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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린도전서 강해/제 3 강 사랑의 덕목 2 (고전13:4-7)

제 3 강 사랑의 덕목 2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돌이와 순이는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둘은 짝꿍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돌이가 순이에게 편지 한 장을 써서 건네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얘, 순아. 나는 너를 좋아해. 내가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그러니 우리 결혼하자."

말하자면 돌이가 순이에게 청혼편지를 쓴 셈입니다. 순이는 그 편지를 받고서 밤새도록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답장을 적었습니다.

"얘, 돌아. 나도 너 좋아하는 것 알고 있지?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너와는 결혼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우리 집안은 모두 가족들하고만 결혼을 했거든. 우리 엄마는 우리 아빠랑 결혼하셨고, 우리 할머니는 우리 할아버지랑 결혼하셨어. 그리고 우리 이모도 우리 이모부랑 결혼하셨어. 이처럼 우리 가족은 다 집안끼리만 결혼했잖아. 그런데 너랑 나랑은 좋아는 하지만 친척도 아니고 남남이잖아? 그래서 미안하지만 나는 너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가 없단다. 돌아, 정말 미안해. 순이로부터."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여섯 살짜리 유치원 아이의 수준으로 생각하면 자기 집안은 다 가족들끼리만 결혼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런 유치한 생각과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모두 또는 전체를 생각하거나 바라보지 않고, 그저 나 또는 우리라고 하는 울타리 속에서 우리가 갇혀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저 나만 잘 살면 되고, 우리 가족만 평안하면 되고, 내 부서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여섯 살짜리의 순이의 결혼관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회가 가졌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파당을 만들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나누어서 서로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이기적이었습니다. 서로 배타적이었습니다. 전연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사랑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속상한 일을 당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할지라도 꾹 참아버리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향해서 참지를 못했습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선대하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온유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면 칭찬해 주고 축복해 주고 함께 기뻐해 주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남들이 잘되자 꼴 보기 싫어하며 시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은 서로 다투는 가운데 온갖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사랑과는 전혀 반대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라고 해서 더 나을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피조물인 인간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를 위해서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 우리 예수님에게는 시기심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0:28의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 예수님은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섬기셨습니다. 그리함으로서 그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이 땅에서 영화롭게 하는 그 일에 힘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사랑의 실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있는 곳에 사랑의 꽃은 아름답게 핍니다. 또 사랑의 열매가 아름답게 열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을 열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 가운데서 처음 세 가지는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사랑의 덕목을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Love is not boastful." 우리를 자랑하게 되면 우리 자신은 우월감을 느낄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을 보고 듣는 상대방은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자랑은 그 사람들 마음 속에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랑함으로서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니까 자랑은 얼마나 나쁜 것입니까? 그러므로 자랑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평등 시리즈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사람의 나이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공부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40이 넘어가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50대가 되면 외모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예쁜 사람, 못생긴 사람은 어리고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50이 넘어가면 배도 나오고 엉덩이도 쳐지고 두루뭉실해져서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60대가 되면 성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평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60이 되면 남자는 순해집니다.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억새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비슷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70대가 되면 건강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나 고만고만합니다. 그만큼 늙어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80대가 되면 재물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돈이 많으면 무엇하겠습니까? 가진 사람이나 못가진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0대가 되면 생사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말은 살았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것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자랑이 심했습니다. 고전14:26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함께 모였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다함께 부르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또 기도할 때 함께 기도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각각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열광적으로 찬송을 부릅니다. 거기에 뒤질세라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큰소리로 암송했습니다.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고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방언을 한다고 떠들었습니다. 또 그 방언을 통역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니 그 모습이 얼마나 무질서했겠습니까? 보는 사람들에게 도무지 덕이 안되었을 것입니다. 왜 그러한 현상이 생겼겠습니까? "너만 은사 받았냐? 나도 은사 받았다!" 그러면서 자기가 받은 은사를 과시하려고 하고 자랑하려고 하고 뽐내려고 하다 보니까 무질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야말로 자랑할 모든 것을 갖추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2:49을 보십시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예수님은 말씀을 하실 때도 자의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 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자랑할 모든 것을 갖추신 예수님이신데 한 번도 자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본시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니까 더더욱 자랑하려고 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갈6:14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자랑할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을 칭찬해 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Love is not proud." 자랑이 외적인 것이라면 교만은 내적인 것입니다. 자랑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교만은 마음 자세입니다. 잠16:18의 말씀을 우리가 잘 압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이 선봉을 서서 앞서갑니다.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패망입니다. 거만한 마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넘어짐이 뒤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교만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그렇게 나쁜 것입니다.

