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강 사랑의 덕목4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어느 성을 정복했을 때였습니다. 그 성안에는 이상한 상자 하나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상자 둘레에는 밧줄이 칭칭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 밧줄은 아주 복잡하게 얽혀져 있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누구든지 그 밧줄을 푸는 자에게 세상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이미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그 성을 거쳐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밧줄을 풀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신하들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서 물끄러미 그 상자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알렉산더는 신하들에게 그 상자에서 조금 벗어나라고 명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순식간에 자기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내들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밧줄을 향해서 힘껏 내려쳤습니다. 밧줄은 두 토막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알렉산더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봤지? 내가 그것을 풀었으니까 이제는 천하가 나의 것이로다!"
다른 사람이 풀지 못했던 것을 알렉산더는 쉽게 단칼에 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밧줄이 얽히듯이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들, 특별히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들로 복잡하게 얽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 가장 근본적으로 손쉽게 내려칠 수 있는 칼이 있습니다. 그 칼의 이름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의 칼로 내려쳐야 합니다.
하나님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얽매인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하나님은 사랑의 칼로 내려치셨습니다. 요3:16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뽑아 드신 사랑의 칼이 무엇입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죄악의 밧줄을 순식간에 토막내 버리신 것입니다.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나와 너 사이에 어떤 문제가 얽히게 되었을 때 믿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믿지 않는 자들이 더 쉽게 푼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술집에 가서 같이 술 한 잔 마시고 나면 다 풀린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고 합니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하면서 너무 경우를 따지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 버리고 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사랑을 몰라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둘째 계명이고, 사랑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 안에 문제가 많습니까? 왜 나와 너 사이의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까? 혀끝으로만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만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사랑이 메말라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없는 것입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파당을 만들어서 서로 대적했습니다. 교회는 사분오열 되어 나갔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음행을 저지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허물이 발견될 때 사랑으로 덮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끌고서 세상 법정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믿지 않는 법관 앞에서 그의 온갖 허물을 발설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심지어 바울의 사역에 대해 오해를 하며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자들조차도 있었습니다.
왜 이런저런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들이 사랑을 몰라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들도 말로는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열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조목조목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차례대로 그 가운데서 아홉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열 번째, 열한 번째, 열두 번째 해당되는 것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첫째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셋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이 세 가지를 오늘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플러스(+)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마이너스(-)의 삶입니다.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를 줄 수 있는 유익된 삶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Love does not rejoices in unrighteousness." 사랑은 의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의의입니다. 사랑은 결코 불의를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불의를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나의 불의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불의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가 불의를 행할 때 그들을 징계합니다. 불의의 결과가 너무나도 나쁘게 나타나는 것을 부모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불의는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할 때 그 결과가 매우 위험하게 나타납니다. 고통을 수반하게 됩니다.
다윗을 예로 들어봅니다. 다윗이 불의를 행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최전선에 보내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자기의 손으로 직접 죽인 것은 아니었지만 살인죄를 범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불의를 행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말하지 않더라도 그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 영적으로도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받았던 고통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시32:1∼2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말하자면 시편 32편은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서 자기의 불의를 회개하고 난 뒤에 지은 시입니다. 불의를 회개하고 난 뒤에 비로소 그는 마음의 평강과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어떤 때를 가리킵니까? 다윗이 자기의 불의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악을 회개하기 이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때는 어떠했습니까? 3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그는 큰 병을 앓았습니다. 육체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뼈마디가 온 몸이 쑤시는 아픔을 앓아야 했습니다. 온종일 그는 앓으면서 침상에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다윗의 몸은 불덩이 같이 되어 많은 열이 났을 것입니다. 몸 속에서 진액이 제대로 나와야지 몸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진액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불의의 결과로 육체적인 고통도 겪어야 했습니다. 불의의 결과가 그렇습니다. 불의를 회개하지 않으면 영적인 고통뿐만 아니고 육체적인 고통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도 그러했습니다. 고전5:1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음행을 저지르는 자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비의 아내, 자기의 계모를 범한 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뿐만 아니고, 이방법인 로마법에서조차도 엄히 금하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불의를 행했습니다. 5:2입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마음이 교만해져서 불의를 행하고서도 오히려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뻐기고 자랑하며 과시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불의를 기뻐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고린도 교인들은 그러한 불의를 보고서도 못 본척하고 눈감아주었습니다. 마치 그것이 사랑인 것처럼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불의에 대해서 못 본척하고 눈감아 준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5:6을 보십시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으로 점점 더 곪아져 가고 만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무엇입니까? 