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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2:20(9): 갈2:20, 엡4:12-16 나는 예수님의 몸으로 삽니다 2010.10.31(일)

2:20(9): 2:20, 4:12-16 2010.10.31()

나는 예수님의 몸으로 삽니다

지난 한 주는 가을 새벽부흥회로 모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평소에 새벽에 일어나지 못한 교인까지도 모두 일어나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얼마나 열심인지 의정부에서 매일 택시타고 오신 분도 있었습니다. 충북 음성에서 새벽 230분에 출발해서 온 가족도 있었습니다. 거제에서 직장 다닌 분은 아예 부흥회를 위하여 한 주간 휴가를 냈습니다. 늦게까지 일하는 대기업 임원은 밤 12시에 퇴근하고도 새벽 4시에 나왔습니다. 수능을 앞둔 학생은 밤늦게 공부하고도 새벽에 일어나 교회나와 기도하고 아침 먹고 학교로 갔습니다. 새벽 잠을 설치며 아이들을 깨워 업고 안고 교회 나온 젊은 부부들,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도 불구하고 원근 각처에서 모인 수많은 성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분명 하나님이 크게 축복하시리라 믿었습니다.

 

동시에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 신앙은 몸으로 하는 것이구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약합니다. 툭하면 다치고 병듭니다. 거기다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은 죄까지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 육체를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우리가 늘 의심하고 살아야 할 죄악 덩어리는 아닙니다. 우리 육체가 약하지만 그 약한 육체로 하나님을 예배하면 그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이 됩니다. 우리 몸이 약해도 그 몸으로 기도하고 그 몸으로 봉사하고 그 몸으로 전도하면 하나님이 우리 몸을 자신의 도구로 삼습니다. 신앙은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예배하고 몸으로 기도하고 몸으로 봉사하고 몸으로 전도합니다.

 

두말할 것이 없이 우리 몸은 약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40대는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고, 50대는 잘 생긴 사람이나 못 생긴 사람이나 똑같고, 60대는 남편, 아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똑같고, 70대는 남자나 여자나 똑같고, 80대는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똑같고, 마지막입니다. 90대에는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다”. 육신적으로 볼 때 사람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2:20에서 말한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을 마무리할 때입니다. 첫 시간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친히 만드셨다. 그래서 소중하다. 둘째 시간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는 죄를 일으키는 육신이 있다. 그래서 매일 훈련해야 한다. 오늘은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사용하시기 원하신다. 그때 우리 몸은 예수님의 몸이 된다.

 

인간의 영혼과 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옛날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다. 몸속에 영혼이 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영혼이다. 그 영혼이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떼이아르드 샤르뎅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체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인 체험을 하는 영적 존재다”. 우리는 영을 가진 육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육을 가진 영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강조점이 영에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아십니까? 영적인 존재인 우리가 우리 영안에 육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영이 육을 소유했다면 영이 육을 다스립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육이 영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종적으로 영과 육이 예수님을 닮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먼저 계획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예수님의 몸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많은 정의와 설명이 있지만 바울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4:12입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바울의 이 말씀은 정말 탁월한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 없이는 살 수 없듯이 교회도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이 살아가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뇌의 지시를 받아야 하고 또 하나는 먹어야 합니다. 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뇌입니다. 뇌는 몸의 윗 부분에 있을 뿐 아니라 몸을 지시하고 명령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교회의 머리, 곧 뇌라고 말합니다. 4:15,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언젠가 실험실에서 뇌를 제거한 개구리를 보았습니다. 개구리에서 뇌를 제거하자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맹목적으로 헤엄치며 다녔습니다. 뇌로부터 어떤 명령과 지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예수님은 또한 그 머리입니다. 성경은 무려 일곱 번이나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뇌의 명령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손을 들었을 때 손이 무슨 일을 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뇌가 명령한 대로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지시받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몸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몸은 뇌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듯이 몸은 또한 먹어야 활동합니다.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양식이 필요하듯이 우리 영혼을 위해서도 생명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양식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몸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의 몸은 생명의 떡이요 예수님의 피는 생명의 음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주신 떡과 피를 우리가 매일 기억하도록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이 성찬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우리 삶에서 매일 마시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네 번 식사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마다 보여주신 식사의 순서가 있습니다. 네 개의 동사입니다.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들에게 주시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일 때 그렇게 하셨습니다.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게 하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시매”. 여기에 네 개의 동사가 나타납니다.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니”. 사천명을 먹일 때도 그렇게 했고, 제자들과 함께 들었던 최후의 만찬때도, 엠마오의 제자들과 식사할 때도 그랬습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실 때도 그 순서대로 주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몸을 take, 가지게 하사, thanks, 하나님께 감사하고, break, 자기 몸을 깨뜨려, give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다는 우리가 교회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취하는 네 가지 순서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크게 두 가지 양식을 먹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둘째 예수님의 몸인 성찬을 먹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먹습니까? 말씀을 우리가 take, 가지고, thanks, 하나님께 감사한 후, break, 그것을 쪼개고 떼어서, give,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인 성찬도 어떻게 먹습니까? 먼저 빵을 우리가 take, 가지고, thanks, 하나님께 감사한 후, break, 그것을 떼어서, give 우리가 먹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우리는 그 몸을 먹고 삽니다.

