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사역의 모델/출애굽기 18장 13-22절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땅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 외에는 할 일이 없을까요? 어서 빨리 약속의 땅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이 여행의 유일한 목적일까요? 이것은 마치 이 땅에서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 천당에 빨리 도달하는 것 뿐이냐고 묻는 것과 동일한 질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교회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이 사람들을 천당에 가게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인자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사람들을 구원함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구원외에 또 하나 그분의 오심의 목적이 섬김이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의 소명과 함께 섬김의 소명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행전 7:37-38에 보면 성경은 광야를 순례하던 이 한 무리의 백성들과 지도자 모세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아십니까? “(37)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예수)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다시 말하면 성경은 광야를 순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리를 ‘교회’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교회의 지도자가 모세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세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를 증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광야 교회에도 사역이 주어져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바로 사람들이며 교회 사역은 구세주이신 예수를 증거하며 동시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사역을 영어로는 ‘ministry’라고 말하는데, 이 단어의 정의는 바로 'act of serving' 곧 ‘섬김의 일’인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여전히 광야 교회에 속한 자들로서 광야 길을 가면서 모세와 함께 주어진 사역을 감당해야 할 자들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런 사역자들을 가르쳐 ‘ministers'(섬기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신약적인 관점에서는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바로 사역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 세상을 살며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어떻게 섬기며 살아야 할까요? 우리의 섬김의 장애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런 장애를 극복하며 섬김의 소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런 광야 교회 사역의 모델과 과제를 동시에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광야 사역의 과제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1. 탈진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섬김의 사역의 최대의 장애는 섬기다가 지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우리는 ‘burnt-out’혹은 ‘탈진’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의 장인은 모세의 사역에 이런 탈진의 위기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르비딤에 머무는 동안에 백성들 사이에는 많은 재판의 필요가 등장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과도한 재판에 매달리게 되었고 서서히 그의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는 고갈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3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는지라” 이때 모세의 장인이 등장합니다. 14절입니다.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이르되 네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찌 됨이냐 어찌하여 내가 홀로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곁에 서 있느냐” 그리고 18절에서 그는 정확하게 모세의 상태를 진단합니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기력의 쇠함-이것이 바로 탈진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탈진은 예외가 아닙니다. 탈진 징후가 생기면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도 변합니다. “이 세상의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조금 더 심하게 되면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때--” 좀 더 심각해 지면 우리는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고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보다 더 심해지면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때--”최악의 상태에 달하게 되면 아마 이 찬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어지지 않도록--” 그러면 우리는 이 탈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사역을 내려놓아야 할까요? 장기 휴가를 떠나야 할까요? 물론 적절한 휴식이나 휴가가 탈진 해소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그러면 천국갈 준비를 해야 할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모세의 장인은 그렇게 충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광야 사역의 중요한 처방이 있습니다.
2. 리더십을 세우는 일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리더십을 분배하는 일입니다. 일을 나누어서 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장인이 관찰했던 모세의 리더십의 문제가 그것이 아니었습니까? 14절에서 “--어찌하여 네가 홀로 앉아 있느냐”고 묻습니다. 18절의 마지막 부분을 주목하십시다. “--이 일에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21-22절입니다. “(21절)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22절)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 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 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에 네게 쉬우리라” 다시 말하면 중간 지도자를 세워서 일을 분담하라는 것입니다.
