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2:20(12): 갈2:20, 요일4:9-10 2010.11.14(일)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쓰는 말중 가장 좋은 말이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우리는 이 말만 들으면 좋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는 말, “사랑합니다”. 우리 서로 옆에 있는 분에게 말합시다. “사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은 말처럼 쉽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하기 쉽지만 실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랑이 어려운 것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진짜 사랑인지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미국 사람들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I love you. You love me. I love you so much".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사랑을 많이 말하는 미국인들에게 이혼율이 가장 높다는 것입니다. 두 집 건너 한 집이 이혼하는 집입니다.
사랑이 어려운 것은 미국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앵발리드라는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에는 나폴레온의 무덤이 있는 데 무덤 입구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나는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국민과 함께 이 세느 강변에서 안식하노라”. 그 글을 보는 사람마다 감동합니다. “아, 나폴레온이 프랑스 국민을 사랑했구나”.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하면 헷갈립니다. 나폴레온이 프랑스 국민을 사랑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해서 어떻게 헸습니까?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장터로 보내 죽게 했습니다. 모스크바를 공격할 때는 수십만의 프랑스 젊은이들이 얼어 죽었습니다. 그가 프랑스 국민들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랑이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야망을 위하여 프랑스 국민들을 희생시킨 것입니다.
나폴레온만이 아닙니다. 히틀러도 그랬습니다. 그가 얼마나 독일국민들의 우수성을 찬양하고 독일 민족을 사랑했는지. 사람들은 그의 애국심을 믿었으나 결과적으로 독일을 가장 비참하게 만든 장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일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역시 인민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 잘못된 사랑으로 인해 전쟁이 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사람이 될까? 저는 지난 주부터 갈2:20절의 한 부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는 좋은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는 19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웨슬리 어머니, 당신은 19명의 자녀중 누구를 가장 사랑합니까?” 웨슬리의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아픈 자식이 회복할 때까지는 아픈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집나간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는 집나간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는 그렇게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부모가 자기를 버리는 사랑으로 희생하고 고생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은 나라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렸고 한주희 준위는 전우를 위해 백령도에서 자기 자신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다만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버림으로 시작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살리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은 자기를 버림으로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살려냈습니다. 버릴 뿐 아니라 살렸습니다. 살리는 데 까지 가야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살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리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놓아주는 것입니다.
살리는 사랑을 위하여 예수님에게 배울 첫 번째는 놓아주는 사랑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갔는 데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한 여자가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발각된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돌로 쳐죽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분노에 찬 얼굴로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여인을 향하여 막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땅에 무엇인가 쓰시더니 일어나서 말씀했습니다.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을 듣자 어른으로 시작하여 하나씩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중에 죄없는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요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주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붙잡아 두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풀어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문제가 많고 어쩌면 내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그만 두면 어디 가서 실수하기 딱 알맞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계속 내 수하에 두고 내가 조종하고 싶습니다. 더구나 그 사람은 나에게 잘못한 것도 있습니다. 나는 고의적으로 그를 보내지 않고 내 영향력 아래 둡니다. 가끔 말을 안 들으면 "네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하고 과거의 약점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는 여인을 놓아주지 않고 붙잡고 있으면서 돌을 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는 인간이 행한 행위에 근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신앙 체계를 말합니다. 율법주의는 끊임없이 사람을 행위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의 잘못된 행동을 빌미로 그를 묶어 둡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서로 망합니다.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그나 나나 다 하나님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으셨듯이 그도 있는 그대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는 여인도 죄인이지만 나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나도 죄인인데 죄인이 죄인을 어떻게 판단합니까?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용서하는 길입니다. 용서는 다른 사람을 나의 판단으로부터 자유케 하여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앞에서 나나 그나 다 똑같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가 죄인으로 나를 책임질 수 없듯이 죄인인 나도 그를 책임질 수 없슴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를 나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유안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어떤 무명의 시인이 “가게 하라”는 시를 썻습니다.
