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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린도전서 강해/제 9 강 사랑의 성숙성(고전13:11-12)

제 9 강 사랑의 성숙성(고전13:11-12)


고전13:11-12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랑의 영원성과 온전성에 이어서 오늘은 사랑의 성숙성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서 아무리 은사가 많고 재능이 많고 직분이 귀하고, 또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린 아이의 수준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숙하고 장성한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우리가 과연 사랑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주부작가 미우라 아야꼬여사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쓴 소설 「빙점」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 책을 이미 읽으신 분들이 여러 분 계실 줄 압니다.

그도 한 때는 평범한 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남편이 벌어다주는 수입에 의존해서 살아가다 보니까 자연히 살림이 쪼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그는 자기 집 앞에 작은 가게를 차렸습니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돈버는 일에만 목적을 삼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자기 가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자기 가게를 찾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양심적으로 언제나 좋은 물건을 가져다가 최대한 값싸게 팔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그의 가게는 소문이 좋게 나기 시작했습니다. 가게는 날이 갈수록 점점 번창해 졌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한 주에 한 번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다가 팔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예 트럭 채 물건을 주문해서 팔아야될 정도로 가게가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남편이 직장에서 퇴근하고 돌아오다가 정신 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 그의 아내를 보고서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 되는 것은 좋은데 이러다가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가게들은 다 문을 닫아야 되지 않겠어? 그 사람들은 다 가난한데 그들이 가게문을 닫으면 무엇을 먹고 살지?"

그 소리를 듣고 미우라 아야꼬여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저 많은 물건을 떼다가 값싸게 소비자들에게 팔면 그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영세가게들에 대해서는 전혀 자기가 배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그날로 가게 운영의 방식을 바꾸어버렸습니다. 물건의 수를 제한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가게에서 파는 물건은 아예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와서 없는 물건을 찾을 때 친절하게 이웃가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돈은 적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알지 못했던 기쁨과 평안이 그의 마음 속에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틈틈이 자기가 좋아하는 책들을 읽고 또 자기에게 있는 문학적인 재능을 살려서 시간이 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책이 유명한 「빙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결코 나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배려할 줄 아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사랑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웃에 대한 이해와 이웃에 대한 배려와 이웃에 대한 용서는 연습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늘 부단 없이 훈련을 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언제나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됩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 루이스(C.S. Lewi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문제는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여자 집사님이 집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능력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주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그는 소리내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잘 놀고 있던 딸아이가 갑자기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칭얼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인형이 망가졌어요. 인형 좀 고쳐주세요!"

그는 모른 척 하고 계속해서 더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아이는 더 칭얼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인형이 망가졌어요. 빨리 고쳐주세요!"

그는 화가 났습니다. 기도하다가 눈을 번쩍 뜨고서는 고함을 질렀습니다.

"얘야, 엄마가 지금 기도하고 있잖아? 기도하고 있으면 조용해야지 떠들면 돼?"

그 소리에 아이는 놀라서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기도한다고 하지만 기도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에게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아, 내가 쉬운 일은 등한시하면서 그저 큰 것만 요구하고 있었구나! 작은 일에도 충성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큰 일을 충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사랑이 부족한 사실을 회개하면서 아이를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도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사랑! 사랑!"을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주 안에서 한 지체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일은 등한시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가진 은사는 보잘 것 없는거야! 내가 가진 은사가 진짜지! 큰거지!"

그들은 은사 때문에 서로 시기하면서 다투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그 모습을 지켜볼 때 얼마나 그들이 얼마나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보였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들을 향해서 더 이상 은사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사랑에 초점을 맞출 것을 당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사는 유치하고 초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성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는 은사중심, 직분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사랑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 있고,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성숙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랑이 없는 은사는 어린 아이의 일과 같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사도 바울은 어린 아이의 일을 세 분야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 중심적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위주입니다. 말하는 것도 그렇고, 깨닫는 것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말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봅니다. 평소에 부모들이 잘해줄 때는 아이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빠, 사랑해. 엄마가 제일이야!"

그러나 아이들은 조금만 토라지면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담아두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말해버립니다.

"엄마, 미워! 아빠 싫어!"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젖을 빨아먹습니다. 한 손으로는 어머니의 젖을 가지고 놉니다. 왜 어머니의 젖이 두 개입니까? 아이들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는 내가 빨아먹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손으로 가지고 놀기 위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밥해 주고 빨래해 주는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치원에서 어린 아이가 세수를 했습니다. 얼굴에 물이 뚝뚝 떨어진 채로 선생님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얼굴 좀 닦아주세요."

선생님이 다른 일을 하다가 바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닦아라."

그러자 아이는 못 닦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 놀라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손이 없니? 왜 못 닦니?"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는 언제나 엄마가 닦아줘요."

이런 아이가 나중에 커서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보, 내 얼굴 좀 닦아줘."

또 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얘야, 와서 내 얼굴 좀 닦아라."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무엇이든지 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말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 하나가 어머니가 선반 위에 올려놓은 과자를 훔쳐먹었습니다. 어머니가 알고서 아이를 다그쳤습니다.

"이놈아, 사람은 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

"예, 압니다."

"그러면 네가 과자를 훔쳐먹을 때도 하나님이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

"예, 알았습니다."

꼬박꼬박 "예!"라고 대답은 잘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과자를 훔쳐먹을 때 하나님이 '이놈!'하고 야단치지 않으셨느냐?"

