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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1-5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어느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총각시절에는 시골에서 교편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는 학교로 출근하기 위해서 시냇물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앞에 놓여있는 징검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디디면서 건너다가 그만 잘못 놓인 돌을 밟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신발도 다 젖고, 바지도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젖은 몸으로는 학교에 갈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때마침 서울에서 잠시 내려오신 어머니께서 집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젖은 몸을 보고서 딱하다는 듯이 물어보셨습니다. "얘야, 어쩌다가 그렇게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느냐?"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예, 어머니. 제가 징검다리를 디디고 시냇물을 건너다가 그만 잘못 놓인 돌을 밟아서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얼른 되물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밟았던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왔느냐?" 아들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얼른 옷 갈아입을 생각만 했지, 미처 돌을 바로 놓아야 된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나무랐습니다. "이놈아, 너 그런 식으로 해서 무슨 선생이 되겠다고 그러느냐? 얼른 가서 돌을 바로 놓고 오너라. 그리고 나서 옷을 갈아입도록 해라!" 그는 어머니의 말씀이 조금 야속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백 번 고쳐 생각해도 지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얼른 가서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 뒤에 그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돌을 바로 놓는 마음으로 매사에 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의 마음도 바르게 되고, 모든 사람들도 그 사람을 바르게 보아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돌을 바로 놓는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고, 또 다른 사람도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일깨워주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그 옛날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범죄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잘못해서 실족해 버렸습니다. 죄악의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대할 때 성도들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할 것인지, 바울은 1절 하반부에서 세 가지로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온유한 심령으로"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남을 심판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사람들을 도와서 바르게 설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만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셋째로,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남들이 빠진 시험에 나라고 해서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무엇인가 잘못을 했을 때, 비방하고 따지고 심판하려고 들지 말고 그것을 거울 삼아서 나도 그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2절 이하 5절에서 세 가지 권면을 위해서 좀 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 세 가지 권면을 우리가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온유한 심령으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태양과 바람이 나그네의 외투를 누가 벗길 수 있을 것인지 시합을 했습니다. 그 때 강한 바람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겼습니까? 아닙니다. 바람은 아무리 세차게 불었지만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미소를 띄면서 따뜻하게 비추일 때 나그네는 외투를 벗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온유한 심령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녹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을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그 다음 날은 미술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소풍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그림을 열심히 그렸습니다. 붉은 태양을 그렸습니다. 파란 하늘도 그렸습니다. 친구들이 손에 손을 잡고서 즐겁게 걸어가는 모습도 그렸습니다. 또 나무도 그리고, 예쁜 꽃도 몇 송이 그려 넣었습니다. 아이는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뒤 바탕색깔을 무엇으로 할지 한참 생각하다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인 진한 남색으로 정하고 바탕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 선생님이 오셔서 아이의 그림을 보더니 아이를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녀석아, 환한 대낮에 이렇게 어두운 색깔을 잔뜩 칠해놓으면 어떻게 하니? 이런 엉터리 같은 그림이 어디 있어. 그림이 너무 엉터리여서 교실 벽에 붙여놓을 수가 없구나!" 아이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아이는 그림에 대해서 자신감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채 1년이 지나갔습니다. 아이는 2학년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선생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첫 미술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얀 도화지 위에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그려보세요." 다른 아이들은 신이 나서 열심히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나 이 아이만큼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에게서 받았던 지적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는 그저 도화지를 앞에 놓고 안절부절못하면서 속히 미술시간이 지나기를 바랄뿐이었습니다. 끝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교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면서 학생들의 그림을 하나씩 하나씩 관찰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이의 앞에 이르렀습니다. 아이는 자기의 작은 심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생님은 그의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야! 이 그림 정말 멋지구나. 온 들판에 하얀 눈이 흠뻑 쌓였네!" 그러면서 아이를 칭찬해 준 것입니다. 아이는 선생님의 칭찬을 일평생 동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때로는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1학년 때의 선생님과 같은 사람도 만났습니다. 때로는 2학년 때의 선생님과 같은 사람도 만났습니다. 우리가 1학년 때 선생님처럼 내게 비난과 책망을 일삼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의 마음의 문이 왠지 닫혀 집니다. 안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내게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는 2학년 때 선생님과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집니다.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학년 때 선생님처럼 하얀 백지를 놓고서도, "야! 정말 멋있는 그림을 그렸구나. 온 들판에 흰 눈이 쌓여있네!"라고 칭찬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인사할 때도 그렇습니다. 이왕이면 더 좋은 인사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러면 인사를 듣는 사람의 마음이 편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렇게 인사하면 어떻겠습니까? "많이 늙으셨네요. 얼굴이 안좋으신 것 같은데 어디 불편하세요?" 그러면 괜히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인사를 할 때라도 생각해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1:28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십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우리의 부족한 그대로 다 받아주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온유한 심령을 우리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서로 격려해 주십시다. 인정해 주십시다. 세워 주십시다. 칭찬해 주십시다. 그리해서 우리가 함께 더불어 걸어가는 신앙의 길이 주 안에서 좀 더 기쁘고, 좀 더 행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범죄한 자를 바로 잡을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지금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잘못은 잘못이라고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꺾어버리거나 짓밟아버려서는 안됩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율법은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멍에를 함께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법,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미국의 뉴욕에 가면 라과디아(La Guardia)라는 공항이 있습니다. 