가라는 것은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요, 내가 너 대신 해 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가라는 것은 나와 너의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라는 것은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요, 동시의 나의 삶도 내가 마음대로 못한다는 뜻이다. 가라는 것은 너를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도 너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가라는 것은 너에 대하여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요, 하나님께 보내 하나님이 너를 돌보게 하겠다는 뜻이다. 가라는 것은 그를 판단하려 함이 아니요, 그도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라는 것은 내가 너를 내 뜻대로 조절하려 함이 아니요, 너를 있는 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나에게 실수하고 잘못한 사람을 자꾸 보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살고 그도 삽니다. 다윗이 잘한 것은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가게 한 것입니다. 사실 므비보셋은 가게 해서는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원수 사울의 손자였으며 언제든지 반역을 꾀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그의 손에서 풀어 하나님께 보냈습니다. 사울의 재산을 다 그에게 주고 그를 평생 다윗의 상에서 먹게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보다 모압과 암몬을 정복한 것보다 큰 일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을 예수님의 살리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내가 묶어 둔 사람을 가게 합니까?
제가 고등학교때 한 목사님댁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댁 책상위에 바를 정자로 크게 써 놓은 글씨 몇 개를 보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호기심이 많아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 책상위에 있는 바를 정자는 무엇입니까?” 목사님이 씩 웃으시더니 말했습니다. “교회안에서 손 볼 사람을 안 보고 넘어간 숫자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제가 목회하면서 보니까 교회안에서 좋은 의미에서 손볼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조언하고 싶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가르치고 싶고, 좋은 의미에서 도와줄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일일이 데려다가 가르친다고 사람되는 것 아닙니다. 그저 참고 기도하면서 기다리면 하나님이 고칩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참고 저 사람은 이래서 참고 그러다 보면 어느날 그가 달라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친 것입니다. 목회는 목회자가 신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하나님께 보내 하나님이 고치게 하는 것입니다.
잘 보내는 것은 남만이 아닙니다. 나도 나를 잘 보내야 합니다. 한 남자가 의사에게 찾아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두통이 너무 심해 괴롭습니다. 어떻게 좀 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러죠.” 의사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먼저 몇 가지 체크를 좀 해야겠습니다. 술을 많이 드십니까?” “술은 손도 대지 않습니다.” “담배는 피우시나요?” “담배요? 담배는 평생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묻기 곤란합니다만 혹시 밤에 외도를 하시나요?” “저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전 매일 밤 늦어도 열 시까지는 잠자리에 듭니다.” “그런데도 찌르는 듯한 두통이 있다는 말씀이죠?” “예". 그럼 됐습니다. 답은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을 너무 빡빡하게 조이고 있습니다. 좀 느슨하게 풀어 놓으세요. 그러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책임질 수 없듯이 우리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를 너무 조이지 말아야 합니다. 나나 남이나 놓아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지만 모든 일을 대신 해주지는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눅5장에서 밤새도록 그물 던졌지만 고기 못잡은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가 가서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 말씀했습니다. 그랬더니 고기가 많아 도저히 베드로 혼자 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다른 어부들을 불러 간신히 그물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엇하고 계셨는가 보면 바라만 보고 계십니다. 고기 못잡은 사람들에게 고기잡게 해 주신 분이 그물 들어 올릴 때는 아무 것도 안합니다. 이상합니다.
사랑이 없으신가 하여 다른 경우를 봐도 같습니다. 중풍병자가 고침받으러 왔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선포하자 병이 나았습니다. 그랬으면 다가가서 걸어가도록 도와 주면 좋을텐데 예수님은 안 도와 줍니다. 스스로 걷도록 합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지체합니다. 가보니까 이미 죽었습니다. 마르다가 불평처럼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냐 하는 것입니다. 조그만 일찍 오셨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것입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 말이 맞을 뿐 아니라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렇게 능력많으신 분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지 못하게는 못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지 않게 안하셨고 또 죽은 뒤에도 일찍 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사랑이 무엇이냐와 관련됩니다. 사랑은 애정이지만 애착은 아닙니다. 애착과 사랑은 비슷합니다. 둘다 관심이 있고 둘다 상대방을 돌봅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애착은 상대방의 성장에 관심이 없고 사랑은 상대방의 성장에 관심이 있습니다. 어머니들이 자칫 빠질 수 있는 사랑이 애착의 함정입니다. c.s 루이스가 쓴 “네 가지의 사랑”이란 책에 보면 피제트 부인이란 여자가 나옵니다. 이 부인은 가족들을 위하여 철저히 헌신하는 여자입니다. 그는 집안의 빨래를 모두 혼자 도맡아 합니다. 웬만하면 세탁소에 맡기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집에 있으면 그를 위해 언제나 따뜻한 식사를 지었습니다. 밤늦게까지 귀가하지 않는 식구가 있으면 그는 항상 자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새벽 두 세 시라도 상관없었습니다. 