효율적인 일의 성취는 홀로 하는 사역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리더십 연구에서도 강조되는 것이 ‘팀 리더십’입니다. 혹은 리더 주변의 사람들을 신뢰하고 일을 분배하여 맡기는 것을 ‘리더십 임파워먼트’(Leadership empowermen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후 삼국의 리더였던 왕건과 궁예의 차이를 아십니까? 개인적 카리스마나 역량으로 말하면 왕건은 궁예를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자기 부하 장수들에 대한 의심 때문에 책사 종간외에 그 누구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독단적인 판단을 내리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실패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반면에 왕건은 자신이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하 장수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민주적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건은 자기 부하들의 의견을 경청한 다음 실제적인 권한과 책임을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과감하게 맡겼습니다. 요즈음 말로 임파우어먼트를 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또한 그 주변에는 늘 우수한 장수들의 리더십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진정 성공적인 리더들은 자신만의 성공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성공하게 하는 리더인 것입니다. 21세기의 광야에도 여전히 이런 사역의 모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3. 공동체를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를 세운다는 말을 할 때 그것은 한 사람의 지도자나 몇 사람의 건강한 지도자를 세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광야 사역의 모델은 모세가 장인의 충고를 수용함으로 건강한 많은 작은 공동체들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건강한 민족 공동체를 지향하게 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제 장인의 충고처럼 일종의 중간 지도자들인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그리고 십부장을 세운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밑바닥 기초를 형성하는 일선 리더가 열명의 사람들을 관리하는 십부장들이었고 그들위에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날의 군대 조직은 바로 그런 조직을 모방한 형태가 아닙니까?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마지막으로 소대장이 그런 조직 형태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조직 형태의 유일한 문제점은 지나치게 수직적으로 경직되기 쉽다는 것입니다.(군대 조직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약 시대에서 예수님은 그런 수직적인 경직성을 배제한 12명의 제자만으로 세상을 바꾸는 ‘단순한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으로 다시 제자를 만들라고 소위 배가를 명하셨습니다. 지난주 우리 교회를 다녀가신 밥 로버츠의 표현을 빌리면 “제자는 제자를 낳고, 교회는 교회를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예수님과 12제자로 형성되는 공동체를 가르쳐 ‘기독교 기초 공동체’라고 부르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셀 교회 운동’은 바로 이런 기독교 기초 공동체를 회복하는 운동인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려면 조직상으로만 12명으로 구성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12명 이내의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열린 나눔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목장 모임이 일방적인 예배가 아닌 ‘삶의 나눔’을 중시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셀 모임에 가는 것을 회피하는 이유로 ‘나눔의 부담’을 지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한국 일보에 실렸던 ‘나도 탈진 증후군이라는 기사’에서 서울 아산 병원 홍진표 교수는 현대인들이 탈진 증후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직장 동료, 아니면 친구나 가족중에서 터놓고 대화 할수 있는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역설 하며 나눔의 효과를 이렇게 말합니다.“자신의 답답한 심정, 징신적 고통을 나누다 보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 볼 수 있고 어떤 스트레스도 해소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일주일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갖는 목장 모임을 통해서 갖는 우리의 나눔이 우리를 얼마나 건강하게 만들고 있는 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기독교 심리학자인 래리 크랩은 자신의 평생의 임상 상담 경험을 반추하며 솔직히 진지한 교회내 소그룹 참여는 어떤 상담보다도, 어떤 의학적인 도움보다 더 효율적인 축복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동안 회피해 오셨던 목장 모임으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음 주일은 주일 예배를 목장에서 드립니다. 목장 가이드를 받으시고 목장 모임을 선택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번 주일만 아니라, 앞으로 지속적으로 목장 모임에 참여하시어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삶을 나누어 주십시오. 우리의 슬픔과 기쁨, 실패와 성공이 나누어지는 그 자리가 치유와 변화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 목장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한 우리 교회 평범한 두 분 성도의 간증을 소개하겠습니다. 간증 1입니다. “저는 처음 목장 모임에 나갈 당시만 해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였고, 정신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게다가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었던 저는 이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장 교회 모임에 나가면서 꽉 다문 조개 같은 제 마음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제 곁에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말씀으로 힘을 얻고 자신감을 회복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걷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간증입니다. “남편이 교회를 떠나 세상 속에 안주하고 있었던 어느 날 부부 목장에 나가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남편은 한번만 참석하겠다고 결정하고 모임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장 모임에서 진솔한 삶의 나눔을 경험하고 중보의 기도로 남편에게 닫혀 있었던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남편은 예전의 신앙을 회복하고 영혼의 풍성함과 삶의 만족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채워지지 않던 영혼의 갈급함이 목장 모임에 참석할수록 평안함이 생겼고 막혔던 기도가 회복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지구촌교회 이동원목사
'추천 설교 > 이동원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다시 붙잡아야 할 비전(요21장15-19) (0) | 2016.06.05 |
---|---|
[스크랩] 빈들에서의 하나님의 음성/눅 3:1-6 (0) | 2016.06.05 |
[스크랩] 마지막의 시작(막13장1-8) (0) | 2016.06.05 |
[스크랩] 무화과 나무의 교훈(막11장12-14;20-25) (0) | 2016.06.05 |
[스크랩] 교회의 의미/엡 3:1-13 (0) | 2016.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