 

교회생활은 예수님 몸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생활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몸을 먹고 예수님의 몸안에 사는 것입니다. 몸이 얼마나 신비한지. 의사이며 선교사인 해리 크라우스가 쓴 책이 있습니다. “비밀은 몸에 있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크라우스는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의학적으로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지체는 개별성과 연합성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기능이 있는가 하면 그 기능이 전체를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간세포는 근육세포와 기능이 다르답니다. 피부세포는 피부세포의 일이 있고 갑상선 세포는 갑상선 세포의 일이 있답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세포는 하나입니다. 우리 몸에 피를 흘리면 세포들은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 쪽에 있는 체액을 혈관을 통해 저 쪽으로 빠른 속도로 나릅니다. 그때 체액은 눈 깜짝할 사이에 100조나 되는 몸의 모든 세포로 퍼져나갑니다. 체액을 주고 받아 몸을 살리는 그 일을 위해 서로 다른 세포들이 일시에 그 일을 합니다. 어떤 부분이 사고가 나 피가 모자라면 우리는 얼마나 보내죠?” 하고 묻는 세포가 없습니다. 사고로 근육세포가 손상되어 피가 필요하면 간세포가 자기 체액을 나눠주면서 너무 많이 주면 내가 손해보지 않나요?” 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한 쪽이 필요하면 다른 쪽이 무조건 자동적으로 주고 받는 시스템, 이것이 우리 몸의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의 몸인 교회안에 사는 신자의 삶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말씀 16절입니다.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에 각 마디”, “지체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지체들이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개역개정판으로 보면 연결되고 결합되어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being fitted and held together". 서로 잘 들어맞고 함께 움직여 마치 공장에 있는 기계의 톱니바뀌처럼 서로 착착 들어 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몸의 지체라는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 몸의 모든 지체는 개별성과 연합성을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기능적으로는 서로 다르면서도 몸을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리는 다리 일하고 허리는 허리 일하지만 허리가 아프면 다리도 아프고 다리가 아프니까 허리도 구부립니다. 눈과 귀는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시력이 약한 사람은 청력에 의존하고 청력이 약한 사람은 눈을 의지하고 살아 갑니다.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는 손이 없는 대신 발로 글을 씁니다. "오체 불만족"의 오다케는 발이 없는 대신 몸둥아이로 운동합니다.

 

