성도 복 받는 성도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몇 년전 제가 청지기 주일 설교를 하는데 일산 신도시로 이사를 왔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정해야 되겠는데 이번주는 이교회 그 다음주는 저교회 다니다 교회가 결정이 되지 않는 겁니다. 금식기도를 하러 기도원에 올라갔어요. 금식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 주시는 교회를 찾아가겠습니다.” 고배하고 내려왔는데 누군가 한소망교회를 소개하더랍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찾아간 날이 십일조 설교를 하는 주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러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 했지만 강력하게 성경대로 목사님이 타협하지 않고 정확하게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설교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청지기 주일 설교를 듣고 ‘이 교회에 내 영혼을 맡기면,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 복 받겠구나’하고 생각한 후 등록했습니다.
세계적인 성령과 치유사역자 베니힌의 책 가운데 “예수믿는 사람들이 부자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책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된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발견하고 나면 부자로 못 사는게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배울 때 잘 배우라는 겁니다. 운동 선수가 되려면 기본 자세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초를 제대로 배워야 운동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생활도 선수가 되려면 출발할 때 기본부터 잘 배워야 합니다.
저는 목사가 되고도 오랫동안 청지기 주일 설교를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제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종아, 너 정말 너희 교인들을 사랑하니! 예. 너희 교인들이 부자로 살기를 원하니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니? 부자로 살기를 원하지요. 종아, 너 이 민족이 정말 부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느냐? 네. 너 정말 나의 종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신실하게 바르게 가르치고 선포하고 바르게 살아가기를 원하느냐? 네. 그러면 십일조 설교를 해야 하느니라. 종아, 담대하라 강하라. 너희 성도들을 어린아이로 생각지 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1-2년에 한 차례 정도 청지기 설교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37가지 비유 가운데 무려 17가지가 재물에 대한 비유입니다. 성경연구가들의 말을 빌리면 성경에 물질관리에 관한 구절이 2084개로 구원의 진리에 관한 말씀보다 무려 10배나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셨지요. 여기서 재물이라는 단어를 원문에서는 맘몬, 돈 귀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물질을 바르게 벌고 바르게 드리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영적전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기보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네 소속이 어디냐?” 하나님이냐 맘몬이냐, 천국이냐 이 세상 나라냐 하는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어디에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소속 그리고 신앙의 수준을 알 수 있고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돈 버는 것은 재주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것은 재주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인격이 있어야 합니다. 돈 버는 것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비슷합니다. 돈 버는데도 특별히 인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거기에 신앙이 있고 인격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 쓰는 것은 종말이요 심판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지고, 하늘백성과 땅의 백성들이 나누어진다는 말입니다.
죠지 스위팅(George Sweeting)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이 끝나는 마지막 날, 내가 얼마나 벌었는가? 이것은 하나도 중요한 질문이 안될 것이다. 그때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나는 얼마나 주었는가? 가치 있는 사역과 놀라운 목적이 있는 그것들을 위해서 얼마나 나는 드릴 수가 있었는가? 하는 물음일 것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개똥이라는 바보와 쇠똥이라는 바보가 살았습니다.
옛날, 개똥이는 열심히 일을 하여 큰돈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돈을 집에 놔두는 게 불안했습니다.
‘어떡하지? 그래, 산에 묻어 두자. 하지만 누가 파내 가면 안 되는데…….’
개똥이는 산으로 올라가 돈을 묻어 두었어요. 그리고 팻말을 세웠어요.
<나는 이 곳에 돈을 묻어 두지 않았다 - 개똥이>
‘“하하하, 이젠 안심이다!”
개똥이는 손을 털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같은 마을에 쇠똥이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이상한 팻말을 보게 되었어요.
‘뭐, 그렇다면 여기에 돈이 묻혀 있나, 안 묻혀 있나 파 봐야지.’
쇠똥이가 땅을 얼마쯤 파보니 돈이 나왔습니다.
‘바보 같은 개똥이 녀석! 돈을 묻어 놓고는 안 묻어 두었다고 써 놨구나!’
쇠똥이는 돈을 들고 산을 내려오려다, 혹시 의심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팻말을 꽂아 두었습니다.
<나는 이 곳에 묻혀 있던 돈을 가져가지 않았다 - 쇠똥이>
다음 날, 개똥이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흙이 파헤쳐져 있질 않겠어요? 그래서 얼른 파 보니 묻어 둔 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개똥이는 털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었습니다. 울다가 보니, 쇠똥이가 꽂아둔 팻말이 보였습니다.
‘뭐? 쇠똥이는 돈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옳아, 이제야 알겠군.’
그 즉시 개똥이는 부랴부랴 마을로 내려 왔습니다.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야! 내 돈 훔쳐 간 이 나쁜 도둑놈들아! 쇠똥이만 빼놓고 몽땅 다 나와! 니네들 다 죽었어!”
바보이기는 개똥이 쇠똥이 만은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 바보라서 살아 계시고 어디나 계시고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II. 돌아 오라
오늘 본문은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포로에서 돌아온 후 고레스의 도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기를 이제 성전 건축만 끝나면 자동적으로, 요술같이 하늘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는데 게을렀습니다. 감사생활에 게을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읍니다.