숲 속에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들짐승들이 연못가에 모였습니다. 물을 마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사슴도 한 마리 끼여 있었습니다. 사슴은 물을 마시다가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쳐다볼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머리에 달린 뿔이 너무나도 황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들짐승들 머리 위에는 뿔이 없었습니다. 모두 대머리들이었습니다. 사슴의 마음 속에 교만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슴은 자기 머리의 뿔을 좌우로 흔들면서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으르렁거리면서 배고픈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짐승들이 놀라서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슴도 뛰어갔습니다. 그러나 조금 가다가 사슴의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서 사슴은 더 이상 달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슴은 자기가 뽐내던 뿔 때문에 사자의 먹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교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패망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무척 교만했습니다. 4:6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신실하고 겸손한 주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고린도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 자기들을 높이지 아니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높여주는 것도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파를 만들었습니다. 아볼로파를 만들었습니다. 게바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파를 만들어서 서로가 서로를 대적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만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서로 싸웠던 것입니다.

4:18∼19의 말씀입니다.


"어떤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사도 바울이 다시금 고린도를 방문하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기들은 이미 배울 것을 다 배웠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서도 배웠고, 아볼로에게서도 배웠고, 게바에게서도 배웠다는 것입니다. "알 것 다 알고 있는데 바울이 다시 온들 우리에게 무엇을 새롭게 가르쳐 주겠느뇨?" 그들은 그만큼 교만했습니다.

5:1∼2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그들 가운데 음행을 저지른 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계모를 범한 자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뿐만 아니고 그 당시의 이방법이었던 로마법에서조차도 엄격하게 금지하는 일이었습니다. 더 나쁜 것은 그러한 음행을 저지르면서도 회개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자기가 잘못했으면서도 큰소리치는 것이 교만한 자의 특징입니다.

8:1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그 당시 이방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음식물, 특별히 고기를 통해서 세상의 더러운 잡귀들이 사람의 몸 속에 침투해서 좋지 않은 영향을 일으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푸줏간에서 고기를 잡으면 먼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일부는 불태우고 일부는 제사장에게 주고 나머지는 도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면 그 신이 고기를 지켜주기 때문에 더러운 잡귀가 그 고기에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가 상당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상의 제물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꺼림직 하니까 아예 시장에 나가서 고기를 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친척의 잔칫집에 가서도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고기를 마음대로 먹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다. 고기는 어디까지나 고기에 불과할 뿐이다. 이방신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또 세상에 잡귀들이 고기를 통해서 사람의 몸에 침투한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소리일 뿐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거리낌없이 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상의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고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사랑 없는 지식은 교만해서 형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사랑으로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린도 교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서로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해서 음행을 저질렀으면서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형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사랑은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것입니다.

사랑이신 우리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모든 무릎으로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케 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높이십시다. 나는 낮아지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Love is not rude." 사랑이 없는 사람은 무례히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루는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때 그 동네에 살던 어떤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죄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창기였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자기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여인이 자기의 집에 들어온 것조차도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예수님은 그의 생각을 아시고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탕감해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을 했습니다.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너의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의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의 머리털로 내 발을 씻겼다.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지만, 이 여인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너는 내 머리에 그 흔한 감람유도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시몬은 그 여인을 무시했습니다. 그에게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사랑으로 그 여인을 감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불쌍한 여인을 시몬의 무례함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누구에게도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무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는 예배드릴 때 남자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반드시 무엇을 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관례입니다. 그런데 여성들 가운데 자의로 머리에 쓴 것을 벗어버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남자들도 쓰지 않는데 왜 여자들이라고 불편하게 모자를 뒤집어써야 하나?"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 보기에 언짢게 만드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무례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찬식을 하기에 앞서서 애찬식을 했습니다. 각자가 자기의 음식을 가져와서 먹는 것이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좋은 음식을 많이 가져와서 배불리 먹었습니다. 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음식을 가지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굶주렸습니다. 그러니 그 분위기가 위화감 때문에 얼마나 서먹서먹하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성찬식을 한들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내 음식 내가 먹는다는데 무슨 소리가 그렇게 많으냐?" 이런 소리를 할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례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방언의 문란성이었습니다. 예배시간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몇 사람이 큰소리로 떠들면서 방언을 말하니까 예배의 경건성이 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도할 때 다같이 조용하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한 두 사람이 서서 대표기도 하듯이 큰소리로 떠들면서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의 기도에 지장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 기도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기도도 역시 소중한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할 때 함께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지금 어떻게 기도하는지 살펴가면서 다른 이들과 조화를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에게 무례히 행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멋대로만 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을 세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십시다. 나를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칭찬해 주십시다. 둘째로,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십시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낮아지십시다. 하나님이 오히려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존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내 멋대로 살려고 하지 말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가면서 살아갑시다.

이번 한 주간 특별히 이 세 가지를 우리 마음 판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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