또 그녀는 모든 옷은 손수 만들어 가족들을 입혔습니다. 그녀에게는 허약한 딸이 있었는 데 어머니는 딸을 병원에 안 데려가고 집으로 가정의를 불러 치료했습니다. 의사가 집에 와도 딸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이야기하면 끝납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했습니까? 그 딸은 자기 몸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자기 건강에 대해 어떠한 걱정도 책임도 질 수 없었습니다. 단지 어머니만 있으면 됐는 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생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모성의 잘못된 애착이 자식의 인생을 포기하게 만든 것입니다. 모성의 사랑이 애착에 빠지면 이렇게 됩니다. 모성애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애착에 빠지면 실컷 헌신하고도 자식을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자, 어머니가 자식을 먹입니다. 그것은 머지않아 자식이 스스로 먹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먹을 때까지만 먹이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가르칩니다. 그것은 머지않아 그들을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스스로 할 때까지만 가르칩니다. 자기를 버리는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버려도 살리지 못하면 나쁜 사랑입니다. 버릴 뿐만 아니라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스캇 펙이라는 정신과 의사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랑은 자기나 혹은 타인의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의지다”. 중요한 것은 “성장”입니다. 자라고 하고 성장시켜야 사랑입니다.
고3 학부모 여러분, 어느날 여러분이 공부하는 고3자녀에게 교회나오지 말고 공부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아이가 대학 들어가면 스스로 교회 나올까요? 제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사랑입니까? 자녀를 살리지 못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헛 것입니다. 게으른 자녀를 위해 엄마가 다 해줍니다. 엄마는 버리고 살았지만 자녀는 살리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아이를 살리지 못하면 나쁜 사랑입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가 여러분을 위해 헌신합니까? 감사히 여기십시오. 그러나 아내도 여러분 때문에 성장하고 자랍니까? 얽어매지 말고 시간을 주십시오. 아내가 자라게 해야 사랑입니다. 살리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자라게 하는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살리는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 요일4:9-10절을 보시겠습니까? 요일4:9-10,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다같이 “살리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려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회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화목제란 구약의 제사중의 하나입니다. 구약에는 여러 가지 제사가 있습니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 이 네 가지 제사의 특징은 자기 죄 때문에 다른 양을 죽이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죄 때문에 드린 제사가 “속죄제”입니다. 사람에게 지은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가 “속건제”입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 때문에 제사가 “소제”입니다. 다 자기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남의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가 있습니다. “화목제”입니다. 화목제는 남의 죄를 위해 내 양을 잡는 제사입니다. 소나 양을 성전에 끌고 와서 물로 씻고 제사장이 그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누구 누구의 죄를 이 양에게 전가합니다”.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왜 속죄제가 아니고 화목제입니까? 남의 죄를 내가 뒤집어 쓴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버려 우리를 살린 이야기를 저는 6.25 전쟁때 있었던 미군 실화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1952년 겨울, 부산 근처의 어느 관측소 벙커에 미군 해병대 상병 둘이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이름은 잭 로빈슨과 팀 케이시. 그들은 미국에서부터는 훈련받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친구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둘은 버지니아 주 콴티코의 탄약 및 폭약 학교에서 만나 휴가도 함께 다녀오고, 얼마 후 캘리포니아 주 캠프 팬들턴으로 옮겨 상급 보병훈련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들의 소속 연대는 1951년 가을,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날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가벼운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는 데 둘은 벙커에 웅크리고 앉아 서로 담배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수류탄이 떨어졌습니다. 정확히 두 사람 중간이었습니다. 북한병사가 미군을 향해 던진 수류탄이었습니다. 수류탄은 곧 터질 태세로 데굴 데굴 굴러 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수류탄을 처리해야만 했습니다. 케이시가 먼저 수류탄을 보았습니다. 수류탄을 보자 케이시는 담배꽁초를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멀리 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수류탄을 덮쳤습니다. 수류탄은 곧 터졌고 케이시의 복부에서 폭발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친구를 잃은 로빈슨은 아픈 가슴을 안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목숨을 버린 친구 케이시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케이시를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아예 죽은 친구 케이시 이름으로 개명했습니다. 성은 본래 성인 잭, 이름은 케이시의 이름을 따서 잭 케이시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두 사람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양쪽 집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자기 본가요 또 하나는 케이시의 집이었습니다. 케이시에게는 홀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는 크리스마스 휴가가 되면 본가와 시카고의 케이시 고향을 둘 다 방문했습니다.