5:11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교회가 불의를 행한 자를 권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불의에 대해서 못 본척하고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11:29∼30을 보십시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다윗이 불의를 행한 결과 영적인 고통뿐만 아니고 육체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불의를 기뻐한 결과 그들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는 병약한 자도 있었고, 중병을 앓는 자도 있었고, 그것 때문에 죽어야 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육체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불의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불의는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불의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면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이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불의에서 벗어나 의의에 거할 수 있도록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경책해야 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Love rejoices with the truth." 여기에 사랑과 진리가 공히 의인화되어서 나타납니다. 사랑은 진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기뻐하지 않으면 사랑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더불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무엇을 믿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교리가 어떠하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아무하고 손잡고, 아무하고나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가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ecumenical 운동의 기본사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주교가 이런 점에서는 조금 심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어떤 행사가 있으면 불교와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습니다. 그래서 법당으로 초청을 받아서 가기도 하고, 또 그 사람들을 성당으로 초청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과연 사랑입니까? 그들은 사랑이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2요1:6의 말씀을 보십시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지금 사도 요한은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태도가 아닙니다. 실천입니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 행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사상입니다. 이단 교리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7∼8절입니다.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그 사람들과 함부로 어깨동무하고 함께 가다가는 받을 상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잃든지 상관없습니다. 교리가 어떻든지 무슨 상관입니까? 사랑만 중요하지요."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요한은 결론적으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9∼11절입니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잘못된 교리를 신봉하며 그것으로 미혹하는 자들은 아예 상종조차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이런 오류에 빠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의 육신의 부활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 곧 부활장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고전15:12∼17의 말씀을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매 구절마다 "다시 산다"라는 말씀이 빠짐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누구든지 부활의 교리 위에 확고하게 서지 못하면 그의 믿음은 헛되다라고 말씀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도 진리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더불어서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Love bears all things." 여기서 참는다는 것은 말없이 덮어주는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보았습니다. 입이 근질근질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흉보고 싶어서입니다. 사랑은 남의 흉을 보았더라도 말없이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벧전4:8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헬라제국의 알렉산더는 20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30세가 되었을 때 전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그는 유명한 화가들을 불러서 자기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좀 더 늙기 전에 자신의 늠름한 모습의 초상화를 후대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만족할만한 그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의 한쪽 편 얼굴에는 전쟁터에서 생긴 흉터가 아주 흉하게 나있었기 때문입니다. 화가들은 그 흉터를 그대로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보기에도 험상궂고 잔인한 모습의 그림이 된 것입니다.
그때였습니다. 평소에 알렉산더를 존경하고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던 한 무명의 화가가 자기가 한 번 그려보겠다고 자원해서 나섰습니다. 물론 그 화가도 알렉산더의 얼굴에 있는 흉터를 그리면 만족할만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화가는 이렇게 했습니다. 알렉산더로 하여금 탁자 곁에 있는 의자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알렉산더 자신의 손으로 턱을 고이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깊이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세를 취하게 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손으로 흉터를 가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알렉산더는 매우 만족했습니다. 그 화가에게 큰 상을 내렸습니다. 평소에 그 화가의 마음 속에 있던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알렉산더의 얼굴에 있는 흉터를 가리울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미 작고를 하신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아주 훌륭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많다 보니까 별별 사람이 사람들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목사님에게 몇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그곳에는 목사님의 잘못과 허물이 열 가지로 적혀 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그것을 다 읽고 난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사실 저는 일만 가지도 더 되는 많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저의 잘못과 허물을 그저 열 가지로만 보아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여러분, 바라기는 앞으로는 이런 것까지도 여러분에게도 보이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찾아왔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일어나서 방을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입니까? 내가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서 사랑이 풍성하면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에게 허물이 보였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다른 사람이 볼세라 빨리 사랑으로 덮어주어야 할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끌고서 세상 법정으로 갔습니다. "이 사람의 허물은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믿지 않는 법관들 앞에서 이처럼 모두 발설했습니다. 그러니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망신을 당했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신다면 감히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천국은 모든 잘못과 허물이 덮여지는 곳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모든 잘못과 허물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답게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입이 근질근질하십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남들이 볼세라 사랑으로 빨리 덮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셋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이 세 가지를 우리의 마음 판에 깊이 새기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은 설 연휴를 맞이했습니다. 불의에 대한 유혹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불의를 우리가 어떻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깨어서 늘 기도하면서 불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면서 똑바로 걸어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불의에 대한 유혹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저런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연히 그 사람들의 허물이 눈에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발설하거나 드러내려고 하지말고, 사랑으로 다른 사람이 볼세라 덮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입을 열어서 꼭 말을 해야된다면 덕 있는 말, 칭찬하는 말, 좋은 말을 해 주십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플러스의 삶이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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