그랬더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너와 나 단 둘이 남았으니까 내 몫까지 네가 다 먹어라'고 하셔서 제가 두 개를 꺼내먹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 아이의 모습입니다. 어린 아이는 전부 자기 위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 은사나 직분 중심이 되면 어린 아이 수준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엇이든지 나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나 나만 옳습니다. 나만 잘났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 아이와 어른을 구별하는 분기점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 전에는 무엇이든지 나 위주로 하다가,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섬길 때 은사 중심이 되지 말고, 언제나 사랑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이 없는 은사는 거울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를 기록할 당시 고린도는 거울의 특산지였습니다. 거울을 많이 생산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거울 만드는 법은 요즘과 달랐습니다. 요즘은 유리의 뒷면에 수은을 발라서 거울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저 금속을 반질반질하게 문질러서 광을 내어 거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요즈음의 거울처럼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울로 보는 특징을 두 가지로 오늘 본문 12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첫째, 희미합니다. 아무리 질이 좋은 거울이라 할지라도, 눈으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만큼 분명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희미하게 보일 뿐입니다.

둘째,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 부분적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거울로 보는 것은 부분일 뿐입니다. 자동차 운전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백미러를 통해서 뒤를 보았습니다. 뒤에 차가 없는 줄 알고 안심하고 차선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빵!"하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핸들을 제자리로 돌리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른바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울로 보는데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 은사 중심이나 직분 중심이 되면 거울로 보는 것 같습니다. 분명하지 못합니다. 희미할 뿐입니다. 또 온전히 알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알뿐입니다. 우리가 은사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드러날 뿐입니다. 사랑 중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사랑이 없고 미움이 있으면 얼굴을 마주치기조차도 싫은 것이 사실입니다. 비딱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가면 국립박물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의 초상화 한 폭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그림입니다.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그림을 감상합니다. 그래서 그 그림 앞은 늘 붐비고 있습니다.

한 번은 미국의 어떤 화가가 일부러 그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그는 찬찬히 그 그림을 보면서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기대가 크다 보니까 실망이 조금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사실은 내가 이 그림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네. 색채감도 그렇고 기법도 뛰어나지 않은 것 같아.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림을 그려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을 것 같네."

그 소리를 듣고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야. 내 생각은 달라.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적인 시각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따지면서 볼 수가 있겠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얼굴을 우러러 보게나. 겸손하게 마음의 무릎을 꿇고서 다시금 한 번 쳐다보게나. 그러면 다른 감동이 있을 걸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 화가는 사랑의 마음으로 다시금 예수님의 모습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조금 전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감동이 그의 마음 속에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그림은 정말로 예수님의 인자하시고 온유하신 모습을 잘 나타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놀라운 감동을 느끼면서 넋을 잃은 채 그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감상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 은사 중심, 직분 중심이 되면 거울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저 희미할 뿐입니다. 또 부분적으로 될 뿐입니다. 사랑으로 우리가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밝히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사랑은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으로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의 일들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컨대 그들은 서로 시기하면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누구에 의해서 세워졌습니까? 사도 바울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나서 계속해서 다른 곳에 가서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바울이 가고 난 뒤에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했습니다. 아볼로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서 복음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워낙 언변이 좋아서 웅변적으로 설교를 아주 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아볼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소위 말하는 아볼로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를 세우신 분이 사도 바울인데 우리가 바울을 좇아야지 어떻게 그를 배신할 수 있나?"

그래서 그 사람들이 바울파를 만들었습니다. 바울파와 아볼로파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사실은 예수님의 뒤를 한 번도 따른 적이 없던 사람들이잖아? 그래도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베드로, 곧 게바가 최고지! 게바를 좇아야지."

그래서 베드로, 곧 게바파가 또 생겨났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또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다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들을 좇을 수가 있어? 그리스도를 좇아야지."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파가 또 생겼습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파당을 만들어 서로 시기하고 헐뜯으며 자기들이 잘났다고 계속해서 다투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보기에 얼마나 유치했겠습니까?

왜 고린도 교인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까? 은사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직분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신앙의 연조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으로 봉사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장성한 사람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입니다. 이 분은 장관직을 두 번씩이나 역임해서 귀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 분은 5년 전에 암으로 인해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때 이미 암세포가 온몸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말하기를 수술해보았자 6개월을 살기가 어려우니까, 그냥 수술하지 말고 그대로 사는 날까지 사시라고 해서 수술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5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건재하십니다. 말씀도 잘하시고 식사도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드셨습니다. 활동하는데 전연 지장이 없습니다. 그 분 말씀이 자기는 매일 자기 속에 있는 암세포와 대화를 나누신다고 합니다.

"야, 어차피 네가 살겠다고 내 몸 속에 들어왔으니까 우리 서로 괴롭히지 말고 너도 살고 나도 살자. 네가 나를 너무 괴롭히면 내가 어쩔 수 없이 내 몸에 칼을 댈 수밖에 없지 않니? 칼을 대면 그 순간 너도 죽지 않니? 내가 살아야 너도 살지. 내가 죽으면 너도 죽을 수밖에 없지 않니? 그러니 너도 살고 나도 살기 위해서 우리 서로를 괴롭히지 말고 함께 살자!"

이런 식으로 매일 자기 속에 있는 암세포와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따금씩 통증이 느껴질 때면 이렇게 달랜다고 합니다.

"알겠다. 너 지금 살아있다고 내게 신호를 보내는 모양인데 그 정도로 충분하다. 더 아프면 내가 견디기 괴로우니까 그 정도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삼자."

자기를 찌르고 있는 육체의 가시를 아예 친구처럼 함께 살기로 마음을 다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이 편안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우리의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우리의 심령을 찌르는 사람의 가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모두 살아온 배경이 다릅니다.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대로 똑같이 생각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더불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살아가며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교회는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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