말라기서는 1장: 감사생활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책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눈먼 것, 병든 것, 찌든 것 가지고 나와서 너희들 예배하려 하느냐?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이 방만하게 살았습니다. ‘정치 지도자들 얼굴에, 종교지도자들 얼굴에, 제사장들 얼굴에 내가 똥칠을 하겠다’라고 선언을 하는 말씀이 말라기서 2장입니다. 그리고 3장의 문을 열면 ‘돌아오라! 돌아오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돌아오라는 애절한 하나님의 외침과 부르짖음이 들립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영적인 지도력을 상실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향하여, 경제파탄에 빠져있는 전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돌아오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7절에서도 세 번씩이나 돌아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라. 무릎이 닳도록 엎드려서 기도해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심히 전도해라”고 하실 것 같은데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참으로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가 십일조 떼어먹었다”고 지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백성들아 회개하라 해 놓고 왜 돈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말라기서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은 돈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 인격,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재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함부로 살았습니다. 방만하게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회개하게 하신 후 “죄값으로 너희들 다리 하나 잘라라” 하는 게 쉽습니까? 아니면 “너희들 그동안 회개하는 마음으로 헌금해라”하는 게 쉽습니까? 헌금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너희들 그동안 떼먹은 것 하나님한테서 도적질 한 것 1,000만원 내 놔라” 그게 쉽습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네 자식 하나 죽여서 하나님 앞에 바쳐라” 어느 쪽이 쉽습니까? 돈 회개가 가장 기초적인 회개임과 아울러 가장 쉬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이 회개 못하면 다른 회개 못합니다. 또 한편 이 회개가 마지막 회개요, 마지막 결단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냥 십일조 떼먹었다 그러지 않고 도적질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네 시간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네 직업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네 사업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생명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너희 나라와 온 백성 교회와 우주 삼라만상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나다.” “하나님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청지기다. 너희들이 청지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는 징표가 있어야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십일조다.” 그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과 선언 없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며 조용히 기도하고 말라기서를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제게 소중한 교훈을 하나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부지런히 땀흘리고 일해서 열 개를 벌었는데 그중에 하나를 하나님 앞에 갖다 바치는 것이 십일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열 개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열 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열 개 중에 하나를 받으시고 나머지 아홉을 선물로 은혜로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III. 선악과는 오늘도 있다: 대표성의 원리
십일조는 선악과와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선악과가 저주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잘 연구해 보면 선악과는 축복의 나무였습니다. 많은 나무들이 있었습니다만 수많은 나무들 가운데 선악과는 메시지를 가진, 말씀을 가진 나무였습니다. 다른 것 아무리 따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는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종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가던 청교도들이 마지막에 사랑하는 자식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종자를 저들에게 먹이지 않았습니다. 날고기를 잡아 먹으면서도 종자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왜? 종자는 대륙에 가서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만큼은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종자였습니다. 은혜의 종자였습니다. 내 삶의 내 생명의 종자였습니다.
이것을 소중히 잘 지키면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따먹고 나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지키면 축복이요 따 먹으면 저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은혜의 선악과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선악과입니다. 소중히 잘 간직하면, 믿음으로 아멘으로 순종하고 받아들이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천국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지키지 아니하고 순종하지 아니하고 짓밟고 살아가면 우리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 이 말씀에 “아멘”하면 그리스도인이요 “글쎄요”하면 구원의 문은 닫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에도 선악과가 있고 물질에도 선악과가 있고 은사에도 선악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잘라 드려야 할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Representative “대표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범죄한 죄인이 되버리고 말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함께 걸머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입니다. 당신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당신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는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대표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버리면 인간이길 포기한 것입니다. 구원을 버리고 천국을 버린 것입니다.
IV. 물질의 대표자
십일조는 물질의 선악과요, 물질의 대표자입니다. 내가 쓰는 모든 물질의 대표성이 되는 것입니다. 종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소중히 잘 지키면 우리가 쓰는 모든 물질들이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따먹고 살아가면 비록 그 물질을 선한 일에 사용해도 때묻은 돈 하나님으로부터 도적질한 돈, 자기 의를 드러내는 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소중히 지키는 것은 구원을 소중히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를 소중히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징이요 고백입니다.
8절 하반절에 보면 때문에 십일조와 헌물을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얘기하면 십일조는 헌금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저한테 볼펜을 어떤 청년이 빌려갔다고 합시다. 볼펜으로 싸인도 하고 메모도 하고 나서 볼펜을 돌려주면서 어깨에 힘을 딱 줍니다. 오히려 쓴 볼펜을 다시 돌려주는 자신을 더 높은 인격자로 평가하며 으시댄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볼펜 빌려 쓰고 다시 내게 돌려준 것은 신실하다 정직하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선행이 아닙니다.
언젠가 국민일보에 “철없던 시절 하나님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 저지른 잘못을 회개합니다”라는 기사 한토막이 실렸습니다.