주로 국내선이 이용하는 공항입니다. 라과디아라는 사람은 본시 1933∼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의 시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했던 훌륭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분은 "Little flower(작은 꽃)"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뉴욕의 시장으로 재적을 하기 이전에 그곳에서 판사로 일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라과디아 그가 법정에 앉아 있는데 어떤 경찰관이 한 노인을 끌고 왔습니다. 죄목은 상점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전에도 훔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훔쳤습니다." "왜 훔쳤습니까?" "예,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은 다 떨어지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빵 한 덩어리를 훔쳤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노인의 사정을 다 듣고 난 뒤에 이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노인이여,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저는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라과디아 판사는 법정 안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노인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은 비단 이 노인의 책임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각각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얼른 자기의 지갑에서 10달러 짜리 지폐를 끄집어내어 모자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자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돌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두어진 돈이 모두 57달러 50센트였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 돈을 노인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노인은 그 돈을 받아서 그 가운데 10달러를 벌금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서 그는 감격 가운데 눈물을 글썽거리며 법정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꺾어버리면 안됩니다. 짐을 함께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가 힘들어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 짐을 함께 져 주십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형제는 바로 세워주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입니다. 야고보가 약3:2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다른 사람만 실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똑같이 실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더 큰 실수를 더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7:3의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는 자기 성찰에는 열심을 내지 않고, 남의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관여하면서 비방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두 가지 이유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제 잘난 맛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어느 두 집사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집사님만 삼일밤 예배에 참석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여자 집사님은 일이 있어서 그 날 참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남자 집사님이 삼일밤 예배에 다녀오더니 달라졌습니다. 평소에 안하던 친절을 베풀어 주고 뜨겁게 사랑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 집사님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하! 남편이 삼일밤 예배에 참석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구나!" 그래서 그 다음 날 과일이 잔뜩 들은 바구니를 사들고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어젯밤 설교가 참 좋았다고 하지요? 주보를 보니까 제목이 사랑이었는데 무슨 내용으로 설교하셨나요?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나요?" 그랬더니 고지식한 목사님은 센스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했는데요." 그러니 여자 집사님은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 착각은 우리가 애교로 봐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착각이 심하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이 그러했습니다. 자기들이야말로 가장 바르게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잘 믿는 사람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바로 이 착각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방하는 것은 곧 "나는 의롭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가증스럽게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로 우리가 남의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면서 판단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꾸 나를 내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그러한 심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4절 말씀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습니까? 얼마나 부족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쓸데없는 자를 구속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잘했다 할지라도 남에게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만일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면 그 사람은 우리보다 훨씬 더 잘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착각과 또 나를 내세우고자 하는 심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자기가 져야 할 짐, 자기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나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일에 충실히 하는 사람을 보면 남의 일에 이러쿵저러쿵 관여할 겨를도 없습니다. 자기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불평이 많고 불만이 많은 법입니다. 그래서 옛날 성현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라." 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임금은 임금 노릇을 잘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만 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평안하려면 부모는 부모 역할을 잘하고, 자녀는 자기들의 해야할 일을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자꾸 남의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관여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 일찍이 교회 맞은편에 있는 빌딩에 주차하기 위해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나와 교회 입구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마침 차 한 대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혹시라도 그 분 역시 그 빌딩에 있는 지하주차장에 주차하려는 줄 알고 창문을 열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 교회 안에 있는 의자들을 청소하고 나서 옷 갈아입으러 집에 가는 길입니다." 말없이 충성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든든히 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눈을 만드실 때 두 개를 만드셨습니까? 많이 보라는 것입니다. 시야를 많이 넓혀야지요. 왜 귀는 두 개를 만드셨습니까? 많이 들으라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어야 합니다. 왜 손은 두 개를 만드셨습니까?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왜 입은 하나만 만드셨습니까? 우리는 입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해야됩니다.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고 또 숨도 쉬어야 됩니다. 그리고 나서도 여력이 있으면 말하라는 것입니다. 곧 말을 아끼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로 일하려고 하지 말고 각기 주어진 사명을 손으로 몸으로 충성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온유한 심령, 곧 예수님의 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남을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을 도와서 세워주어야 합니다. 셋째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뽑으려고 나서지 말고 내 눈에 있는 큰 들보를 깨닫고서 자기 성찰에 힘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돌을 바로 놓는 그러한 심정으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고,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세우는데 도와주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하는 교회 생활이 좀 더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고, 감격하고, 행복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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