어느 여름, 케이시는 불시에 케이시 어머니의 집에 들렀습니다. 어머니와 케이시는줄곧 손을 잡고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저녁식사후 둘은 거실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케이시의 살아 있던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케이시가 물었습니다. “어머니, 케이시가 정말로 저를 사랑했을까요?” 어머니가 웃었습니다. “잭,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케이시가 말했습니다. “어머니, 정말일까요?” 슬픔에 잠긴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케이시가 너를 위해 그 이상 뭘 더 해줄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어머니는 울었습니다. 6.25때 실제 있었던 미군 실화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갈2:20,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것을 믿습니까?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것임을 믿습니까? 동시에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것임을 믿습니까? 케이시는 친구를 위해 죽었으나 그는 친구의 마음안에 친구의 이름안에 친구의 목회안에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었으나 어디 가신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 이름이 크리스쳔 아닙니까? 크리스쳔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이 아닙니까? 우리 이름속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살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신 그 분이 지금은 우리의 이름안에 우리 마음안에 우리의 삶안에 살아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버리실 뿐 아니라 살리신 분, 그 분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나무가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쉘 실버스타인(Shall Silverstein)이 쓴 이 짧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는 예수님을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어느 시골에 나무 한 그루와 소년이 있었다. 나무는 소년을 사랑했다. 어린 소년이 처음에 나무에 바랬던 것은 나뭇가지에 올라 사과를 따먹고 그 그늘 아래 눕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자라면서 욕심이 생겼다. 사과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이었다. 나무는 그때 아무 말없이 소년에게 사과를 주어 그 돈으로 삶을 즐기게 한다. 그러나 소년의 욕심을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예 나뭇가지를 베어 처자식을 위해 집을 짓고 몸통까지 베어 배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무는 이번에도 소년의 소원대로 나뭇가지를 베어 집을 짓게 하고 자기 몸통까지 주어 배를 짓게 한다. 배를 지은 소년은 멀리 항해를 떠난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멀리 멀리 떠난다. 넓은 바다로 나간 소년은 따분한 삶에서 벗어나 마음껏 세상을 즐겼다. 그러나 거친 파도는 그를 피곤하게 했다. 소년은 돌고 돌아 자기를 사랑하는 나무에게도 다시 돌아온다. 나무는 이미 소년에게 모든 것을 주어 더 이상 줄 것이 없었다.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늙고 병든 그루터기뿐 그러나 나무는 소년에게 마지막으로 줄 것이 남아 있음을 기쁘게 여기며 늙은 자기 몸을 소년에게 내준다. 노인이 된 소년은 평생 자기를 사랑한 나무의 그루터기에 앉아 남은 인생을 살았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주신 것을 믿습니까? 하나 밖애 없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의 몸을 주셨습니다. 그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사과도 주시고 나뭇가지도 주시고 몸통도 주시고 마지막에 하나 남은 그루터기까지 주셨습니다. 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까지 내가 붙잡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놓아주십시오. 내가 책임지지도 못하고 고치지도 못합니다. 사랑하되 애착에 빠지지 마십시오. 애착은 애정이 아니라 자기 사랑입니다. 사랑은 결국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살리신 것처럼 살리며 사십시오. 사랑은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가 살 때 사랑으로 살게 하옵소서. 사랑만한 힘이 없고 사랑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되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놓아준 것처럼 매일 우리가 붙들고 있는 사람을 놓아주게 하옵소서. 예수님 때문에 바라바가 놓여진 것처럼 우리가 책임지지도 못하고 변화시키지도 못할 사람들을 부지런히 놓아주게 하옵소서. 사랑이 애착이 되거나 독점이 되지 않도록 하옵소서. 사람을 자라게 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 무엇보다 주님이 보여주신대로 살리는 사랑을 하게 사옵소서. 자기를 버려 우리를 살리신 주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모든 것을 주어 우리를 살리신 주님, 우리도 가족을 살리고 직장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영혼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게 하옵소서.
갈2:20(12): 갈2:20, 요일4:9-10 2010.11.14(일)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갈2:20,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사랑은 놓아주는 것입니다.
요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사랑은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살리는 것입니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회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갈2:20,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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