이 학교 졸업생으로 현재 공군 모 부대에 재직 중인 박모 준위(54)가 학교측에 한 장의 편지와 50만원짜리 수표 1매를 동봉해 보내며 보낸 편지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지난 1966년 광주 숭일중 종교부장으로 일했는데 급우들이 모은 헌금을 한 친구에게 빌려줬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돈을 갚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저는 졸업할때까지 학교에 헌금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40년간 그때 일을 가슴에 두고 살아 오다 이제야 갚습니다.” 박씨는 또 편지에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 헌금을 빌려간 친구의 이름도, 헌금의 액수도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헌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못한 일만은 ‘마음의 빚’으로 남아 뒤늦게나마 사죄를 구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내 것 아닌 것을 잘못 쓴 죄를 갚고 살겠다는 마음은 대단하다기 보다는 최소한 신앙인의 양심입니다.
V. 십일조를 드리는 방법
십일조를 어디다 갖다 바쳐야 되겠습니까? 오늘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선 십일조는 온전하게 드려야 합니다. 타협하면 안됩니다. 내가 얼마를 드릴까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내가 꼴 먹는 그 자리에, 예배의 자리에 바쳐야 합니다. 내 영혼을 위탁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몸된 집,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고아원에도 갖다주고, 선교헌금 내기도 하고, 이웃을 위해 구제도 하는데, 이것은 십일조의 주인이, 물질의 주인이 자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십일조든 헌물이든 자기가 직접하는 것은 자기 장사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십일조하면서 무명으로 하는 것을 대단한 공로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사랑과 구제는 숨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선포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 교회 모든 헌금들은 선언하고 하는 것이요, 당당히 하는 것입니다.
구제헌금을 한다든지 이웃을 도울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내 돈이 누구에게 갔는지 몰라야 합니다. 기억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말해 믿음은 공개적으로, 선행은 은밀하게!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정직한 십일조는 미루지 말고 모아서 하지 말고 반드시 매월 드리는 것이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문제는 신앙적으로 환경적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교회는 주정헌금을 드릴 수 있게 합니다. 내 믿음의 십일조를 정하고 그것을 매 주일 얼마로 작정하고, 결단을 합니다. 이것은 십일조 하는 사람이 매 주 드리는 주일헌금과는 다른 것입니다. 주정헌금은 일종의 십일조 헌금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십일조를 결단하든 주정헌금을 결단하든 둘 중 하나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정헌금은 분명 십일조는 아닙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가 십일조 드릴 연습을 하는 겁니다.
어떤 분이 십일조를 결단하면서 깜짝 놀랄 일 몇 가지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처음 십일조 뗄 때에 내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파서 놀랐답니다. 그런데 얼마동안 했더니 너무나도 기쁨으로 드릴 수 있어서 놀랐습니다. 아홉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지혜가 생겨서 풍성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날이면 교회에 달려나가고 싶고 하나님 앞에 은혜가 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기름진 삶을 누릴 수 있는 나의 삶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미국의 돈에는 일불짜리나 천불짜리에나 모두 “In God we Trust”(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이 찍혀있습니다. 세계의 돈이 되는 축복을 받은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남북 전쟁의 어려운 때에 한 농촌의 목사가 당시의 재무장관인 췌이스(S.P. Chase)씨에게 건의하고 국회가 승인을 해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VI. 십일조 축복
십일조 잘하는 백성에게 오늘 본문이 많은 것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늘문이 열린다.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하늘문은 언제나 열리게끔 되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베드로가 고백할 때 “천국열쇠를 너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늘문을 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늘문을 열어서 성령충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찬송하고 기쁨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늘 보화 창고를 열게끔 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황충이 금해질 것이다.
농사를 지었으면 주인이 먹고 살아야 되는 거지요. 사업을 열심히 했는데 회사에 황충이 생겨 망합니다. 어떤 가정은 행복한 결혼을 시작했는데 애정생활에 황충이 생겨서 가정이 파탄에 이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살았는데 건강에 황충이 생겨 질병으로 고생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온전하게 드리면 인생에 황충이 먹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셋째,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겠다.
농사를 지었어도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기한 전에 떨어지면 저주받은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70이요 80인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학교에 입학했는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겠다. 결혼생활 시작했는데 결혼이 마칠 때까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겠다. 임신한 여자가 해산하기 전에 낙태하는 것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사업을 시작했는데 중도에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보라”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하나님은 시험 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에 단 한번 오늘 읽은 말라기서에 십일조를 교훈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강조어가 “온전한”입니다. 타협하지 않은 십일조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믿음으로 아멘 하면 좋고,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을 시험이라도 해봐라. 체험이라도 해봐라 그런 얘기입니다.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해 원금을 모두 날렸습니다.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 밀린 임금을 요구했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록펠러는 너무 괴로워 모든 사업과 심지어 생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십일조생활을 해온 록펠러는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음을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십시오.” 록펠러는 통곡했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나를 믿었으면 계속 따라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황금 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석유였습니다. 록펠러는 유전을 발견해 일약 거부가 됐습니다.
록펠러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십일조는 위기의 순간에 더 정직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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