교회안에 사는 우리는 서로 샴쌍둥이와 같습니다. 샴쌍둥이는 몸이 서로 붙어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어떤 아이는 배가 붙어 있고 어떤 아이는 엉덩이가 붙어 있습니다. 샴 쌍둥이의 정확한 이름은 시암 쌍둥이입니다. 시암은 태국의 옛날 이름입니다. 오래전에 태국에서 한 기형아가 태어났습니다. 부모들은 이들을 고치고자 미국으로 갔지만 결국 고치지 못하고 평생 붙어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각자 결혼도 했고 미국 시민권도 같이 얻었습니다. 그리고 63세에 같이 죽었습니다. 샴쌍둥이는 몸이 붙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 각자 자신의 장기를 가졌습니다. 서로 달랐지만 하나였습니다. 개별성과 연합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각자의 기능이 있었지만 늘 함께 하면서 함께 울고 함께 웃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몸안에 사는 교회생활입니다. 한 몸을 이루면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합니다. 공감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없으면 못삽니다. 상호의존입니다. 서로 도와 주고 책임을 집니다. 상호책임입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꿈을 꿉니다. 공동비전입니다. 그러다가 같이 죽고 같이 삽니다. 공동운명입니다. 이것이 연결되고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되면 없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고립주의입니다. 고립주의는 혼자 살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야 어떻든 나만 혼자 살겠다는 것입니다. 몸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경쟁주의입니다. 경쟁주의는 몸끼리 서로 잘하려고 다투는 것입니다. 오른쪽 눈보다 왼쪽 눈이 더 잘보겠다는 것입니다. 왼발보다 오른 발이 더 빨리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짝짝이라 합니다. 또 하나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몸끼리 서로 누가 잘했나 못했나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이지선 양은 교통사고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얼굴이 화상을 입었다고 손이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손이 얼굴을 가리고 날마다 만져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뻐졌습니다. 스웨덴의 복음가수 레나 마리아는 어릴 때 사고로 두발과 두 손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짐승처럼 기어다녀야 했습니다. 그때 뜻밖에 목소리가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계적인 찬양가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안에서 서로 의지하고 사랑합니까? 서로 다르지만 한 몸을 위해 서로 연합합니까? 다른 지체가 약할 때 비난합니까? 감싸 줍니까? 다른 사람이 잘못할 때 책임을 묻습니까? 책임을 집니까? 영국의 c.s.루이스는 세 종류의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필요의 사랑(need-love), 선물의 사랑(gift-love), 감상의 사랑(appreciative love)입니다. 필요의 사랑은 요구하는 사랑입니다. 내가 필요해서 원하는 사랑입니다. 아기가 젖이 필요해서 엄마를 찾습니다. 달리다가 목이 말라 물을 찾습니다. 며칠 굶어 음식을 찾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들이 구하는 것을 줍니다. 필요 때문입니다. 몸은 서로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곳입니다. 필요가 존재의 목적은 아니지만 필요가 없으면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서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십니까? 선물의 사랑이 있습니다. 선물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줘야 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주는 것입니다. 어떤 목장에 한 아이가 급성폐혈증으로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목장식구들이 조를 짜서 밤마다 나와 기도합니다. 기도한 후 병원으로 가서 밤을 새워 간호합니다. 이 아이가 퇴원했습니다. 사랑의 선물을 받고 퇴원한 것입니다. 감상의 사랑도 있습니다. 감상의 사랑은 보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그저 보기만 해도 좋은 사랑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필요의 사랑은 나는 네가 필요해라고 말합니다. 선물의 사랑은 나는 네게 주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감상의 사랑은 나는 너를 보기만 해도 좋아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세 가지 사랑을 주십니다. “나는 네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 네가 원하는 것을 다 줄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나는 너를 보기만 해도 좋아”. 교회생활도 세 가지입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한 것을 알아요. 당신에게 내 것을 다 주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을 바라만 봐도 좋아요”. 이것이 예수님 몸안에 사는 삶입니다.

영적인 삶은 예수님의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몸안에 사는 삶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먹습니다. 다음은 교회안에서 예수님의 몸을 이룹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이 되어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몸이 되어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몸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몸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은 목자로 일했습니다. 엘리사를 소를 키우는 농부, 기드온은 손으로 타작하고, 아모스는 뽕나무를 재배하는 농부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손으로 일하는 육체 노동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어부였습니다. 바울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천막을 만들며 선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살전4:11,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일하고 너희에게 명한 바와 같이 종용하여 자기의 일을 할뿐더러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다같이 자기 손으로 일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몸으로 일하도록 몸과 함께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농부는 밭으로, 교수는 연구실로, 과학자는 실험실로, 학생은 도서관으로, 어린이집 교사는 아가방으로, 직장인은 회사, 주부는 가정으로 보냈습니다. 일터는 우리가 몸으로 일하도록 보냄 받은 곳입니다. 몸이 가야 일이요 몸으로 일해야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예수님의 몸으로 세상에 보냅니다.

 

전도도 몸이 가야 합니다. 반드시 전도에는 두 가지가 따라가야 합니다. 시간과 몸입니다. 시간을 내고 몸이 따라가야 전도입니다. 1907년 이후 우리 나라 초대 교회가 지속적으로 부흥된 계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십일조 전도였습니다. 19099, 평안북도 영변에 10명의 기도하는 여신도들이 모여 십일조회라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전도를 위해서 자기 시간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헌신했습니다. 이들은 152주 가운데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5주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약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해서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기는 어려운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몸으로 전도하기로 하고 그것을 위해 일년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5주중 2주는 성경과 교리, 전도법등을 집중적으로 배우고 3주는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나갔습니다.

 

이들의 십일조 전도는 그 다음 해 평양에 52명의 십일조회가 생김으로 확대돼 해주 인천 진남포 서울 수원 원주등으로 퍼져 갔습니다. 그리고 십일조회가 생긴지 9개월만인 19106월에 이런 보고서가 한국교회사에 남게 됩니다. “십일조회는 시작 9개월 만에 전국에 96개 조직되어 모두 1,719명이 교육을 받고 흩어져 2,840회 가정 방문을 통해 5,647명을 만나 전도한 결과 개종자 830명을 얻었다”. 몸으로 전도를 시작한 10명의 부인들의 작은 헌신이 큰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의 십일조를 낸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내게 됩니다. 일년중 5주에서 두 달, 두 달에서 세 달, 그렇게 전도에 헌신한 사람들이 나오고 거기서 전도부인이 나오고 그래서 교회는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몸이 가야 전도인 것을 아십니까? 어제도 우리 교회 젊은 부부들이 아침 일찍 나와 송현초등학교에 나가 전도했습니다. 부흥회때 받은 은혜로 시간과 몸이 되어 나간 것입니다. 그들의 얼굴이 가득찬 웃음을 보며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았습니다.

 

여러분, 선교도 몸으로 가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나라 최초의 순교자 토머스 목사는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나 27세에 대동강변에서 순교했습니다. 몸으로 왔고 몸으로 죽었습니다. 그가 몸으로 죽자 이 땅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 수많은 영혼들이 살아났습니다.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셀러도 몸으로 이 땅을 밟았습니다. 언더우드는 26살 때 <코리아 리뷰>라는 잡지를 보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장로교 선교부에 지원했는 데 세 번이나 떨어졌습니다. 이유는 조선은 목사를 구하지 않고 의사를 구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언더우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지원하다 결국 1885년 꿈에도 그리던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몸이 온 것입니다. 영국의 리빙스턴도 그랬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헌금을 걷는 데 어린 리빙스턴은 헌금할 돈이 없었습니다. 그가 헌금위원에서 말했습니다. “나를 헌금 쟁반위에 올려주세요”. 결국 그는 아프리카의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후 30년동안 문명을 등지고 아프리카에서 선교에 매진하던 그가 1873319, 죽어가면서 마지막 일기를 이렇게 남겼습니다. “나의 왕, 나의 생명, 나의 모든 것, 나의 주님, 30년전 내 몸을 받아 당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셨나이다. 이제 또 한번 내 몸을 바치오니 나를 받으사 주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그리고 죽었습니다.

 

여러분, 멋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몸을 먹고 생명을 얻은 우리가 예수님의 몸으로 교회안에서 사랑하며 살다가 예수님이 몸이 되어 세상에 나가 전도자로 선교자로, 봉사자로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간다면 그것처럼 위대한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장 위대한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돌아간 후 우리의 몸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 고전15:51입니다.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무덤에 누어 있는 몸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말한 것입니다. 순식간에 변화합니다. “순식간이란 말은 헬라어로 아토모”, 여기에서 에서 아톰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아톰은 원자입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올 때 우리는 순식간에 변화됩니다. 영적 존재로 변화됩니다. 어떻게 변화됩니까?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 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여러분, 정말 저는 우리가 이 말씀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 육체의 최후상태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변할 것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모습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육의 몸이 영의 몸으로, 병든 몸이 건강한 몸으로, 죄를 짓는 몸이 거룩한 몸으로, 여기 저기 아프고 깨지고 다치고 늙은 몸이 강건하고 깨끗하고 젊은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 몸이 병들고 다치고 약하고 늙는 것은 이 세상 뿐입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저희 장모님이 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평소에 나이가 많이 허리가 굽고 흰머리가 많았던 장모님이 어느날 집사람의 환상중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얼마나 예쁘고 고운지. 주름 하나 없는 19살 새색시의 모습이었습니다. 양쪽에는 하얀색의 천사들이 서 있고, 얼굴에는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찼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육의 몸이 영의 몸으로 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육체가운데 살 때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프고 힘들다고 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2:20,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우리의 육체는 예수님 몸을 먹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 몸으로 서로 교회를 이룸으로 사랑을 나눕니다. 그리고 성령님과 함께 예수님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집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삽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예수님이 가는 곳이요 우리가 말하는 것이 예수님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천국에서 진짜 예수님의 몸처럼 변합니다. 영적인 몸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영원토록 삽니다. 이것이 우리 육체의 운명이요 우리가 이 땅에 육체가운데 사는 이유입니다. 2:20,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이 축복이 영원히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2:20(9): 2:20, 4:12-16 2010.10.31()

나는 예수님의 몸으로 삽니다

2:20에서 말한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4:15,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들에게 주시다”.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게 하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시매”.

 

교회생활은 예수님 몸안에 사는 것입니다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루이스는 세 종류의 사랑

필요의 사랑(need-love)

선물의 사랑(gift-love)

감상의 사랑(appreciative love)

 

영적인 삶은 예수님의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살전4:11,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일하고 너희에게 명한 바와 같이 종용하여 자기의 일을 할뿐더러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고전15:51,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 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2:20,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